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7화. 벌 받아야지
구희영이 보여 준 영상을 본 김하선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어머님! 괜찮으세요?”
함께 영상을 보던 최모나가 그녀의 팔을 잡으며 일으켜 세웠다.
“네, 선생님. 저 괜찮아요.”
김하선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구희영에게 물었다.
“희영아. 너 이거 왜 찍은 거니?”
“설래가 절 도와줘서 저도 도와주고 싶어서 찍었어요.”
“그랬구나. 이 영상 아줌마한테 보내 줄 수 있어?”
“네, 바로 보내드릴게요.”
영상을 전송받은 김하선은 최모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구희영과 함께 잠시 병원을 나왔다.
“설래 도와줘서 고마워. 늦었으니까 택시 타고 가.”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줌마가 안 괜찮아서 그래.”
정류장에서 택시를 잡은 김하선은 기사에게 요금을 주면서 아이를 잘 데려다줄 것을 부탁했다.
“기사님. oo 아파트까지 잘 부탁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조심히 들어가.”
“네, 감사합니다.”
* * *
그 시각, 이설래는 생각이 많았다.
‘어떻게 알았지?’
도대체 어떻게 알고 왔을까 계속 생각하고 있던 그때, 의국실 문이 열리며 새엄마 김하선이 들어왔다.
편한 슬리퍼와 집에서 입는 옷차림으로 그대로 다가온 김하선은 별안간 설래를 꼭 끌어안았다.
“……!”
뭐라고 말을 할 새도 없이 자신을 안은 새엄마 행동에 당황하던 설래는 더욱 당황스러운 상황을 마주해야 했다.
자신을 끌어안은 김하선이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흐윽!”
흐느껴 울던 김하선은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감정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설래를 꼭 끌어안고 있던 손을 풀고 옆으로 고개를 돌린 김하선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하!”
5분 후,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고 손으로 눈물을 훔치는데 눈앞에 휴지가 보였다.
새엄마가 우는 모습을 보고 뻘쭘해진 설래가 책상에서 휴지를 갖고 와 건넸다.
말없이 휴지를 받은 김하선은 얼굴을 정리하며 설래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설래야, 내가 갑자기 병원 찾아와서 놀랐지?”
“네…….”
“네 방을 청소하다가 병원 영수증이랑 밴드를 봤어. 그래서 병원에 오게 됐고, 조금 전에 의사 선생님께 전부 다 들었어.”
“…….”
“있잖아. 아줌마가 미안해.”
“……!”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듣고만 있는데, 대뜸 사과하는 김하선을 보며 설래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선생님이 그러는데 네가 스스로 괴롭히는 게 스트레스도 영향을 줬을 거라고 하시더라. 나는 그게 내 탓도 있지 않을까 싶어. 아줌마는 사실 늘 너한테 미안했어. 아빠와 아줌마의 재혼이 너한테 받아들이기 쉽지 않고 그 때문에 네가 알게 모르게 많이 힘들었을 거 같아.”
김하선은 자신의 진심이 조금이라도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설래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믿어 줄지는 모르겠지만, 아줌마는 아빠와 내 행복보다는 설래 너의 행복이 우선이야. 아빠가 처음 네 사진을 보여 줬을 때 아줌마가 너무 기뻐서 하루종일 그 사진만 보고 있었어. 어쩜 이렇게 사랑스럽게 생겼을까 생각하면서 나한테 이런 예쁜 딸이 생긴다니 너무 감사했거든. 그런데 설래 네가 이렇게 힘들고 아파하는 걸 보니까 너무 속상하다.”
“…….”
“아줌마는 아빠도 중요하지만, 너도 중요해. 그리고 아빠한테 가장 중요한 건 설래 너야. 네가 아빠의 재혼으로 힘들고 그게 네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면 다시 생각해 볼게. 아줌마가 많이 미안해…….”
