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0화. 거북이의 성장
학교에서 돌아온 설래는 저녁에 학원에 가는 대신 김하선과 함께 우리병원을 찾았다.
처방받은 약을 복용 후 변을 보긴 했지만, 단추가 나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선생님, 좀 어때요?”
“여기, 엑스레이 보이시죠?”
김하선의 질문에 최모나가 엑스레이 화면을 보여 줬다.
“변이 어제보다는 줄어들긴 했는데 말끔하게 배출되지 않았어요. 보시면 단추도 변과 함께 남아 있는 상태고요. 설래야? 아무래도 관장을 좀 해야겠다.”
“네, 관장이요?”
김하선과 함께 엑스레이를 보고 있던 설래는 ‘관장’이란 말에 긴장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솔직히 말해서 관장은 하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 저, 꼭 관장해야 해요?”
“약 복용하고 단추가 나왔으면 안 해도 되는데 안 나와서 해야 할 거 같아. 그런데 너무 걱정할 거 없어. 이게 막 무섭거나 아픈 게 아니야.”
“그래, 선생님 말씀 맞아. 아줌마도 관장해 봤는데 변이 막 나올 거 같은 느낌 때문에 그렇지 아프지는 않아.”
“정말이요?”
“그럼.”
한 번도 안 해 본 사람들은 관장에 대한 두려운 생각이 있지만, 막상 해 보면 다른 시술에 비해 아프거나 많이 힘든 건 아니었다.
물론 항문을 통해 관장약을 넣고 기다려야 하는 게 좀 힘들긴 하지만, 변을 배출하고 나면 개운하다.
“설래야. 이렇게 생각해 봐. 관장을 해도 단추가 안 나오면 그땐 내시경으로 빼내야 하는데, 그거보다는 낫잖아. 그렇지?”
“그건 그래요.”
곰곰이 생각하던 설래는 최모나 말에 동의했다. 관장보다는 내시경이 더 무서웠기 때문이다.
“옷 갈아입고 있으면 간호사 선생님이 와서 도와주실 거야.”
“네.”
잠시 후, 임정숙 간호사가 와서 관장을 도와줬다.
“베드 위에 엎드린 자세로 힘 빼고 있으면 돼.”
“선생님, 약 들어갈 때 많이 아파요?”
“약 들어갈 때는 아프지 않아. 약 들어가고 난 뒤에 점점 화장실 가고 싶은 느낌이 들 거야. 그렇다고 바로 가면 안 되고 5분 정도 참고 가야 변이 잘 나올 수 있어. 알았지?”
“네.”
임정숙 간호사의 도움으로 관장약을 넣자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장실을 가고 싶은 느낌이 빠르게 들었다.
정말이지 무슨 순식간에 변의가 느껴졌는데 어찌나 빠르게 느낌이 오는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렇게 설래는 가까스로 5분을 참고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
철컥-
“설래야, 어떻게 됐어?”
잠시 후 화장실을 나온 설래를 보며 앞에서 기다리던 김하선이 물었다.
“시원하게 볼일 봤어요.”
“그래? 잘됐다. 단추는? 단추는 나왔어?”
묵은 변이 나온 것도 잘된 일이지만, 사람들은 관심은 온통 단추에 있었다.
“네, 단추도 잘 나왔어요.”
설래는 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변과 함께 나온 단추가 얼마나 반가운지 속이 다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선생님, 저 단추 나왔어요.”
다른 환자 진료를 보고 다가오는 최모나를 보며 설래가 말했다.
“그래? 확실하지?”
“그럼요.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어요.”
“다행이네. 관장까지 하면서 단추 빼느라 애썼다.”
“아니에요.”
“병원 선생님들께서 잘 진료해 주신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김하선은 마치 제 일처럼 기뻐하며 최모나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저도 감사해요. 선생님 덕분에 힘들었던 일도 잘 해결할 수 있었어요.”
설래는 의국실에서 최모나가 했던 진심 어린 조언으로 인해 마음의 문을 열고 답답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었다.
“내가 했다기보다는 너, 스스로 용기를 냈기 때문에 결과가 좋았던 거야. 봉합한 곳은 잘 아물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앞으로 몸에 좋은 것만 먹기다. 알았지?”
