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6화. 뚜렷한 하얀색 반달
“이봐요! 오심보 선생님. 이러다 환자 죽습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태경이 정색하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
접수고 뭐고 일단 CT부터 보는 게 우선이었다.
“내가 언제 접수 안 한다고 했습니까? 접수합니다. 해요!”
눈빛에 불꽃이 튀며 오심보를 똑바로 직시한 채 태경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일단 사람이 죽게 생겼으니까 CT 결과부터 먼저 좀 보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잘못된 일입니까? 선생님도 간호사로 일하고 있으니까 의사인 우리가 환자의 상태가 얼마나 심하면 이 난리를 치며 빨리 보자는 건지 알잖아요.”
“아니, 왜 갑자기 화를 내고 그래요. 잠시만요! 그런데 정말 의사 맞아요?”
팽팽한 의견을 오가던 그때 오심보는 별안간 태경과 친구들에게 의사가 맞는지 물었다.
실로 황당한 질문이었다.
“뭐라고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아까부터 의사라고 하는데 진짜 의사는 맞는 거죠? 막말로 요즘 세상이 얼마나 험하고 사기꾼도 많은데 내가 그쪽 세 분이 의사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어요?”
“저기요, 간호사 선생님. 우리 다 의사 맞아요. 여기, 이 사람 얼굴 본 적 없어요?”
가만히 있던 박준석이 태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 왜, 퀴즈 프로에도 나오고 아동학대 사건으로 한 번 난리 났던 거 알죠? 그때 인터뷰도 하고 뉴스 많이 나왔는데 몰라요?”
“TV를 잘 안 봐서 모르겠는데요? 의사 신분증 있어요?”
“아니, 어떤 사람이 의사 신분증을 가지고 다녀요. 그러면 그쪽은 간호사 신분증 갖고 다닙니까?”
“예! 여기 제 명찰 안 보이세요?”
박준석이 어이없단 표정으로 대꾸하자 오심보는 보란 듯이 유니폼에 달린 병원 명찰을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의사도 아니면서 의사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 저 매년 봐요.”
별안간 의사 신분증을 운운하는 모양새가 억지 트집을 잡으려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오심보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비교적 조용한 섬 병원도 바쁜 때가 있다. 바로 휴가철이었다.
의료진은 한정적이고 병원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그만큼 대기 시간도 늘어난다. 그런데 문제는 기다림을 참지 못한 몇몇 사람들이 본인을 의사라고 말할 때가 있다.
그러면서 뭍에 있는 큰 병원 의사다, 여기 선생님을 잘 안다며 빨리 치료해 달라며 재촉한다.
하지만 정작 그런 사람들치고 진짜 의사인 사람들을 별로 본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작은 섬마을이다 보니 은근히 무시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래서 오심보는 태경 일행에게 진짜 의사인지 물었던 것이다.
“돌겠다. 누가 의사 신분증을 갖고 다녀.”
“죄송하지만, 저는 눈으로 확인된 것만 믿는 사람이라 신분증 없으면…….”
이재현이 이마를 짚으며 기막혀하자 오심보가 여전히 신분증을 운운하던 바로 그때였다.
“여기!”
지금까지 옆에서 조용히 핸드폰을 보고 있던 태경이 휴대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보이죠?”
휴대폰 화면에는 보건복지부 장관 도장이 찍힌 전문의 자격증이 보였다.
“이만하면 의사 신분증 맞죠?”
그리고 곧이어 넘어간 화면에는 얼굴이 나와 있는 우리병원 명찰이 보였다.
“됐습니까?”
그 말에 오심보가 안경 끝을 올리며 화면에 집중했다.
명찰 안에 있는 얼굴은 영락없는 태경의 얼굴이 분명했다.
“어떤 사람들이 의사를 사칭했는지 모르지만, 의사로서 위급한 환자 앞에 두고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확인된 거죠?”
“네, 의사 맞네요.”
“그러니까 이제 접수니, 절차니 그런 거 그만 말하고 결과부터 봅시다. 이 환자 죽으면 그쪽이 책임질 겁니까?”
의사 면허증을 확인하자 민망해진 표정을 짓는 오심보를 향해 태경이 쐐기를 박았다.
“어머, 어머! 저 환자 죽으면 제가 왜 책임을 져요. 그리고 내가 언제 안 본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좀 빨리 보자고요.”
“안 그래도 지금 보려고 했어요.”
책임지라는 말에 정색하며 기막혀하던 오심보는 결국 스테이션에 있는 모니터 앞으로 다가가 혼잣말하며 결과를 클릭했다.
“책임을 내가 왜? 어이가 없네. 여기요? 결과 확인해 보세요.”
오심보는 여전히 입술을 삐죽거리며 구시렁댔지만, 태경과 친구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재현이 오심보와 함께 접수하러 간 사이 태경은 박준석과 함께 결과를 확인했다.
