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화. 희락도
“아저씨들 안녕.”
“그래, 지상아. 잘 가.”
“진짜! 잘됐다. 그치?”
꼭 붙어서 걸어가는 부자의 뒷모습을 보며 세 사람은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그럼. 나도 자식 키우는 입장이라 그런지 아까 감정 이입이 확 되더라.”
아이들 아빠인 박준석은 부모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내 자식이 없어진 것도 아닌데 난 놀라서 막 심장까지 두근거리더라.”
“형, 그거 BP(혈압) 높아서 그런 거 아니야?”
“말을 말자. 그나저나 드론 아이디어는 진짜 죽였다. 역시 태경이야.”
“맞아. 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냐?”
“그냥 예전에 외국 경기장에서 드론으로 아이를 찾았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는데 그 생각이 나서 찾아갔지.”
“진짜 아까 거짓말 아니라 여기 모인 사람들이 아빠 찾는다고 합창하고 애 아빠 뛰어올 때 나 소름 돋았잖아.”
“각박한 세상이라고 해도 이런 거 보면 아직 살 만한 세상인 거 같아. 안 그러냐?”
“형 말이 맞아요. 근데 우리 배 시간 언제라고 했지? 슬슬 가야 하지 않아?”
“맞다! 우리 배 타야 하지.”
아이 일에 집중하고 있던 이재현은 순간 배를 타야 한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시간 확인해 봐.”
“어! 일 났다.”
태경의 말에 핸드폰으로 배 시간을 확인하던 이재현이 다급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왜? 설마 간 거야?”
“아니. 그건 아닌데 배 시간 얼마 안 남았어. 얼른 뛰어!”
세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거 없이 터미널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야! 재현아, 얼마나 남았는데? 걸어가면 안 돼?”
날렵하게 뛰어가는 태경, 이재현과 달리 박준석이 힘겹게 뛰어가며 외쳤다.
“안 돼. 형, 뱃살 뺀다고 생각하고 뛰어.”
“오늘 밥도 제대로 못 먹어서 힘든데…….”
“가서 맛있는 거 먹을 테니까 일단 뛰어.”
그렇게 세 사람은 열심히 뛴 덕분에 제시간에 섬으로 들어가는 배에 승선할 수 있었다.
차까지 실어 나를 정도로 규모가 있는 여객선은 주변 섬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야! 죽인다.”
숨을 고르고 가판으로 나온 세 사람은 탁 트인 바다 풍경을 마주했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바다냐. 가슴이 그냥 뻥 뚫리는 게 절로 숨이 쉬어진다.”
“재현아, 가슴이 뻥 뚫리면 죽는다.”
박준석은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이재현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형? 나도 의사유, 의사. 하여간 가끔 보면 농담도 구별 못 한다니까.”
“얌마! 농담한 거야, 농담. 정색하기는. 나도 가슴이 뻥 뚫리는 게 기분까지 상쾌해지는 거 같다. 좋다! 좋아.”
아침까지만 해도 뭐 하러 섬까지 가냐고 투덜거리던 박준석은 누구보다 즐거운 표정으로 경치를 즐기고 있었다.
“거보슈! 오니까 좋지?”
“인정할게. 진짜 좋다.”
“섬에 도착하면 더 좋을 거야. 태경아 넌 어때?”
“나도 좋지. 확실히 여행 온 기분도 나도 뭔가 벌써부터 힐링 되는 거 같다.”
“태경아, 재현아. 우리 그러지 말고 셋이 사진이나 찍자.”
“저 형 또 사진 타령이다. 아, 사진 좀 그만 좀 찍어. 난 됐으니까 태경이랑 둘이 찍어.”
“까칠한 새끼. 좀 찍자. 내가 말했지? 남는 건 사진밖에 없어. 사람은 추억으로 먹고사는 거야.”
“난 눈으로 남길 테니까 형이나 사진 많이 찍어.”
“아저씨!”
박준석과 이재현이 사진 찍는 걸로 티격태격하는 사이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이?”
점점 가까워지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세 사람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지상이와 아빠를 발견했다.
“지상아?”
“너도 배 탔어?”
“네. 아빠랑 집에 가요.”
“집!?”
“집에를 간다고?”
“저희 가족이 섬에 살고 있거든요.”
아이 말에 태경과 이재현이 되묻자 함께 다가온 이준역이 고갯짓으로 인사를 하며 답했다.
“아! 그러세요?”
“네, 아빠랑 엄마 그리고 여동생이랑 우리 가족 다 섬에 살아요.”
“그러니까 지상이가 섬에 산다는 거지?”
