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449화 (448/472)

449화. 우리가 친구야?

앙칼진 소리와 함께 가지런히 담겨 있던 딸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당황한 김하선이 바닥에 떨어진 딸기를 줍는 사이 설래는 책상으로 걸어갔다.

재빨리 낙서 가득한 교과서를 뒤집어 놓고 바닥에 있던 가방도 책상 밑으로 넣었다. 그리고 김하선을 향해 소리를 높였다.

“아줌마는 왜 항상 아줌마 생각만 해요? 내가 언제 학원 갔다 와서 뭐 먹는 거 봤어요? 공부하고 자야 하는데 음식 먹으면 졸려서 오늘 해야 할 공부도 다 못 해요. 나 성적 떨어지면 아줌마가 책임질 거예요?”

“미안. 설래가 딸기 좋아한다고 해서 맛이라도 보면 좋겠다 싶어서 가져왔는데 아줌마가 실수했다.”

“아줌마는 가만 보면 내가 말하는 거 제대로 듣지도 않나 봐요. 내 방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는데 노크도 안 하고 마음대로 들어오잖아요.”

설래는 김하선의 적극적인 태도가 싫었다.

“그냥 나 신경 쓰지 말고 살라니까 왜 자꾸 나를 건드려요.”

“이설래!”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온 이재천이 딸이 하는 말을 듣고 방으로 들어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너,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딸기 먹으라고 한 게 그렇게 잘못이야. 녀석아, 너 생각해서 하는 소리잖아.”

“엄마라니? 누가 엄마야? 우리 엄마 여기 없는데 누가 엄마라는 거냐고!”

“…….”

아빠의 말에 설래가 소리를 버럭 높이자 김하선은 남편에게 그만하라고 하면서 먼저 방을 나갔다.

“설래야? 이제 그만하면 안 될까? 새엄마는 너랑 잘 지려고 노력하고 있잖아. 가족들 다 노력하는데, 너도 조금만 노력해 줘. 아빠가 부탁할게.”

이혼으로 딸이 받은 상처를 이재천이 모르는 게 아니었다. 다만 조금만 마음의 문을 열고 가족들이 함께하길 바랄 뿐이었다.

“부탁! 내가 아빠한테 부탁했지? 나는 아빠가 재혼하는 거, 저 아줌마랑 결혼하는 거 싫다고. 그런데 아빠 마음대로 결정한 거잖아. 나 엄마한테 보내 줘. 엄마랑 살래.”

“설래야? 그건 안 돼.”

엄마랑 살겠다는 딸을 보며 잠시 머뭇거리던 이재천은 이내 딱 잘라 말했다.

“아빠는 원하는 대로 하고서 왜 나는 내 마음대로 못 해. 엄마도 이혼할 때 그랬어. 나랑 나중에 같이 살자고.”

“그때랑 지금은 달라. 엄마도 사정이 있고 일이 있잖아. 그리고 아빠는 우리 딸이랑 같이 살고 싶어.”

“그러면 저 아줌마 나가라고 해.”

“이 녀석아.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너 자꾸 이러면 아빠 진짜 화나. 너도 이제 애 아닌데 언제까지 이렇게 철없이 굴 거야.”

“그만 좀 해요. 당신 어서 나와요. 설래야 아빠가 오늘 맥주 마시고 취했나 보다. 아줌마가 앞으로 더 조심하게. 잘 자.”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방으로 들어온 김하선이 남편을 데리고 방을 나갔다.

“아빠는 아무것도 몰라! 내가 지금…….”

닫힌 방문을 보고 있던 이설래는 얼굴을 구기며 혼잣말하다 가방 앞주머니에서 한 손에 들어오는 상자를 꺼냈다.

투명 아크릴로 되어 있는 상자 안에는 작은 단추와 블록 조각, 미색의 원형 진주 조각 등이 들어있었다.

“전부 다 짜증 나. 다 싫어.”

짜증을 내뱉던 설래는 상자에서 조각을 하나 꺼냈다. 그러더니 가만히 움켜쥐다 침대에 누워 버렸다.

잠시 후, 짜증을 가라앉히고 공부하기 위해 일어난 설래의 손안에 조각은 보이지 않았다.

* * *

다음 날, 설래는 학교에 등교했다.

다른 아이들은 선생님이 올 때까지 모여서 대화하기 바빴지만, 설래는 혼자 공부를 하고 있었다.

반에서 1등이며 전교에서 10등 안에 드는 설래는 공부를 잘했다.