분주하게 모니터를 오가던 눈빛들이 심상치 않았다.
“형, 이거…….”
이준역의 브레인 CT에는 누가 봐도 뚜렷한 하얀색 반달이 보였다.
CT상 하얀 것은 액체로, 뇌와 머리뼈 사이에 액체는 없는 것이 맞다. 그런데 저렇게 큰 초승달 모양의 액체가 생겼다는 것은 한 가지를 가리켰다.
출혈! 바로 출혈이었다.
“형, 이거 형 이거 SDH(subdural hematoma, 경막하혈종)이지?”
박준석에게 늘 존댓말을 쓰던 태경이 너무 놀라 반말하기 시작했다.
“형? SDH 맞지?”
“어……. 맞아.”
SDH, 경막하혈종.
사람의 뇌는 가장 안쪽부터 연막을 시작으로 중간에 있는 지주막 그리고 가장 바깥에 있는 경막. 이렇게 세 개의 뇌막으로 둘러싸여 척수와 함께 보호받고 있다.
얇은 연막, 지주막과 달리 경막은 두꺼운 조직이며, 골막과 수막으로 되어 있다.
경막하혈종은 바로, 이 경막에 혈관이 터져 피가 고인 것을 뜻한다.
보통 교통사고나 낙하 또는 머리에 직접적인 충격을 받았을 때 나타난다.
사고 시 충격이나 상황에 따라 바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고 수일이 지나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경막에 고인 피가 뇌를 압박하기 때문에 빠른 처치를 하지 않으면 자칫 사망에 이를 수 있었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이준역에게서 4단계, 다섯 번째 바이탈을 느낀 태경이 생각했던 게 바로 SDH, 경막하혈종이었다.
겉으로 뼈가 부러지거나 크게 다친 곳이 없다고 안심할 수 없었던 것도 그만큼 긴박하고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경은 SDH를 의심하면서도 CT를 찍고 확인하기 전까지 반대로 아니기를 바랐었다.
“선생님!”
CT 결과를 확인한 태경이 다급하게 오심보를 불렀다.
“여기, 당직 신경외과 선생님 당장 콜하시고 수술이 가능한지 여부도 우선 알아봐 주세요.”
“수술……? 저기, 선생님. 잠시만요.”
당장 수술실 사용 여부를 묻는 태경을 보며 오심보가 안경을 올리며 못마땅한 눈빛을 보였다.
“수술이라니요? 아무리 의사 선생님들이라고 해도 제가 따라야 할 의무는 없잖아요.”
“지금 그게 무슨…….”
“으아함!”
한층 격해진 태경이 말을 시작하려던 찰나, 커다란 하품 소리와 함께 누군가 오심보를 불렀다.
“피곤하다. 오 선생님.”
오심보를 부른 사람은 남자로, 태경의 무리보다 젊었으며 그는 계단으로 내려와 설전을 벌이고 있는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가운을 입고 있는 모습이 누가 봐도 나 의사라고 말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남자의 가운 위에는 고동채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태경과 친구들은 아까 방사선사가 말한 내과 당직의가 이 사람이라는 걸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감기 초장에 잡으려고 약을 강하게 먹었더니 자도 자도 잠이 쏟아지네요. 그런데 진료 보러 오셨어요?”
까치집이 생긴 머리카락을 긁으며 반쯤 감긴 눈을 이제야 완전히 뜬 고동채가 태경의 무리를 보며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네, 당직 선생님이신가요?”
“아, 예. 제가 당직의 맞습니다.”
“잘됐네요. 저기 누워 있는 사람 보이죠? 저 환자 당장 수술이 필요합니다.”
태경은 고동채를 향해 수술이 필요한 이유를 빠르고 정확하게 설명했다.
“SDH라면 뭐 급한 상황이긴 하네요. 급한 거 맞는데…….”
설명을 들은 고동채 역시 이준역이 처한 상황을 알았다. 하지만 어쩐지 급한 상황을 인지한 것에 반해 그의 반응이 상당히 미지근했다.
“그런데 지금 저희가 수술실이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고동채는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이런 일에 이가 갈린 듯 상당히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희락도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지역 대학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전문의를 따고 펠로우로 일하고 있었기에 이런 상황을 꽤 많이 접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선뜻 도와주려 나서기가 싶지 않았다.
이런 일에 나서서 도와줬다가 환자는 물론 보호자에게 시달린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의사로서 회의감도 밀려오고 이딴 꼴을 보려고 그렇게 공부해 의사가 됐나 하는 마음도 들었다.
결국 펠로우 과정을 끝낸 고동채는 편하게 지내고 싶은 생각으로 희락도에 있는 의사 모집을 보고 공공의료원에 자원했다.
