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3화. 공포 그 자체
-우리 사랑하는 준현이 준혁이 잘 놀고 있어?
“응. 잘 놀고 있어.”
아이들은 출장 간 엄마에게 걸려 온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다.
-밥 먹었어?
“할머니가 불고기랑 맛있는 거 많이 해 주셔서 맛있게 먹었어. 엄마 일 힘들어?”
-아니. 우리 쌍둥이 생각하니까 하나도 안 힘들어. 엄마 일 열심히 하고 내일 보자. 저녁에 아빠 오실 거야.
“응, 엄마 사랑해.”
“사랑해요.”
-엄마도 우리 준현이, 준혁이 사랑해.
엄마와 영상 통화를 마친 쌍둥이는 하던 놀이에 열중하고, 할머니는 전화기를 가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얘? 영지야?”
문을 닫은 할머니는 조용한 목소리로 딸과 영상 통화를 이어 갔다.
-엄마, 힘들죠? 미안.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네, 아빠랑 나는 우리 쌍둥이 보는 낙에 살아.”
-세상에서 애 보는 게 제일 힘드니까 그렇지.
“내 새끼 힘든 것보다는 내가 힘든 게 나아. 괜찮아. 그보다 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 엄마가 따로 방에 들어왔어.”
-할 말? 왜요? 애들이 사고 쳤어?
이영지는 쌍둥이가 워낙 활동적이고 개구쟁이인 아이들이기 때문에 혹시 부모님을 곤란하게 한 건 아닐까 싶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준현이가 좀 아파.”
-아프다고?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요?
아이가 아프다는 말에 이영지의 표정 위로 순식간에 걱정이 더해졌다.
“배탈인지 장염인지 화장실을 계속 들락거린다. 아까 달래서 약은 먹였는데 소용이 없는 거 같아.”
-설사? 어제저녁에도 평소보다 화장실을 자주 가는 거 같아서 물었더니 절대 아니라고 막 그러더라고.
“아무래도, 아까 준혁이가 아이스크림 먹는 걸 자기도 먹고 싶다고 하도 사정하길래 조금 먹게 했는데 그거 때문인 거 같아. 어떡하니?”
할머니는 약을 먹으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크게 효과가 없자 괜히 손주가 아픈 게 본인 탓인 것만 같았다.
-엄마도 참. 엄마 탓 아니야. 그리고 둘이 고집부리면 남편이랑 나도 못 말려. 어릴 때는 병원 자주 가잖아요. 괜찮아요.
이영지는 당연히 아들이 걱정됐다.
가뜩이나 남편은 중요한 회사 일정으로 업무 중이었고 자신은 출장 중이었기 때문에 그 마음이 더했다.
하지만 늘 쌍둥이를 사랑으로 봐주시는 분들이 부모님인 걸 알기 때문에 부모님 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준현이의 고집을 알기 때문에 아무리 할머니가 말렸어도 결국에는 먹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제부터 뭔가 증상이 보였지만, 남편도 자신도 워낙 정신이 없어서 잘 살펴보지 못한 본인 잘못이 더 컸다.
“내 생각에는 병원을 데려가는 게 좋을 거 같아.”
-병원 가는 게 좋지. 엄마, 그냥 주변에 응급실 있는 병원 있으면 응급실로 데려가서 진료 보세요. 근데, 응급실이 대기 시간이 길어서 기다리기 힘드실 수 있어요.
“그런 건 걱정하지 마. 아빠랑 엄마 다니는 병원에 응급실 있어.”
-근데, 엄마? 괜찮겠어?
“뭐가?”
-준현이랑 준혁이 둘 다 병원 데려가는 게 정말 힘들어요. 남편이랑 나도 병원 한 번씩 데려갈 때마다 진을 뺀다니까.
젊은 사람이자 엄마인 자신도 아이들 병원 가는 게 전쟁일 정도로 엄청난 일이었다.
그런데 나이가 있으신 부모님이 말썽꾸러기들을 데리고 병원을 잘 갈 수 있을지 생각하니 속이 답답했다.
“뭘, 그런 걸 다 걱정하고 그래. 아빠랑 내가 잘 데려갈게.”
-엄마! 내 아들이지만, 둘 다 보통 아니야. 그이한테 좀 빨리 올 수 있는지 연락해 볼까?
“아서라. 아서! 유 서방도 일하느라 바쁜데 왜 연락을 해. 자식 셋 키운 엄마 경력만 몇십 년이야. 잘 데려갈 테니까 엄마한테 맡겨.”
-알았어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세요.
“그래, 알았다.”
딸과 전화를 끊은 할머니는 방으로 할아버지를 불러 머리를 맞대며 쌍둥이를 자연스럽게 병원에 데려갈 방법을 모색했다.
