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446화 (445/472)

446화. 마지막 일정

“아니, 도대체 누구길래 이렇게 꽁꽁 숨겨. 얼른 말해 봐.”

“감덕찬.”

“감덕……푸핫!”

이름을 되뇌며 물을 마시던 박준석은 순간 깜짝 놀라며 가운데 자리에 앉은 이재현 얼굴에 물을 뿌렸다.

“형, 미쳤어! 왜 이래?”

“재현아, 미안. 일부러 그런 거 절대 아니다.”

“아! 더러워.”

“아 양치해서 깨끗해. 아니, 감덕찬 이름 때문에 놀라서 저절로 물이 튀어나왔다니까.”

“감덕찬? 그 사람이 누군데 그래?”

감덕찬이고 나발이고 이재현은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기 바빴다.

“뭐? 너 감덕찬 몰라?”

“몰라. 알아야 해.”

“넌, 뉴스도 안 보냐?”

“보는데?”

“됐고. 태경아, 너 설마 감덕찬이 국회의원 그 감덕찬 말하는 건 아니지?”

“맞아.”

“구, 국회의원?”

“그래. 감덕찬이면 그 사람 차기 대권후보로 거론되는 인물이잖아.”

“뭐야! 진짜였어?”

국회의원이란 말에 재빨리 핸드폰을 검색해 보던 이재현은 박준석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고 상당히 놀랐다.

“김태경, 너 미쳤다.”

“이런 거물이랑 어떻게 친한 사이가 된 거야?”

“친한 거까지는 아니고 그냥 인사만 드리는 사이인데 워낙 급해서 내가 부탁했는데 들어주셨어.”

“이러다 우리 태경이 나중에 큰 자리 하나 맡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거 아니야?”

“형, 그런 거 아니라니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마.”

“태경아, 너희 병원에 의사 자리 하나 안 남아? 나 월급 많이 안 줘도 되는데…….”

“난 비서 자리. 내가 태경이 너 비서 역할 제대로 해 줄게. 어때?”

“아! 왜들 이래.”

“우리 김 원장님 터미널에서 내려서 어떻게 해장국 한 그릇 하고 들어가시죠.”

“그래요. 원장님 우리가 모실게요.”

“사양할게.”

박준석과 이재현은 터미널에 도착할 때까지 태경에게 원장님 소리를 놓지 않았다.

“형 잘 먹었어.”

“나도.”

터미널에 도착한 세 사람은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섬으로 간다고 이거저거 알아보느라 재현이 수고했고, 태경이는 사람 살리느라고 고생했다.”

“누가 들으면 환자 나 혼자 살린 줄 알겠네. 두 사람도 같이 살린 거야.”

“아무튼 이번 휴가는 의미 있게 잘 보낸 거 같다.”

“그러게. 나도 의사로서 남은 내 인생을 다시 생각해 보고 좋았던 거 같아.”

“야. 태경아. 재현이 이 새끼 말하는 거 보니까 조만간, 레지던트로 들어가는 거 아니냐?”

“그러게.”

“그건 아니라고 아까도 말했잖아. 그리고 난 형이랑 태경이 처럼은 절대 못 해.”

“재현아, 이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다. 우리 마지막으로 사진이나 한번 찍고 가자.”

“저 형 또 사진 타령이다. 태경아. 나 먼저 간다.”

“형, 나도 가 볼게요.”

“야, 재현아. 태경아.”

사진을 찍으려고 박준석을 뒤로한 채 태경과 이재현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희락도에서 사람을 살렸던 세 사람에게 이번 휴가는 잇지 못할 기억으로 남게 됐다.

* * *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헤어진 태경은 집으로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병원으로 가지도 않았다.

물론 아무 일정이 없었다면 병원으로 갈 수도 있었겠지만, 오늘은 일정이 있었다.

다른 날 갈까도 했지만, 이곳을 가기 위해 며칠 전에 신청해 둔 상태였기에 갑자기 일정을 취소하고 싶지 않았다.

내일부터는 다시 출근이고 시간이 난 김에 꼭 들려야 했던 곳이기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향했다.

“기사님, 저 앞에서 세워 주세요.”

