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4화. 365일 24시간
그 말에 순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모든 사람들이 걸어가던 걸음을 멈췄다.
“나선형 계단이라고요?”
“네, 선생님.”
“예전에 부지 주인이 공원 컨셉으로 펜션을 하려다가 중단된 곳이라서 구조가 좀 독특해요.”
오심보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은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일단 계속 걸어가죠.”
태경의 말에 사람들은 멈췄던 발을 다시 움직였다.
다들 머릿속에 가파른 나선형의 계단을 내려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특히 태경은 더 생각이 많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환자를 헬기 착륙 장소까지 직접 옮기자고 한 사람도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베드 위에 누워 있는 이준역의 몸은 밴드로 고정된 상태였기에 이동하는 데 큰 무리는 없었다.
하지만 이건 평지로 이동하는 지금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평지가 아닌 내리막길 계단에서도 잘 지탱하고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아마 내리막길 계단을 따라 몸이 아래로 쏠릴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준역뿐만이 아니라 기계가 실려 있는 베드도 마찬가지였다.
자칫 발을 헛디뎌 기계가 땅에 떨어진다거나 내리막길 계단 높이 때문에 기계가 움직여 떨어진다면 그것도 문제였다.
더군다나 지금은 낮이 아닌 심야 시간이었다.
어두운 곳에서 조금 전에 머리 수술을 마친 환자를 계단으로 옮기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이동하는 구간에 장애물 등이 있는지 물어볼 걸 하는 소용없는 후회가 들기도 했다.
‘하! 뭔가 방법이 없을까?’
이 와중에도 랜턴으로 길 앞을 정확하게 비추며 이동을 멈추지 않은 채 태경은 생각했다.
“태경아, 어떡해?”
곰곰이 생각하던 박준석은 도저히 자기 머리로 답이 나오지 않자 답답한 듯 물었다.
그 물음에 어둠 속 여덟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태경에게 쏠렸다.
누구 하나 입 밖으로 말한 적 없었지만, 사람들은 이미 태경을 리더처럼 따르고 있었다.
이제 계단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일단…….”
아직 답을 찾지 못한 태경이 어렵게 입을 열던 바로 그때였다.
“김태경 선생님이십니까?”
강한 랜턴 불빛과 함께 태경의 이름을 부르며 씩씩한 목소리가 맞은편에서 들려왔다.
“네, 맞습니다.”
태경을 필두로 사람들의 걸음이 자연스레 멈추고 곧이어 목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둘러 계단을 올라온 그들은 육지에서 온 구급대원들이었다.
조금 전, 헬기가 착륙하고 헬기에서 내린 대원 두 명이 계단 위로 올라온 것이다.
365일 24시간, 생명을 살리기 위해 대기하는 그들이었기에 가파른 계단 하나만 보고도 필요한 장비를 챙겨 왔다.
“저희가 조금 일찍 도착해서 도와드리려고 올라왔습니다.”
“와! 타이밍 미쳤다.”
구급대원을 본 이재현은 격한 표현을 내뱉었고, 태경과 나머지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해야 할 일을 한 건데 감사는요. 늦지 않게 도착해서 다행이네요.”
그 뒤, 이준역은 구급대원들이 들고 온 이동이 용이한 좀 더 안전한 베드로 옮겨졌다.
태경 일행은 대원들을 도와 걱정하던 계단을 잘 내려갔고, 이준역과 김한솔은 무사히 헬기에 탑승했다.
“김태경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나머지 모든 선생님도 정말 감사해요.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별말씀을요. 이준역 환자 잘 쾌차할 겁니다.”
“보호자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태경과 박준석, 이재현은 돌아가며 한마디씩 했다.
곧이어 수술방에 있던 간호사까지 위로의 말을 건네자 뒤에서 머뭇거리던 오심보가 앞으로 나왔다.
“저기, 아까 병원에서 미안했어요. 보호자분이 한 말 듣고 생각해 봤는데 내가 잘한 게 하나도 없더라고요. 정말 미안해요.”
“아니에요. 저도 감정이 격해져서 말이 앞섰어요.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병원비는 제가 뭍에서 돌아오는 대로 바로 지불할게요.”
“제가 원장님께 잘 말씀드릴 테니까 그런 건 신경 쓰지 마세요.”
“이제 이륙해야 하니까 헬기에서 떨어져 주세요.”
