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6화. 환자 정보는 알려드릴 수가 없어요
설래 방, 청소를 마친 김하선은 화장대에 멍하니 앉아 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보, 나 좀 나갔다 올게.”
“이 시간에?”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이재천이 시계를 보며 답했다.
그 말에 마음이 급했던 김하선은 핑계를 빠르게 생각했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설래 방에서 발견된 것들을 남편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괜히 설래와의 관계가 더 악화할 거 같았기 때문이다.
일단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는 게 우선이었다.
“여보?”
“어?”
“어디 가냐니까.”
“아, 그냥…….”
적당한 핑계를 생각하며 시간을 끄는 사이 남편이 말을 덧붙였다.
“아니, 어디를 가는데 말을 못 해. 보아하니까 당신 또 설래 기다리러 가는구나?”
“아니, 그냥 아침에 먹을 요거트가 떨어져서 그거 좀 사러 갔다가 한번 가 볼까 했지.”
“그렇게 기다리지 말라고 했는데 뭐 하러 그래. 괜히 당신만 피곤하지. 그냥 요거트만 사고 와.”
“알았어요.”
“그러지 말고 내가 같이 갈까?”
“뭐 하러. 당신 좋아하는 TV 보면서 쉬고 있어. 야식 먹지 말고.”
“알았어. 조심히 갔다 와.”
김하선은 소파에서 일어나려는 이재천을 말리며 급히 현관 밖으로 나왔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온 뒤 어플로 미리 예약한 택시를 타고 출발했다.
남편에게는 요거트를 사러 간다고 했지만, 김하선의 목적지는 마트도 설래가 다니는 학원도 아니었다.
쓰레기통 안에 꾸겨진 영수증에 있던 우리병원이었다.
“여울동 우리병원으로 가신다고 했죠?”
“네, 기사님 맞아요.”
자식을 가진 엄마의 촉이라고 할까 아니면 괜히 예민함이 쓸데없는 생각으로 이어진 걸까.
김하선은 둘 다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손에 쥔 병원 영수증을 빤히 쳐다봤다.
잠시 뒤, 택시가 병원 앞에 멈췄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기에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택시에서 내린 김하선은 정문 앞에서 잠시 주춤하나 싶더니 이내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대기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접수처 직원에게 다가갔다.
“수고 많으십니다.”
“네, 어서 오세요. 진료 보시러 오셨나요?”
“저기, 그게 아니라 뭐 좀 여쭤보려고 그러는데요.”
“아, 네. 말씀하세요.”
“혹시 여기 이설래라고 진료 보지 않았나요?”
“실례지만, 환자 정보는 알려드릴 수가 없어요.”
직원이 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병원은 환자 정보를 본인이 아니면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 됐다.
무슨 일 때문에 저러는 건지 직원도 궁금하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진료받았는지 그것만이라도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죄송해요. 안 됩니다.”
정중한 말투로 거절하는 직원을 보며 김하선은 곤란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랐다.
이대로 아무 정보도 얻지 못한 채 돌아가야 하나 싶던 찰나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용기를 내기로 했다.
“실은 제가 이설래 엄마예요. 우리 딸이라서 제가 일부러 병원까지 찾아온 건데,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무슨 일이에요?”
때마침 접수처로 온 임정숙 간호사가 김하선이 한 말을 들으며 직원에게 물었다.
“수 쌤? 이분께서 진료 본 환자 관련해서 질문이 있다고 해서요.”
“이게 우리 딸 방 쓰레기통에 있던 영수증인데 여기서 진료 본 게 맞는지 궁금해서요.”
임정숙 간호사는 김하선이 내민 영수증을 확인한 뒤 잠시 고민하는 듯 보였다.
“문의하시려는 환자분이 딸이라고 하셨죠?”
“네, 제가 엄마예요.”
“환자분 성함이 어떻게 된다고 하셨죠?”
“이설래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남긴 임정숙 간호사는 최모나가 아닌, 태경의 진료실로 향했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원장님, 이설래 학생이요.”
“왜요? 지금 최 선생이랑 같이 있지 않나? 무슨 일 있어요?”
태경은 순간, 최모나와 설래가 대화가 잘 안 됐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 이설래 학생 보호자가 찾아왔어요.”
“보호자요?”
“네, 어머니가 와서 우리 딸이 여기서 진료받았는지 확인해 달라고 하셨어요.”
임정숙 간호사는 김하선이 쓰레기통에서 영수증을 찾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표정이 많이 안 좋아 보이던데……. 원장님 어떡할까요?”
“최 선생한테 보호자 왔다고 이야기해 주세요.”
태경은 이 시간에 쓰레기통에 있는 영수증까지 챙겨서 병원을 찾을 정도면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 걱정에 한걸음에 달려온 것 같은데 아무리 환자 정보가 중요해도 이런 문제라면 부모가 알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알겠습니다.”
진료실은 나온 임정숙 간호사는 최모나에게 바로 콜했다. 그리고 5분도 안 되는 사이 의국실에서 최모나가 나왔다.
“최 쌤? 여기요. 저기,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분 보이죠?”
“네, 저분이 설래 학생 어머니세요?”
“네, 맞아요.”
“제가 가 볼게요.”
최모나는 영수증을 손에 쥐고 있던 김하선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이설래 학생 어머니시죠?”
“맞아요. 제가 설래 엄마예요.”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아, 네…….”
최모나는 김하선을 데리고 접수처를 지나 자판기가 있는 조용한 복도에 자리했다.
“여기, 앉으세요. 커피 한 잔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여기 선생님이세요?”
“네, 최모나라고 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요. 설래 여기서 진료받은 거 맞죠?”