“얼굴 선하게 생기신 분이 어떻게 이런 무서운 곳에 오셨대요.”

“저도 제가 여길 올 줄은 몰랐습니다.”

뒤를 돌아 얼굴을 쓱 보는 기사에게 태경은 카드를 내밀었다.

“영수증은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사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탁-

택시에서 내린, 태경은 정문에 걸린 나무 현판을 쳐다봤다.

현판 위에는 밝은 갈색 나무 위에 검은색 궁서체로 ‘연손 교도소’라고 굵게 쓰여 있었다.

태경이 마지막 휴가 날 찾은 곳은 교도소로, 유혁진을 만나러 온 것이다.

일전에 억울하게 죽었던 여동생의 복수를 위해 우리병원에 왔던 인연을 맺은 죄수로, 그의 면회를 왔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 유혁진에게 편지로 안부를 전해 듣기는 했지만, 잘 지내는지 궁금했기에 직접 오게 됐다.

“수고하십니다. 면회하러 왔는데요?”

“신청하셨나요?”

“며칠 전에 신청했습니다.”

담당자에게 신분증을 건네고 확인 절차를 거친 후, 태경은 면회 장소로 이동했다.

“여기 앉아계시면 곧 나올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태경은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만 보던 면회 장소에 앉아 있으니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철컥-

의자에 앉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곧이어 철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원장님!”

“잘 지냈어요?”

칙칙한 색상의 죄수복을 입고 있었지만, 유혁진의 얼굴은 죄수복과 달리 밝았다.

“그럼요.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설마, 저 만나려고 오신 겁니까?”

“아니요. 근처 지나갔다가 그냥 얼굴이나 한번 보고 갈까 싶어서 들렀습니다.”

“그래요? 전, 또 저 때문에 오셨으면 어쩌나 했잖아요.”

말은 저렇게 했지만, 사실 유혁진은 태경이 면회 온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며칠 전, 본인 앞으로 영치금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것도 꽤 많은 금액이 들어와 놀랐는데, 보낸 사람이 태경이라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게다가 병원에 있는 동안 이미 신세를 많이 졌는데 퇴원 후에도 인연이 이어질 줄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막말로 자신은 죄수고 태경은 사회적으로 알아주는 의사라는 신분을 가진 사람인데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원장님은 잘 지내고 계세요?”

“저야 늘 똑같죠. 환자 보고 수술하고 그렇게 지내고 있어요. 저, 지금 휴가 갔다 오는 길이에요.”

“원장님이 휴가를요? 절대 병원 밖으로 안 나가실 거 같더니 휴가도 가시네요.”

“저도 사람인데 당연하죠. 그나저나 빵 만드는 일은 잘되고 있어요?”

유혁진은 편지에 자격증을 위해 제과제빵 기술을 공부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럼요. 생각보다 재미도 있고 하고 싶은 걸 하니까 공부하는 게 힘들지 않더라고요. 아! 원장님 잠시만요.”

잠시, 주변 눈치를 보던 유혁진은 바지춤에서 사진을 꺼내 투명 가림판에 갖다 대며 태경에게 보여 줬다.

사진은 그가 만든 여러 종류의 빵 사진이었다.

평소 교도소 내 규칙을 잘 지키는 그가 사진을 몸에 몰래 숨겨 온 이유가 있었다.

태경에게 약속했던 대로 열심히 잘 지내고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거 보이시죠?”

“이걸 유혁진 씨가 직접 다 만들었어요?”

“그럼요. 전부 제가 다 만든 거예요. 마음 같아서는 한 개라도 맛보게 해 드리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사진으로 갖고 왔습니다.”

“이제 보니까 손재주가 보통이 아닌데요.”

빈말이 아니었다.

사진 속에 있는 빵들은 유명 프랜차이즈 제과점 제품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보기만 좋은 게 아니라 맛도 끝내줍니다. 제가 나가면 꼭 원장님께 직접 만들어서 대접해 드릴게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제가 면회 올 사람이라고는 창규밖에 없는데 원장님께서 오신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몰래 와서 제대로 놀라게 해 주려고 했는데 실패네요.”

“저 안 그래도 요즘 자주 깜짝 놀라고 있으니까 아쉬워하지 마세요.”

