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426화 (425/472)

426화. 휴가

의심이 점점 확실하게 굳혀질 즈음, 알림 벨 소리와 함께 편의점 문이 열렸다.

‘여기 원장님한테 돈 뜯으러 온 건가?’

딩동-

“어서 오세요.”

손님이 들어오던 소리에 반사적으로 인사말부터 하던 사장은 손님이 태경인 것을 확인하고는 얼굴에 화색을 띠며 다시 인사했다.

“원장님.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여! 태경아?”

“왔냐? 이리 와. 우리 김밥 먹고 있어.”

테이블에 있던 박준석과 이재현이 태경을 보며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했다.

“알았어. 사장님, 이거 계산할게요.”

“저기 원장님?”

태경이 가져온 아몬드 우유를 계산하던 사장은 테이블에 있는 두 사람을 수상쩍게 쳐다본 뒤 작은 소리로 말했다.

“방금 인사한 두 사람, 친구 맞아요?”

“네, 친구 맞아요.”

“예? 정말 친구라고요? 어릴 적에 친했다가 갑자기 연락해 와서 찾아오거나 그런 건 아니죠?”

“오랜만에 보는 거긴 한데…….”

“그렇죠?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뭐 때문에 그러세요?”

“원장님, 저 사람들 보이스 피싱일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세요.”

“예?! 보이스 피싱이요?”

당황한 태경을 보며 편의점 사장은 조금 전, 이웃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하며 두 남자가 수상하다고 전했다.

“그래서 보이스 피싱으로 오해하신 거예요? 전혀 아닌데. 두 사람은 제 대학 친구들이에요.”

“그게 정말이에요? 내가 멀쩡한 친구분들을 괜히 오해했네요. 미안해라.”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원장님. 어디 가시나 봐요?”

평소처럼 가운이 아닌 사복에 배낭을 메고 있는 태경을 보며 사장이 물었다.

“오늘 휴가 갑니다.”

“하긴. 사람이 가끔 쉬기도 하고 그래야 해요. 잘됐네.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계산을 마친 태경은 두 사람과 함께 편의점을 나왔다.

“그동안 잘 지냈냐?”

“야, 우리 이게 얼마 만에 셋이 뭉친 거야?”

이재현과 박준석은 태경을 보며 반가움을 금치 못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지?”

“셋이 전부 같이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말투에서조차 반가움이 묻어나는 두 사람은 의대 친구들이었다.

미친 듯이 공부에 몰두했던 그 시절, 태경은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며 투지로 공부에만 몰두했다.

집안의 여유도 없었고, 의사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었기에 남들이 놀 때도 공부하며 독고다이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와 준 이들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박준석과 이재현이었다.

열심을 넘어 악착같이 공부하던 태경에게 두 사람은 가끔씩 웃음을 주며 숨을 쉴 수 있게 해 준 친구들이었다.

의대 졸업 후 각자 길을 가면서 예전처럼 만나는 시간이 줄었다.

세 사람 모두 인생에서 힘든 시기들이 있었기에 한동안은 연락이 뜸한 적도 있었지만, 끊어지지는 않았다.

태경이 우리병원으로 옮기고 일이 잘 풀릴 때도 가장 축하해 줬던 사람들이 두 친구였다.

그렇게 서로 사는 게 바빠 연락만 하고 지내다가 이재현의 끈질긴 설득에 셋이 일정을 맞춰 휴가를 가게 된 것이다.

병원 붙박이인 태경은 처음에는 갈 생각이 없었다.

1박2일 동안 병원을 비우는 게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휴가는 고사하고 한 번을 마음 편히 쉬지 못한 그에게 의진과 직원들이 강하게 휴가를 권했고, 결국 휴가를 가기로 결정하게 된 것이다.

원래는 태경의 집에서 만나 가기로 했지만, 태경이 언론사에 부탁받아 보내주기로 했던 의료 칼럼 원고가 담긴 파일을 병원에 두고 오는 바람에 병원에서 만나 출발하게 된 것이다.

“맞다! 잠깐 멈춰 봐.”

나란히 걸어가던 중 태경, 이재형보다 두 살 많은 맏형인 박준석이 걸음을 멈췄다.

“야, 재현아. 내가 가만히 생각해 봤는데 이건 아닌 거 같다.”

