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2화. 모래알
밖으로 나와서 접수처를 지나 자연스럽게 중앙 계단을 오르던 최모나는 별안간 계단에 올려놨던 한쪽 다리를 다시 내렸다.
“……!”
뭔가 기분이 싸했다. 그 싸한 기운에 뒤통수까지 당기는 것만 같았다.
“……왜 그러세요?”
갑자기 계단을 오르다 말고 멈춰선 최모나를 접수처 직원이 불렀다.
“최 쌤!”
“아, 네. 부르셨어요?”
“왜 그러시냐고요.”
“아! 갑자기 뭐가 생각나서요.”
접수처 직원에게 답한 최모나는 몸을 완전히 틀어 대기실 쪽을 쳐다봤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 벽에 붙어 있는 병원 포스터를 읽고 있는 사람.
그중에서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 눈길이 갔다.
익숙한 옆모습. 요즘 병원에 자주 오는 OO 여고를 다니는 여고생. 이설래 학생이었다.
계단에 우두커니 서 있던 최모나는 일단 병동으로 올라가 자신이 할 일을 했다.
콜이 온 환자도 보고 태경이 말한 환자도 살폈다. 그리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와 접수처로 향하는데 식당에서 나온 이찬희가 다가왔다.
“병동 갔다 오는 길이야?”
“응. 밥 다 먹었어?”
“어. 배고파서 두 그릇 먹었더니 과식한 거 같아. 의국실에 소화제 있지?”
“내 책상 첫 번째 서랍에 있어. 이 쌤? 만약에 좀 신경 쓰이는 환자가 있으면 어떡할 거야?”
“왜? 누구 신경 쓰이는 환자라도 있어?”
“뭐! 조금?”
“의학적인 거야 아니면 개인적인 거야?”
가볍게 던진 질문에 디테일한 답변이 돌아오자 잠시 고민하던 최모나가 입을 열었다.
“전자로 시작했는데 후자까지 따라가는 거 같아.”
“그래? 그럼, 뭐 고민할 거 있나?”
“어!?”
“최 선생 표정 보니까 이미 신경이 많이 쓰이는 거 같은데? 신경 쓰이는 만큼 다가가 봐.”
괜히 남자 친구가 아니었다. 이찬희는 여자 친구인 최모나란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선생님은 환자에게 다가갈 때 망설임이 없으시잖아. 우리가 선생님께 보고 배운 게 그런 거니까 최 선생이 이런 생각 하는 거 자연스러운 행동 아닐까?”
맞는 말이었다.
환자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다가가 소통하는 것. 그게 태경을 보고 배운 것 중 하나였다.
생각해 보니 먼저 저 학생을 진료할 때도 최모나는 이찬희가 한 말과 똑같은 생각을 했었다.
“그러네. 고마워.”
“별게 다 고맙네.”
고맙다는 말과 함께 이찬희의 어깨를 두드리며 최모나는 접수처로 향했다.
“선생님?”
“네. 최 쌤.”
“혹시 저기 교복 입은 학생 접수했나요?”
“네, 접수했어요. 저 학생 요즘 자주 오네요.”
“어디 진료 볼 건지 말했고요?”
“아니요. 그냥 상처 치료받으러 왔다고 하던데요.”
접수처 직원의 말을 들으며 저번에도 상처 치료였는데 라고 최모나는 생각했다.
“저 학생 외래 본다고 하던가요?”
“늘 비슷해요. 빨리 진료 볼 수 있는 걸로 본다고 하거든요.”
“선생님, 저 학생 제가 데려가서 진료 볼게요.”
최모나는 병원에서 상처 치료받은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또 병원을 온 아이에게 묘한 궁금증이 들었다.
“네, 그러세요.”
설래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최모나는 아이에게 다가가 아는 척을 했다.
“안녕!”
밝은 인사 소리에 투명 아크릴 상자를 손에 쥐고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던 설래가 건조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자주 보네. 이름 설래 맞지? 진료 보러 왔니?”
“네.”
“가자.”
“네?”
진료를 보러 가자는 말에 설래는 아무 대꾸 없이 여전히 의자에 앉아 최모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이상하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최모나는 오늘 아이에게서 평소와 좀 다른 분위기를 느꼈다.
좀 더 퉁명스럽고 약간 까칠한 느낌이 가득했는데 어딘가 귀찮고 피곤한 표정이 보였다.
“너, 진료 보러 온 거 아니야?”
