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화. 리스크
“맞습니다. 의원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무슨 일인지 편하게 말해 보세요.
“실은 제가 친구들과 함께 희락도라는 섬으로 휴가를 왔습니다.”
-휴가요? 원장님이 휴가를 가셨다니 뭔가 놀라운데요? 사람이 쉬기도 해야죠. 잠시만요!
태경이 휴가 갔다는 말에 웃는 소리를 내던 감덕찬은 이내 환자 때문에 전화했다는 걸 깨닫고 다시 물었다.
-환자 때문에 전화하셨다고 했죠?
“네, 의원님. 제가 일행과 숙소로 돌아가던 중 운전을 해 주신 분이 사고로 외상을 입었습니다.”
태경은 감덕찬에게 현재 상황에 대해 빠르게 설명했다.
“119에 연락해서 육지로 나가는 게 방법이지만, 그렇게 된다면 환자를 치료하더라도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고 식물인간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식물인간이요?
“네, 마침 여기 섬에 있는 유일한 병원이 공공의료원이라서 의원님께서 도와주실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실례를 무릅쓰고 전화 드렸습니다.”
-저런!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전화 잘하셨습니다.
감덕찬은 그 어떤 짜증이나 불편한 기색 없이 오히려 걱정하지 말라며 태경을 다독였다.
-내가 지금 희락도 관할 도지사님께 바로 전화할게요. 우리 김 원장님께서 요청하시는 모든 상황은 들어주도록 말씀 잘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의원님.”
흔쾌히 도와준 마음이 얼마나 고맙던지 태경은 보이지도 않은 감덕찬을 향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의원님, 제가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 또한 제가 지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원장님, 은혜라니 말도 안 됩니다. 저도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다.
“그럼요. 말씀하세요.”
-방금 말씀하신 책임은 저도 같이 지겠습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그 환자 꼭 살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의원님.”
-원장님 하고 싶은 거 다 하시고 오직 환자만 생각해 주세요. 제가 그 가족 대신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육지까지 이동 수단도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네, 의원님. 정말 감사합니다.”
감덕찬의 든든한 지지를 받은 태경은 복잡했던 머릿속이 정리된 기분이었다.
사실 지금 하려는 일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짓인지 잘 알고 있다.
내가 일하는 병원도 아니고 다른 병원에서 수술방을 내어 달라는 게 의사로서 무례한 행동이다.
하지만, 무례하고 말도 안 되는 짓임에도 불구하고 태경이 이렇게까지 하려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환자!
오직 환자를 살리기 위한 마음이 무례함을 이길 수밖에 없었다.
“야! 태경아?”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병원에 들어가자 박준석과 이재현 동시에 태경을 불렀다.
“너, 어디 갔었어?”
“119랑 통화하고 온 거야?”
“얼마나 걸릴 거 같아?”
“…….”
박준석과 이재현이 쉬지 않고 던지는 질문에도 어쩐지 태경은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한쪽에서 전화를 받고 있는 오심보를 쳐다봤다.
“야. 태경아. 전화했냐고?”
“어. 했어.”
“뭐래? 온대?”
“잠깐 기다려 봐.”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잔뜩 궁금한 두 사람을 뒤로한 채 태경의 시선은 여전히 오심보를 향했다.
“아, ……네네. 알죠. 하지만 원장님. 아, 네……. 누, 누구 전화요? 도, 도지사님이요! 지금 도지사님이라고 하셨어요? 세상에!”
그리고 전화를 받고 있는 오심보는 전과 다르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통화하며 태경과 친구들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
“아, 예.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원장님. 네, 그렇게 할게요.”
대답하다 깜짝 놀란 반응을 보인 오심보는 전화를 끊고 태경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야, 저 간호사 이쪽으로 오는 거 같은데?”
“뭐지? 119랑 통화했는지 물어보려고 오는 거 같기도 하고…….”
“저, 저기요? 김태경 선생님?”
“네, 제가 김태경입니다.”
“선생님, 하고 싶으신 대로 하세요.”
날카롭게 느껴지던 말투가 한풀 꺾인 걸 보니 감덕천의 입김이 제대로 통한 모양이었다.