설래의 손등 위로 굵은 눈물이 뚝 떨어졌다. 고개를 들고 보니 김하선이 다시 울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안에 걱정이 가득하다는 걸 설래는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설래야. 네 몸에 이런 상처 내지 마. 널 아프게 하지 마. 아줌마 때문에 네가 이렇게 된 거 같아서 마음이 너무 아파.”
설래는 기분이 이상했다.
자꾸만 본인 탓을 하는 김하선 때문이었다.
자해를 한 것도 물건을 삼킨 것도 제 탓이지 새엄마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데 자꾸만 본인 때문이라는 말을 할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사실 아까 의사 선생님께는 말을 하지 못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자해를 한 원인은 스트레스와 불안, 짜증 등 여러 가지 감정이 있었지만, 친엄마 때문이기도 했다.
아프다고 문자를 보내고 상처 사진을 보내면 엄마가 관심을 가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늘 바쁜 엄마에게 아직 아무 연락이 없었다.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와 짜증이 많았다. 그런데 새엄마는 달랐다.
슬리퍼 차림으로 뛰어와 눈물까지 흘리며 걱정하는 새엄마를 보니 솔직히 처음으로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그리고 고맙기도 했다.
지금까지 온갖 짜증을 다 내고 말 한마디 다정하게 한 적 없는 자신을 왜 이렇게까지 생각하며 걱정하나 싶었다.
“얼마나 아팠을까? 많이 힘들었지? 몸은 괜찮은 거야?”
“……때문 아니에요.”
몸을 살피는 김하선을 향해 설래가 작은 소리도 말했다.
“어! 뭐라고?”
그 소리를 듣지 못한 김하선이 다시 물었지만, 설래는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사실 모르지 않았다.
늘 학원 수업이 늦게 끝나면 새엄마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단 것도, 항상 조심스럽게 방 청소를 해 준다는 것도, 아빠가 좋아하는 반찬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반찬만 식탁에 올라오는 것도 전부 다 알고 있었다.
그동안 새엄마가 자신에게 어떻게 했는지 어떤 진심으로 다가오려 했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외면하고 있었다.
설래의 시선이 맞은편에 앉아 있는 김하선 신발에 닿았다.
단순히 집에서 편하게 신는 슬리퍼를 신고 온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한쪽은 아빠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아빠와 새엄마가 사이즈만 다른 똑같은 슬리퍼를 신고 있었는데 한쪽은 누가 봐도 남자 슬리퍼였다.
아마도 놀란 마음에 신발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집에서 급히 나온 거 같았다.
내 몸에 상처가 난 일이, 이상한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일이, 새엄마에게 이렇게 큰일이구나 싶은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아줌마……?”
“어, 그래. 설래야. 왜? 어디 불편하니? 의사 선생님 불러올까?”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저 이렇게 된 거요. 아줌마 때문에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제가 처한 상황들이 짜증 나고 스트레스받아서 그랬어요. 그러니까 아줌마 탓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김하선은 설래의 반응을 보며 적잖이 놀랐다.
그저 본인 이야기만 잘 들어 줘도 좋겠다고 생각했고, 좀 더 욕심을 부려 진심이 전해지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솔직히 말할 줄은 몰랐다.
그런데 곧이어 들려온 말에 김하선은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죄송했어요.”
설래가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사과의 말을 전한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설래는 새엄마에게 사과할 기회가 없을 거만 같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새엄마는 항상 대화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늘 일방적으로 대화를 단절한 채 예민하게 행동한 것도 자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짝짝이로 신고 온 슬리퍼를 본 순간, 그동안 너무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줌마한테 그러면 안 됐었는데 날카롭게 반응해서 죄송해요.”
“빈말이 아니라 아줌마는 네 입장 다 이해해. 너한테도 시간이 필요했을 거라고 생각해. 아줌마한테 사과해 줘서 고마워.”
김하선은 잡고 있는 설래의 손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보였다.
“설래야, 아줌마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니?”
“부탁……이요? 뭔데요?”
