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상황을 이해한 나는 허리춤에 두른 벨트에 주섬주섬 그람을 끼워 넣었다.
그때,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남성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더니 이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자신이 보인 추태가 꽤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람이 눈에 직접 보일 때만 그 효과가 나타나는 모양이군.’
겸사겸사 사용법도 대강 알았다.
‘하아, 장승민 그놈이었으면 처음부터 써먹을 방법을 잘 알았을 텐데.’
이쪽은 대략적인 건 알아도 직접 하는 게 처음이니 쉽지 않다.
게다가 게임 속으로 들어온 게 확실한 상황에 더 미칠 노릇이었다.
“뭐, 뭐, 칼까지 꼬나 쥐고 한번 해보자는 거냐. 은평구꽃미남!”
그러다 나는 눈앞에 남자를 그제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엉성한 장비.
자신이 겁먹었단 사실에 분한 표정.
특유의 허세.
게임 난이도가 높은 딥판이라고는 하나 이 녀석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잔챙이.’
게임을 시작할 때 제일 처음 만나는 그런 인물이었다.
게다가 나는 이놈이 내뱉은 말 중에 가장 거슬리는 게 있었기에 인상을 팍 일그러트렸다.
그러자 그는 좀 전의 공포가 이미 각인된 것처럼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은평구꽃미남, 한 번만 더 그따위로 날 부르면 네 입을 찢어 버릴 줄 알아.”
“뭐, 뭐?”
“백두산, 백두산이라고 부르라고.”
“배, 배그드산?”
그가 어색한 발음으로 내 이름을 말하자 나는 혀를 찼다.
이쪽 녀석들은 내 이름을 발음 못 하나.
“그냥 편하게 산으로 불러라.”
“산, 어, 뭐, 알았다.”
그는 어벙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다행히 이름은 부르라는 대로 불러주네.
혹시나 뭔가 시스템적 제약이 있어 무조건 은평구꽃미남으로 불려야 했다면…….
나는 그 즉시 창밖으로 뛰어내렸을 거다.
“그래서 넌 이름이?”
“그, 철급 모험가 잼미니이다만.”
옷차림이 꼭 보이스 스카웃처럼 스카프까지 둘러서는.
“그래, 나한테 무슨 볼일 있냐?”
“어, 그, 임무 출발일이 오늘이니까 7시까지 내려오라 했는데…….”
그는 설명해주다 말고 욱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 왜 내가 설명해야 하냐!”
임무.
그걸 듣고 나는 깨달았다.
‘이거 아마 튜토리얼이다.’
고인물들은 생략할지 몰라도 나 같이 게임 처음 하는 놈들은 무조건 해야 하는 튜토리얼 말이다.
나 역시 게임을 대충 파악하고 있을 뿐인 만큼.
잘됐다.
“아, 미안하다. 잠깐 잊었어. 사과할게.”
내가 순순히 사과하자 그는 눈을 끔뻑이었다가 이내 이를 꽉 깨물고 나를 노려봤다.
그 눈빛은 감히 ‘나를 기다리게 해놓고 이딴 사과로 끝?’이라는 반응이었다.
‘얘, 등신인가.’
그는 조금 전, 자신이 공포에 질렸었다는 것조차 금세 잊어버린 모양이다.
“말로만 사과하냐?”
“흐음?”
아니나 다를까, 잼미니는 바로 시비를 걸어왔다.
“늦은 값으로 3 쿠퍼 내놔라.”
그의 얼굴이 험악하게 찌푸려졌다.
“너 때문에 그렘린 둥지 처리가 늦어졌잖아. 그 보상을 하라고.”
완전히 도둑놈 심보네 이거?
틈을 보이자마자 돈부터 내놓으라 하는 잼미니를 보고 나는 한차례 웃었다.
그러다 내 얼굴은 또 순식간에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가뜩이나 친구가 하던 게임에 강제로 빙의 당해서 열받아 죽겠는데.
이놈이 기어코 나를 터트렸다.
