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461화 (460/472)

461화. 시장통

이재천을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여 설래를 낳아 살았지만, 삶이 행복하지 않았다.

“왜 행복하지 않았는데?”

설래가 알고 있는 한 아빠와 엄마는 겉으로 보기에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한 번도 아빠나 엄마가 목소리를 높인 걸 본 적도 없었고 서로에게 짜증을 내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평범하지만 행복한 그런 가정의 모습이었다.

“혹시 내가 모르는 게 있는 거야? 아빠나 내가 엄마를 힘들게 했어?”

“아니. 전혀. 아빠는 정말 좋은 사람이고 설래도 엄마의 딸인 게 과분할 정도로 사랑스러운 딸이지.”

“그런데 왜?”

“엄마가 문제야.”

“그게 무슨 소리야?”

“엄마가 더 이상 아빠를 사랑하지 않았고, 엄마로 살고 싶지 않았어.”

고수이는 이재천을 사랑했지만, 결혼하자는 그의 말에 많이 망설였다.

본인은 가정을 꾸려 잘 살 수 있는 그런 성향의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은 연애 시작부터 이재천에게 말했었고, 그도 알았다고 했다.

두 사람은 다른 연인처럼 뜨겁게 사랑했고, 시간이 지남의 따라 고수이의 단호했던 마음도 점차 옅어졌다.

그러다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 고수이가 임신을 한 것이다.

이재천은 사랑하는 그녀에게 청혼했고 고수이는 망설이다 수락했다.

성인이고 서로가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 연인인 상태에서 생긴 아이였기 때문에 서로에게 책임을 지고 함께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결혼 생활이 쭉 이어졌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고수이는 이 생활을 지속하는 게 어려웠다.

특별히 모날 것이 없는 평범한 하루였지만, 주부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삶이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사는 인생인데 본인만 유난을 떠는 거 같아 이런 마음을 누르고 또 눌렀다.

일을 하면 달라질까 했지만, 쉽지 않았고 더 이상 이재천을 사랑하지도 않았다.

더 이상 어느 곳에 속한 소속감으로 살기가 버거웠다.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고수이는 모든 마음을 이재천에게 털어놓았다.

조금씩 달라지고 있던 아내의 모습을 보고 눈치를 채고 있던 그는 반대하다가 결국 고수이의 놓아주기로 했다.

협의 이혼이었으며 대신 친권과 양육권은 모두 남편에게 주었다.

딸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당연히 사랑했지만, 본인이 우선인 자신보다 더 잘 키울 수 있는 사람이 이재천이었기에 모두 주었다.

고수이는 끊어졌던 커리어를 쌓기 위해 이혼 후 일에 매달렸고, 힘들지만 생활에 만족했다.

일하기 시작하면서 본인이 줄 수 있는 선에게 설래의 양육비를 보냈다.

이재천은 안 받겠다고 거절했지만, 엄마로서 할 도리를 하고 싶었다.

“엄마 말 들고 많이 놀랐지?”

고수이는 하나도 빠짐없이 딸에게 전부 말했다.

다른 엄마들과 다른 본인의 모습을 보고 딸이 실망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속이기 싫었다.

“아빠는 이혼할 때 이 사실을 설래에게도 말해야 한다고 했지만, 엄마가 반대했어. 이유는 아직 설래가 어리다고 생각해서 그랬어. 나중에 대학교 가면 그때 말하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아빠 말처럼 설래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닌데 엄마가 잘못 생각했던 거 같아. 엄마 많이 밉지?”

설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연락도 없고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것만 같은 생각에 한때는 엄마가 미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오히려 엄마의 진짜 속마음을 알고 나니 속이 후련했고, 엄마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설래를 힘들게 해서 미안해. 남들처럼 평범한 엄마로 살지 못한 것도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아니야. 그건 엄마가 미안해할 일이 아닌 거 같아. 예전에 친구가 나한테 왜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냐고, 공부가 재미있냐고 그래서 나는 진짜 재미있고 좋아서 한다고 한 적이 있어.”

“우리 설래는 공부가 좋아서 하는 거 엄마는 알지. 너 싫어하는 건 절대 못 하잖아.”

“맞아. 난 공부가 싫거나 재미없으면 꼴등 하는 일이 있어도 안 했을 거야. 엄마도 그런 거라고 생각해.”

“……!”

