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434화 (433/472)

434화. 사람도 환자도 아닌 고요함

남자의 말을 듣고 있던 여자는 목소리를 조금 낮추더니 창문을 올려 보라는 손짓을 보였다.

“어?”

“창문 좀 올려 보라고. 잠시만요.”

여자가 닦달하자 차창이 올라가고 곧이어 두 사람의 대화가 차창 밖으로 흘러나왔다.

“왜?”

“왜라니? 당신 미쳤어? 이 시간에 그것도 숲길에서 저 사람들이 누군지 어떻게 알고 도와줘.”

여자는 외딴섬에서 만난 태경과 이재현이 하는 말을 믿지 않았다.

“당신 뉴스도 안 봤어. 저 사람들 나쁜 사람이고 괜히 차에 태웠다가 우리 해코지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런가?”

“당연하지. 요새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아! 깜짝아!”

똑똑-

열변을 토하던 여자는 차창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깜짝 놀라며 남자를 더욱더 닦달했다.

“자기야 빨리 출발해. 빨리!”

“저희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정말 사고가 나서 그래요.”

“저기요!”

부웅-

태경과 이재현이 다급하게 말했지만, 이미 차는 저만치 출발한 상태였다.

저들의 심정은 이해한다 해도 마음이 좋지 않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젠장. 인심 한번 야박하네.”

신발 앞에 있던 작은 돌멩이를 발로 찬 이재현이 야속하게 떠나가는 차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근데 차 계속 안 잡히면 어떡하지?”

“그땐, 뛰어서라도 사람 불러와야지.”

농담이 아니라 진짜였다.

조금만 더 기다렸다 차가 잡히지 않으면 뛰어서라도 도움을 요청하러 갈 심산이었다.

1분 2분 3분…….

답답한 마음과 상관없이 눈치 없는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렇게 시간이 다시 흘러가고 두 번째 차량이 떠난 지 15분이 지난 그때였다.

“야, 재현아. 저기 차 온다.”

저 먼발치에서 강한 라이트를 밝히며 달려오는 차가 보였다.

“도와주세요!”

“여기요!”

두 사람은 차가 다가오기도 전에 힘껏 목소리를 높이며 작은 불빛을 내뿜는 핸드폰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도와주세요.”

“사람이 다쳤어요.”

이윽고 차량이 두 사람 근처로 다가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까 고라니 소리처럼 목청에 더 힘을 올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차는 두 사람을 그대로 지나가 버렸다.

“하!”

빠르게 흔들던 손이 멈추고 답답한 한숨이 허공으로 뿌려진 그 순간,

끼익-

앞서가던 차량이 급브레이크를 걸며 급히 멈췄다.

“태경아.”

순간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던 태경과 이재현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멈춰선 세 번째 차를 향해 뛰어갔다.

10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춘 차는 사고 난 네 사람이 탄 차보다 좀 더 큰 SUV 차량이었다.

차를 향해 뛰어온 태경이 차창을 두드리기도 전에 운전석 창이 먼저 내려가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운전석에는 30대로 보이는 남자와 보조석에는 또래로 보이는 여자가 반려견을 안고 있었다.

“저기, 죄송하지만…….”

얼굴 가득 간절함이 가득한 태경은 속으로 제발이라는 말을 되뇌며 말을 이었다.

“정말 죄송하지만 사고가 나서 그런데 도와주세요.”

“저희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나서 운전자가 정신을 잃어서 그래요.”

이번에도 사람들이 오해하고 그냥 갈까 봐 이재현은 빠르게 자초지종을 알렸다.

“사고요?”

“그런데 차는 어디…….”

차 사고라는 말에 반려견을 앉고 있던 여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차는 사고 후 차가 회전하며 비탈길로 내려가 나무를 들이받아서 옆에 있습니다.”

“병원에 전화해 봤는데 통 연결이 되지 않아 지나가는 차를 계속 세우는 중이었어요. 갑작스럽겠지만 좀 도와주세요.”

“어떡하지?”

다급함이 느껴지는 태경과 이재현을 보며 남자는 두 사람이 거짓말은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믿는 거 같지도 않았다.