“저기, 저 환자 여기서 살리고 싶다고 하셨다면서요.”
“네, 맞습니다. 꼭 살리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세 분이 하시고 싶으신 대로 하시라고요. 수술방 간호사도 한 명뿐이라서 준비하는 데 좀 걸려요. 그분도 수술한 지 오래돼서 잘 모를 거고 수술방은 2층 끝에 있어요. 제가 전화해 놓을게요. 됐죠?”
“그런데 환자는 저희가 옮기나요?”
“그럼요. 이제 김태경 선생님이 모든 책임을 지기로 했잖아요. 저랑 고 선생님은 응급실 지켜야 하니까 알아서 하세요. 그러기로 한 거잖아요.”
“알겠습니다.”
“태경아?”
할 말을 마친 오심보가 스테이션으로 향하고 박준석과 이재현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태경에게 물었다.
“책임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수술방은 또 뭔 소린데?”
“일단 두 사람 먼저 올라가 있어? 아까 수술방 어딘지 들었지? 2층이다.”
“야, 태경아? 넌.”
“보호자한테 알려야지. 설명하고 바로 올라갈게.”
박준석과 이재현이 이준역과 함께 엘리베이터로 올라가고 태경은 곧장 김한솔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사모님 저 김태경이라고 합니다. 혹시 병원 도착까지 얼마나 남았나요?”
-다 왔어요.
휴대폰 너머로 대답이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둔탁한 소리와 함께 병원 문이 열렸다.
다급하게 들어온 김한솔의 고개가 빠르게 좌우로 움직이더니 곧장 태경에게 걸어왔다.
“살려 주세요!”
태경을 보자마자 김한솔이 내뱉은 첫 한마디였다.
전후 사정을 묻기도 전에 그녀는 남편을 살려 달라며 애원했다.
“선생님, 제 남편 좀 살려 주세요. 지상 아빠 어디 있어요?”
“환자분은 방금 전에 수술방으로 이동했습니다.”
“수술방이요?”
“네, 환자분의 병명은 경막하혈종입니다.”
의사가 아닌 김한솔이 이해할 수 있도록 태경은 최대한 쉽게 설명했다. 대신, 사실 그대로 있는 그대로 전했다.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은 남편이 육지까지 이송돼서 병원에 도착하면 상황이……. 그러니까 식물인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네, 현재는 그렇습니다.”
“여기서 응급처치라도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식물인간이라는 말을 듣고 잠시 움찔하던 김한솔은 이내 침착하게 질문했다.
“선생님들 서울에서 오셨다고 들었어요. 그러면 우리 남편 같은 환자도 보셨을 거잖아요. 선생님 도와주세요. 아직 애들도 어리고 저 무엇보다 준역 씨, 이대로 못 보내요. 저 그 사람 없으면 못 살아요. 도와주세요.”
김한솔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간절히 애원했다.
“이준역 환자 수술할 생각입니다.”
태경은 수술할 계획을 말하며 그와 동시에 수술 중에 생길 수 있는 위험 요소에 관해서도 빠짐없이 설명했다.
“예전에 친정아버지가 간단한 수술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담당 의사 선생님께서 그랬어요. 아무리 간단한 수술이라고 해도 수술방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고 사람마다 수술 후 후유증이나 이런 것도 다르다고요. 그래서 선생님이 무슨 말씀하시는지 저도 다 알아요. 수술 동의할게요.”
김한솔은 지금 상태가 안 좋은 남편이 수술하다 위험한 상황이 생긴다고 해도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그냥 무작정 육지로 이송되기만을 기다렸다간 식물인간이 될지도 모르는데 뭐라도 해 보고 싶었다.
“선생님, 우리 남편 꼭 살려 주세요. 아들을 살려 준 분에게 남편까지 살려 달라는 게 죄송하지만, 제가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모든 설명을 마친 태경은 당직의에게 수술 동의서 작성을 부탁하고 빠르게 2층으로 향했다.
“저기 태경이 온다.”
“야! 태경아?”
