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화. 날카로운 물건
“내 말 잊지 않았지? 우리 학교생활 편하게 하자.”
투명 매니큐어가 정성스럽게 발린 손톱을 세운 이라미가 설래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자! 종이 다 받았지?”
“네.”
“영상은 얼마 안 돼. 15분 정도 되고 보면서 메모할 내용 있으면 나눠준 종이 하단에 자유롭게 메모하고 위쪽에 내용 요약한 거 영어로 적으면 돼. 알았니?”
“네.”
선생님의 설명과 함께 칠판 한쪽에 있는 프로젝트에 영상이 나오고 수행평가가 시작됐다.
영상은 인간의 자연 파괴와 기후 변화에 관한 주제로 몹시 어렵지는 않지만, 난이도가 어느 정도 있었다.
설래는 영상 시작과 함께 무섭게 집중하며 중요한 단어들을 적어나갔다.
“영상은 여기까지야. 많이 어렵지는 않지?”
영상이 끝나고 선생님이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완전 어려워요.”
“선생님 난이도 너무 높아요. 하나도 안 들려요.”
“그동안 공부했던 단어들 많이 나왔으니까 엄살 피우지 말고 지금부터 20분 줄 테니까 내용 요약해.”
설래는 막힘없이 영상을 요약하며 종이를 채워 나갔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났다.
지금까지 책상 위에 낙서하며 딴짓하고 있던 이라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이설래가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이다.
“이설래 저x, 뭐 하는 거야?”
잠시 책을 보고 있는 선생님의 눈을 피해 이라미와 무리들을 눈을 마주치며 입 모양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쟤 미친 거 아니야?”
“시간 다 가고 있는데 지금쯤이면 넘겨야 하잖아.”
옆자리에 앉은 친구와 입을 뻥긋거리던 이라미는 별안간 설래의 등을 볼펜으로 쿡 찔렀다.
“……!”
등에서 느껴지는 갑작스러운 통증에 놀란 설래는 상체를 움찔하며 등을 폈다. 뒤에서 이라미가 찔렀다는 걸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야! 이설래 너! 뭐하는 거야?”
이라미는 설래의 등 뒤에 얼굴을 가까이 대며 아주 작은 소리로 떠들었다.
“빨리 요약한 거 넘겨.”
“…….”
“씨x년아 너 이러면 재미없어. 야! 이설래, 미친x아. 좋은 말 할 때 1분 안으로 내놔라.”
계속해서 요약본을 내놓으라는 말이 사방에서 작게 들려왔지만, 설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미 요약은 진작 다 끝낸 상태였지만, 일진 무리가 원하는 대로 수행평가를 대신 해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 개x은x이 야마 돌게 하고 있네.”
그렇게 살벌한 욕과 함께 이라미가 설래의 등을 다시 한번 찌른 그때였다.
드르륵-
“선생님?”
설래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선생님을 불렀다.
“어, 설래 왜 그러니?”
“얘들이 자꾸 저 방해해요.”
“……!”
생각지 못한 발언으로 이라미 무리는 물론 같은 반 아이들까지 전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특히 일진 무리는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그대로 굳어 버린 것만 같았다.
이라미가 착각하는 게 있었다.
설래는 아직까지 일진 무리를 크게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설래도 사람인지라 여러 명의 아이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이유 없이 욕하면 두려운 생각이 들긴 했다.
하지만 저런 이상한 아이들에게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이고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저것들의 괴롭힘이 더 심해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오빠, 그러니까 새엄마의 아들인 이복오빠 이선우가 집에 온 초반에 자주 했던 말이 있었다.
‘설래야 넌 학교에서 괴롭히는 애들 없어?’
‘없어.’
‘혹시라도 그런 이상한 애들이 이유 없이 시비 걸고 괴롭히면 절대 주눅 들지 말고 당당해. 알았지? 그것들은 사람 밟는 맛에 괴롭히는 거라 당당하면 무시하지 못할 거야.’
이복오빠 말이 도움 되기도 했지만, 설래의 멘탈이 보통이 아닌 건 사실이었다.
저런 조언을 들어도 실제 학교폭력이란 굴레에 갇히면 설래처럼 당당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설래야 방금 뭐라고 했어?”
교탁에 있던 선생님이 보던 책을 내려놓고 설래에게 다가와 물었다.
“이라미, 김찬솔, 최수리, 김하영이 저보고 수행평가 좀 대신해 달라고 하잖아요. 그리고 이라미는 자꾸만 볼펜으로 절 찌르면서 욕까지 했어요.”