“아니, 좋게좋게 넘어가려 했더니 이 새끼가?”
나는 그 즉시 그람을 뽑아 놈의 눈앞에 들이댔다.
“흐아히아각?!”
그러자 잼미니가 그 즉시 경기를 일으켰다.
“돈 필요해? 돈 줘?”
내가 그람을 더더욱 들이밀자 그는 벽에 등을 붙인 채 미친 듯이 몸을 떨었다.
나는 그람을 쥐지 않은 손으로 놈의 양 볼을 콱하고 쥐었다.
“흐, 흐악?! 그, 그거 좀 치우고!”
“대답부터 해 이 임마! 내 삥을 뜯어 갈 수 있는 건, 우리 동네 백수 형밖에 없었어! 그것도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였고 인마! 알아들어!”
“끄익, 알, 알았으니까악!”
내가 미친놈처럼 소리치는 사이에 잼미니는 어느새 눈을 까뒤집으며 발작하듯 몸을 떨고 있었다.
“알아들었으면 3쿠퍼 내놔.”
내가 슬쩍 칼을 거두며 손을 내밀자 흐릿한 초점의 잼미니가 당황하며 나와 손을 번갈아 보았다.
“내, 내가 왜?!”
“어쭈, 내가 너 때문에 잊고 있던 트라우마가 생각났잖아. 보상금 줘야지. 안 줘?”
“드, 드리겠습니닷!”
그가 주머니에서 급히 3쿠퍼를 꺼내자 나는 그 돈을 빠르게 낚아챘다.
그러자 아이템 창에 0이던 잔고가 3쿠퍼로 바뀌었다.
철급 모험가를 잡으면 3쿠퍼가 나오는 모양이다.
훌륭한 시스템이군.
“좋아, 이걸로 우리는 화해한 거다. 그치?”
“어, 으응.”
“그래, 우리는 이제 친구 사이야.”
그런 그를 보고 그람을 집어넣은 나는 싱글벙글 웃었다.
그러곤 주저앉은 그의 어깨를 손으로 탕탕 두드려 주었다.
“뭐 해. 친구, 얼른 안 일어나고? 그렘린인가 뭔가 잡으러 가자며?”
잼미니가 마치 미친놈을 본 듯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수준에 맞춰서 행동해줬더니, 미친놈 취급하기는 고얀 놈.
돈 받았으니, 이번만 봐주기로 했다.
잔뜩 주눅 든 잼미니가 바쁘게 계단을 내려가는 사이.
나는 느긋하게 그를 따라갔다.
‘마지막에 잡았다는 아스란칼이라는 놈이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지금 내가 들고 있는 그람이 얼마나 쓸 만한지 몸소 체험했다.
“아, 오셨어요?”
여관 밖을 나오자 비루한 차림의 남성 하나가 우리를 보고 반응했다.
딱 평범한 인상인 그는 식은땀을 흘리는 잼미니를 의아하게 봤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고개 숙여 보였다.
“이번 파티에 함께하게 된 디온느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산이라고 합니다. 지각을 해버렸네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가 고개 숙여 인사하자 나도 무척이나 예의 바르게 응대했다.
이를 본 잼미니의 두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자신을 대할 때와는 너무 딴판이었기 때문이었다.
“너, 너 이 자식, 저 녀석한테는 존댓말하고 나한테는 왜 반말하냐?”
“네가 먼저 반말했잖아.”
그건 맞는 말이라 잼미니는 금세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우린 친구 사이인데 당연히 반말하는 거 아니냐?”
환한 웃음과 함께 내가 허리로 손을 내리자 잼미니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그는 슬쩍 눈을 찌푸리며 디온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에게 도저히 깝죽거릴 수가 없으니 괜히 저쪽으로 불똥이 튄 것 같았다.
그 사실을 모르는 디온느만이 난처한 기색으로 고개를 기울일 뿐이었다.
“끄윽, 출발할 테니 따라와라.”
어쨌든 친구가 된 잼미니의 뒤를 따라 나는 그렘린이 사는 산으로 향했다.
