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445화 (444/472)

445화. 아는 분 누구?

벌컥-

격하게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아내가 눈썹을 들썩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탁-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서재를 들어온 아내는 신경해가 들고 있는 와인 잔을 뺏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당신, 와인 마셨어?”

“아니, 아직. 이제 막 마시려고 했는데 당신이 들어와서 못 마셨어. 와인 잔 이리 내.”

“시끄럽고 아 해 봐.”

“왜 이래? 라면 꼬불쳐 놓은 거 없어. 아~”

남편 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아내가 신경해의 입을 강제로 벌려 냄새를 맡았다.

“안 마셨네.”

“이 여자가 진짜! 뭔데 그래.”

“옷 입어. 병원 가야 해. 당신 콜 왔어.”

김미숙은 거실에 두고 갔던 신경해의 핸드폰을 흔들며 말했다.

“응급 콜이라고? 하! 시X!”

콜이란 말에 신경해 입에서 욕설이 절로 튀어나왔다.

병원에서 100미터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기에 그는 응급 콜로 불려 나가는 날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와인 한 잔에 영화를 볼 수 있는 소확행을 이렇게 날려 보내다니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랄스럽다. 지랄스러워.”

“또! 또! 입 거칠어진다. 말 좀 예쁘게. 어!”

“안 가면 안 될까?”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한다. SDH(subdural hematoma, 경막하혈종)래. 얼른 가 봐.”

“SDH면 가서 바로 수술이네? 그냥 확! 와인 마셔 버릴걸.”

“시답지 않은 소리 그만하고 얼른 옷 입고 나오셔.”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당신처럼 정신과로 갈 걸.”

“아니야. 당신 못 왔을 거야. 빨리 준비해.”

“뭐, 좋다고 이름이 운명이네 주접을 떨며 신경외과로 갔는지 원…….”

행복한 시간을 뺏긴 신경해는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리며 안방으로 들어가 옷을 입고 나왔다.

“진짜 가기 싫은데, 후배보고 하라고 할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그래. 의사 되겠다고 머리 싸매고 공부한 내 탓이지 이럴 거 뻔히 알고 들어갔는데 누굴 탓해.”

“말 길어지는 거 보니까 정말 가기 싫구나?”

“싫어.”

“그래도 환자 살리는 일이잖아.”

아내는 남편의 핸드폰을 챙겨 주며 응원했다.

“그건 맞지. 배운 거 낭비하면 안 되지. 갈게.”

“여보?”

“왜?”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려는 신경해를 김미숙이 급히 부르며 따라갔다.

“당신 설마, 그거 잠옷 바지 아니지?”

“어라! 그러네.”

가기 싫다고 노래를 불러도 막상 마음이 급했던 신경해는 짙은 잠옷 바지를 외출 바지랑 착각하고 입었다.

어쩔 수 없이 그도 의사였다.

“이런 젠장!”

빠르게 바지를 갈아입고 나온 신경해가 신발을 신었다.

“태워다 줄까?”

“됐어. 드라마나 보고 있어. 간다.”

“살려!”

“당연하지.”

신경해는 언제나 그랬듯 아내와 함께 살리라는 인사를 주고받으며 병원으로 향했다.

* * *

“야! 환자는?”

병원에 도착해 근무복으로 갈아입은 신경해가 소리를 높이며 응급실로 내려왔다.

“교수님 나오셨습니까?”

신경해를 보자 폘로우가 냅다 인사하며 다가왔다.

“그럼 나왔지 들어가겠어?”

“아닙니다.”

신경해를 옆에서 꽤 봐온 펠로우는 이제 이런 거친 모습에 면역이 생겨서인지 어느 정도 괜찮았다.

하지만 오늘같이 쉬는 날 불려 나오는 날이면 평소보다 더욱 지랄하기 때문에 더 각별히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급하다며 환자는 어디 있어?”

“지금 헬기로 오고 있습니다.”

“뭐! 헬기?”

“네, 희락도에서 운전하다가 야생동물이랑 충돌해서 외상을 입었다고 들었습니다.”

“멧돼지랑 부딪혔구먼.”

희락도뿐만 아니라 인근에 섬마을이 몇 개 있기에 가끔 이런 사고가 있었다.