쉽게 말해 1년 동안 쉬려는 마음으로 이곳에 온 것이다.
그런데 이 꼴을 보기 싫어 섬으로 왔는데 하필 또 이런 일과 마주하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하! x같네.’
그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환자의 사정은 잘 알겠지만, 나섰다가 후에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더군다나 SDH 환자라고 하는데 막말로 환자가 죽기라도 하면 그땐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가뜩이나 이곳에 온 지 이제 막 3개월밖에 안 됐기에 더욱 몸을 사렸다.
아주 잠깐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그는 결국 오심보에게 이 일을 넘기기로 했다.
까칠하고 예민한 사람이지만, 본인 역시 난감한 상황에 휩쓸리는 건 극도로 꺼리는 성격이기에 알아서 잘 대처할 거라고 생각했다.
“죄송하지만 저희가 수술실은 좀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죠? 오 선생님?”
고동채의 말에 오심보는 당연하다는 듯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동채는 별안간 핸드폰을 들며 급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 병실에 입원해 계신 환자분이 계시는데 호출이 와서요. 여기, 오 선생님과 말씀 나누세요. 그럼.”
울리지도 않은 휴대폰을 흔들며 고동채는 급하게 계단으로 올라갔다.
“당직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 들으셨죠? 그리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쪽 분들 의견 따를 의무 없어요.”
“지금 의무를 따질 때가 아니잖습니까! 선생님도 저 사진 보면 알 거 아니에요. 이 환자 지금 수술 안 하면 죽습니다.”
“자꾸 죽는다 죽는다 하시는데, 죽는 건 안타깝지만, 제가 굳이 제 권한 밖의 일을 벌여서 책임을 지고 싶지는 않아요.”
오심보도 고동채와 같이 책임이 문제였다.
괜히 문제가 생겨 안 좋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수술할 수도 없었다.
“수술실 말씀하시는데 지금 병원에 신경외과 선생님도 안 계세요. 그냥 119 내륙에 연락해서 도움 요청하세요. 여긴 섬이고 수술할 수 있는 분이 아무도 없는데 어떡하겠어요.”
“이런! 씨발.”
태경의 입에서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워낙 욕과 거리가 멀었지만, 태경도 사람인지라 환자가 처한 답답한 상황과 마주하니 의식할 새도 없이 욕이 나왔다.
“아니, 이봐요! 욕을 하는 건 아니죠. 저도 간호사예요. 지금 그쪽이 환자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저도 그래요.”
태경이 욕을 자신에게 한 거라고 생각한 오심보는 흥분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건 그거고 제가 의사도 아닌데 함부로 일을 벌일 수는 없잖아요. 조금 전에 당직 선생님도 힘들다고 했고 막말로 당직 선생님이 신경외과도 아니고. 아까도 말했지만, 여기서 이러고 계시는 것보다 빨리 내륙에 연락하시는 게 환자한테도 더 도움이 될 거예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닌 건 아니라며 반박했던 오심보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병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철컥-
“어머 어쩐 일이세요?”
때마침 병원 안으로 섬 주민이 들어오자 오심보는 자신은 할 말을 다 했다며 태경의 무리를 남겨 둔 채 주민에게 향했다.
“저녁 먹은 게 체했는지 속이 뒤틀려서 자다 깼어. 안 되겠다 싶어서 참다 링거라도 맞으려고.”
“또 기름기 잔뜩 들어간 음식 드신 거 아니에요?”
“오랜만에 치킨이랑 맥주를 먹긴 했는데 그래서 그런가?”
“기름기 조심하셔야 한다니까. 이쪽으로 오세요. 제가 선생님 얼른 모셔올게요.”
“그래요.”
섬 주민을 응대하는 오심보를 보며 태경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하!”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 누르며 미간을 찌푸린 태경은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저 간호사가 말이 날카롭긴 해도 아예 틀린 말을 한 건 아닌 거 같아. 일단 빨리 119에 도움 요청하는 게 어때?”
“그래. 태경아. 재현이 말대로 하자. 우리가 뭘 할 수가 없어.”
“어! 야, 나 전화 들어온다.”
심각하고 진지한 대화가 이어지던 중 이재현이 손에 들고 있던 이준역의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화면에는 ‘사랑하는 아내’라는 문구가 보였다.
워낙 정신이 없었기에 가족들이 이준역을 기다릴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나 전화 좀 받고 올게.”
이재현이 전화를 받기 위해 자리를 옮기고 박준석이 다시 태경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의사라고 해도 내 병원도 아니고 남의 병원에서 수술방 운운하는 거 아니잖아. 그리고 지금 이미…….”
“형!”
박준석의 말을 자른 태경이 잔뜩 독해진 포르말린 냄새를 뚫고 뭔가 결심한 듯 그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