할아버지와 이야기한 할머니는 준현이에게 병원 간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말하기로 했다.
어차피 병원에 간다는 것 자체가 아이에게는 스트레스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병원 가는 걸 숨기는 건 굳이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병원 가는 사실을 몰랐다가 도착해서 알게 되면 현장에서 더 난감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도 처음부터 말을 하는 게 좋을 거 같아.”
“그렇죠? 나도 그래요.”
조부모는 아이가 떼를 쓰지 않고 고집부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병원에 갈 괜찮은 방법이 떠올랐다.
“준현아, 준혁아?”
거실로 나온 두 사람은 A4 종이 한 장과 볼펜을 들고 쌍둥이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즐겁게 게임을 하는 준혁이와 달리 자주 화장실을 다녀온 준현이는 침대에 누워 기운이 없어 보였다.
“준혁아. 게임 그만하고 할아버지 할머니랑 이야기 좀 할까?”
“조금만 더 하면 안 돼요?”
“오늘은 게임 많이 했잖아. 재미있는 거 할 거니까 얼른 와.”
“네.”
“준현이 많이 힘드니?”
“아니요. 저 아무렇지 않은데요.”
침대에 누워 있던 준현이는 배가 아픈 티를 내지 않으며 몸을 일으켰다.
“할머니, 준현이 또 화장실 갔다 와서 배 아프대요.”
“유준혁! 아니거든! 너 조용해.”
“둘 다 그만하고 여기 종이 보이지?”
할아버지는 들고 온 종이를 보이며 아이들의 흥미를 이끌었다.
“네, 종이접기 하시려고요?”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부터 여기다가 준현이 준혁이가 가장 갖고 싶은 거 하나씩 적어 봐.”
“갖고 싶은 거요?”
“장난감도 돼요?”
“그럼. 뭐든 다 돼. 대신 제일 갖고 싶은 거 하나만 적어야 한다.”
장난감도 된다는 말에 쌍둥이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고민했다. 장난감이 하나 갖고 싶어도 집에 많다고 부모님은 잘 사 주지 않았다.
내년에 학교에 들어간다고 장난감보다 책을 사 주기도 해서 생일이 아니면 장난감을 새로 사는 건 어려웠다. 그래서 그런지 쌍둥이는 기분이 좋았다.
설사와 복통으로 배가 아픈 준현이도 장난감을 가질 수 있다는 말에 지친 표정에 생기가 돌았다.
아이들은 고민할 것도 없이 요즘 유명한 만화영화에 나오는 레이싱 자동차 모형을 적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우주 특공대 자동차 세트 갖고 싶어요.”
“준혁이도요.”
“그래? 그럼, 할아버지 할머니가 둘 다 이거 사 줄게.”
“정말이에요?”
선뜻 장난감을 사 준다는 말에 쌍둥이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정말이지. 대신 할아버지랑 장난감 사러 가기 전에 병원에 가서 준현이 진료 보고 나오면. 그때 사 줄게.”
“벼, 병원이요! 안 돼요!”
그 말에 준현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강하게 부정했다.
“아까, 할머니가 약 먹으면 병원 안 간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병원에 가요.”
“준현아. 할머니 말 한 번 들어봐 줄래? 그게 약을 먹고 괜찮으면 안 가도 되는 게 맞아. 이 말은 할머니가 아까 했잖아. 그렇지?”
준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준현이가 약을 먹어도 계속 화장실 가고 배가 지금도 아프잖아. 준현이가 말을 안 해도 할머니랑 할아버지는 너 배 아픈 거 다 알고 있었어.”
“할머니 말이 맞아. 할아버지도 예전에 어릴 때 배가 아팠는데 병원 무서워서 참았다가 더 아파서 아주 고생했어.”
“할아버지 왕 큰 주사 맞았어요?”
옆에 있던 동생 준혁이가 궁금한 듯 말을 이었다.
“엄마가 아픈 거 참으면 왕 큰 주사 맞는다고 했는데, 그거 거짓말이죠?”
“아니야. 진짜야. 할아버지도 괜히 참았다가 왕 큰 주사 맞았다니까.”
왕 큰 주사라는 말에 준현이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저도 가서 왕 큰 주사 맞을 거예요?”
“아니지. 우리 준현이는 왕 큰 주사 맞는 게 아니라. 가서 의사 선생님이 진료 보시고 약 받으러 가는 거야.”
“집에 약 있잖아요.”
“아까 먹은 약으로 치료가 안 되니까 다른 약을 먹어야지. 우리 강아지들이 좋아하는 자동차 종류가 많잖아? 약은 그 종류가 훨씬 많아.”