2층으로 올라가자 박준석과 이재현이 수술방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왜 안 들어가고 있어? 간호사 선생님 온다고 하지 않았어?”
“이제 곧 올 거야.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곧이어 수술방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열리고 중년 여성이 세 사람을 맞이했다.
“이제 들어오셔도 돼요. 오 선생님한테 급하게 연락받고 와서 정신이 없네요. 섬에서 수술한 적이 너무 오래전이라 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잘 모르는 것도 많아요. 최대한 선생님들이 필요한 거 있으면 잘 도와드릴게요.”
밝은 목소리와 함께 이준역의 베드를 잡아끄는 모습을 보니 오심보와 달리 협조적이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여기 들어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던 탓인지 태경은 저 간호사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제가 환자분 안으로 옮길게요. 세분 여기서 스크럽 하시고 들어오세요.”
간호사가 베드를 밀며 들어가고 태경은 팔을 걷어 소독을 시작했다.
“야! 태경아. 그런데 간호사도 없는데 어떡하려고?”
빠르게 소독하는 태경을 보며 박준석이 물었다.
수술방에서 일하는 간호사는 각자 일하는 포지션이 있었다. 크게 소독 간호사, 스크럽 간호사로 나눌 수 있다.
지금 중년 간호사는 순환 간호사로 쉽게 말해 수술 시에 필요한 기구, 물품들을 전달하고 관리하는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말은 지금 집도의를 도와주는 스크럽 간호사가 없다는 뜻이다. 박준석이 물어본 것도 이 부분이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우리가 하면 돼지.”
“난 태경이 네가 시키는 것만 도와줄게.”
“우리? 아니, 잠시만!”
도와줄 마음을 먹은 이재현과 달리 순간 박준석이 미간을 살짝 구기며 난감한 심정을 드러냈다.
“우리라니 난 못 해.”
“형!?”
“태경아, 네 마음 잘 알아. 막말로 나도 저 환자 살리고 싶지. 하지만 지금 잘못되면 그 손해배상은 누가 하게? 그리고 나 개원해서 타지에서 의료행위도 금지일 거 같고, 아니 단순히 환자 살리자고 하기에는 내가 지금 생각할 게 너무 많아.”
박준석은 신경외과 의사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준역의 상태가 얼마나 위중한지 잘 알고 있었다. 살리고 싶은 마음도 진심이었다.
하지만 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선 자신에게 너무 많은 리스크가 따랐다.
일반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의사로서 살다 보면 의료 소송에 휘말릴 때가 생각보다 많다.
환자가 잘못된 그런 소송 말고도 납득하기 어려운 소송도 많다.
때론 죽어 가는 환자의 목숨을 살리고서도 소송에 휘말려 어마어마한 금액을 갚아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박준석도 그랬다.
억울하고 어이가 없는 소송에 휘말렸고 사실을 바로잡고자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막상 그 당시 진짜 잘못은 다른 동료가 했지만, 소송이 터지자 다들 나 몰라라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보상금을 갚고 있었다.
그런데 또 이런 비슷한 일이 생길 수도 있는 상황이 닥치니 박준석 입장에서는 선뜻 나서고 싶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그 역시 지켜야 할 가정이 있었다.
아내가 있고 소중한 자식들이 있었기에 만약 여기서 일이 잘 못된다면 그때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아내 역시 많이 힘들어했기에 그런 일을 또 겪는다면 그땐 버틸 자신이 없었다.
“태경아, 진짜 미안하다. 내가 이런 일에 겁이 많아.”
“형?”
“내가 무슨 뒷배가 있는 사람도 아니고 쥐뿔 가진 것도 없는데 여기서 더 잃을 수도 없잖아. 난 너처럼 그렇게는 못 해. 무식하게 환자만 보고 용기 내며 달려드는 거 나는 못 해.”
“형, 수술방 들어와 놓고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그냥 하자. 의사가 이럴 때 나서야지 언제 나서겠어.”
가만히 있던 이재현이 박준석의 팔을 가볍게 치며 무거운 분위기를 바꿔 보려 했다.
“재현아, 나 장난하는 거 아니야.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