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439화 (438/472)

439화. 기꺼이 산을 넘을 각오

“재현아, 나 장난하는 거 아니야.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너 병원 몇 번 말아먹은 거랑은 차원이 달라. 이거 잘못되면 그땐 진짜 x 되는 거야.”

늘 먹는 이야기에 허허실실 웃던 박준석의 모습은 더는 없었다.

처음으로 심각한 그의 모습을 본 이재현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어렵게 수술방까지 입성했는데 두려운 박준석의 마음이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냥 보호자에게 말하고 육지로 이송하자.”

감덕찬에게 전화까지 해서 얻어낸 수술방이었다.

아무것도 해 보지 않고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신경외과인 박준석이 빠진다면 이 수술은 진행할 수가 없다.

아무리 수술을 잘하고 의학적 지식이 뛰어난 태경이라고 해도 이번 수술은 박준석의 도움이 필요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수술에 참여시켜야 했다.

박준석이 망설이는 이유를 태경은 잘 알고 있다. 게다가 그가 처한 상황에 놓인다면 누구라도 환자부터 생각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태경이야 워낙 환자 일에 유별날 정도로 오지랖이 있는 사람이라 그렇지, 사실 다른 의사였어도 박준석과 같이 말했을 것이다.

안 그래도 바닥인데 여기서 더 잘못되면 어떡할까 싶은 복잡한 걱정이 머릿속에 가득할 것이다.

박준석의 표정은 여전히 수술방을 나갔으면 하는 눈치였다.

이대로 그가 수술방을 나가면 끝이다. 이렇게 된 이상 태경이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였다.

박준석의 불안을 해소해 주는 것이다.

“형? 그리고 재현이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하나도 빠짐없이 잘 들어.”

“……?”

두 사람이 의아한 표정을 보이는 가운데 태경이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흔들림 없이 분명한 눈빛으로 정확하게 말했다.

“202x 년 현재 시각, 00시 00분 나, 김태경이 희락도에 있는 oo 공공의료원 수술방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의료행위의 책임이 있으며 여기 있는 다른 이는 모두 나의 지시를 받고서 행동한 것임을 확실하게 말한다.”

휴대폰 녹음 기능을 끈 태경은 박준석을 보며 말했다.

“형, 봤지? 방금 말한 거 녹음했어. 두 사람에게 메시지 보낼 테니까 걱정하지 마. 혹시라도 환자 잘못되면 법정에서 그거 사용하면 돼. 그리고 금전적인 부분이든 그 밖에 부분이든 형이 말하는 그 책임 내가 질게.”

“김태경…… 멋있는 새끼.”

“아니, 태경아!”

태경의 모습에 뭔가 감동 받은 이재현과 달리 여전히 표정 변화가 없는 박준석은 답답한 듯 말을 덧붙였다.

“네가 지금 녹음한 것도 다 좋고. 고마워. 고마운데 이게……. 말이 안 되잖아. 수술을 내가 해야 하는데 어떻게 책임을 내가 안 져.”

“내가 할게.”

“뭐?!”

“수술 내가 한다고.”

“야! 태경아 너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헛소리 아니야. 수술 내가 할 테니까 형은 그냥 옆에서 말만 해 줘. 그러면 문제가 생겼을 시 모든 책임은 나한테 있는 거 맞지?”

“너…… 너,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말이 왜 안 돼. 말 돼!”

“아니 그 말이 아니라 너! 외과의잖아.”

“에이, 형. 태경이 외과의기도 하지만 응급의학과랑 정형…….”

“넌 좀 가만히 있어 봐.”

이재현이 태경의 전문의 보드를 정확히 정정하려 하자 박준석이 그만하라면 말을 잘랐다.

“그래, 태경이 너 능력 있고 전문의 보드 많은 거 알아. 아는데……. 그래도 저건 머리야!”

“알아. 머리인 거. 그런데 형이 안 할 거잖아.”

“어?!”

“나는 이준역 씨를 살리고 싶고 형은 수술할 수 없고, 수술하려면 신경외과 의사가 필요하고 지금 우리 상황이 그래. 맞지? 수술은 내가 할게. 형은 말만 해. 그러면 간단하잖아. 더 이상 할 말 없지?”

“하! 너 진짜 미친놈인 거 알아?”

당연한 듯 태연하게 말하는 태경을 보며 박준석은 짧게 탄식하며 욕을 내뱉었다.

“어, 나 미친놈 맞아. 환자 살리고 싶은 미친놈.”

