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2화. 목이 찢어질 정도로
“내가 괜한 이야기를 꺼냈네. 미안하다.”
“미안은 무슨. 내가 얘길 못 한 건데……. 준석이 형도 최근에 알았어. 나 연달아 망하고 그 사람도 지치고 많이 힘들어해서 서로 잘 이야기해서 헤어졌어.”
이재현은 이미 마치 해묵은 먼지를 털어내듯이 담담하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힘들다는 사람 계속 붙잡고 있는 것도 욕심이잖아. 솔직히 내가 좀 망했어야지. 아무튼 그렇게 됐다.”
“자식. 힘들었겠네.”
“아니. 전혀 안 힘든데? 나 솔직히 두 사람 앞이라서 이런 말 하지만 이혼해서 진짜 좋다. 마음도 얼마나 편한지 몰라.”
“좋긴 개뿔 뭘 좋아.”
“형 나 진짜 좋아. 어차피 애도 없어서 걸리는 것도 없고 앞으로 나를 위해서 이기적으로 속 편하게 살 거야. 나 요즘 연애도 한다니까.”
“연애? 아! 지랄 좀 하지 마. 너 연애 한다고? 거짓말하네.”
“내가 거짓말을 왜 해? 같은 직장에 있는 돌싱인데 좋은 사람이야.”
“이 새끼 소설 쓴다. 그래. 진짜라고 믿어 줄게.”
“진짜라니까.”
“알았으니까 술이나 한 잔 더 쳐드세요.”
“됐어. 안 마셔.”
그 뒤, 세 사람은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하고 의사로서 고충을 나누며 저녁 식사를 마무리했다.
“이만 일어나자.”
“그런데 이거 가격이 꽤 나올 텐데 사장님 돈 안 받으시면 어쩌지?”
“아까 보니까 안 받으실 거 같긴 한데 그래도 계산해야지.”
“내가 이미 했어.”
박준석과 이재현이 어떻게 계산하고 갈까 고민하는 사이 태경이 자리에서 일어나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뭐! 네가 했다고?”
“언제?”
“아까 화장실 갈 때.”
한눈에 봐도 상당한 금액이 나올 것만 같은 상차림에 태경은 도저히 공짜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에게는 화장실을 간다고 룸을 나왔다.
다행히 부부는 주방과 홀을 오가며 손님 응대에 정신이 없었고, 태경은 가까이 있던 직원에게 요청해 음식값을 계산했다.
“말을 하지. 얼마 나왔어?”
“25만 원 넘게 나왔네?”
이재현이 태경이 건네는 영수증을 보며 말했다.
워낙 스폐셜 코스로 음식이 잘 나왔기에 가격이 꽤 나왔지만, 박준석과 이재현은 놀라지 않았다.
“그 정도 나올 만하지.”
“태경아. 밥값 보내 줄게.”
“나도. 원래 여행 와서 이런 건 제대로 더치페이해야 해.”
“맞지. 그냥 지나갔다가는 괜히 서운할 수 있다.”
“서운할 것도 많다. 됐어. 안 그래도 내가 내려고 했어.”
“왜?”
“저번에 내가 밥 사기로 했는데 바빠서 못 봤잖아. 그거 대신 샀다고 생각해.”
태경의 말에 은행 어플을 클릭하던 두 사람이 빠르게 닫으며 반색했다.
“이야! 이게 바로 우리병원 원장님의 포스인가? 역시 돈 잘 버는 게 최고야.”
“김, 원장님 덕분에 저녁 잘 먹었습니다.”
“고맙다. 태경아.”
“나도. 덕분에 잘 먹었다.”
“김태경 최고!”
“됐어. 그만해.”
세 사람이 룸을 나와 카운터로 향하자 밥값 소식을 들은 이준역이 당황한 얼굴로 다가왔다.
“계산하시면 어떡해요? 일부러 대접하려고 한 건데……. 제가 환불해 드릴게요.”
“아니에요. 저희는 맛있는 음식 먹은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이렇게 그냥 가시면 안 되죠. 얼른 카드 주세요.”
“사장님, 정말 괜찮아요.”
미리 계산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이준역은 진심으로 환불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 사람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러면 제가 너무 죄송한데…….”
“그러면 저희 다음에 또 올 테니까 그때 서비스 많이 주세요.”
“알겠습니다. 대신, 그땐 절대 계산하시면 안 됩니다.”
“그럼요. 그때는 안 된다고 해도 공짜로 얻어먹고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일 났다.”
한쪽에서 전화하고 있던 박재현이 난감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고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우리 숙소까지 걸어가게 생겼어.”
“왜?”
“기사님한테 전화했는데 아내분이 전화를 받으면서 약주 하시고 뻗으셨대.”