최모나는 다시 한번 설래에게 질문하자 대답 대신 질문이 돌아왔다.
“진료 보러 온 거 맞아요. 그런데 선생님이 저 진료 보시게요?”
“응. 내가 보려고 하는데. 왜?”
“여기 다른 환자도 많은데…….”
최모나의 답변에 설래는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 * *
“여보, 나 왔어.”
이재천은 퇴근 후 집으로 들어와 아내, 김하선을 찾았다.
“당신, 왔어요? 배고프죠?”
“아니야. 점심때 동태탕이 맛있어서 과식했더니 저녁은 굶어야겠어.”
“적당히 먹지. 소화제 줘요?”
“그 정도는 아니야. 선우는 오피스텔 잘 데려다줬어?”
“그럼. 반찬 몇 가지 챙겨서 잘 데려다줬지.”
김하선은 동네에서 미용실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모처럼 쉬는 날이라 대학교 근처에서 자취하는 아들을 데려다주고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잘했네. 설래는 학원?”
“아직 올 시간 안 됐지. 어머! 잘됐다.”
갑자기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김하선을 보며 남편 이재천은 왜 저러나 싶은 표정으로 쳐다봤다.
“설래 방 청소해 주려고.”
본인 방에 들어오는 걸 극도로 꺼리는 설래 때문에 김하선은 마음 놓고 청소를 시원하게 한 적이 드물었다.
평소에는 일 끝나고 들어오면 저녁 준비하고 그러다 보면 좀 이따 설래가 돌아오기 때문에 청소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때문에 마침 쉬는 날이고 아직 설래가 오려면 시간이 남았기에 오늘이 청소하기 딱이었다.
“청소야 아무 때나 하면 되지.”
“당신 몰라서 그래? 설래, 자기 방에 허락 없이 들어가는 거 엄청 싫어해.”
“싫어하긴. 엄마가 청소해 주는 데 그러면 안 되지. 아!”
김하선이 남편 어깨를 아프지 않게 때리자 이재천이 아픈 제스처를 보이며 웃었다.
“하여간 아빠들은 이렇게 무심해요. 지금 설래 입장에서는 예민하고 그럴 수 있어. 그러니까 조심하는 게 좋다고.”
“나도 알지. 아는데…….”
“아는데 뭐?”
잠시 말끝을 흐리던 이재천은 아내의 재촉에 다시 말을 이었다.
“선우는 안 그러는데 설래만 너무 그러니까 내가 당신한테 미안해서 그러지.”
“난 또 뭐라고. 미안한 것도 많네. 선우는 설래보다 마음이 여유롭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선우는 대학생이고 설래는 아직 입시생인데 얼마나 신경 쓸 게 많겠어. 선우도 저 때는 엄청 예민했어.”
“그래? 선우가?”
이재천이 본 새아들 선우는 늘 의젓하고 듬직한 모습만 봤었기에 아내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그럼. 다들 비슷해. 그리고 여보, 나는 그렇게 생각해. 재혼이 다들 잘살아 보자고 한 거긴 하지만 우리 의견이 더 중요했지 아이들 의견을 따른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설래가 나한테 예민하게 굴어도 당신이 괜히 내 편 들고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김하선은 현명하고 심성이 고운 여자였다.
본인을 생각하는 남편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설래와 잘 지내고 싶었기에 지금은 설래를 더 이해하는 게 먼저였다.
“사람마다 받아들이고 친해지는 게 다른 거야. 막말로 내가 설래 입장이었으면 나는 더했을걸.”
“참나! 누가 보면 설래가 당신 딸인 줄 알겠어.”
“어머! 이 남자 보소. 설래 제 딸 맞거든요.”
“하하! 그건 맞지. 난 진짜 당신이랑 결혼하길 백번 잘했다니까. 여보, 이리 와.”
“됐거든요! 얼른 가서 옷 벗고 씻어요.”
김하선은 남편의 옆구리를 장난스럽게 찌르며 설래 방으로 들어갔다.
“책은 책상 오른쪽이고 츄리닝은 침대 아래쪽……. 그리고 양말은 옷장 앞에 있네.”
먼저 청소하기 전 김하선은 설래가 두고 갔던 물건과 옷가지가 있던 곳을 잊지 않고 외웠다.
그래야 청소가 끝난 뒤 원래 있던 자리에 둘 수 있었다.
혹시라도 물건이나 옷가지 위치가 바뀌면 설래가 바로 알아보기 때문에 조심하는 게 좋았다.
