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9화. 책임
김하선은 복사해 온 진단서를 보란 듯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세상에 의사 선생님이 먼저 학교폭력을 의심하고 이야기해 주는데 내가 얼마나 놀랐던지……. 당신들 그리고 너희들 절대 그냥 넘어갈 생각하지 마.”
“교장 선생님. 제가 분명히 말하겠는데, 와이프와 제 의견을 안 들어주시면 바로 교육청에 민원 넣고 언론에도 알리겠습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 장난으로 드리는 말씀 아닙니다.”
김하선과 이재천의 으름장에 교장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럼요. 당연합니다. 어떻게 저런 일을 저지를 수가 있는지……. 아까는 제가 영상을 보지 못해서 생각이 짧았습니다.”
학교 평가가 몇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 교육청과 언론에서 이 사실을 알린다니 교장은 눈앞이 아찔했다.
“너희들! 뭐 하고 가만히 있어?”
교장은 이라미 무리를 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서 설래에게 사과하지 않고 뭐 하고 있는 거야? 요즘 같은 시대에 학교폭력이라니. 너희들이 한 건 학교폭력이 아니라 범죄야. 범죄!”
“교장 선생님께서 말씀 잘하셨네요.”
영상을 보고 빠르게 태세 전환하는 교장의 말을 듣고 있던 이재천이 가해자와 부모를 쳐다보며 말했다.
“18살은 죄질에 따라 소년법 처벌이 적용될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오전에 경찰서랑 변호사 사무실에 들러 알아보니까 담뱃불과 날카로운 것들로 타인의 신체를 훼손하면 상해죄가 해당하며 그에 따라 소년법이 아닌 일반 죄목으로 처벌받을 수도 있다는 의견을 들었어요.”
“그 말은 우리 설래를 괴롭힌 가해 학생들이 저지른 행동은 엄연히 범죄라는 뜻이죠.”
범죄!
그 말을 듣자마자 가해 학생들과 부모들의 낯빛이 하얗게 질려 가기 시작했다.
“설래 어머님, 정말 죄송합니다. 너! 뭐 하고 있어 얼른 사과하지 않…….”
탁-
이라미 부모가 딸의 등을 내리치며 사과하라고 닦달하던 그때였다.
“그 버러지들 여기 있다고!”
격하게 열리는 미닫이 문소리와 함께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남자가 들어왔다.
“여보! 목소리 좀 줄여요.”
아내로 보이는 여자가 남자 뒤를 따라 들어왔고, 그 뒤로 이라미 무리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구희영이 들어왔다.
구희영 가족이 교장실까지 온 건, 김하선 때문이었다.
설래에게 구희영이 괴롭힘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김하선은 연락처를 알아내 부모님께 이 사실을 알리고 오늘 학교에 오라고 권했다.
일 때문에 잠시 다른 지역에서 머물던 구희영의 부모는 딸이 학교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에 열 일 제쳐놓고 당장 달려왔다.
“야! 너희들이 우리 딸 괴롭힌 것들이냐?”
도축업 사업을 하는 구희영 아빠는 엄청난 포스를 풍기며 가해 학생들을 압박했다.
“이것들이 입에 본드를 붙였나? 너희들이 내 딸 괴롭혔냐고?”
“네…….”
“마, 맞아요.”
“희영아. 얘들 맞아?”
“응. 아빠. 맞아. 나 괴롭히고 못살게 굴고 돈 뺏고 매점 심부름시키고 내 외모 비하하며 욕하고 때렸던 애들 맞아.”
구희영은 전날, 설래와 한참 통화 후 자기 목소리를 내고 당당해지기로 결정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눈치 보고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생각하며 그들이 저질렀던 일을 전부 말했다.
“내! 이것들을 당장!”
“아버님!”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 구희영 아빠가 테이블 옆 협탁 위에 있던 화분을 잡으려고 하자 교장과 담임이 말렸다.
“고정하세요. 아버님!”
“진정하세요.”
“고정! 진정! 이봐, 당신들 이 학교 교장이고 담임이라는 사람이 이것들이 애들 괴롭히는 것도 몰랐으면서 나보고 진정하라고? 이게 진정이 될 거 같아?”
“죄송합니다.”
“죄송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고개 숙인 교장의 말을 듣지도 않던 구희영 아빠는 그대로 교장실을 나가 버렸다.
그러더니 잠시 후, 화장실에 있던 양동이에 물을 가득 담아와 그대로 가해자와 그 부모들에게 물세례를 날렸다.
“아버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봐요! 교장 선생님. 안 되긴 뭐가 안 됩니다. 내 새끼들 때리고 괴롭힌 건 되는 일이고 내가 이것들이랑 그 부모들에게 냉수 처먹고 정신 차리라고 한 건 안 되는 일입니까!”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정말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면목이니 죄송이니 그딴소리 하지 말고 이거 애들 어떻게 할 거요!”