“네. 맞아요.”
“대단하다.”
태경의 말에 아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젊은 분이 섬에 살기 쉽지 않을 텐데 대단하시네요.”
“아닙니다. 세 분께서는 여행 오셨나 봐요.”
“네, 경치 좋은 섬이 있다고 해서 힐링하려고 왔습니다.”
“저희는 희락도 살고 있는데……. 혹시 어느 섬으로 들어가세요?”
“희락도요? 방금 희락도라고 하셨나요?”
이준역의 말에 이재현이 놀란 표정으로 반응하며 물었다.
“아. 네.”
“저희도 지금 희락도 가는 길이에요.”
“그러세요? 뭔가 세 분과 우리 부자가 인연인 거 같은데요?”
“그러게 말이에요.”
터미널에서 지상이가 이재현의 카드를 주워 준 것과 아이의 아빠를 찾아 준 것까지. 네 사람은 이 정도면 확실히 보통 인연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제가 살고 있는 곳이라서가 아니라 희락도가 경치도 진짜 끝내주고 음식도 맛있어서 구경하다 보면 여행 온 보람이 있을 겁니다. 후회 안 하실 거예요.”
“살고 계신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더 기대되네요.”
“혹시 점심이나 저녁에 식사할 곳은 정하셨나요?”
“아니요. 인터넷으로 몇 군데 보긴 했는데 이따 돌아다니면서 괜찮은 데 있으면 갈까 생각 중입니다.”
“잘 아는 맛집 있으면 추천해 주시겠어요?”
옆에서 아이가 준 뽑기 엿을 먹고 있던 박준석이 음식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이 형, 먹는 얘기에 또 눈 돌아간다. 애 거 그만 뺏어 먹어?”
“뺏어 먹은 게 아니라 지상이가 준 거야. 그렇지 지상아?”
“맞아요. 내가 아저씨 드렸어요. 아빠, 그런데 아저씨들 우리 집 오면 안 돼?”
“안 그래도 아빠도 지금 그 말 하려고 했어.”
아이가 내뱉은 우리 집이란 말에 세 사람이 무슨 소리인가 생각할 즈음 이준역의 뜻밖의 제안을 했다.
“제가 실은 섬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어요.”
“식당이요?”
“예. 그래서 세 분께 식사 초대를 하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저희를요? 저희는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감사하죠.”
“아니에요. 그러지 마세요.”
“이 친구 말이 맞습니다.”
식사 초대라는 말에 잔뜩 들뜬 박준석과 달리 태경과 이재현은 조심스럽게 괜찮다는 의사를 전했다.
마음은 감사했지만, 사람들이 많은 시내도 아니고 섬에 있는 식당에 가서 공짜로 음식을 대접받는 게 미안했기 때문이다.
“그러지 말고 꼭 오세요. 우리 지상이 세 분 아니었으면 찾기 힘들었을지도 몰라요. 제가 세 분께 신세를 톡톡히 졌습니다.”
“별말씀을요. 우리 아니라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지상이가 씩씩하게 잘 기다린 거지 저희는 한 게 없어요.”
“무슨 말씀이세요. 지상이가 배에 타서도 계속 아저씨들이 같이 있어서 무섭지 않고 기다릴 수 있었다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는지 몰라요. 꼭 오세요.”
갑자기 생각나서 던진 말이 아니었다.
사실 이준역은 배에 오르기 전부터, 그러니까 드론 회장에게 태경의 아이디어로 아들을 찾게 됐다는 말을 듣고 식사를 초대하고 싶은 마음이 바로 들었다.
하지만 그 당시, 태경과 친구들이 배를 타는지도 섬에 가는지도 몰랐다.
게다가 잃어버렸던 아들을 만나고 너무 정신이 없었기에 감사하다는 인사만 하다 물어볼 타이밍을 깜빡한 것이다.
그러다 아까 가판에서 세 사람을 보고 식사를 대접하려고 다가온 거였다.
“우리 아빠, 엄마 음식 최고로 맛있어요. 아저씨들 꼭 오세요.”
“애들은 거짓말 안 하는 거 아시죠? 그리고 제가 요리는 좀 하거든요. 그러니까 재미있게 잘 구경하시고 이따 저녁에 식사하러 오세요.”
“그래. 가자.”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태경을 보며 이준역이 ‘바다 속 진주’라고 쓰인 식당 명함을 내밀자 옆에 있던 박준석이 얼른 명함을 받으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안 가면 그것도 예의 아니다. 그렇죠? 지상이 아버님. 아니, 사장님.”