오늘 관광을 함께한 택시 기사가 저녁 식사 후 숙소에 데려다주기로 했는데 그만 술을 먹고 잠이 들어 버렸다.
“일단 다른 택시 불러 보자. 우리 아까 번호 받은 거 있잖아.”
“그러지 마시고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그래, 잘됐다. 당신이 모셔다드리고 와.”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준역이 말하자 인사를 하기 위해 왔던 아내 김한솔이 한마디 거들었다.
“아니에요. 다른 택시 전화하면 돼요. 바쁘신데 괜찮아요.”
“저희도 아니에요. 어차피 저녁 장사 다 끝나서 바쁜 것도 없고 세 분 이대로 그냥 보내면 저 오늘 잠 못 잡니다.”
“남편 말이 맞아요. 섬은 주로 늦게까지 관광택시가 많아서 지금 잡기도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오늘 신세만 지고 돌려보내면 저희 마음 안 편해요.”
이준역과 김한솔은 세 사람은 그냥 보낼 생각이 없었다.
목숨 같은 아들을 찾게 해 준 은인 같은 사람들인데 대접은커녕 밥값까지 계산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는데 마침 타고 갈 차편이 없다니 잘 됐다 싶었다.
“숙소가 어디세요?”
“햇살 정원이요.”
“그래요? 거기 차 없으면 못 걸어가요. 여보, 얼른 갔다 와. 정리만 하면 되니까 당신 없어도 돼.”
“그래 알았어. 가시죠.”
“오늘 잘 먹고 갑니다.”
“조심히 가시고 또 놀러 와 주세요. 우리 아들 찾아 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결국 세 사람은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김한솔과 인사한 뒤, 이준역의 차를 타기로 했다.
철컥-
“애들이 있다 보니까 짐도 많고 그러네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아니요. 사장님. 그러지 마세요.”
앞 좌석에 있는 짐을 치우려 하자 세 사람이 분주한 손길을 말리며 함께 뒷좌석에 탑승했다.
“뒤에 같이 타면 됩니다.”
“불편하지 않으시겠어요?”
“전혀요.”
하얀 SUV 차량에 시동이 걸리고 이준역은 차를 출발시켰다.
“내일 가세요?”
“네, 내일 오전에 올라갑니다.”
“세 분 여행은 즐거우셨어요?”
“그럼요. 경치도 좋고 사장님 덕분에 맛있는 것도 먹고 아주 만족합니다.”
네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고 포장도로를 나온 차량이 비포장도로로 진입한 바로 그때였다.
“진짜로 최근 몇 년 동안 간 여행 중에 가장…….”
“꺄아악!!!”
순간 고막을 가르는 비명에 이재현이 하던 말을 멈췄다.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었어?”
“들었어.”
“꺄아악!!!”
다시 한번 들려온 그 소리는 목이 찢어질 정도로 악에 받쳐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세 사람은 순간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야, 이거 사람 소리 아니야?”
“마, 맞아. 맞는 거 같아.”
가운데 앉아 있던 이재현이 놀란 듯 양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러자 차창 밖을 쳐다보던 박준석이 동의하며 말을 이었다.
“아! 시x! 이거 그거 아니야?”
“뭐?”
“……!”
“아, 형! 왜 말을 하다 말아. 뭔데 얼른 말해.”
“살인… 사건 그런 거 아니야?”
“살인 사건이요?”
“그게 무슨 말이야.”
뜬금없이 튀어나온 살인 사건이란 말에 태경과 이재현이 동시에 답했다.
“여기 섬이잖아. 예전에 사건보고 25시 보니까 섬에서 살인 사건 나서 사람 죽고 난리도 아니었잖아. 범인 잡아 달라고 국민 청원도 올라오고 유명했던 사건인데 몰라?”
“생각이 날 듯한데……. 근데 방금 저 소리 비명이면 위급한 상황 아니야?”
“위급하니까 소리 질렀겠지.”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재현아, 너 미쳤냐?”
박준석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만약 진짜 살인 사건이면 어쩌려고 저기를 가재? 너 죽고 싶어.”
“죽기는 누가 죽어.”
“두 사람 다 그만해.”
두 사람이 오버하는 게 아닌 거 같았다.
어둠이 짙게 깔린 섬 어딘가에서 들린 소리는 얼핏 듣기에 비명에 가까웠기에 기분이 이상했다.
“사장님,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태경이 정신없는 두 사람을 진정시키며 운전하고 있는 이준역에게 물었다.
뭐지?
순간 룸미러로 웃고 있는 이준역과 눈이 마주친 태경이 잘못 본 건가 싶었다.