전날, 학원 수업 내용을 정리한 노트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고개가 앞으로 쏠리며 목 베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머! 설래야. 쏘리.”

뒤를 돌아보자 모여 있는 무리 중 한 명이 손을 들며 웃었다.

“내가 손이 잘못 나갔네.”

“이라미 네 손이 잘못했네.”

옆에 있던 아이가 베개를 던지며 아이의 이름을 말하며 덩달아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라미를 필두로 김찬솔, 최수리, 김하영이 한 패거리였다.

일명 이라미와 무리들로 OO 여고에서 나름 유명한 아이들이었다.

무리 앞에 붙은 유명하다는 수식어가 기분 좋은 뜻이 아닌 반대였다.

1학년 때부터 아이들을 괴롭히며 자기들 멋대로 하는 일진 근성이 있는 무리였다.

이들이 한 짓은 생각보다 대범하고 질이 나빴다.

때때로 아이들에게 조금씩 돈을 뜯어 큰돈을 만들기도 하고 마음에 안 드는 애가 있으면 분이 풀릴 때까지 돌아가며 괴롭혔다.

쉽게 말해 학교 폭력을 하는 무리였다. 하지만 그 무리가 징계를 먹거나 주의를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선생님께 알려 봤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랬다가는 괴롭힘이 더 심해질 수도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모두 쉬쉬했다.

사실 예전에 괴롭힘을 당하던 아이가 학교 측에 사실을 알렸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고 결국 그 아이는 멀리 전학 가버렸다.

“설래야?”

이라미가 공부에 집중하고 있던 아이를 다시 부르자 설래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설래야, 이왕 고개 돌린 김에 그 베개 좀 갖다 줄래?”

또 시작이다.

설래는 이라미와 무리들이 저러는 이유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저들 무리가 타깃으로 삼고 괴롭히는 아이가 있었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아이였는데 왜 괴롭히는지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원래 학교 폭력을 하는 아이들은 이유 없이 괴롭히고 당하는 아이들도 이유 없이 당하는 아이들이 대다수이다.

이라미와 그 친구들은 괴롭히는 아이에게 매점 심부름이나, 면박 주기, 물건 숨기기 등과 같은 짓거리를 일삼았다.

본인들은 그저 친구끼리 장난치는 거라고 했지만,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벗어나고픈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날도 그 아이는 이라미 무리에게 둘러싸여 너튜브에 나오는 우스꽝스러운 춤을 억지로 따라 하고 있었다.

‘라미야, 나 이 춤 안 추면 안 될까?’

‘희영아. 너 설마 지금 내 말 거절하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가 너 다이어트 시켜 주는 건데 이렇게 성의를 무시하면 안 되겠지?’

괴롭힘당하는 구희영은 체격이 좀 많이 나가는 아이였다.

그 아이는 친구들이 보는 교실에서 웃긴 춤을 추는 게 정말 싫었다.

춤을 출 때마다 가슴이 흔들리고 살이 떨리는 자신이 너무 수치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많이 처먹고 살찌래. 너 지금 춤 안 추면 옆에 남고에 가서 심부름시킨다. 그거 할래? 아니면 춤출래?’

결국 강압에 못 이긴 구희영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교실 안에 있던 아이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각자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설래 역시 언제나처럼 공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괴롭힘당하는 구희영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그냥 같은 반일 뿐 친구도 아닌 사이였지만, 어제 일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이설래는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데 문제집을 두고 와서 다시 교실로 향했다.

그런데 이미 아이들이 다 빠져나간 교실에서 물에 젖은 교복 대신 체육복을 입고 울고 있던 구희영을 본 것이다.

설래는 아무 말 없이 문제집을 갖고 나왔지만, 너무나 서럽게 우는 구희영의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드르륵-

자리에서 일어난 설래는 사물함이 있는 뒤로 걸어갔다.

‘아이고! 우리 돼영이 춤 존나 잘 추네.’

‘살 흔들리는 것 봐! 졸라 역겨움. 몸에서 돼지 냄새 날 듯.’

‘좀 비켜 줄래!’

구희영을 둘러싸며 조롱하는 이라미와 무리에게 설래가 말했다. 그러자 아이들의 시선이 설래에게 향했다.

‘뭐?’

‘책 꺼내게 비켜 달라고. 너희가 내 사물함 막고 있잖아.’

‘아! 그랬구나. 미안. 그런데 조금만 기다려 줄래. 1분 30초만 있으면 우리 돼영이 공연 끝나거든. 너도 옆에서 같이 봐.’

‘싫어! 나 빨리 공부해야 하니까 비켜 줘.’