“다들 정말 감사합니다.”
조종사의 말과 함께 김한솔은 인사를 마무리하며 마지막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사람들은 헬기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프로펠러가 힘차게 돌아가고 거센 바람과 함께 먼지를 일으키며 헬기가 하늘 위로 떠올랐다.
“그래도 헬기까지 옮기고 잘됐네. 그렇지?”
“그럼.”
이재현과 박준석은 서로 뿌듯한 얼굴을 보이며 어깨를 토닥였다.
“다들 수고 많으셨어요.”
“선생님들이 더 고생하셨죠.”
무사히 이송을 마친 태경은 사람들을 격려하며 함께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 * *
OO 대학병원 근처 아파트-
남들은 꿈나라에 들어갔을 늦은 시간 중년 여자가 거실 소파와 한 몸이 된 채 TV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뭐야? 당신이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설마 당신 저 여자랑 잠자…….
“잠자리한 거 아니지?”
“뭐 하는 거야?”
주방에 있던 남편이 TV에서 나오는 드라마 대사를 스포하며 먼저 말하자 아내가 짜증 섞인 눈초리로 째려봤다.
“당신 궁금할까 봐 내가 미리 말해 준 거지.”
지방 대학병원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 두 사람은 동갑내기 부부로 친구같이 티격태격하며 잘 지내고 있었다.
남편 신경해는 후배들에게 괴팍하고 거친 입의 소유자지만, 실력 좋은 신경외과 의사다.
아내 김미숙은 마음이 다치고 도움이 필요한 환자들은 치료하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 재직 중이다.
아내는 중요한 학회 일정을 마치고 모처럼 밀린 드라마를 시청하려는데 짓궂은 남편이 자꾸 옆에서 지방방송을 시전하고 있었다.
“나, 이거 아직 안 봤거든? 부탁이니까 그만해라.”
“그거 재미없다니까. 그러지 말고 나랑 와인 한잔하면서 영화나 보자. 이번에 넷폴릭스에서 공개한 영화인데 사람들 반응이 장난 아니야.”
“난 이건 볼 거니까 당신 혼자 보세요.”
“정말 같이 안 봐?”
“…….”
“미숙 씨? 김미숙?”
아내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드라마에 집중하자 남편은 일부러 더 장난쳤다.
“아으! 좀. 그만하라고. 안 들리잖아.”
“안 들리면 볼륨 좀 올리든가. 애들도 집에 없는데 소리 켜도 상관없잖아.”
“당신만 조용하면 되거든. 마지막으로 말한다. 조용해.”
“오케이. 조용할게.”
약속했던 것과 달리 남편의 조용함을 10분을 채 넘기지 못했다.
탁- 타탁- 탁- 탁-
뭘 그렇게 찾는지 자꾸 주방에서 왔다 갔다 하며 작은 소음이 끊이지 않았다.
“아니, 남들 다 꿈나라 가 있는 시간에 주방에서 뭐 하는 거야?”
아내가 시간 좀 보라고 시계를 손짓하며 말을 이었다.
“설마 당신 뭐 먹으려는 거 아니지?”
“와인 마실 거라니까.”
“와인이랑 글라스 식탁 위에 있는데 왜 자꾸 선반이며 수납장을 다 열어 보는데?”
“어! 없네? 이게 어디 있으려나…….”
“여보슈? 신경해 씨?”
“왜요? 김미숙 씨.”
“뭐하냐고.”
“뭐 찾고 있어.”
“그러니까 뭘.”
“그게 있잖아……. 그러니까 말이야.”
뭘 찾고 있는 건지 신경해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여보, 나 숨넘어간다. 성격 급한 사람이 왜 말을 못 하고 저런대.”
“컵라면.”
“뭐!”
“내가 꼬불쳐 놓은 컵라면 분명히 여기 서랍장 깊숙이 숨겨 놓았는데 안 보이잖아.”
“……!”
다이어트하는 사람이 이 시간에 라면을 찾고 있다고 말하자 김미숙은 어이가 없었다.
“죽을래? 당신, 다이어트 중이거든. 근데 무슨 라면이야. 그냥 와인이나 마셔.”
“그래서 5킬로나 뺐잖아. 나, 라면 너무 먹고 싶어서 이틀 동안 라면 안에서 헤엄치는 꿈을 다 꿨다.”