“또 뭐가?”

“우리가 여기까지 왔는데 태경이 병원은 구경하고 가야 하지 않겠냐?”

“그러네. 태경아 병원 한 번 구경하고 가자.”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보자.”

“형, 내가 다음에 보여 드릴게요. 지금 직원들 정신없어요.”

“왜? 새벽이라 한가하지 않아?”

“한가하긴. 우리 직원들 바쁩니다. 다음에 오면 내가 고기도 사 주고 제대로 보여 줄게.”

“좋아. 대신 한우다.”

“알았어요. 형은 한우 사 줄게요. 큭!”

“뭐야? 얘 왜, 혼자 웃고 난리냐?”

갑자기 두 사람을 보고 피식하는 태경을 보며 박준석이 물었다.

“그러게. 뭔데 그래? 같이 웃자.”

“편의점 사장님이 한 말이 생각나서.”

“아까 보니까 계산도 한참 하더라. 무슨 말인데 그래?”

“두 사람이 정말 내 친구 맞는지 물어봤어.”

“그걸 왜 물어봐?”

“둘이 나한테 보이스 피싱하려는 줄 알았대.”

“뭐!? 에이 설마. 우리가 어디를 봐서… 아니다. 형 보니까 느낌 있네.”

태경의 말을 부정하던 이재현이 박준석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 편의점 사장님 보는 눈이 있어. 내가 전에 뉴스에서 봤는데 보이스 피싱 하는 놈들이랑 형이랑 뭔가 비슷하게 생겼어.”

“야! 이 자식아, 사돈 남 말 하지 마세요. 네 페이스가 더 그렇게 생겼어.”

“무슨 소리야. 형 가끔 환자들이 진료실 들어왔다 놀라지 않아?”

“전혀. 안 놀라는데?”

“두 사람은 여전하다. 여전해.”

박준석과 이재현은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만났다 하면 서로 얼굴이 더 잘났다고 떠들곤 했다.

“근데 차 끌고 온다고 하지 않았어? 갑자기 왜 버스로 바뀐 거야.”

“태경아 그 얘기 꺼내지도 마. 어제 누가 준석이 형 차 범퍼 상처 내고 도망가서 공장 들어갔어.”

“정말? 많이 찌그러졌어요?”

“새 걸로 갈아야 할 거 같아. 누가 그랬는지 걸리면 가만 안 둘 거야. 그런데 우리 배 시간 몇 시라고 했지?”

“어!”

박준석 말에 시간표를 확인한 이재현이 당황하며 고개를 들었다.

“우리 빨리 터미널 가야 해. 20분 차 놓치면 섬에 못 들어간다.”

“그러게 뭐 한다고 섬까지 들어가.”

“형. 일단 가 보면 다르다니까. 그만 투덜거리고 얼른 가.”

“저기, 택시 온다. 택시!”

태경을 비롯한 박준석과 이재현은 들뜬 마음으로 급하게 택시를 탔다.

세 사람은 꿀 같은 휴가를 보낼 생각으로 기분 좋게 터미널로 향했다.

다행히 늦지 않게 터미널에 도착한 그들은 버스 맨 뒤 좌석으로 걸어가 나란히 앉았다.

“형, 뭐가 그렇게 좋아서 실실 웃고 있어.”

가운데 앉은 이재현이 창밖을 보며 히죽거리고 있는 박준석을 쳐다보며 물었다.

“얘들아, 나이가 들어도 놀러 가는 건 여전히 기분 좋다.”

“당연하지. 애든 어른이든 노는 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네 옆에 그런 사람 있잖아.”

“하긴. 형 얘 아직도 수술 복기 노트 자필로 쓰는 거 알아?”

“독하다. 독해. 난 태경이 볼 때마다 그 말이 생각나.”

“뭐요?”

“세상에서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나도.”

“근데 그 말이 맞잖아. 세상에서 공부처럼 쉬운 게 어디 있어.”

“에라이 이놈아! 놀러 가면서 공부 이야기 그만하고 우리 이따 휴게소에서 뭐 먹을래?”

“어이, 베둘레헴 씨? 또 먹어요?”

“원래 버스 타면 휴게소는 무조건 들려야 해. 이따 꼭 가자.”

“그래, 가자. 가!”