물론 야생동물과 충돌 후 SDH로 온 환자는 흔한 게 아니었지만, 별별 일이 다 있는 병원이라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환자 응급처치가 잘된 상태라고 했는데 수술한 거 아닐까요?”

“야, 장난하냐? SDH라면서?”

“네, 교수님.”

“희락도뿐만 아니라 인근 섬에서 그 정도 수술할 인력 없어. 응급처치라고 해도 딱히 뭘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닐 거야. 그리고 SDH가 응급처치가 어디 있어. 바로 머리 열고 수술하는 게 응급처치인데. 근데 시간 얼마나 된 거야?”

사고 후 골든 타임이 지나면 환자 뇌가 눌리게 될 텐데 신경해는 그게 걱정이었다.

“그나저나 수술방에 연락했어?”

“네, 교수님. 다 연락했습니다.”

“교수님, 환자 도착했습니다.”

그때 환자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의료진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구급대원들과 함께 이준역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김한솔의 모습도 보였다.

“CT 찍은 거 바로 열어 보고 일단 환자부터 수술실로 옮겨.”

신경해는 이준역을 보자마자 OO 의료원에서 찍어온 CT 사진을 보고 바로 수술실로 옮기려 했다.

“선생님, 이 환자 수술했습니다.”

환자 상태를 빠르게 전달한 구급대원이 마지막으로 이준역의 수술 소식을 전했다.

“네?”

그 말을 듣자마자 이준역의 머리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응급수술에 마음이 급했던 신경해는 그제야 환자 머리에 수술한 흔적이 눈에 확 들어왔다.

“아니. 이게…….”

정말이지 SDH를 수술한 흔적이 분명했다.

분명 환자는 희락도에서 왔고 수술할 인력이 없을 텐데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이준역의 수술 소식을 듣지 못한 그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안녕하세요. 환자 보호자 아내 되는 사람이에요.”

구급대원들이 인사와 함께 퇴장하고 김한솔이 신경해에게 다가왔다.

“선생님, 우리 남편 수술한 거 맞아요.”

“OO 의료원에 수술한 인력이 없는 걸로 아는데요.”

“네, 그 병원 선생님이 하신 게 아니라 다른 선생님께서 해 주셨어요. 그리고 이거…….”

김한솔은 자신의 휴대폰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걸 왜?”

“아! 잠시만요.”

의아해하는 신경해 표정을 보며 김한솔이 톡에 있는 파일을 클릭했다.

-이준역 환자를 수술한 김태경이라고 합니다.

핸드폰 안에서는 차분한 목소리로 녹음된 태경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환자의 사고 추정 시간은 00시이며 OO 의료원으로 이송 후 CT를 촬영했습니다. 촬영 후 환자의 증상을 확인했습니다.

처음에는 육지로 이송하려 했으나, 환자의 골든 타임을 생각해 응급 수술을 진행하였습니다. 수술 시작 시간은 OO시고 수술은…….

이준역이 헬기에 실려 인근 대학병원으로 이송되고 있을 당시, 태경은 병원으로 돌아가며 위의 내용을 전부 녹음했다.

수술은 어떻게 진행됐고 어떤 약물을 사용했는지 등 수술에 관해 하나부터 열까지 빼지 않고 녹음한 후 김한솔에게 전달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신경외과 전문의가 한 수술이 아니었고, 환자 상태를 정확히 전달하면 담당 의사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여유가 있었다면 병원에서 전원 갈 때처럼 환자 정보를 준비했겠지만, 워낙 급박한 상황이라 녹음으로 대체했다.

“고 선생?”

녹음 파일을 전부 들은 신경해는 이준역을 다시 한번 유심히 보더니 펠로우에게 말했다.

“이 환자 빨리 중환자실로 옮겨.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보고하고.”

“수술은…….”

“봐! 수술한 상태잖아. 수술할 필요 없으니까 수술실 잡은 거 취소하고.”

“네, 교수님. 알겠습니다.”

펠로우가 이준역 환자를 중환자실로 옮기고 신경해는 김한솔과 대화를 나눴다.

“방금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환자분은 현재 따로 수술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환자실을 통해 경과 지켜보고 괜찮으면 며칠 이내로 깨어날 겁니다.”