“앞으로 네 몸 괴롭히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런 게 한두 번은 괜찮겠다고 생각하다가 어느새 습관처럼 하게 되거든. 그때는 더 고치기도 힘들 거 같아서.”
“네. 그럴게요. 고치도록 할게요.”
설래는 자해와 이식증이 몸에도 정신에도 안 좋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계속 그만둬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실천하지는 않았다.
의사 선생님의 말씀과 새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이번 기회에 완전히 끊어 내야겠다고 다짐했다.
“대신, 힘든 일이 있을 때는 아빠나 아줌마나 아니면 설래가 편한 사람 누구한테든지 좋으니까 말해 줘. 그리고 아줌마랑 조금씩 친하게 지내면 어떨까? 아줌마는 설래랑 진짜 잘 지내보고 싶은데……. 그럴 수 있을까?”
“네. 저도 노력할게요.”
“어! 정말?”
너무 기쁜 나머지 김하선은 설래를 와락 끌어안은 뒤 본인이 더 놀랐다.
“어머! 미안. 아줌마가 너무 기뻐서 설래 아픈 걸 깜빡했어.”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
처음으로 마주 앉아 대화하며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된 두 사람은 그동안 오해를 풀 수 있었다.
의국실에서 나온 두 사람은 함께 최모나를 만났다.
“이건 봉합한 곳에 세균 감염되지 않고 잘 아물게 하라고 먹는 항생제 처방전이에요. 그리고 이건 변이 잘 나오게 하는 약이니까 잊지 않고 복용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이 약은 물을 많이 마셔야 효과가 좋아요.”
“네, 선생님. 지금 집에 가서 먹어도 될까요?”
“네, 지금 복용해도 괜찮아요. 그리고 약을 먹어도 변이 나올 기미가 안 보이면 그땐 병원으로 바로 오세요. 설래야, 너 변 나왔다고 바로 물 내리지 말고 변기 잘 봐야 한다.”
“……네. 잘 볼게요.”
“어머님 이거 받으세요.”
최모나는 손에 들고 있던 병원 이름이 인쇄된 서류 봉투를 김하선에게 건넸다.
“아까 부탁하셨던 서류예요. 혹시, 의학적으로 의견이 더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알려 주세요.”
“네, 선생님.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료를 마친 김하선과 설래는 나란히 병원을 나왔다.
“설래야, 너 괴롭힌 애들 있잖아.”
“그건,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해결할게요.”
“해결? 네가 혼자 해결할 수 있다고? 어떻게?”
“상대 안 하고 무시하면 며칠 지나서 흥미 잃어버릴 거예요.”
“미안한데 아줌마는 생각이 좀 달라.”
“네?”
“아줌마 때도 그런 질 나쁜 애들이 있었거든. 그런 애들은 가만히 무시한다고 절대 그만두지 않아. 그리고 아줌마가 도저히 화가 나서 이대로는 도저히 못 있겠어.”
감히 남에 귀한 자식에게 손을 대다니, 김하선은 이 문제를 절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혹시 이 문제가 학교에 알려지면 설래가 많이 곤란할까?”
“아니요. 그냥 상대하기 귀찮을 뿐이었지 곤란할 건 없어요. 제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곤란할 게 없잖아요.”
“그 말이 맞네. 그럼, 이 문제는 아줌마한테 맡겨.”
“어떻게 하시려고요?”
“어떻게 할 게 뭐 있어. 이런 문제는 아주 간단한 거야.”
김하선은 씨익 웃으며 덧붙였다.
“나쁜 짓을 한 사람은 벌을 받잖아. 걔들 벌 받아야지. 배고프지? 아줌마가 가서 맛있는 거 해 줄게.”
김하선은 은근슬쩍 설래의 손을 잡았다.
“아줌마가 사계절 손이 차거든. 그래서 따뜻한 설래 손잡고 가려고.”
“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손이 차갑다고 했지만, 김하선의 손은 따뜻했다.
설래는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 새엄마와 손을 잡고 가는 게 싫지 않았다. 두 사람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