“네, 맞아요. 그리고 설래 지금 병원에 있습니다.”
“지금 병원에 있다고요? 왜요? 우리 설래가 어디 아픈가요?”
딸이 병원에 있다는 말에 김하선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진료를 봤다는 건 거의 확신했기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평소 공부에 욕심이 있어 학원 빠지는 걸 싫어하는 애가 병원에 있다는 말을 듣자 꽤 놀랐다.
“그 전에 제가 하나만 여쭤볼게요. 어머니 혹시 병원에 오신 이유가 있을까요?”
“확실한 건 아니고 제 느낌인데, 아무래도 딸이 괴롭힘을 당하는 건 아닐까 싶어서 확인하려고 왔어요.”
영수증뿐만 아니라 피가 묻어 있던 커다란 밴드 이야기와 방바닥에 있던 모래알까지 김하선은 자신이 본 걸 전부 설명했다.
“이제 설래가 여기서 어떤 진료를 받았고 왜 지금 병원에 있는지 선생님이 말씀해 주세요.”
“제가 그동안 설래를 쭉 진료했던 담당 의사입니다. 사실 저도 어머니처럼 학교 폭력을 의심하고 있었지만, 확신하진 않았어요.”
어떻게 들어도 부모라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최모나는 최대한 차분한 말투로 김하선이 많이 놀라지 않게 설명했다.
설래가 처음 병원에 왔을 때부터 어떤 진료를 받았는지 오늘은 왜 왔는지 빠짐없이 알렸다.
“봉합 후 치료는 끝났고 제가 설래와 대화하며 설득하던 중이었어요.”
“……!”
모든 상황을 전해 들은 김하선은 눈을 질끈 감고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듯 보였다.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세상 어떤 부모가 자식이 학교 폭력과 자해와 물건을 삼켰다는 이야기를 듣고 멀쩡할 수 있나 싶었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그러니까 설래가 지금 자기 몸에 자해하고 먹으면 안 되는 물건을 삼키는 이식증이라는 거죠?”
“네, 맞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김하선은 거짓말이 아니라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늘 당차고 씩씩한 설래가 학교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니 정말이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뉴스에서 관련 소식을 접할 때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놀랐는데 그런 일이 딸에게 일어나고 있다는 게, 기가 막혔다.
그리고 학교 폭력 못지않게 크게 놀란 건 자해와 이식증 소식이었다.
심장이 요동치고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단추 삼킨 건 괜찮은 건가요?”
정신없는 와중에도 김하선은 설래의 몸 상태부터 확인했다.
“지금까지 물건을 삼켰을 때 며칠 안에 대변으로 다 나왔다고 했어요. 현재 내시경으로 꺼내기보다는 변이 잘 나올 수 있게 약 처방을 한 상태고 만약 그래도 나오지 않으면 관장을 할 생각입니다.”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김하선은 아무 말이 없었다.
“저, 어머니. 지금 많이 놀라신 거 아는데 설래가 학교 폭력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어요. 힘드시겠지만, 어머니께서도 설득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선생님, 이식증이나 자해는 왜 하는 걸까요?”
“설래가 말하길 그런 행동을 하면 신경 쓰던 것들을 잠시 잊을 수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의학적인 측면에서 설명해 드리자면 불안과 스트레스가 가장 클 거예요.”
“아마 제 탓도 있는 거 같아요.”
“네? 그게 무슨…….”
아까 의국실에서 설래는 분명 새엄마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자기 탓을 하는 김하선 때문에 최모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제가 친엄마가 아니에요. 지금 설래를 좀 볼 수 있을까요? 아이가 괜찮은지 걱정되고 보고 싶어요.”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떤지 최모나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아까 설래가 한 말을 생각해 보고 지금 김하선의 언행을 보면 적어도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저, 자식을 걱정하는 여느 엄마들의 모습과 똑같았다.
설래가 만나기 싫다고 했다면 억지로 만나게 하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이유가 없었다.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김하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최모나를 따라갔다.
복도를 걸어가던 두 사람이 코너를 막 돌려던 그때, 별안간 누군가가 최모나 앞으로 불쑥 튀어나와 부딪혔다.
“아!”
“괜찮니?”
부딪힌 사람은 교복을 입은 학생이었다.
“아, 네…….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괜찮아?”
“네, 괜찮아요. 안녕하세요.”
최모나에게 괜찮다고 말한 학생은 김하선 쪽으로 몸을 틀더니 꾸벅 인사하며 자기가 누군지 밝혔다.
“전 구희영이라고 해요. 설래 어머니 맞으시죠?”
“어, 그래. 맞아.”
구희영은 설래가 이라미 무리에게 끌려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 때부터 지켜봤던 그 친구였다.
친구가 너무 걱정됐던 구희영은 조용히 설래를 뒤따르며 병원까지 쫓아왔다.
설래가 응급실에서 나와 의국실로 들어가고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때 김하선을 보고 할 말이 있어 계속 병원에 있었다.
“너, 설래 친구니?”
딸과 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여고생을 보며 김하선이 말했다.
“저는 친구라고 생각하는데 설래는 그 말 들으면 좀 안 좋아할 수도 있어요.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주머니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나한테? 내가 지금 설래 보러 가야 하는데 급한 거니?”
“네, 급한 거예요. 오늘 설래가 애들한테 끌려가서 괴롭힘을 당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몰래 가서 그 영상 다 찍었어요. 그거 보여드리려고요.”
“영상을 찍었다고?”
“네.”
자신을 도와준 친구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던 구희영은 몰래 숨어서 이라미 무리가 한 짓을 전부 핸드폰에 담았다.
“여기요. 이거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