“그럼 시작해 볼까.”
좋아하는 음악을 핸드폰으로 작게 틀어 놓은 김하선은 즐겁게 청소를 시작했다.
바닥에 있는 물건을 위로 올리고 먼저 청소기를 신명 나게 돌렸다.
위이이잉-
힘찬 청소기 소리가 이어지고 물걸레로 바닥을 구석구석 깨끗하게 닦았다.
이쪽저쪽 움직이던 밀대가 멈추고 서서 걸레질하던 김하선이 책상 근처에서 허리를 숙이며 바닥을 자세히 보았다.
아까 청소기를 돌릴 때도 보이던 모래알이 책상 근처에도 있더니 창가 쪽으로 뜨문뜨문 이어진 게 보였다.
“웬? 모래야. 체육 시간에 묻은 건가?”
설래 방에서 모래알이 나온 게 처음이라 잠시 의아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청소를 마무리했다.
“청소 끝! 속이 다 시원하게 깨끗하네.”
원래도 깨끗한 방이었지만, 방까지 깨끗하게 닦으니 기분이 좋았다. 김하선의 얼굴 위로 미소가 번졌다.
“비울까?”
청소 때문에 옮겨 놓았던 물건과 옷가지를 원래 자리로 옮기고 나가려던 김하선은 뭔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바로 책상 안쪽에 있는 쓰레기통 때문이었다.
저걸 비우면 설래가 방에 들어온 걸 대번에 알 거 같았기 때문에 잠시 망설였다.
평소 쓰레기통까지 본인이 알아서 비웠기에 괜찮을까 싶었다.
‘아줌마! 쓰레기통 비웠어요? 내 방 청소하지 말라고 했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싫은 티를 내며 말하는 설래의 귀여운 얼굴이 눈에 선했지만, 김하선은 결국 쓰레기통을 비우기로 했다.
깨끗이 청소하고 쓰레기통 안에 쓰레기만 남겨 두기가 개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쓰레기통을 안 비웠나? 쓰레기가 많네.”
봉지를 가져와 쓰레기를 옮겨 담던 김하선은 뭉쳐진 뭔가 쓰레기통 안쪽에 붙어 있는 걸 발견했다.
탁- 탁-
봉지 안에 쓰레기통 입구를 넣고 탁탁 두드려도 나오지 않자, 결국 손으로 붙어 있는 걸 떼어 냈다.
“……!”
그런데 김하선의 표정이 좀 이상했다.
“이게 뭐야?”
뭉쳐져 있던 쓰레기는 아무리 봐도 상처에 사용하는 커다란 밴드 같았고 무엇보다 그 안에 붉은 게 묻어 있었다.
“이거…….”
굳이 가까이서 보지 않아도 김하선은 그게 피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 이게 왜?”
설래 방 쓰레기통에서 밴드가 나왔다는 건 설래가 이걸 사용했다는 소리였다.
김하선은 어제, 오늘 딸의 모습을 떠올렸다.
겉으로 드러나는 곳에 밴드가 붙여진 걸 본 적이 없었기에 옷으로 가려진 곳에 붙였던 게 아닐까 싶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사이즈의 밴드를 본 적이 없었기에 김하선은 쓰레기를 옮겼던 봉지를 바닥에 전부 쏟았다.
휴지와 포스트잇 그리고 머리카락 사이에서 작게 꾸겨진 종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병원 02-XXX-XXXX
서울시 XX구 여울동.
예상대로 종이는 병원 영수증이었고 하단에 주소와 전화번호가 있었다.
“우리병원?”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병원이었다.
김하선은 머리가 복잡했다.
그러고 보니 청소하면서 방바닥에 보였던 모래알도 그렇고 뭔가 좀 이상했다.
아무래도 설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김하선은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 딸에게 전화를 걸려던 동작을 멈췄다.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었고, 전화를 걸어 물어본다고 해도 설래가 말해 줄 것 같지 않았다.
뭔가 확인이 필요했다.
방바닥에 쏟은 쓰레기를 다시 봉지에 담고 병원 영수증에 있던 병원 이름을 확인한 뒤, 핸드폰으로 검색했다.
예전에 한 번 진료 받으러 갔던 기억이 있던 김하선은 진료 시간을 확인하고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우리병원입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혹시 지금도 진료 보시나요?”
-네. 응급실도 있고 저희 병원은 24시간 진료 보고 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김하선은 설래의 책상 서랍을 하나씩 열어 본 뒤 심각한 표정으로 방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