“여보가 보고 와 봐.”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못한 남자가 난감한 듯 말하자 보조석에 앉아 있던 여자가 확인해 보라며 남편을 부추겼다.

“그래, 그게 좋겠다. 그럼 제가 내려가서 확인을 좀 해 봐도 될까요?”

“그럼요.”

“당신 여기서 문 잠그고 있어.”

“응.”

젊은 부부는 희락도에서 한 달살이를 계획하며 일주일째 지내고 있는 중이었다.

오늘은 섬에 있는 캠핑장에서 차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던 중에 불빛을 흔드는 태경과 이재현을 보고 차를 멈췄다.

철컥-

차에서 내린 남자는 두 사람과 살짝 거리를 두며 뒤따라갔다.

“여기! 이쪽입니다.”

“뭐야! 차 세웠어? 사람 온 거야?”

운전석 옆에서 급정거하는 차 소리를 듣고 궁금해하던 박준석이 내려오는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어. 차 세웠어.”

“그래, 잘됐다.”

“운전자가 정신을 잃은 상태입니다.”

“……!”

남자는 태경을 따라 내려온 이준역을 보며 그들의 말이 사실인 걸 알게 됐다.

“세상에! 진짜네.”

“죄송하지만, 병원까지만 환자를 옮길 수 있게 도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그럼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준역의 상태를 보며 도와줄 것을 흔쾌히 수락한 남자는 비탈길을 뛰어 올라가더니 잠긴 차 문을 급하게 두드렸다.

똑- 똑-

“여보, 수미야 문 열어.”

“어떻게 됐어. 진짜 사고 난 거야?”

“어, 운전자가 정신 잃고 쓰러져 있어. 병원도 전화가 안 된다니까 우리가 좀 데려다줘야 할 거 같아.”

“그래, 당연하지. 뒤에 치워야겠다.”

남편의 말에 동의한 여자는 차에서 급히 내려 케이지에 반려견을 넣었다.

“밍키야. 잠깐만 들어가 있어.”

“저기, 혹시 환자를 옮길 만한 게 좀 있을까요?”

밑에 있던 태경이 차를 치우고 있던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여보! 우리 그거 있잖아. 침낭.”

“그래. 접이식 침낭이 있는데 그거면 될까요?”

“그럼요.”

“이건데…….”

“그거면 충분합니다.”

부부가 꺼낸 침낭은 양 끝에 철제가 있고 밑에 받침대도 있었다.

구급차에 있는 환자 이송 베드만큼은 아니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바닥에서 침낭 조립을 끝낸 태경은 남자와 함께 이준역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이걸로 사장님 옮기자.”

“이거 어디서 났어?”

“제가 차박 다녀오는 길이라서 침낭이 있었거든요.”

“아, 그래요? 감사합니다.”

“다리 잘 잡아.”

태경은 운전석에 있는 이준역의 안전벨트를 풀고 침낭으로 옮기려 했다.

“특히 머리 조심하고.”

“여보, 잠깐만! 이거.”

네 사람이 이준역을 운전석에서 막 꺼내려던 그때 남자의 아내가 손에 든 무언가를 흔들며 뛰어 내려왔다.

“이것도 가져왔어.”

여자가 가져온 건 반려견이 사용하는 패드로 너무 말랑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딱딱하지도 않은 적당한 재질이었다.

“교통사고 환자는 옮길 때 머리 부분 조심해야 한다고 하던데 그래서 갖고 왔어.”

“잘 알고 계시네요.”

“여보, 이분들 의사 선생님들이시래.”

남자는 조금 전, 태경과 침낭을 갖고 내려갈 때 세 사람이 의사라는 걸 들었다.

“어머, 정말! 정말 의사분들이세요?”

“네, 맞습니다.”

“잘됐다. 여기가 섬에서도 좀 외진데 그래도 의사분들이 같이 계셔서 다행이네요.”

“여보, 차 문 좀 열어 줘.”

“어, 알았어.”

여자가 차 뒷문을 열어주자 네 사람은 이준역이 누워 있는 침낭 그대로 차에 실었다.