“나도 싫은 건 절대로 안 하는데 엄마라는 이유로 싫은데 억지로 살 수는 없잖아. 행복하기 위해 사는 세상인데 엄마가 힘들게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설래는 진심으로 엄마를 이해했고, 몸이 자란 만큼 생각도 자란 어른이 되고 있었다.

“엄마도 엄마의 삶이 있는 거잖아. 난 엄마가 날 잊은 게 아니고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거. 그 마음 알았으면 됐어. 그거면 충분해.”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우리 딸이 엄마보다 더 어른스럽고 좋은 사람이네. 설래야. 앞으로 엄마랑 살래?”

고이수는 김하선에게 설래가 엄마를 많이 그리워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재천과 충분히 상의했고 설래가 원한다면 함께 살아도 좋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아니.”

“왜, 혹시 엄마 이야기 들어서 그런 거야? 그런 거라면…….”

“아니야. 엄마. 그런 것 때문이 아니야.”

엄마랑 살고 싶었지만, 더는 아니었다. 만약 지금 이대로 엄마를 따라간다면 진짜 힘들 때 옆에 있어 준 김하선에게 두고두고 미안할 거 같았다.

무엇 보다 설래도 김하선과 잘 지내고 싶었다.

“나 새엄마랑 지내고 싶어. 그래도 돼?”

“당연하지.”

“대신 엄마 쉬는 날 자주 놀러 갈게.”

“그래. 엄마도 자주 연락할게. 엄마가 해 준 것도 없는데 잘 자라 줘서 고마워.”

친엄마의 진심을 알게 된 설래는 마음속에 남아 있던 작은 먼지를 모두 털어내고 완전히 깨끗해진 것만 같았다.

“설래야, 엄마가 집까지 데려다줄까?”

한참 동안 밀린 대화를 마치고 함께 카페를 나온 고수이가 물었다.

“아니야, 엄마. 나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새엄마가 기다리는구나?”

“응. 같이 들어가려고.”

“그래, 조심히 들어가고 전화할게.”

친엄마의 헤어진 후 설래는 김하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줌마 어디 있어요? 네. 저 지금 카페에서 나왔어요.”

잠시 후, 시장에서 반찬을 사 온 김하선이 빠르게 카페로 돌아왔다.

“왜? 벌써 나왔어? 엄마랑 저녁 먹고 오늘 같이 자기로 한 거 아니야?”

설래는 카페에서 고수이에게 김하선에 관한 놀라운 사실을 들었다.

이재천은 재혼을 결정할 무렵 고수이에게 재혼 사실을 알렸다.

당연히 재혼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괜찮다고 했다. 다만 재혼 상대가 설래와 잘 지낼 수 있도록 부탁한다고 전했다.

그 말에 며칠 뒤, 고수이는 핸드폰으로 사진 한 장을 받았다.

자필로 쓴 장문의 손편지였는데 김하선이 보낸 거였다.

내용은 사랑스러운 설래의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아이를 기르겠다는 내용이었다.

고수이는 그 편지를 보며 좋은 사람이라는 것과 함께 이런 사람이라면 내 딸을 많이 사랑해 주겠구나 싶어서 안심됐다.

설래는 엄마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솔직히 마음이 좀 뭉클했다.

“표정이 왜 그래?”

김하선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며 아무 말 하지 않는 설래에게 다시 물었다.

“엄마랑 이야기가 잘 안 됐어?”

“아니요. 잘됐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일찍 나온 거야? 엄마는 갔어?”

“네, 다음 주 주말에 가기로 했어요. 새엄마, 반찬 뭐 샀어요?”

“너, 제육 좋아하잖아. 내일 고추장 불고기…….”

무심코 장 본 재료를 말하던 김하선의 말이 뚝 끊겼다.

방금 뭔가 들은 거 같은데 본인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설래야 너, 방금 뭐라고 했어?”

“새엄마라고 했어요.”

“아줌마한테 새엄마라고 한 거야? 맞아?”

“네……. 아줌마라는 표현은 잘못된 거잖아요. 엄마라는 호칭은 익숙해지면 천천히 할게요.”

“이거 꿈 아니지? 세상에! 설래가 나한테 새엄마 소리를 하다니……. 아줌마 지금 기분 너무 좋은 거 알아?”

“네, 정말 좋아 보여요.”