거기까지 가는 데는 꽤 긴 시간이 소요됐다.
하지만 이런 장거리 이동이 처음인데도 난 별로 지치지 않았다.
‘내 원래 몸보다 체력이 좋아졌어.’
군 생활에서 남는 건 운동 말고 없다는 생각에 뜀뛰기만 열심히 해서, 겨우겨우 체력 평가 1급.
이게 딱 내 체력 수준이었다.
나름 열심히 체력 단련을 하긴 했어도 이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아니다. 이거, 체력이 좋아졌다기보다는.’
묘하게 몸을 움직이는 데 군더더기가 없다.
고작 걷는 것일 뿐이지만,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도 몸이 저절로 가장 효율적인 움직임을 추구하는 것 같았다.
육체를 효울적으로 쓰는 방법을 내가 자연스럽게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체력적으로 리즈 시절이라고 봐도 좋았을 때보다 몸이 더 가볍게 느껴졌다.
‘이건 게임 보정이라고 봐야 하나?’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인 나는 턱을 잡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생각해 보니 시야도 넓어졌지.’
그러면서 나는 스윽 앞을 바라보았다.
지금 내 키는 얼추 180 중반 정도로 보였다.
본래 키가 175였던 만큼 시점의 차이도 어느 정도 느껴졌다.
게다가 머리카락 색은 또 어떤가.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살짝 당겨 보면 회색빛 머리칼이 눈에 확 들어왔다.
병장 만기 제대한 지 얼마 안 되어 짧았던 내 머리카락은 어느새 이마를 다 가릴 정도로 길어 있었다.
장승민 자식은 캐릭터 닉네임을 은평구꽃미남이라 지었을 뿐만 아니라.
커스터마이징까지 열심히 해서, 훤칠한 외모로 캐릭터를 만들어 놨던 것이다.
남캐 커마에 진심이었다니…… 변태 같은 놈.
‘그래도 키는 커져서 좋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샌가 우리는 산지로 진입해 있었다.
“야, 친구야.”
나는 산 경치를 둘러보며 잼미니를 불렀다.
“왜.”
“왜? 어쭈, 말이 좀 짧다?”
“왜, 왜 그러는데.”
이놈은 아무래도 꾸준하게 정신 교육을 해줘야 할듯싶었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 하기로 하고.
나는 몇 가지 물어보기로 했다.
“헬리오스라고 아냐?”
“헬리오스? 이 근방에서 제일 유명한 사도잡이단이잖아.”
역시 유명한가.
“거기에 들어가려면 어떡해야 하냐?”
“거기 입단하기 개 어려울 텐데. 뭐랬더라, 헬리오스 단원이 돌아다니면서 괜찮은 놈 있으면 뽑아간다던가. 그랬을걸?”
“뽑아간다라…….”
스카우트 식인가.
“직접 찾아가는 건?”
“강철급 모험가도 문전 박대당했다고 들었어요.”
그때, 디온느가 대화에 끼어들며 설명을 해줬다.
지금 나는 동급 모험가다.
모험가 등급은 동, 철, 강철, 은, 금, 백금까지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 문전박대 안 당하려면 최소 은급 모험가는 되어야 한다는 거였다.
‘장승민 녀석이 초반이라고 말한 걸 보면 뭔가 초반부 시나리오 전개 자체와 관련 있을 거 같긴 한데.’
그 스카웃이라는 기회가 금방 오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두 사람과 떠드는 사이 어느새 산 정상이 보였다.
그러자 잼미니가 발걸음을 멈췄다.
“야, 동급.”
“왜, 인마.”
“아, 아니 너 말고!”
내가 대답하자 잼미니가 당황하며 디온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서둘러 앞으로 걸어 나왔다.
“예.”
“지금 저기 큰 나무 보이지. 뿌리 아래쪽에 공간이 있는 거 같으니까, 네가 먼저 가봐.”
“옙, 알겠어요.”
