425화. 보이스 피싱? 친구?
정무석이 진지한 표정과 함께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탁-
“방금 말은 상당한 어폐가 있는데…….”
“예?”
“자네가 잘못한 건 없어. 실력 좋은 사람이 계속 미끄러졌다는 건 그런 조직 사회에서 그만큼 정직하고 우직하게 살았다는 거니까 그런 생각은 하지 마.”
자리가 자리인지라 정무석은 주변에 사람이 많았고 그중에는 의료계 쪽 인사도 꽤 있었다.
그는 평소 알고 있는 신화대병원 교수 몇 명에게 태경의 관해 물었다.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딸이 만나는 남자가 어떤 사람인가 궁금했고, 보통 함께 일해 본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판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태경을 두고 비슷한 말을 했다.
‘김태경 그 친구는 진짜 의사야. 정직하게 환자만 진료하다 쫓겨났어. 운이 없어도 너무 없었지.’
대학 병원에서 정치를 하기보다는 오직 환자만 보다 내쫓겨 난 안타까운 천재라고 했다.
“내가 물어보는 사람마다 전부 자네를 칭찬하며 인재를 놓친 고계득을 욕하기 바빴어. 그렇게 나쁜 짓을 한 사람이니까 인재를 보는 눈도 없었겠지만 말이야.”
정무석은 태경과 고계득 간의 있던 일도 전부 알고 있었다.
“예전에는 개천에서 용이 낫지만, 요즘에는 어림도 없다고 하잖아. 갈수록 인맥이나 연줄 없으면 높이 올라가기 힘든 구조를 만들어 버리니까 자네처럼 진짜 열심히 하고 필요한 인재들이 억울한 일이 생기는 거야. 김 선생?”
한참 진지하게 말하던 정무석은 나란히 앉은 태경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네, 아버님.”
“여기까지 오는 동안 힘들지? 그동안 자네 혼자 고생 많았네.”
그 한마디가 어찌나 따뜻하게 다가오던지 태경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술로 본인을 힘들게 하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였지만, 좋은 기억도 있었다.
아버지는 태경과 형이 힘들 때면 등을 토닥이며 힘내라는 말을 했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진심이 담긴 아버지의 위로가 그리운 날이 있었는데, 생각지 못한 정무석의 말에 아버지 생각이 잠시 났다.
“김 선생?”
“네, 아버님.”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그래도 내가 꽤 괜찮은 어른이야. 앞으로 술친구가 필요할 때나 인생의 조언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편하게 연락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무석은 진심이었다.
이미 몇 달 전, 새벽 진료에서 태경을 처음 봤을 때부터 사윗감으로 마음에 쏙 든 상태였다.
그는 앞으로 태경의 든든한 지원군이 될 생각이었다.
“저기, 아버님?”
대화하던 태경은 별안간 궁금한 점이 떠올랐다.
“혹시 말입니다. 그때 우리 병원에 기부금을 주고 가시지 않으셨나요?”
그날, 정무석이 우리병원에서 진료를 본 뒤 병원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기부금이 들어왔었다.
액수도 몇천만 원이나 되는 큰 금액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왠지 모르게 기부금을 두고 간 게 정무석일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글쎄. 그건 나도 모르는 일인데…….”
싱긋 웃으며 위스키를 한 모금 들이켜는 정무석을 보며 태경은 그가 두고 갔음을 확신했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주신 기부금은 좋은 곳에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난 모르는 일이라니까 그러네. 그거야 자네가 원장이니까 알아서 하고 얼음 녹겠어. 얼른 술잔이나 비워.”
그렇게 진솔한 두 남자의 술자리가 마무리되고 태경은 장 여사가 싸 준 반찬을 들고 대문 밖으로 나왔다.
처음 긴장한 마음으로 대문을 들어갔을 때와 달리, 나올 때는 따뜻한 마음으로 나올 수 있었다.
“대리 기사님은요?”
“곧 올 때 됐어.”
“선배. 내일 휴가 가는데 술 마셔서 어떡해요? 괜찮아요?”
“나 한 잔밖에 안 마셨어.”
“오늘 힘들지 않았어요?”
“아니, 아버님도 어머님도 너무 좋으시더라. 편하게 대해 주셔서 감사했어.”
“그렇게 느꼈다니까 다행이다. 내일 휴가 가서 병원 생각 딱 접고 즐겁게 잘 다녀와요.”
“알았어. 오늘 고생 많았어.”
“고생은 선배가 했지 내가 했나. 이거 가자마자 반찬들 냉장고에 꼭 넣어야 해요.”
“네, 알겠습니다. 기사님 오셨다. 의진아, 나갈게.”
“네, 조심히 들어가고 휴가 잘 다녀와요.”