“왜요? 혹시 어디 몸 안 좋아요?”

태경은 순간적으로 다섯 번째 바이탈을 느끼지 못했는데, 유혁진이 어디 아픈 건 아닌지 걱정됐다.

“원장님은 정말 천생 의사네요. 저 아픈 곳 없이 건강합니다.”

“허리도 괜찮은 거 맞죠?”

“그럼요. 그때 잘 진료해 주셔서 튼튼합니다. 실은 차태철 어머니가 면회를 왔어요.”

다시는 그 이름을 들을 일 없다고 생각한 태경은 좀 놀랐다.

차태철. 유혁진의 여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장본인으로 그는 마지막까지 사과 한마디 없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처음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유혁진은 어이가 없었지만, 나쁜 놈이 천벌을 받은 거라고 생각하며 제 인생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사과하러 온 거군요?”

“여기서 만났는데 지금 원장님이 앉아계신 그 의자 밑에서 무릎을 꿇었어요.”

사실 유혁진은 차태철 모친의 면회를 거절했었다.

한 번, 두 번 계속 거절하자 영치금을 넣었기에 만날 수밖에 없었다.

“왜? 돈을 넣었느냐고 이런 거 필요 없다 난 다 잊었다고 그 말을 하려고 만났는데 빌더라고요.”

누가 봐도 야윈 모습으로 나타난 차태철 모친은 망설이는 모습 없이 사과의 말을 전했다.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해요. 태철이 손잡고 직접 사과하러 오려고 했는데 못난 아들이 먼저 갔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 뒤로도 차태철 모친은 영치금을 넣어 주고 몇 번 찾아와 별다른 말 없이 사과하고 돌아갔다.

그런 차태철 모친을 향해 유혁진은 더 이상 아들을 증오하지 않으니 그만 찾아오라고 했다.

“나도 열심히 내 인생 살 거니까 아주머니도 본인의 인생을 살라고 했어요.”

“잘했네요. 정말 잘했어요. 유혁진 씨, 멋진 사람인 거 알아요?”

“원장님 말씀 듣고 보니까 좀 그런 거 같기도 하네요.”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농담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유혁진은 그 일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완전히 치유했다.

“저기 말입니다. 제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말해 봐요.”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살면 원장님 같은 삶을 사는 겁니까?”

“예?”

엉뚱한 질문에 태경은 기막힌 듯 웃었지만, 유혁진은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병원에서 보여 준 모습 하며 굳이 교도소에 있는 사람까지 찾아오고 신경 써 주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했다.

“원장님 혹시 호구세요?”

“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니, 얼굴도 안 보고 사는 가족도 많은데 다른 사람들을 왜 이렇게 도와주면서 사나 싶어서요.”

“남들 도와주면 호구예요?”

“요즘은 내 실속 차리지 않고 남 도와주면 호구 소리 듣는대요.”

“그래요? 그럼 호구 하죠, 뭐. 그리고 나 그렇게 착한 사람 아니에요. 나도 높이 올라가려고 욕심도 부려 보고 넘어져도 보고 남들처럼 똑같이 살았어요. 그러다가 진짜 의사로서 살아 보자 해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겁니다.”

“원장님도 우여곡절이 많았네요.”

“그럼요. 고속도로처럼 계속 평탄한 삶만 사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어요. 넘어져도 일어나서 다시 앞만 보고 가는 거죠.”

“맞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면회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원장님, 앞으로 저 같은 놈 만나러 일부러 오고 그러지는 마세요.”

“왜요?”

“저 만나러 올 시간에 잠이나 더 자고 쉬세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합니다. 유혁진 씨는 자격증 준비나 잘하세요.”

“고집 엄청난 거 아시죠?”

“유혁진 씨만 하려고요. 이만 가볼게요.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지내요.”

“네. 원장님도요. 그리고 이제 영치금 넣지 마세요.”

“생각 좀 해볼게요. 밥 잘 챙겨 먹어요.”

“네, 원장님 다음에는 모범수로 출소해서 뵙겠습니다.”

“그때까지 기다릴게요.”

유혁진은 밝게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한 뒤 철문 너머로 걸어갔다.

태경은 흐뭇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보며 교도소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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