“뭐야!? 이라미 너, 진짜야?”
선생님은 눈에 힘을 주며 이라미 곁으로 다가와 추궁했다.
“아, 아니에요. 선생님. 안 그랬어요.”
“그러면 넌 지금 설래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 너희 수행평가 시간에 장난하는 거 아니지?”
“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반에서 1등 하는 애한테 그러겠어요.”
선생님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하자 이라미가 손을 흔들며 부정했다.
“이라미? 너 지금 그런 미친 짓을 하는 거 맞아. 전, 거짓말한 적 없어요. 선생님도 제가 지금까지 이런 모습 보인 적 처음이라는 거 아시잖아요.”
가방에 흙을 퍼 담고 교과서를 물에 적시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런 것보다 아빠 엄마가 이혼했다는 사실이. 엄마가 연락이 안 된다는 사실이.
지금 별 거지 같은 것들이 내신을 망친다는 사실이 설래를 짜증 나게 할 뿐이었다.
자꾸 등을 찌르는 이라미 때문에 짜증이 극에 달한 설래는 참다못해 선생님께 사실을 알린 것이다.
“선생님 이거 보이시죠?”
설래는 영어 선생님에게 자신의 등을 돌려 보이며 말을 이었다.
“자세히 보시면 볼펜 자국 있을 거예요. 이라미가 정확히 두 번 아주 세게 찔렀거든요.”
“어머! 그러네. 이거 볼펜 자국 맞네.”
교복을 가까이 들여다보던 선생님은 설래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자 이라미와 무리는 아연실색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라미, 정말 네가 볼펜으로 찌른 거야?”
“그, 그게요. 선생님 설래가 뭔가 오해한 거 같아요. 저는 그냥 화이트 좀 빌리려고 한 건데…….”
“이라미, 김찬솔, 최수리, 김하영. 너희 당장 일어나 복도로 나가 서 있어. 끝나고 교무실 갈 줄 알아.”
행실이 바르고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고, 거기에 학생의 본분인 공부까지 잘하는 이설래.
그리고 공부하고는 담쌓고 몰려다니며 안 좋은 소문이 돌고 짙은 화장에 짧은 교복을 입고 다니는 이라미 무리들.
전자와 후자를 놓고 봤을 때 누구라도 전자인 이설래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저, 정말 화이트 빌리려고 한 거예요. 볼펜은 실수로 찌른 거라니까요.”
“되지도 않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나가!”
아니라고 바득바득 우기는 아이들에게 선생님은 문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내보냈다.
“저, 씨x 개 같은 x!”
“저거 진짜 미친x이네.”
복도로 나온 이라미와 무리는 사나운 눈으로 욕을 내뱉었다.
“이설래 저년 보통 년 아니야.”
함께 서 있는 무리 중에 한 아이가 이라미를 보며 말했다.
“나 1학년 때 쟤랑 같은 반이었는데, 반년 동안 친구 하나 없이 아싸로 지내는데 세상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졸라 당당하게 다니더라니까.”
“하긴! 우리가 갈군 뒤로 친구도 없이 혼자 다니는데 전혀 주눅 들지 않잖아.”
“라미야, 그냥 쟤 무시할까? 저런 또라이 건드렸다가 괜히…….”
“괜히 뭐! 저 미친 게 애들 다 보는 곳에서 개망신을 줬는데 이대로 있자고?”
“아니, 그게 아니라 이설래가 눈 하나 깜짝 안 하니까 하는 말이지.”
“그럼 눈 깜짝하게 해 줘야겠네.”
이라미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이를 갈았다.
* * *
몇 시간 뒤, 학교 수업이 모두 끝나고 학교를 나온 설래는 편의점에 들렀다.
학원 가기 전, 간단히 끼니를 때울 생각이었다.
밥을 거르지 말고 잘 먹고 다니라고 아빠가 용돈을 넉넉히 줬지만, 딱히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계산 다 됐어요. 카드 뽑아도 돼요.”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구입한 설래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아직도 안 봤네…….”
라면이 익을 동안 핸드폰 문자 어플을 클릭한 설래는 엄마가 아직까지 문자를 읽지 않는 게 마음에 걸렸다.
-여보세요.
잠시 고민하다 핸드폰 통화 버튼을 눌렀는데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상 못 한 전개에 설래는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엄마? 나야.”
-어, 설래야. 잘 지내지?
반가운 설래와 달리 친엄마의 목소리는 어딘가 형식적인 느낌이 풍겼다.