“또라이 같은 놈! 에라이! 나도 모르겠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 봐.”

환자를 향한 꺾이지 않은 태경의 마음에 결국 박준석도 백기를 들었다. 대신 그는 여전히 수술을 집도할 생각은 없었다.

“나 진짜 말만 한다. 수술은 못 해.”

“알았다니까. 수술 내가 해.”

“근데 우리 술 마셨잖아?”

두 사람이 소독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이재현이 정말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아?”

“당연히 술 마시고 진료하면 안 되는데, 아직 현행법상 정확한 규정이 없어.”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의료법 제66조에는 의료인의 면허를 1년 동안 정지시킬 수 있는 각 사항 여러 개가 있다.

그중에서 의료인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행위를 할 때라는 사항이 있는데 음주할 시 품위 손상에 해당할 수 있다.

이런 일로 환자가 의사를 고소한 경우가 있지만, 의사가 환자를 진료할 능력을 상실한 게 아니라고 판단되면 처벌받지 않았다.

반대로 환자 진료나 상황 판단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음주를 할 시에는 처벌받는다.

그럼, 환자를 진료할 수 있을 정도로 술을 마시면 괜찮다는 것인가라고 물으면 당연히 아니다.

환자를 진료할 시 술을 마시면 안 된다. 그건 의료인의 기본이다.

다만, 지금 태경과 친구들은 상황이 달랐다.

병원에서 가운을 입고 의사로서 일을 하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휴가를 와서 친구들과 가볍게 한잔한 것이다.

누구 하나 취한 사람도 없었고 환자를 진료할 수 있는 인지 능력에도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태경은 조금 전, 김한솔에게 남편의 상황을 설명하며 자신이 술 한 잔을 마셨다는 사실도 보호자에게 명확히 전달했다.

‘선생님 술 마신 거, 저도 알아요. 그 술병 제가 갖다 드렸잖아요. 그런데 취하지 않으셨고 진료 보는 데 지장 없으시다면 세 분께서 준역 씨 맡아 주세요.’

김한솔은 태경과 친구들이 전혀 술에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본인이 판단하며 남편을 진료하는 행위에 문제 삼지 않았다.

“보호자에게도 말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하여간! 그건 또 언제 말했대. 김태경 지독한 놈이라니까.”

“시간 없어. 얼른 가우닝 하자.”

“태경아,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볼게.”

박준석이 수술방 안으로 막 들어가려는 태경을 불러 세웠다.

“이게 정말 맞는 거냐?”

“이준역 씨, 육지까지 이송되면 식물인간 될 가능성 높다고 했지?”

“그렇지.”

“형, 아까 아침에 잃어버렸던 아빠 만나고 좋아하던 지상이 얼굴 기억나지?”

“어? 어.”

“그 얼굴 기억하면 이게 맞아. 얼른 들어가자.”

세 사람은 드디어 수술방에 들어왔다.

인턴 시절 빼고는 수술방에 들어온 기억이 없는 이재현, 마음이 완전히 편하지 않은 박준석과 달리 태경은 달랐다.

이 중에서 유일하게 침착했다.

사실 태경이라고 걱정이 하나도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런 걱정보다는 사람의 목숨이 우선시 될 뿐이었다.

“태경아. 잠깐만!”

“어, 형. 왜?”

“우선 너랑 내가 가우닝해서 환자 머리 소독하고 나는 밖에서 시킨 거 할게.”

“형, 전신마취 기계 돌릴 줄 알아? 우리 마취의도 없어.”

그랬다. 수술하려면 마취의가 있어야 하는데 병원에는 마취의가 없었다.

“내가 마취 기계를 어떻게 알아. 태경이 너 수술 밥 먹듯이 하잖아. 네가 나보다 잘 아는 거 아니야?”

“나도 마취의는 아니니까.”

우리병원에서 마취는 의진과 이동훈의 영역이기에 태경도 그들만큼 알지는 못했다.

“그럼, 마취의도 없는데 어떻게 하냐?”

진짜 산 넘어서 산이었다.

큰 산을 간신히 하나 넘었는데 또 다른 산이 가로막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산이 몇 개든 태경은 기꺼이 산을 넘을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수면으로 깊게 재우자.”

“뭐? 수면으로?”

“응. 그리고 마약을 때려 박아야지.”

“그래도 돼?”