“설래 부모님, 그리고 희영이 부모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자식을 잘못 키웠습니다.”
“설래야 미안해.”
“희영아, 정말 미안해.”
“우리가 잘못했어.”
바보가 아닌 이상 돌아가는 상황에 심각성을 느낀 가해자와 부모들은 너 나 할 거 없이 사과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설래야, 희영아 미안해. 내가 너무했어.”
하나둘씩 차례대로 사과를 전하며 이라미 역시 잘못을 시인하며 사과했다.
그렇게 당당하고 사람을 내리깔던 표정과 눈빛은 오간 데 없고, 비에 젖은 생쥐 꼴로 걱정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아니잖아.”
가만히 가해 학생들의 사과를 듣고 있던 설래가 입을 열었다.
“잘못? 너무했다고? 그래서 사과한다고?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해. 그게 너희들이 불리할 때 상황을 모면하는 방식이야?”
새엄마가 학교폭력을 학교에 알리지 않았다면 저들은 어제와 같이 또다시 괴롭히는 일을 당연하게 여겼을 것이다.
설래는 가해자들의 사과가 진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저들의 모습은 기만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희영아, 쟤들이 우리한테 사과하는데 네가 보기에는 미안해하는 거 같아?”
“아니, 이라미, 김찬솔, 최수리, 김하영. 모두 그냥 하는 말일 걸. 아마 재들 속으로 시X, 시X 거리면서 욕하고 있을 거야.”
구희영 역시 저들의 진정성 없는 사과를 믿지 않았다.
“난, 너희가 괴롭힘을 당하는 애들이 느끼는 수치심과 괴로움, 모멸감 그런 감정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건지 한 번이라도 느껴봤으면 좋겠어.”
“저도 희영이 생각이랑 같아요.”
“교장 선생님, 들으셨죠?”
“그럼요. 두 학생의 마음 이해합니다. 제가 담임 선생님과 함께 합당한 징계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아니요. 뭔가 착각하신 거 같은데 학교 측에 처벌을 맡기려고 온 게 아니에요.”
“네?!”
“저랑 우리 남편, 그리고 여기 계시는 희영이 부모님까지 피해자 부모로서 가해 학생들 처벌 관련해서 학교에 요구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거예요.”
김하선과 이재천은 학교가 이 문제를 잘 해결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애초부터 어떻게 가해자들을 처벌할지 미리 생각하고 있었다.
“요구사항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제가 말씀드리죠.”
자리에 앉아 있던 이재천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A4 종이를 꺼내며 일어났다.
“첫째, 이라미, 김찬솔, 최수리, 김하영. 이하 가해 학생 네 명은 OO 고등학교에서 각각 다른 학교로 강제 전학을 보낼 것과 이번 사건을 학교 홈페이지에 공지할 것을 요구한다.”
고등학교에서 학생이 잘못하거나 사고를 쳤을 때 받는 징계 중에 가장 강한 징계가 강제 전학이었다.
“둘째, 이들의 잘못을 생기부에 기록하며 셋째, 사회봉사 100시간을 실시한다. 넷째, 지금까지 이설래, 구희영을 비롯한 다른 학생들에게 빼앗은 돈을 한 명도 빠짐없이 돌려준다. 마지막으로 모든 학급을 돌며 학생들에게 학교폭력 한 것을 시인하며 사과할 것을 요구한다. 만약, 가해 학생과 부모가 한 가지라도 거부할 경우 교육청은 물론 모든 언론에 학폭 피해 사례를 고발 및 경찰에 고소할 것이다. 이상입니다.”
이재천이 낭독한 처벌은 말 그대로 장난이 아니었다.
실제 학교폭력으로 학교 내에서 문제가 됐을 때 처벌하는 강한 징계를 넣은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넣은 항목은 설래가 생각한 처벌이었다.
그동안 학교에 다니면서 이라미 무리가 괴롭힌 아이들은 한두 명이 아니었기에 모두에게 사과하기를 바랐다.
“혹시라도 이런 처사가 심하다고 생각할지 몰라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교장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을 비롯한 가해 학생들과 부모님들이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제 딸, 설래는 가해 학생들이 저지른 폭력으로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재천의 발표가 끝난 뒤, 교장은 속으로 꽤 놀라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교편을 잡으면서 학교폭력을 처음 겪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피해 학생 부모가 이렇게까지 철저하고 확실하게 모든 상황을 정리해 갖고 온 적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교장도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그때, 가해 학부모 중 이라미의 아빠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잘못했으면 그에 따른 벌을 받는 게 맞습니다. 내 자식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한 건데 설래와 희영이 부모님들께 면목이 없습니다. 저도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 학교폭력을 뉴스로 볼 때마다 내 자식은 저런 일은 겪지 않을까 했지, 누군가를 괴롭힐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애들 장난이라고 한 번만 봐 달라고 했던 이라미 엄마와 달리, 아빠는 옳고 그름을 아는 진짜 어른이었다.