“맞습니다. 그럼 전 이따 오시는 걸로 알고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저씨들 안녕!”
배가 희락도에 가까워지자 이준역은 내릴 준비를 하기 위해 인사를 한 뒤 선실로 들어가고 곧이어 선내 방송이 들려왔다.
-잠시, 안내 말씀드립니다.
곧 있으면 희락도에 도착하오니 내릴 분들은 짐을 챙겨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명함만 봐도 뭔가 맛집일 거 같은 느낌이 제대로 오는데? 이따 꼭 가자.”
“우리가 가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일단 내려서 생각해 보자.”
“생각할 게 뭐 있어? 저녁은 무조건 바다 속 진주에서 먹는 거다.”
기분 좋은 박준석과 함께 태경과 이재현은 짐을 들고 배에서 내리기 바빴다.
* * *
“지상아! 여보!”
배에서 내린 부자를 보자마자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딸을 안은 이준역의 아내 김한솔이 뛰어왔다.
“엄마아~~”
“세상에! 내 새끼.”
잔뜩 놀란 얼굴로 다가온 김한솔은 딸을 남편에게 안기며 뛰어온 아들이 괜찮은지부터 확인했다.
“지상아 엄마 좀 봐봐. 너 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어?”
“응. 나 아무렇지 않은데?”
“아무렇지 않기는! 아빠 잃어버렸었다며?”
“어! 엄마 어떻게 알았어?”
“지금 그게 중요해? 만물상 아주머니가 알려 줬어.”
아내가 놀랄까 봐 이준역은 집에 와서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조금 전, 김한솔이 집에서 나올 때 만물상 안주인이 전화해서 알려 주는 바람에 알게 된 것이다.
“내가 오늘 뭍에 사람 많다고 내 핸드폰 가져가라고 했잖아.”
“내가 생각이 짧았어. 미안해. 여보. 많이 놀랐지?”
“말이라고 해! 아까 아주머니 전화 받는데 심장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어.”
“나도 아까 지상이가 내 옆에 없는데 순간 숨이 안 쉬어지는 거 같더라.”
“어떡하다 잃어버린 거야?”
만물상 안주인에게 자세히 듣지 못한 김한솔이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했다.
“내가 상자 옮기느라고 지상이가 내 옷 잡고 걸어가는데 사람들한테 밀려갔어.”
“당신도 참! 애들은 눈만 감았다 떠도 금방 없어질 수 있어서 잘 봐야 해. 사람 많은 데 가면서 손을 잡아야지 상자를 잡고 있으면 어떡해.”
잔소리가 아니었다.
실제로 사람이 많이 붐비는 곳에서 아동 미아 사건이 발생하는 경우가 꽤 있었기에 늘 조심해야 했다.
무엇보다 부모 입장에서 아이를 잃어버렸다 찾았다는 소리를 듣고 감정이 멀쩡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당신도 알겠지만, 우리 아들 워낙 활동적이라서 나가면 더 조심해야 한단 말이야.”
“그러게, 이건 내가 잘못한 거야. 앞으로는 조심할게.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됐어. 당신도 놀랐을 텐데 뭘. 잘 왔으면 됐지.”
누구보다 가장 속상할 사람이 남편이기에 김한솔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이 순간 무엇보다 아들이 무사하다는 사실이 가장 감사했다.
“지상이도 앞으로 엄마, 아빠랑 어디 갈 때 항상 손 꼭 잡고 뛰지 말고 옆에 꼭 붙어 다녀야 해. 알았지?”
“오늘은 옆에 있었는데 사람들이 밀어서 그런 거야.”
“그랬어? 엄마가 잘 몰랐네. 미안.”
“아니야. 나도 앞으로 더 조심할게.”
“우리 아들 착하네. 여보? 그런데 도대체 오늘 아침부터 뭍에는 왜 간 거야? 만물상 아주머니한테 물어보니까 우리 물건 다음 주에 온다고 하던데?”
김한솔은 아침에 나갈 때도 물었지만 이준역은 그저 볼일이 있다는 말만 할 뿐 이유를 말하지 않았었다.
“물건 때문에 간 거 아니야.”
“그럼? 그런데 이건 다 뭐야?”
이준역이 안고 있던 딸을 다시 안은 김한솔은 남편이 바닥에 내려놓은 박스를 보며 물었다.
“아! 안 돼. 엄마 보지 마.”
“케이크! 뭐야, 설마 당신…….”
작은 손으로 다급하게 가리는 아들의 손 너머로 케이크를 본 김한솔은 이제야 부자가 아침 일찍 육지로 나간 이유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