박준석의 말대로 만약 누군가 위험한 상황이라면 심각한 문제였기에 절대 웃음이 나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크!”
그런데 곧이어 호탕한 웃음소리가 차 안에 번졌다.
“크큭! 하하!”
이준역의 웃음이었다.
“…….”
“사, 사장님……?”
거의 파안대소하는 이준역을 보며 세 사람이 당황한 사이 그가 사과를 전하며 웃는 이유를 전했다.
“갑자기 웃어서 죄송합니다. 세 분이 너무 진지하게 놀라신 거 같아서요. 그 소리 사람 소리 아닙니다.”
“예?”
“사람 소리가 아니면……?”
“동물 소리예요.”
그랬다. 세 사람이 진지하게 생각하며 비명이라고 느꼈던 소리는 야생 동물 소리였다.
“동물이요?”
“네, 고라니 소립니다. 살짝 사슴 비슷하게 생긴 동물인데 고라니라고 아세요?”
“아! 이거.”
재빨리 휴대폰으로 고라니를 검색한 이재현이 양옆에 앉아 있는 두 사람에게 화면을 돌렸다.
“이게 고라니구나.”
“동물 프로에서 본 적 있는데. 아니 근데 고라니가 저렇게 울어요?”
“사람 소리치는 거랑 똑같죠?”
“농담 아니라 우리는 진짜 어디 사람이 다치기라도 한 줄 알았어요.”
“셋 다 서울 촌놈들이라 고라니 소리를 들어 봤어야지.”
“고라니 소리 처음 들은 사람들은 원래 다 놀라고 해요.”
“와! 말도 안 돼. 사람 목소리랑 진짜 똑같네.”
그새 동영상을 찾아본 박준석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 야생 동물 많은가요?”
“아무래도 섬이다 보니까 도시보다 많죠. 아까 울었던 고라니 녀석들은 꽤 자주 보여요. 그리고 멧돼지도 있고.”
“멧돼지요? 야생 멧돼지가 있어요?”
“그럼요. 도로에도 자주 나오고 실제로 보면 크기가 상당해요. 고라니나 멧돼지나 그놈들이 산에서 내려와서 밭에 있는 작물 다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일도 많아요.”
“멧돼지는 생각도 못 했는데 대단하네.”
“지금 밤이라 어두워서 안 보이는데 아까 이쪽 도로 진입할 때 야생 동물 출몰지역이라고 간판도 있었어요.”
사람 비명에 버금가는 울음소리를 내는 고라니에 멧돼지까지 출몰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세 사람은 확실히 섬은 섬이구나 싶었다.
“워!”
“아! 깜짝아. 애도 아니고 하여간에.”
조용히 있던 박준석이 핸드폰으로 멧돼지를 보고 있던 이재현을 놀라게 했다.
“놀랐으면서 괜찮은 척하기는.”
“난 가끔 보면 형이 우리 중에 막내 같고 태경이가 가장 형 같아. 안 그러냐? 태경아?”
“형이 가끔 그러기는 하지. 사장님, 지상이는 집에 있나 봐요.”
지상이의 소식이 궁금한 태경이 물었다.
“집 근처에 아버지, 어머니가 살고 계시는데 식당 일 나가면 아이들 봐주고 계세요.”
“섬에 사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사장님 참 대단하시네요.”
“대단하긴요. 섬에 사나 도시에 사나 다 장단점이 있는데 저랑 와이프는 원래 섬사람이라 그런지 이 생활이 잘 맞고 좋더라고요. 전 세 분이 더 대단하신 거 같은데요?”
“저희요?”
“세 분 다 의사 선생님이라고 들었습니다.”
이준역은 아까 식당에서 택시 기사로부터 세 사람의 직업이 의사라는 걸 전해 들었다.
“의사가 뭐 대단한 직업인가요.”
“대단하죠. 제가 건축과 출신이라 과제가 좀 많았어요. 그런데 대학 때 동아리에 친한 의예과 형이 있었는데 그 형이 본과 올라가면서 공부량 때문에 죽을 거 같다면서 뭘 공부하는지 알려 주는데 우리 과는 일도 아니더라고요.”
“와! 갑자기 본과 때 생각하니까 진짜 그때 어떻게 공부했는지 생각도 안 난다.”
“그래? 난 지금도 기억나. 본과 공부량은 진짜 미친 수준이지. 난 아마 돌아가서 다시 하라고 하면 절대 못 할 거야. 돈을 줘도 못 한다.”
이준역의 이야기로 시작된 의대 본과 이야기에 세 사람이 그 시절을 회상하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아니다. 태경이 자식은 다시 돌아가도 아무렇지……!”
쿵-
순간 네 사람이 탄 차량이 무언가 충돌하며 상당한 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