“응. 집에 가서 전화할게.”
태경은 의진에게 가벼운 입맞춤을 한 뒤 대리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기분 좋게 집으로 향했다.
* * *
다음 날, 우리 병원 근처 편의점-
“어서 오세요.”
“사장님, 여기 꿀물 어디 있죠?”
오전 6시, 동년배로 보이는 중년 남자와 함께 편의점에 들어온 또 다른 남자가 카운터로 다가와 말했다.
“바로 뒤 돌아서 왼쪽으로 가시면 전자레인지 뒤쪽으로 온장고에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편의점 주인에게 꿀물을 물어본 남자는 온장고에서 음료를 꺼내며 함께 온 일행을 향해 말했다.
“형?”
“…….”
“아, 형?”
“…….”
“뭐 하는데 대답이 없는 거야?”
꿀물을 손에 쥔 남자가 연신 일행을 불러도 대답이 없자 그는 답답한 표정으로 일행에게 다가갔다.
“이보슈? 내 말 안 들려요?”
“나 불렀어? 집중하느라 못 들었어. 왜?”
“형도 꿀물 마실 거냐고?”
“할아버지냐? 꿀물 찾고 있게?”
“그러는 형은 애유?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런 걸 먹어?”
“이런 게 어때서? 맛만 좋아. 야! 재현아, 나는 왜 나이가 들었는데도 이런 게 맛있냐?”
곰돌이 캐릭터처럼 푸근하게 살짝 배가 나온 남자, 박준석이 간편 식품 앞을 서성이며 꿀물을 들고 있던 이재현에게 말을 이었다.
“매콤 어묵 김밥, 묵은지 참치김밥, 전주비빔밥 삼각김밥, 참치 마요 삼각김밥. 뭐, 먹지? 고민되네.”
“그게 그렇게 고민할 일이유?”
“그럼. 고민 크게 되는데. 나 결정 못 할 거 같은데 네가 좀 추천해 줘라.”
“아, 사람 참. 귀찮게시리. 그냥 아무거나 먹어.”
“너 사람이 말이다. 의식주 중에 식이 얼마나 중요한데 아무거나 먹으래. 나 먹진남이란 말이야.”
“먹진남은 또 뭐야?”
“먹는 거에 진심인 남자의 줄임말이라고 할까?”
“하긴, 형 예전부터 먹는 거에 진심이긴 했지.”
“나야 늘 먹는 거에 진심이지. 그리고 나 블로그 하는데 거기 음식 리뷰도 하거든. 근데 사람들 댓글도 많이 남기고 특히 재미있다는 말도 많이 남겨. 그러니까 진지하게 골라 줘.”
“매콤 어묵 김밥으로 해요. 형 매콤한 거 좋아하잖아.”
“오케이. 묵은지 참지로 결정했어.”
“내 저럴 줄 알았어. 하여간 형은 진짜 하나도 안 변했다. 대단하다.”
“원래, 하던 대로 하고 살아야지 사람 쉽게 변하면 죽는다.”
이재현과 박준석. 두 남자는 나이에 맞지 않게 중고생 친구처럼 투닥거리며 음료수와 소시지를 고른 뒤 카운터로 향했다.
“그런데 형, 살 좀 빼야겠다. 뱃살이 이게 뭐유?”
“재현아, 중년의 뱃살은 부와 여유의 상징인 거 모르냐?”
“뭐, 돈 많이 벌었다 이거야?”
“벌면 뭐 하냐? 그 돈 다 어디 들어가는지 알잖아. 아무튼 이 뱃살이 중년의 여유다 그거야.”
“그딴 거 모릅니다.”
“그리고 너도 뱃살 있는데 나한테 그러면 안 되지.”
“형보다는 아니거든. 형수가 뭐라고 안 해?”
“하지. 나한테 맨날 베둘레헴이라고 놀려. 올해 안에 뱃살 안 빼면 그땐 골프채 갖다 버린대.”
“그래, 운동해서 좀 빼.”
“빼야지. 야, 근데 아까 주차할 때 보니까 병원이 생각보다 크더라.”
“저 정도면 큰 거지.”
“많겠지?”
“뭐, 환자?”
“응.”
“그렇겠지.”
“혹시, 우리병원 말씀하시는 건가요?”
두 사람이 가져온 식품 바코드를 찍고 있던 편의점 주인이 대화의 조용히 동참했다.
“네, 맞아요. 옆에 있는 우리 병원 환자 많이 오죠?”
“많다마다요. 저기, 선생님들이 다 친절하셔서 많이 와요. 사람이 많아도 급하게 진료 보지 않고 꼼꼼하게 보니까 많을 수밖에 없죠. 그리고 원장님이 진짜 진국이야. 환자를 내 가족같이 돌본다니까.”