다행히 차가 일반 차량보다 조금 크고 두 사람이 차박 때문에 뒷좌석을 넓게 만들어 놓은 상태여서 이준역을 옮기는 데 무리가 없었다.

“침낭 때문에 자리가 좁아져서 세 분이 좀 불편하시겠어요.”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세 사람이 남는 공간에 간신히 몸을 구겨 넣은 뒤, 차는 출발했다.

비포장도로를 벗어나기까지 조금씩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세 사람은 이준역의 몸이 크게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잘 붙잡고 있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빨리 차가 잡혀서 다행이다.”

“그러니까. 난 안 잡힐 줄 알았거든.”

박준석과 이재현이 너무 늦지 않게 병원으로 갈 수 있다는 것에 조금은 안심했다.

반면 여전히 이준역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태경은 전혀 안심할 수 없었다.

‘젠장! 냄새가…….’

이준역의 다섯 번째 바이탈이 처음보다 진해졌다.

막힌 공간이라 냄새가 더 강하게 느껴진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그게 아니었다. 확실히 더 진해지고 있었다.

‘아빠! 아빠!’

‘지상아.’

순간 태경의 눈앞에 서로의 이름을 애틋하게 부르던 이준역과 그의 아들 지상이의 얼굴이 오버랩됐다.

아직 앞길이 창창한 젊은 남자.

아내와 어린 두 아이와 함께 외딴섬에서 사는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던 그 모습이 떠올라 태경은 마음이 더욱 안 좋았다.

“저쪽 언덕배기 쪽에 있는 병원으로 가시는 거 맞죠?”

병원을 향해 가던 중 운전하고 있던 남자가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

“희락도에 병원 하나밖에 없지 않나요?”

“맞아요.”

“그런데 거기 병원 의사랑 간호사들 좀 싸가지……!”

보조석에 앉아 있던 여자가 아무 생각 없이 말하다가 뒤에 타고 있는 세 사람이 의사라는 사실을 깨닫고 급히 말끝을 흐렸다.

“죄송해요. 세 분도 의사 선생님이신데 제가 말을 잘못했네요.”

“아닙니다. 의사나, 간호사라고 다 친절한 사람만 있나요. 괜찮습니다.”

“와이프랑 제가 희락도 한 달살이로 왔는데 저번 주에 급히 병원 갈 일이 있어서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섬에 있는 병원이라고 해도 환자 대하는 태도가 좀 그렇더라고요.”

남자는 아내의 싸가지 없다는 말이 마음에 걸린 듯 자신들이 겪은 이야기를 짧게 풀었다.

“남편 말이 맞아요. 분명 진료받는 사람도 거의 없고 누가 봐도 바쁘지 않은데 계속 기다리라고 하더니 정말 한참 있다가 나오더라고요.”

“전반적으로 응대가 좀 불친절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병원을 방문했을 때 기억이 꽤 안 좋았다는 두 사람의 말과 함께 네 사람이 탄 차가 병원에 도착했다.

이 병원은 희락도에 있는 유일한 병원으로 공공의료원이었다.

겉에서부터 느껴지는 건물 외벽이 꽤 오래된 병원임을 짐작케 했다.

위치가 섬이다 보니 도시에 있는 병원처럼 규모가 크지는 않고 2층으로 된 딱 섬에 있을 법한 아담한 건물이었다.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차에서 이준역을 막 내린 그때, 남자와 여자가 세 사람을 향해 인사를 전했다.

“침낭 가져가셔야죠. 잠시만 기다리시며 제가 갖다 드릴게요.”

“아닙니다.”

“그러지 마세요.”

이재현의 말에 두 사람은 격하게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괜찮아요. 그리고 저희 그 침낭 오래 사용해서 어차피 바꾸려고 했어요.”

“신경 쓰지 마시고 얼른 들어가 보세요. 그분 꼭 일어날 수 있게 선생님들이 잘 돌봐주세요.”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태경과 친구들은 병원까지 태워준 두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급히 병원으로 들어갔다.

끼익-

낡은 문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온 세 사람을 반긴 건 사람도 환자도 아닌 고요함이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여전히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외딴섬이라 그런 건지 원래 시간이 늦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병원이 이렇게 조용할 수 있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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