반드시 휴게소 먹거리를 사수하겠다던 세 사람은 그 말이 무색할 정도로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정확히 네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형! 일어나요.”

가장 먼저 일어난 태경이 두 사람을 번갈아 깨우기 시작했다.

“아함! 잘 잤다. 뭐야! 벌써 도착한 거야? 휴게소를 놓쳤네.”

“재현아, 너도 일어나.”

“그래도 우등이라 우리 편하게 왔다. 역시 돈이 좋아.”

“우리 배 몇 시라고 했지?”

“잠시만! 배가 조금 지연됐다고 나오네. 출발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았는데 뭐 할까?”

휴대폰으로 여객선 홈페이지를 확인한 이재현이 말을 이었다.

“찾아보니까 오늘 장날이라 시장도 열리고 지역 축제도 있는 거 같은데 거기 가 볼래?”

“일단 나가서 생각하자. 나 방광 터질 거 같다.”

“기사님, 수고하셨습니다.”

화장실이 급한 박준석을 필두로 세 사람은 고속버스에서 내렸다.

* * *

○○버스 터미널.

붕어빵처럼 똑 닮은 사랑스러운 모습의 부자의 터미널 안쪽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빠?”

얌전히 앉아 있던 초등학생 아들이 함께 앉아 있는 아빠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응? 아들 왜.”

“저 차야?”

“아니.”

“우리 버스는 언제 와? 언제까지 기다려.”

“저기 천장에 9번이라고 쓰인 거 보이지? 우리 버스는 저 9번 앞에 멈출 거야. 기다리기 힘들어?”

“아니. 조금 힘든데 오늘은 엄마를 위한 날이니까 힘내볼 게.”

“우리 아들 멋진데?”

남자는 한껏 어깨에 힘을 주며 말하는 아들이 귀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 아빠. 저기 봐 봐. 9번에 버스 들어온다. 우리 버스 왔어.”

“그러네. 아빠 손!”

아이는 벤치에서 일어나 아빠의 손을 잡고 버스가 들어온 9번 승강장으로 향했다.

“한 명, 두 명, 세 명, 네 명, 다섯, 여섯 일곱……. 열둘. 아빠. 몇 명 내리면 끝나?”

“글쎄, 아빠가 그거까지는 잘 모르겠네. 그래도 버스가 아침 일찍 출발해서 사람들이 많이 타진 않았을 거야.”

“아빠 저 버스 얼마면 살 수 있어? 1억 더 줘야 하지?”

“그럼, 버스는 비싸지. 왜, 지상이 저 버스 갖고 싶어?”

“아니. 나중에 내가 돈 많이 벌면 아빠 사 주려고.”

“아빠를? 우리 아들 효자네. 말만 들어도 고마워.”

남자는 아들이 귀여운지 꼭 끌어안으며 볼을 비볐다.

“으! 아빠 수염.”

“미안, 아빠가 오늘 면도를 안 해서 따가울 거야.”

“아니야. 괜찮아.”

“지상아, 우리 가자.”

“사람들 다 내렸어?”

“그런 거 같아.”

버스에서 기사가 내리자 남자는 아들의 손을 잡고 서울에서 출발한 9번 버스 앞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어! 아빠 잠시만.”

그런데 걸어가던 아들이 아빠의 손을 놓고 바닥에서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이거! 저 아저씨가 떨어뜨렸어.”

“그래? 저기요.”

그 말을 들은 남자는 아들의 손을 잡고 방금 전에 옆을 지나간 남자들을 쫓아가 불렀다.

“저기요?”

“네?”

남자가 한 남자의 등을 툭 치며 부르자 앞서가던 세 남자가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부자가 쫓아온 남자들은 9번 승강장 버스에서 내린 태경과 친구들이었다.

“저 부른 건가요?”

이재현이 남자에게 말하자 그의 아들이 앞으로 나와 손을 내밀었다.

“이거, 아저씨 거 맞죠? 아저씨가 떨어뜨렸어요.”

아이가 건넨 건 다름 아닌 신용카드였다.

“그러네. 내 카드 맞네.”

이재현은 그제야 핸드폰 주머니에 넣어 놨던 카드가 빠진 걸 알게 됐다.

“우리 아들이 방금 버스 옆에서 주웠거든요.”