“어차피 수면 마취약 사용할 건데 호흡억제는 기관 삽관을 지금 하면 되고 진통은 혹시, 여기 덱스메데토미딘(dexmedetomidine, 수면마취제) 있나요?”

“아, 네. 있어요.”

태경이 수술방에 함께한 간호사에게 묻자 그녀가 힘차게 답했다.

“그게 뭐야?”

“형 알지 않아?”

박준석이 묻자 이준역 머리에다 포비돈을 쏟아부으며 태경이 말했다.

“야, 난 수술 안 하잖아.”

“요즘 유행하는 수면마취제야. 프로xx에 비해서 호흡 억제도 없고 진통 효과도 있어서 둘을 섞어서 사용하면 부작용이 적다는 결과가 나와서 요새 많이들 섞어서 사용해.”

“그래? 예전에는 마약하고 포폴이 공식이었잖아.”

“예전에는 그랬지.”

“어! 잠깐. 태경아, 잠시만!”

별안간 박준석이 소독하던 태경을 비키라고 손짓했다. 그러더니 면도기를 갖고 와서 환자의 머리카락을 빠르게 밀어냈다.

“됐다. 이제 소독 다시 해.”

“땡큐.”

다들 머리가 복잡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의사였다.

처음 접한 상황에 당황하던 이재현과 수술방에 들어오는 것조차 꺼리던 박준석도 수술 가운을 걸치고 수술이 시작되니 환자만 보였다.

어쩔 수 없는 직업병들이었다.

“근데, 덱스 뭐시기 저거 부작용은 없어?”

“간단한 약 먹고 부작용 겪는 사람도 있는데 세상에 부작용 없는 약이 어디 있어.”

“우문현답이다. 네 말이 맞네. 부작용이 심한가 해서 물어봤지.”

“그렇지는 않아. 부작용이 있는데 가벼운 브라디카디아(bradycardia, 서맥, 심장 박동 수가 낮아지는 증상)라서 괜찮아. 어! 재현아. 거기 닿으면 안 돼. 조심해.”

설명하던 태경이 이재현에게 소리를 높였다.

“미안. 조심할게.”

“쯧쯧! 수술방에 들어가 봤어야 알지. 조심해 인마!”

“형은 수술방에서 그렇게 잘해서 소송 당했수?”

“저, 새끼 말하…….”

“둘 다, 그만해.”

태경이 두 사람을 말리며 소리쳤다.

“지금 수술 중이잖아.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집중해.”

“그래, 우리 집중하자.”

“어. 알았어.”

“재현아 나 그거 있잖아. 내가 뒤에 갖다 놓은 거…….”

“형, 이거?”

이재현이 박준석의 손가락을 따라가자 드릴 같은 철로 된 수술 도구가 멸균 포장지에 싸여 있었다.

드릴처럼 돌리는 손잡이가 있고 끝에는 동그란 것이 달려 있었는데, 동그란 부분에는 무언가를 갈 수 있게 홈이 수도 없이 많았다.

“어! 그거. 맞아. 그거 잘 뜯어 봐. 멸균 깨지지 않게 그렇지. 잘한다.”

이재현이 조심스럽게 포장지를 뜯자 길이 40cm 무게 4~5kg 정도 되는 도구가 박준석 손에 놓여졌다.

그는 멸균된 테이블 위에 도구를 놓고 태경에게 갔다.

“메스!”

메스를 건네받은 태경이 환자의 수술 부위를 메스로 깊게 절개해서 바로 뼈가 나오도록 했다.

이후 손에 잡히는 아무거나 잡고서 뼈막과 피부 사이를 긁어 박리했다.

아무거나라는 말이 맞는 것이 태경도 머리 수술은 처음이라 어떤 기구가 어디에 쓰이는지 정확히는 몰랐다.

하지만 어떤 때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기에 거기에 필요하고 비슷한 모양의 기구를 갖다가 쓰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센스 있는 수술방 간호사가 머리 수술에 필요한 모든 기구를 멸균 테이블 위에 놓았다는 거였다.

“형, 이제 여기다가 저 드릴로 구멍 내면 되는 거지?”

“어? 어. 뭐 그렇겠지?”

“이 양반아, 대답 똑바로 해.”

“그렇겠지라니. 무슨 답이 그래.”

이재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태경이 연이어 말했다.

“형 몰라?”

“어, 나 몰라…….”

예상 못 한 답변에 태경은 아주 잠시 말문이 막힐 뻔했다.

“모르다니? 형이 그걸 왜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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