당당하게 말하는 설래를 보며 이라미는 잠시 당황하더니 이내 자리를 비켜 줬다.

그리고 그다음 날부터 이라미 무리들의 타깃이 구희영에서 이설래로 바뀌었다.

사물함과 가방에 흙 담아 두기, 교과서 찢어 버리기, 체육복 화장실 변기에 버리기, 일부러 넘어뜨려 상처 내기 등.

이라미와 무리는 여러 방법으로 괴롭혔지만, 설래는 무서워하거나 주눅 들지 않았다.

그게 일주일 전에 일이었다.

“설래야, 너 내 말 안 들려? 그 목 베개 좀 갖다 달라니까?”

설래가 가만히 쳐다보자 이라미는 또다시 말했다.

그러자 설래는 무선 이어폰을 꺼내 보란 듯이 귀에 꽂으며 공부에 집중했다.

“하! 저거 미친 거 아니야?”

“공부 좀 한다고 너무 깝치네.”

“라미야, 이설래 이대로 두면 안 되겠는데? 단계 좀 올릴까?”

“그러게. 쟤 버르장머리 좀 고쳐야겠다.”

잠시 후, 담임이 들어와 수업 준비가 이뤄지고 수업이 시작됐다. 수업과 쉬는 시간이 반복되고 어느새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설래는 급식을 먹고 식당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함께 어울리던 친구라고 불리던 아이들이 있었지만, 이라미 협박에 무서워 아이들은 설래를 피했다.

“야! 너 나 좀 보자?”

“이거 놔!”

“조용히 따라와 다치기 전에.”

이라미와 무리들은 설래의 팔을 잡고 인적이 드문 쓰레기장으로 데려갔다. 설래가 뿌리치려 했지만, 양쪽으로 아이들이 꽉 잡아 어쩔 수가 없었다.

“설래야, 우리 같은 반 친구잖아. 그러니까 나 부탁 하나 들어주라.”

“…….”

“이따 영어 시간에 나랑 얘들이 네 뒤로 쭉 앉을 테니까 우리 거 적어서 뒤로 넘겨줘.”

오늘은 영어 수행평가가 있는 날이다.

선생님이 영어로 된 짧은 영상을 보여 주고 그에 대한 감상문을 짧게 영어로 써서 제출하는 형식이었다.

평소 공부를 잘하는 설래에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할 수 있지?”

“내가 왜 해야 하는데?”

“친구니까. 원래 친구는 어려울 때 돕는 게 친구잖아. 안 그래? 설래 너는 우리보다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하니까 네가 우리를 돕는 거지. 맞지?”

“맞지. 하여간, 이라미 잔머리는 존나 잘 굴려요.”

“우리가 친구야?”

설래는 이라미와 무리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친구지. 아니야?”

“넌 친구끼리 교과서 버리고 사물함이랑 가방에 흙을 넣고 그래?”

“야! 그거 장난이잖아. 친구끼리 장난도 못 쳐? 존나 진지하네.”

“이설래 공부만 해서 그런지 사람이 너무 정이 없다. 원래 장난치면서 친해지는 거야.”

“우리가 못 배워서 그래. 설래 네가 앞으로 도와줘. 학교 조용히 잘 다니려면 서로 돕고 살아야지. 그럼 이따 부탁한다.”

이라미와 그 무리들은 설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탁을 가장한 협박을 한 뒤 자리를 벗어났다.

탁- 탁-

교복 치마 주머니 안에서 투명 아크릴 상자를 두드리던 설래는 긴 한숨을 내쉬며 교실로 들어갔다.

부산하게 움직이는 아이들 뒤로 수업 시작종이 울리고 곧이어 영어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

“자! 오늘 수행평가 있는 날이지? 다들 준비 잘했지?”

“아니요.”

“선생님? 난이도 아주 높아요?”

“그래도 수행평가인데 너무 쉬우면 평가가 안 되잖아.”

“안 돼요.”

“평소 공부한 사람은 잘 들릴 거고 아닌 사람은 안 그렇겠지? 받은 종이 뒤로 한 장씩 넘겨.”

영어 선생님이 맨 앞줄에 앉은 아이들에게 준비한 종이를 넘겼다.

뒤쪽에 앉은 설래도 종이를 받고 바로 뒤에 앉은 이라미에게 종이를 넘겼다.

“이설래? 내 부탁 잊지 않았지?”

학생답지 않은 화장한 얼굴이 예고 없이 다가와 설래와 마주했다.

“내 말 잊지 않았지? 우리 학교생활 편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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