“고맙습니다.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아저씨 큰일 날 뻔했네.”

“재현아. 말로만 고맙다고 하지 말고 애 뭐라도 사줘. 놀러 와서 카드 잊어버렸으면 어쩔 뻔했냐? 일단, 난 화장실부터 간다.”

소변이 급한 박준석은 빠르게 말한 뒤 먼저 화장실로 향했다.

“그러게. 아저씨가 뭐 사 줄까? 제가 정말 고마워서 뭐라도 보답하고 싶은데…….”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지상아 괜찮지?”

“응. 괜찮아. 남의 물건을 돌려주는 게 맞아. 뭐 받으려고 한 거 아니야. 그러니까 아저씨 저한테 보답 안 하셔도 돼요.”

아이의 똘똘한 답변의 태경과 이재현은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그럼 이 초콜릿이라도 받을래?”

이재현은 아침에 편의점에서 샀던 뜯지 않은 초콜릿을 건넸다.

“아니요. 모르는 사람이 주는 음식은 함부로 먹으면 안 돼요. 그리고 초콜릿은 이 썩어서 별로 안 좋아해요.”

“그래? 너 아주 똘똘하구나. 알았어. 아저씨 카드 주워 줘서 고마워.”

“네.”

태경의 무리와 인사한 부자는 다시 9번 승강장에 주차한 버스로 향했다.

“이준역 씨, 물건 두 개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여기 있네요.”

“감사합니다. 기사님.”

버스 기사에게 택배 물건들을 받은 뒤 부자는 터미널 안으로 들어갔다.

“아빠, 아빠? 이게 엄마 케이크야?”

“응. 맞아. 지상이랑 지윤이가 그린 그림으로 서울에서 빵 만드는 선생님이 만들어 주셨어.”

“정말? 나도 볼래.”

“알았어. 대신 여기서 꺼내 볼 수는 없으니까 여기 위로 보자. 이쪽으로 봐.”

“진짜네. 지윤이랑 내가 그린 가족이 케이크 위에 있어.”

상자에 붙어 있는 투명 비닐을 통해 케이크를 본 아이는 신기한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 가족이 다 있지?”

“응. 엄마가 엄청나게 좋아할 거 같아.”

“우리 이따가 엄마 서프라이즈 파티 잘하자.”

“나만 믿어.”

부자는 엄마의 생일 파티를 해 줄 생각에 잔뜩 신나 보였다.

그 뒤, 이준역은 편의점에 들러 아들에게 초코 우유를 사 준 뒤 큰 상자를 얻어 케이크 상자와 선물 상자를 담아 터미널을 나왔다.

“지상아, 아빠 상자 때문에 손잡기 힘드니까 대신 옷 꼭 잡아. 알았지?”

“아빠, 아빠? 저기, 저거 봐. 드론이야. 드론!”

이준역의 말에도 아이는 하늘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늘은 오일장에 지역 축제까지 겹쳐 길에는 평소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게다가 한쪽에서 드론 쇼를 하고 있었는데 비행기와 드론을 좋아하는 아들은 지금 아빠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지상아! 아빠 말 듣고 있어? 이지상?”

“듣고 있어. 그리고 나 아빠 옷도 꽉 잡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오늘은 사람 많아서 아빠 옆에 꼭 붙어 걸어야 해. 저번처럼 장난감 아저씨 보고 먼저 가고 그러면 안 돼.”

“안 그럴게. 그런데 아빠, 우리 저기 가서 드론 조금만 보고 가면 안 돼?”

“아빠 일 때문에 다른 곳도 들러야 하니까 대신 딱 10분만 보는 거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간절하게 말하는 아들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응. 알았어. 10분이면 돼.”

섬에 살고 있는 이준역은 아직 배 시간이 남았기에 아들이 좋아하는 드론을 보러 가기로 했다.

“아빠 옷 꽉 잡아.”

부자는 인파 속을 천천히 걸어가며 드론이 있는 근처에 가까스로 이르렀다.

“다 왔다. 지상아, 힘들지 않아?”

그런데 아들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하던 남자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옷자락을 꼭 잡고 함께 걸어가던 아들이 옆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상아!”

이준역은 잔뜩 꾸겨진 옷자락처럼 얼굴을 잔뜩 구긴 채 아들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이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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