“준현아?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준혁이랑 병원 갔다가 장난감 사러 가자. 응? 그래도 엄마, 아빠랑 병원 가는 것보다는 우리랑 가는 게 낫지 않을까?”
“그래, 준현아. 내가 손 꼭 잡아 줄게. 우리 가자.”
이미 머릿속에 자동차가 그려진 준혁이는 온 힘을 다해 형을 설득했다.
“엄마, 아빠랑 같이 가면 막 엄마한테 잔소리 듣고 장난감도 안 사 주시잖아”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준현이는 동생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가서 약만 타면 갖고 싶은 장난감이 생긴다니 솔직히 마음이 많이 흔들렸다. 병원은 정말 싫었지만, 우주 특공대 자동차는 진심으로 갖고 싶었다.
“할머니, 대신 가서 주사는 안 맞는 거죠?”
“그럼, 주사는 안 맞지.”
“주사 안 맞으면 갈게요.”
“정말? 잘 생각했다.”
결국 자동차 세트를 갖고 싶은 준현이는 마음이 움직였다.
“얼른 옷 입고 가자.”
* * *
잠시 뒤, 쌍둥이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우리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접수처에서 접수를 마치고 쌍둥이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응급실 대기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 여기 좀 빨리 봐줘요.”
“11번 베드 환자 CT 촬영 있습니다.”
“나 죽네. 아오! 나 죽어요.”
“환자분, 안 죽어요. 살기 위해 병원 오신 거니까 조금만 진정하세요.”
“아아 앙! 싫어! 엄마 집에 갈래. 주사 맞기 싫어.”
얌전히 앉아 있던 쌍둥이의 얼굴은 응급실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인해 점점 굳어가고 있었다.
딱히 특별할 것 없이 응급실 내부에서 들려오는 일상적인 소리였지만, 어린아이들에게는 그 소리가 공포 그 자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얼굴에 피를 뚝뚝 흘리며 119구급대원과 함께 들것에 실려 온 환자. 아픈 환자로 인해 예민하게 소리치는 보호자.
붕대를 감고 팔에 수액 바늘을 꽂은 채 온 힘을 다해 울고 있는 어린 환자까지.
그야말로 응급실 모든 장면이 두렵고 무서웠다.
불과 병원에 들어오기 직전까지 씩씩한 모습이었던, 쌍둥이는 겁에 질린 토끼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 강아지들 왜 이렇게 조용해?”
“할머니, 그냥 집에 가면 안 돼요? 병원 싫어요.”
“나도. 싫어요. 무서워요.”
쌍둥이는 장난감이고 뭐고 그냥 병원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괜찮아. 저 사람들은 많이 아파서 그런 거야. 놀랄 것 없어. 우리는 선생님만 보고 금방 갈 거야.”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어르고 달랐지만, 이미 겁에 질린 아이들의 표정은 좀처럼 풀릴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할머님, 안녕하세요.”
안내를 위해 다가온 간호사가 반갑게 맞았다.
“할아버지도 오셨네요.”
예전에 할아버지가 우리병원에서 수술한 적도 있고, 할머니는 약을 타러 가끔 오기 때문에 간호사는 두 사람을 알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간호사 선생님.”
“손주들인 가 봐요.”
“우리 막내딸 아이들입니다.”
“귀여워라. 쌍둥이죠?”
“네, 일란성 쌍둥이예요.”
“아이들이 인물이 좋네요.”
“감사합니다.”
“장염 증상으로 오셨다고요?”
“우리 손주가 설사하고 배가 아프다고 해서요. 아무래도 장염 같아서 진료 보려고 왔습니다.”
“지금 9번 베드에 가 계시면 선생님이 진료 보실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아이들과 함께 베드로 향하고 곧장 최모나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커튼을 열고 들어온 최모나는 똑같은 아이들을 보며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설사랑 복통이 있어서 왔다고요?”
“네, 약을 먹어도 똑같아서 데리고 왔습니다.”
“일단, 피검사랑 엑스레이 검사를 해 볼게요. 자! 누가 배가 아파서 왔을까?”
“준현이요.”
최모나의 질문에 할머니가 답했다.
“우리 멋진 친구 중에 누가 준현인지 손 한 번 들어 볼까?”
“…….”
베드에 나란히 앉아 있는 아이들에게 눈높이를 맞춘 최모나가 질문했지만, 쌍둥이는 조용했다.
“준현이가 누구일까?”
“야! 유준현. 너 뭐해 선생님이 부르시잖아?”
“아니에요. 선생님, 난 준혁이고 얘가 준현이에요.”
아이들이 얌전해서 어렵지 않게 진료를 보겠다고 생각한 최모나는 당황했다.
똑같이 생긴 일란성 쌍둥이 아이들이 서로를 지목하며 준현이라고 우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