“엄마 왜 이렇게 통화가 안 돼?”
-설래야, 엄마가 요즘 바빠서 연락하기 힘들어. 당분간 계속 바쁠 거야.
“정말? 그, 그럼…… 내가 엄마 만나러 가면 안 돼?”
-안 되지. 엄마 일하는 곳으로 오면 곤란하잖아.
“엄마 살고 있는 곳으로 갈게.”
-그건 더 안 되지. 설래야, 미안한데 엄마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통화하자.
“엄마…….”
할 말도 많고 물어볼 말도 많은데. 뭐가 그렇게 바쁜 건지. 한 달 만에 연결된 전화를 엄마는 속절없이 끊어버렸다.
‘바쁘겠지. 바쁠 거야. 그래도 통화했으니까 됐어.’
서운한 마음과 속상함을 속으로 삼키며 설래는 가방에서 아크릴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서 조각 하나는 꺼내 옆에 두고 라면과 삼각김밥을 먹었다.
“안녕히 계세요.”
다 먹고 편의점을 나와 몇 걸음 걸어가던 설래의 발걸음이 별안간 멈춰 섰다.
“씨발x아, 밥 다 처먹었어?”
“어. 다 먹었어.”
“존x 맛있게 처먹긴 하더라.”
이라미와 무리가 편의점 앞에서 도끼눈을 뜨고 기다리고 있었다.
“워! 워!”
물어보는 질문에 답한 설래가 가던 길을 가려고 하자 이라미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이대로 가면 안 되지. 안 그러냐?”
“그럼. 이렇게 가면 우리가 서운하지.”
“난 너희들이랑 볼일 없는데?”
“우리가 볼일이 좀 있지 않을까? 잠깐 같이 좀 가자.”
일진 무리는 설래와 어깨동무하며 근처 인적이 드문 장소로 이동했다.
“야! 이설래!”
이라미는 설래를 벽이 있는 곳으로 밀어붙이며 무리들과 함께 둘러쌌다.
“미쳤냐? 너 때문에 반성문 졸라 쓰게 생겼잖아.”
수업이 끝나고 교무실로 끌려갔던 무리는 담임에게까지 혼나며 자필 반성문을 10장씩 써 오기로 했다.
“내가 그랬지? 좀 도와 달라고? 그거 도와주기가 그렇게 아까웠어?”
“내가 공부하면서 노력해서 얻은 지식인데 당연히 아깝지. 너희도 애먼 사람 붙잡고 이런 짓 할 시간에 공부 하나라도 해. 그래야 대학가지.”
“뭐야! 이게 진짜 미쳤나! 너가 그렇게 잘났어?”
쫙-
화가 난 이라미가 별안간 뺨을 날렸는데 설래도 참지 않고 이라미에게 뺨을 날렸다.
쫙-
“네가 먼저 때려서 나도 정당방위 한 거야.”
“이게 진짜!”
자신이 맞았다는 사실에 놀란 이라미는 무리를 시켜 설래의 팔을 잡았다.
“너 이게 뭔 줄 알아?”
뭔가 날카로운 물건을 꺼낸 이라미는 설래의 뺨에 갖다 대며 약을 올렸다.
“공부 잘하니까 네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거 같아? 너희 엄마 새엄마라면서?”
“……!”
안 그래도 가정사 때문에 속상한 설래에게 이라미는 기름을 부으며 약을 올렸다.
“쯧쯧! 너도 안 됐다. 불쌍해라.”
“이거 놔!”
“싫은데? 내가 두 번 다시 너 까불지 못하게 할 거야.”
“이거 놓으라고!! 악!”
잠시 뒤, 설래가 심한 몸부림을 치며 괴로운 목소리가 공터에 울렸다.
“아악! 하지 마!!”
“그러니까 내 말 잘 듣지 그랬어. 그랬으면 이런 일도 없고 서로 좋았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수행평가 중에 쌤한테 꼰지르면 어떡해? 내가 그래서 빡이 친 거야.”
이라미는 바닥에 주저앉은 설래의 머리채를 잡고 실컷 욕을 하더니 한마디를 더 남긴 채 무리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어디 쌤들한테 또 한 번 일러 봐. 그다음에는 더 끔찍한 일 당하게 해 줄게. 앞으로 학교생활 졸라 재미있을 거야. 기대해.”
기막힌 상황에 바닥에 앉아 눈물을 훔치던 설래는 더럽혀진 가방과 교복을 손으로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