“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정말 감사했어요.”
“아닙니다. 들어가세요.”
두 사람은 최모나와 인사 후 진료비를 수납하고 병원을 나섰다.
처음 병원에 상처를 치료하러 왔을 때와 비교하면 설래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편하고 밝아 보였다.
“단추가 잘 나온 건 말할 것도 없고 아이 얼굴에 근심이 없어져서 그게 참 좋네요.”
임정숙 간호사 역시 아이를 키우는 엄마였기에 이번 일이 잘 해결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설래 괴롭혔다던 가해 학생들 처벌은 받았대요?”
“네. 설래 어머니가 그러시는데 남편분이랑 학교 찾아가서 잘 해결하고 처벌받을 수 있게 조치하셨대요.”
“잘됐다.”
“처벌 정도가 아니에요.”
응급실 스테이션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간호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제 사촌 동생이 설래 학생이랑 같은 학교인데 가해자들 싹 다 전학 가고 온라인에 신상 다 털려서 기획사 연습생이었던 내는 퇴출당하고 난리도 아닌가 봐요.”
불과 몇 시간 만에 온라인에 퍼진 학교폭력 글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가해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중학생 동창들의 증언이 이어지며 이라미 무리는 전국적으로 학폭의 낙인이 찍혔다.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을 괴롭히고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면 반드시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당연한 사실을 가해자들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최 선생?”
태경이 응급실로 들어오며 최모나를 불렀다.
“네, 선생님.”
“수고했어.”
“네, 뭐를…….”
별안간 수고했다는 말에 최모나는 말끝을 흐렸다.
태경이 무언인가를 시킨 일도 없었고, 그렇다고 수고했다는 말을 들을 만한 일을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전혀 모르겠다는 눈치네. 이설래 환자 잘 마무리한 거 수고했다고.”
“아! 그게 뭐, 수고할 일인가요. 그냥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 말 못 하겠다고 진료실 찾아와서 대신해 달라고 한 사람이 누구더라. 최 선생 아니었던가?”
“그러게요. 원장님께도 말씀드리고 저한테도 와서 걱정하던 분이 최 쌤이 맞죠.”
“그때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돼서 그랬습니다.”
“진료를 잘하는 의사는 많아도 환자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의사는 많지 않아. 최 선생도 그거 때문에 힘들어했었잖아. 이번에 아주 잘했어.”
그제야 최모나는 태경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됐다.
“우리 최 쌤이 이렇게 환자를 생각하다니 제가 다 뿌듯하네요.”
“두 분 다 그만하세요. 왜들 그러십니까. 전, 병동에 좀 갔다 오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칭찬에 민망해진 최모나는 응급실을 급히 빠져나갔다.
“최 쌤이 진짜 많이 달라졌네요.”
“그러게요. 환자랑 소통하는 것도 관심 없던 친구가 저렇게 달라질 줄 누가 알았겠어요.”
“어머! 전 알고 있었는데요? 그때 원장님께서 우리 거북이 쌤들 열심히 가르치셨잖아요. 그 덕분에 우리 선생님들이 성장할 수 있었고요. 원장님께서 많이 애쓰셨죠.”
“갑자기 민망해지는데 저도 병실로 올라가면 되나요?”
“원장님은 가시면 안 되죠.”
“신환입니다.”
“네, 가 볼게요.”
태경은 멋쩍은 미소를 보이며 환자에게 향했다.
* * *
“잠시만요!”
김하선과 병원을 막 나온 설래는 가던 길을 잠시 멈췄다.
“왜? 어디 안 좋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버릴 게 좀 있어서요.”
“버릴 거?”
“이거요?”
궁금한 표정으로 물어보는 김하선을 향해 설래는 주머니에 있던 상자를 꺼내 보였다.
그 상자는 단추와 작은 조각들이 들어 있던 아크릴 상자였다.
“이 상자 버리고 가려고요.”
설래는 김하선이 보는 앞에서 그 상자를 버리고 싶었다.
쓰레기통에 버림으로써 다시는 음식이 아닌 물건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안 그래도 물어보고 싶었는데 아줌마 보는 앞에서 버려 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저 오늘은 학원 안 가고 집에서 공부할게요.”