라면 광인 그는 다이어트로 인해 2달 동안 라면 국물도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다. 하지만, 모처럼 내일 쉬는 날이고 좋아하는 영화를 보면서 와인 한잔에 라면을 안주 삼아 먹고 싶은 욕구를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
“5킬로 더 빼기 전까지는 절대로 안 돼.”
“당신 가끔 보면 정말 지독한 사람이야.”
“나도 알아. 원래 지독한 사람들이 성공하는 거야. 나 지독해서 교수 됐잖아.”
“하여간 말로는 못 당하지.”
“내일 국물 끝내주게 라면 끓여 줄 테니까 오늘만 참아.”
“정말? 정말 라면 끓여 줄 거야?”
“응. 곤약 라면으로.”
“야! 됐어. 안 먹어. 장난하나. 아! 맞다. 여보?”
와인과 글라스를 들고 서재로 들어가려던 신경해는 별안간 뒷걸음으로 나오며 아내를 불렀다.
“왜요?”
“그 환자 어떻게 됐어?”
“그 환자라니 누구 말하는 거야?”
“그 왜, 손자가 귀신 들렸다고 하면서 폐쇄 병동에 온 환자 있었잖아.”
“아…….”
환자 이야기가 나오자 김미숙은 그렇게 보고 싶고 집중해서 보던 드라마에서 시선을 떼고 볼륨을 줄였다.
“그 환자.”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된 어린 환자가 있었다.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환자는 할머니의 신고로 병원, 폐쇄 병동에 입원해 있는 상태였다.
손자는 매일 환상과 환청에 시달리며 알 수 없는 말과 행동을 보였다.
하나뿐인 귀한 손자가 이상행동을 보이자 할머니는 귀신이 들렸다며 온갖 토속 신앙으로 손자를 고치려 했다.
결국 별 방법을 다 동원해도 손자 증세가 심해지자 주변 사람들 말대로 119에 신고했고 폐쇄 병동까지 오게 된 것이다.
손자 본인조차도 스스로 귀신이 들린 건가 싶은 생각과 괴로움에 몸부림쳤지만, 반전이 있었다.
귀신이 들린 게 아니라 손자는 아팠던 것이다.
“말을 왜 하다 말아. 그 환자 어떻게 됐냐니까.”
“스키조프레니아더라고.”
그 손자의 병명은 이제는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스키조프레니아(Schizophrenia, 조현병)였다.
다행히 손주는 상담, 약물치료 등을 통해 증상이 많이 좋아지고 있었다.
“예상대로네. 나이도 어린 친구가 고생 많았겠다.”
“고생 많았지. 그런데 본인 때문에 할머니가 고생했다고 하면서 오히려 할머니 걱정만 하더라고. 마음도 착해. 착해서 더 짠하고. 내 생각에는 지금 상태만 유지하면 빠르게 퇴원할 거 같아.”
“그래도 호전되고 있다니 다행이네.”
“응. 다행이지. 아으! 당신 때문에 중요한 장면 놓쳤잖아. 이제 말 걸지 마. 당신은 내가 꼭 집중할 때 말 시키더라.”
“다시 돌려서 봐. 난 영화 보러 간다. 정말 같이 안 볼 거지?”
“제발 좀 들어가.”
신경해는 아내의 핀잔을 뒤로하고 서재로 들어와 PC 전원을 켰다.
“영화를 보자. 내일은 오후 출근에 수술도 없고 간만에 영화 한 편 때리자. 좋구나~ 기분이 좋구나아~”
늘 수술에 신경 쓸 것도 많고 복잡한 내 머릿속은 볼 수도 없는데 남의 머릿속만 들여다보는 고된 일상이었다.
그런 일상에 내려진 단비 같은 휴식이 너무나 기뻤던 신경해는 노래인지 말인지 구별이 안 되는 요상한 소리를 내며 OTT 사이트로 접속했다.
“라면이 없는 건 아쉽지만, 이 정도도 어디냐. 파라다이스가 따로 없네.”
신경해는 보고 싶은 영화를 클릭하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선물 받은 고급 와인을 따른 글라스 밑 잔을 뱅글뱅글 돌리다 입에 막 갖다 대려던 바로 그때였다.
벌컥-
격하게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아내가 눈썹을 들썩이며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