“얼른 가자! 가서 맛있는 저녁 먹자. 뭐 먹고 싶은 거 더 없어?”

“새엄마가 해 주는 거면 다 맛있어요.”

설래에게는 엄마가 두 명이다.

친엄마와 새엄마.

엄마가 두 명이라고 하면 남들은 조금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두 엄마와 함께 설래는 앞으로 건강하고 즐겁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함께 버스에 오른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즐거운 대화를 주고받으며 집으로 향했다.

김하선과 함께한 설래의 얼굴에서는 더 이상 어색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행복이라는 건 어쩌면 거창한 게 아니라 이런 사소한 건 아닐까 하며 엄마도 새엄마도 모두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라고 설래는 생각했다.

* * *

우리병원-

“최 선생 수고했어.”

저녁을 먹고 잠시 의국실로 들어온 이찬희가 노트북으로 자료를 찾고 있던 최모나 옆에서 장난치고 있었다.

아까 응급실에서 태경의 칭찬에 부끄러워하던 최모나의 모습을 보며 태경의 모습을 따라 하는 중이다.

“…….”

“전혀 모른다는 눈치네.”

“그만해.”

“이설래 환자 잘 마무리한 건 수고……헉!”

계속 장난치던 이찬희는 결국 옆구리를 쿡 찌르고 나서야 장난을 멈췄다.

“아! 아파. 모나야 너무 아프다.”

“그러니까 그만하라고 했잖아. 가끔 이 선생 장난칠 때 보면 애 같은 거 알아?”

“알지. 우리 할아버지가 그러시는데 원래 남자는 태어나 죽을 때까지 애같이 산다고 하셨어.”

“아니, 그런데 오늘 왜 이렇게 신났어? 뭐 좋은 일 있어?”

“그럼. 있지. 아까 여자 친구의 귀여운 모습을 봐서 그런지 기분이 좋네.”

“귀엽긴 무슨! 내가 말을 말아야지.”

“과연! 이걸 보고도 말을 안 할 수 있을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모니터에 집중하는 최모나를 향해 이찬희가 옆을 지나가며 서랍을 열었다.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서랍을 보자 달달한 젤리가 종류별로 가득했다. 전부 최모나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젤리였다.

“뭐야? 이거 전부 산 거야?”

“너, 그거 좋아하잖아. 이번에 신제품 나온 거라고 해서 직구로 주문했어.”

“뭐야. 역시 남자 친구가 최곤데!”

“당연하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사귀기 시작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익숙하고 든든한 존재가 되고 있었다.

“이 선생, 고마워.”

“고맙긴. 하나 먹어 봐.”

이찬희의 말에 젤리 봉지를 하나 집어 올리던 그때 책상 위에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Rrrrrrrr

“네. 아, 그래요? 바로 가겠습니다.”

“응급실?”

“어, 선생님 정 쌤이랑 수술실 좀 일찍 들어가셨대. 근데 좀 이상한 소리를 하시네.”

“무슨 소리?”

“ER 지금 시장통이라는데?”

방금 전화를 받자마자 간호사는 시장통에 난리 났다며 빨리 오라는 말을 전했다.

“그래? 신환들 몰렸나 보네. 바로 가자.”

두 사람은 하던 일을 멈추고 바로 응급실로 넘어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오늘 응급실이 공포의 소굴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야! 이 짐승만도 못한 년아!”

“야, 이 미친x아? 네가 할 소리는 아니지? 나만 짐승이야!”

응급실에 가까워져 올수록 살벌한 욕설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엄마!!”

그러더니 곧이어 목 놓으라 통곡하며 엄마를 찾는 목소리도 들렸다.

이찬희와 최모나는 오늘 뭔가 쉽지 않겠다는 확신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응급실 안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수 쌤, 어떻게 된 거예요?”

“최 쌤 조심하세요!”

순간 최모나 쪽으로 뭔가 날아오자 이찬희가 그걸 받았다.

잡은 물건을 확인해보니 눈 화장을 할 때 사용하는 아이섀도 팔레트였다.

“수 쌤!”

이번에는 임정숙 간호사 쪽으로 날아오는 물건을 최모나가 잡았다.

“이게 뭐지?”

“전자 담배네.”

최모나의 질문에 이찬희가 답했다.

손가락 굵기보다 약간 굵고 기다란 것이 전자 담배기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저기, 8번 9번 베드 보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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