“설래야. 그럼 아줌마랑 잠깐 요 앞 카페에 좀 들렀다 갈까?”
“카페요? 아줌마 커피 안 드시잖아요.”
집에서도 커피 마시는 걸 본 적이 없었기에 갑자기 웬 카페인가 싶었다.
“내가 아니라 설래를 보고 싶어 하는 분이 기다리고 있어서.”
“절 보고 싶은…….”
자신을 보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려던 사람은 그 사람이 누군지 알 거 같았다.
“표정 보니까 누군지 눈치챘구나?”
“엄마가 오셨어요?”
“맞아.”
“정말 우리 엄마가 왔다고요?”
설래는 좀처럼 믿기 어려운 표정을 되물었다.
“그렇다니까. 가자.”
두 사람은 병원 근처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얼른 들어가 봐. 엄마가 기다리고 계실 거야.”
“아줌마는요? 같이 안 들어가세요?”
“응. 아줌마는 뭐 좀 사 올 것도 있고, 엄마랑 편하게 이야기해.”
“네.”
설래는 카페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그곳에는 엄마. 그토록 보고 싶던 친엄마가 있었다.
“설래야? 어서 와.”
고수이는 설래를 보자마자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우리 딸, 딸기 주스 좋아해서 엄마가 미리 시켰어. 괜찮지?”
“응. 엄마가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새엄마한테 이야기 듣고 설래 보려고 왔지.”
오늘 아침 김하선은 무작정 고수이를 찾아가 설래의 이야기를 전했다.
지금까지의 일을 전혀 모르고 있던 고수이는 깜짝 놀랐다.
그동안 개인적으로 준비했던 일이 있었기에 오직 그 일에만 열중하느라 딸에게 닥친 일도 알지 못 못했다.
고수이는 그제야 설래가 보낸 사진과 문자를 보며 딸이 힘든 시간을 보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일이 바빠도 이대로 있을 수 없었기에 두 사람이 병원 오는 시간에 맞춰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바쁜 거 아니었어?”
“바쁘지. 그런데 다른 일도 아니고……. 엄마가 와 봐야지. 설래야 너 괜찮아?”
“괜찮아. 아빠랑 아줌마가 학교 와서 잘 해결했어.”
“아빠가 그러는데 다쳤다고 들었어. 사진도 봤고 치료는 잘된 거야?”
“응. 병원에서 치료받았어. 봉합했는데 잘 아물고 있다고 걱정할 거 없대.”
그토록 엄마를 만나고 싶었던 설래는 막 설레거나 들뜨기보다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엄마를 만나면 산더미처럼 쌓인 말들을 밤새도록 하고 싶었는데, 막상 준비했던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까지 차분한 스스로에게 놀라울 정도였다.
“다행이다. 그동안 엄마랑 만나지도 못하고 연락도 잘 안 되고 많이 속상했지.”
“솔직히 엄마한테 서운하긴 했어. 연락도 안 되고 날 찾지도 않은 엄마가 미웠어.”
설래는 담아 두지 않고 엄마에게 가졌던 감정을 고백했다.
“맞아. 그랬을 거야. 엄마가 미안해. 연락이 안 된 일뿐만 아니라 이혼 일도 미안해. 설래가 원하지도 않았던 이혼을 엄마, 아빠 마음대로 정해서 네가 제일 힘들어한 거 같아. 설래야, 사실 있잖아. 이 말을 나중에 하려고 했는데 오늘은 꼭 말해야 할 거 같아.”
잠시 멈칫하던 고수이는 시원한 커피로 목을 축인 뒤 말을 이었다.
“엄마랑 아빠가 이혼한 이유 궁금했지?”
설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랑 엄마 이혼은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외도나 이런 문제가 아니고 뭐랄까 좀 특이하다고나 할까? 아빠는 끝까지 반대했는데 엄마가 이혼하자고 했어.”
“엄마가? 왜?”
“정말 솔직히 말하면 내가 엄마로서의 삶이 좀 버거웠던 거 같아.”
고수이는 설래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차분하게 속내를 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