“저기 원장이요?”
“예. 사람도 참 좋고. 인물도 얼마나 좋은지 몰라.”
“하긴, 김 원장이 인물이 좋지.”
“에? 우리 병원 원장님을 아세요?”
이재현의 말에 편의점 주인이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럼요.”
“알다마다요.”
두 사람이 동시에 답했다.
“두 분 다 잘 아시나 봐요.”
“잘 알기만 하게요? 우리 김 원장이랑 친구 사이입니다.”
“치, 친구요? 정말 원장님 친구예요?”
“그럼요.”
“아… 그래요?”
태경과 친구라는 두 남자의 대답에 편의점 주인은 살짝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
사람을 겉으로 판단하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리 봐도 베둘레헴을 자랑하며 동네 호프집만 들락거릴 것만 같은 두 사람과 태경이 어울리는 그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계산 다 됐습니다. 영수증 드릴까요?”
“아니요. 그리고 저 담배 하나만 주시겠어요?”
“어떤 걸로 드려요?”
“제일 끝에 있는 걸로 주세요.”
“계산 다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니, 형은 몇 년 전부터 금연한다고 하더니 아직도 담배 안 끊었수?”
“그래도 전담으로 피우잖아.”
“전담은 담배 아니야?”
“전담 피우다가 그다음에 금연할 거야. 이렇게 단계적으로 해야지 더 확실하게 금연할 수 있다.”
“얼른 김밥이나 먹어.”
계산을 마친 두 사람은 테이블에 앉아 구입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딩동-
“어서 오세요.”
“사장님, 나 숙취 해소제 좀 줘요.”
“아저씨 오늘도 회식하시나 보네.”
“네, 우리 아저씨는 술 먹을 때 이게 꼭 있어야 하거든요. 이거 사려고 수영 끝나고 집까지 갔다 다시 나왔잖아요.”
“내 남편이니까 챙겨야지 어떡하겠어.”
“맞아요. 내 남편 내가 안 챙기면 누가 챙기겠어요. 참! 그 얘기 들었어요?”
계산을 마친 사람이 편의점 주인에게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었어요?”
“수선집 건물, 민상네 보이스 피싱 당했대요.”
“진짜? 민상이 할머니?”
“아니, 아저씨가.”
“할머니가 아니라 아저씨가 당했다고요? 말도 안 돼. 민상네 아저씨 대기업 연구원이잖아. 그 집 아저씨 얼마나 똑똑한데. 그런 사람이 보이스 피싱을 왜 당해요.”
동네 주민이 보이스 피싱을 당했다는 말에 편의점 주인은 진심으로 놀란 듯 보였다.
“뭐, 잘못 안 거 아니에요?”
“사장님이야말로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뉴스 안 봤어요? 요즘 보이스 피싱이 예전이랑 차원이 달라요. 교수, 의사, 공무원 등 직업 가리지 않고 당한다니까. 사기꾼이 작정하고 속이면 직업이 뭐든 그냥 다 당한다고 하잖아요.”
“나도 듣기는 했는데 주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네. 돈은 얼마나 나갔는데?”
“삼백 좀 넘게 당했나 봐요.”
“삼백이면 적은 돈도 아닌데 민상네 속상하겠다.”
“속상하지. 보니까 이놈들이 2인 1조로 움직이면서 오래된 친구라고 그러면서 막 친한 척 갑자기 접근해 온 거야.”
“친구도 아닌데?”
“당연히 친구가 아니지. 원래 보이스 피싱으로 사기 치는 놈들이 사람 말로 홀리는 기술도 배우고 요놈들이 남의 돈 떼먹으려고 체계적으로 교육도 받고 그래서 어지간한 사람은 다 속아 넘어간대요.”
“안 그래도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인데 별놈들이 다 설치고 다닌다.”
“아무튼 난 요즘 시장이고 가게고 돌아다닐 때마다 조심하라고 말해 주고 다녀요. 사장님도 조심하세요.”
“그래요. 말해 줘서 고마워. 들어가요.”
열띤 대화를 나눈 이웃 주민이 편의점을 나간 뒤, 사장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향했다.
테이블 쪽으로 시선을 옮긴 사장은 박준석과 이재현을 보며 이웃이 했던 말을 떠올랐다.
‘친구라고 하면서 접근했대.’
방금 전에 들은 보이스 피싱 때문인지 사장은 점점 저들이 나쁜 사람들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잠깐! 친구라면서 왜 병원으로 안 가고 여기 있는 거야? 저 사람들도 보이스 피싱 아니야?’
의심이 점점 확실하게 굳혀질 즈음, 알림 벨 소리와 함께 편의점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