그 말에 어디서 주워온 듯한 검을 꺼낸 디온느가 긴장한 표정으로 나무에 다가갔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잼미니 쪽을 슥 봤다.
“왜 디온느 씨, 혼자 보내. 섭섭하게.”
“그야 미끼지. 저 녀석은 덩치도 작고 딱 봐도 약해 보이잖아.”
하여튼 쓰레기 같은 놈.
“그렘린들도 약한 놈, 강한 놈 정도는 구분하니까 놈들이 숨지 않고 나올 수 있게 만든 거지. 동급 모험가는 원래 이렇게 쓰는 거야.”
“잼민이, 너도 개약해 보이는데.”
“……제기랄.”
내 앞에서는 쪽을 못 쓰는 잼미니였다.
“기릭?”
그리고 그 순간 잼미니의 작전이 정확했던 듯.
나무 둥지 아래로 그렘린 한 마리가 기어 나왔다.
그리고 안쪽으로 놈이 뭐라 말하자 몇 마리가 더 기어 나왔다.
그것은 곧 전투에 돌입한다는 소리와 같았다.
“재, 잼미니 씨, 산 씨!”
하나둘 늘어가는 그렘린을 보고 디온느가 긴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잼미니는 조용히 숨을 죽이며 자세를 낮췄다.
보아하니 그렘린이 디온느를 공격해도 된다고 확신할 때까지 기다릴 모양이었다.
여기서는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맞겠지.
그 순간 그렘린들이 디온느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온다!”
그리고 그걸 보자마자 잼미니가 바닥을 박차며 뛰어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본 나는 아이템 창에서 롱소드를 꺼내 들어 장비했다.
묵직한 그립감이 손을 타고 느껴졌다.
살면서 검이라고는 과도밖에 쥐어 본 적 없는데.
나는 이 감각이 무척이나 익숙하게 느껴졌다.
‘왜지?’
디온느는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듯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잼미니는 그보다는 전투에 능숙한 듯.
뛰쳐나가자마자 발차기로 그렘린을 날려 버리곤 자리를 잡았다.
그 모든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마치 세상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익숙하다.
흘러가는 전투 상황이 모두 내 눈 안에 들어왔다.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나는 이미 바닥을 박차며 달리고 있었다.
그렘린 한 마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롱소드를 쥔 내 손이 허리춤으로 당겨지다가 이내 뜀박질한 속도를 그대로 담아 검을 내질렀다.
“기익?”
디온느와 잼미니에게만 시선이 쏠려 있던 그렘린이 이에 뒤늦게 반응했다.
하지만 내 검은 이미 상대에게 닿기 직전이었다.
쇄도한 롱소드는 그렘린의 얇은 목젖을 찢고 녀석의 뼈를 갈랐다.
강력한 일격이 그렘린의 목을 뚫고 지나간 순간.
놈은 입에 피거품을 물며 그대로 고꾸라졌다.
몸에 튄 핏물에서 미약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 미묘한 따스함이 방금까지 살아 있던 생물을 죽였다는 감각을 되새겨 주었다.
‘몸이 가볍다.’
죽은 그렘린을 바라본 나는 현재 재신이 일말의 감정의 동요도 없음을 깨달았다.
‘나…… 사이코패스가 돼버린 건가?’
생물을 죽였는데,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그로테스크한 장면이 조금도 징그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번쩍하고 가설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알겠다. 이거.’
나는 그냥 평범한 게임 캐릭터에 빙의한 게 아니다.
내가 빙의한 것은 다름 아닌 7,677회차를 겪어온 인물이다.
‘비록 그 기억은 내게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지만.’
나는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그렘린의 머리를 무릎으로 찍곤.
그 즉시 놈의 목에 검을 박아 넣었다.
그 행동에는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었다.
‘육체 자체가 과거 회차의 기억을 지니고 있었다.’
그 사실이 다시금 현실을 자각하게 해주었다.
내가 빙의한 캐릭터가 7,677회차를 통한 경험을 육체에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그건 내 생존 확률이 이전보다 수십 배는 올랐음을 의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