“그래요? 감사합니다.”

“그 인사를 받기에는 제가 한 게 없는데요? 이준역 환자는 수술한 선생님들 덕분에 산 거지 저 때문에 산 게 아닙니다. 그분들이 살렸어요.”

그 말은 들은 김한솔은 태경과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면회 일정과 궁금하신 사항은 기다리시면 담당자가 안내 도와드릴 겁니다.”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앞으로 우리 남편 잘 부탁드려요.”

“그럼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 저기?”

걸어가려던 신경해는 다시 고개를 돌려 김한솔에게 물었다.

“환자 수술한 선생님이 신경외과가 아니라고 하셨죠?”

“네, 일반외과 선생님이라고 하셨어요.”

“그렇군요. 그럼 또 뵙겠습니다.”

신경해는 복도를 걸어가며 생각했다.

“GS(일반외과) 전공자가 SDH를 수술했다고? 보통이 아닌데……. 도대체 그 또라이는 누구야?”

신경외과 환자를 신경외과 전문의도 아닌 의사가 살렸다는 점이 놀라고 신기했다.

어떤 마음을 먹으면 일반외과 의사가 수술할 생각까지 했는지 신경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김태 뭐라고 한 거 같은데 이름이라도 기억할 걸 그랬나? 하여간 대단한 사람이네.”

중환자실로 향하는 신경해는 아까 들었던 이름을 기억하려고 했지만, 좀처럼 기억나질 않았다.

“하!”

그러면서 집에서 그렇게 투덜대며 억지로 나왔던 스스로가 민망해 헛웃음이 나왔다.

“별 희한한 의사 때문에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내가 반성하게 되네.”

* * *

다음 날-

아침 일찍, 김한솔에게 연락받은 시부모님이 아들이 있는 병원으로 가기 전 세 사람의 아침밥을 손수 지어 숙소로 전달했다.

‘사장님, 이거 의사 선생님들 깨어나면 꼭 좀 전해 주세요.’

손자에 이어 아들까지 살려 준 은인 같은 사람들을 이대로 보낼 수 없었기에 정신없는 와중에도 이준역의 모친은 아침상을 차려 전달했다.

어머니의 손맛이 느껴지는 정성 가득한 밥을 먹은 세 사람은 OO 의료원에 들렀다.

도움을 줬던 원장과 의료진에게 감사와 죄송하다는 말을 전한 뒤. 이준역이 입원한 병원으로 향했다.

비록 중환자실에 있는 이준역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가족들과 인사하며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수술도 잘된 상태고 이준역의 상태도 좋아 별문제 없이 깨어날 거란 말을 들었다.

세 사람은 내 일처럼 기뻐하며 병원을 나와 터미널에서 서울행 버스를 탔다.

“이번 휴가는 뭔가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날이 될 거 같아.”

“나는 아직도 수술 장면이 눈에 선한 게 잊히지 않는다니까.”

창밖을 보던 박재현이 말하자 이재현이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을 이었다.

“뭔가 여기에 뜨거운 뭉클함이 그때 확 올라오더라. 내가 한 번도 전문의 자격증 안 딴 거 후회한 적 없는데 나도 딸 걸 그랬나 싶더라고.”

“지금도 안 늦었어. 미국에는 52살에 전문의 취득한 사람도 있는데 해 봐.”

“됐네요. 아! 맞다. 태경아?”

“어.”

“너 근데 그날 저녁에 누구한테 전화한 거야?”

“그래. 나도 물어본다는 게 정신없어서 이제 생각났다.”

이재현과 박준석은 도대체 어떤 사람에게 전화했기에 야밤에 섬까지 헬기가 왔는지 궁금했다.

“그냥 아는 분에게 부탁 좀 했어.”

“아는 분 누구?”

“있어.”

“아, 누군데 그래.”

“그러게. 형? 태경이 이 자식이 이러는 거 처음 보네. 어차피 이름 말해도 우리 몰라. 안 그래 형?”

“그럼. 얼른 말해 봐. 뭐, 소방청에 있는 그런 분이야?”

“아니.”

“그럼, 누군데?”

“아니, 도대체 누구길래 이렇게 꽁꽁 숨겨. 얼른 말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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