그는 그 어떤 변명거리도 대지 않고 자식의 잘못과 부모로서 자기 잘못까지 빌었다.
“이건, 우리 라미와 친구들이 백 번 잘못한 게 맞습니다. 저와 집사람이 바쁘다는 핑계로 자식 관수를 잘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라미!!”
이라미 아빠는 딸을 보고 분개하며 소리를 높였다.
아빠를 무서워하는 이라미는 화들짝 놀라며 바로 반응했다.
“네! 네, 아빠.”
“라미랑 너희 모두 다 제대로 사과해. 너, 그리고 앞으로 기획사 나가서 배우 되겠다는 소리 하지 마. 친구들 괴롭힌 사람이 무슨 배우야! 넌 대중 앞에 설 자격 없어.”
이라미는 아빠의 외침에 그 어떤 반박조차 하지 못하며 설래와 구희영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모든 일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걸, 가해 학생들은 그 당연한 사실을 오늘 깨달았을 것이다.
그 후, 교장은 징계위원회를 급히 열어 이번 일에 심각성을 느끼고 가해 학생들을 강제 전학시키는 것은 물론 이재천의 요구사항을 전부 수용하기로 했다.
김하선과 이재천, 구희영의 부모는 가해 학생에게 다시는 아이들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서약서와 학교 측 약속을 받고 돌아갔다.
설래와 구희영은 다시 교실로 돌아가 수업에 참여했지만, 가해 학생들은 수업에 참여할 수 없었다.
“저희는 그동안 학교에 다니면서 아이들을 괴롭혔고 사과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번 일로 강제 전학을 가게 됐으며, 앞으로 그 누구도 괴롭히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친구야, 미안해.”
이라미와 무리는 설래 앞에서 직접 썼던 사과문을 들고 같은 반을 시작으로 모든 학급을 돌며 사과했다.
몰려드는 민망함과 수치스러움에 그들은 고개조차 들지 못했으며 눈물을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이런 행동을 한다고 해서 가해자들이 한순간에 마음을 고쳐먹고 새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의 머릿속에 두 번 다시는 이런 일을 하면 안 되다는 교훈은 제대로 새겨졌을 것이다.
“설래야?”
모든 수업이 끝나고 교문을 나서는 설래를 구희영이 불렀다.
“이설래? 너 그거 봤어? 지금 난리 났어.”
“무슨 난리?”
“이거 봐!”
구희영은 핸드폰을 꺼내 메신저 대화 내용을 보여 줬다.
다른 학교에 다니는 친구가 보낸 내용은 고등학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익명 게시판으로, 이라미 무리의 학폭 사건이 올라온 글이었다.
“내 친구가 그러는데 이미 인근 학교에 소문이 벌써 퍼졌대. 여기 조회수 보이지. 투데이 베스트에도 오르고 난리도 아니야.”
아까 가해 학생들이 학급을 돌며 사과할 때 몇몇 아이들이 영상과 사진을 찍었고, 그걸 게시판에 올렸다.
댓글은 수천 개가 넘어갔고, 분노한 글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이 어느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될지 미정이었지만, 아마 학교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기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장난 아니지?”
“예상했던 일인데 뭐. 원래 나쁜 짓 하면 다 벌 받게 되어 있어.”
“설래야, 너 진짜 멋있는 거 같아.”
“뭐래. 나 하나도 안 멋있어.”
“맞다! 이번에 도와줘서 고마워. 너 때문에 나도 사과받고 앞으로 학교생활 잘할 수 있게 된 거 같아.”
구희영은 설래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혼자서는 절대 하지 못했을 일이었기에 고마운 마음이 더 컸다.
“아니야. 내가 보기에는 너 원래 학교생활 잘했어.”
“저기, 떡볶이 먹고 가지 않을래? 내가 쏠게.”
“안 돼. 나, 병원 가야 해. 떡볶이는 내일 먹자.”
“정말? 그래. 그런데 우리 이제 친구야?”
“몰라.”
“야, 나랑 친구 하자. 귀찮게 안 할게.”
“벌써 귀찮거든.”
“너 친구 안 해 주면 더 귀찮게 군다.”
“참나! 알았어. 친구 하자.”
모처럼 설래와 구희영의 얼굴 위로 미소가 가득했다.
학교폭력은 이유를 막론하고 정당화될 수 없는 문제다.
두 사람은 이번 일로 다시는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들이 나오지 않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