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이튿날 아침, 나는 아침밥을 챙겨 먹고 모험가 길드로 향하고 있었다.
‘라면에다가 김치 먹고 싶네.’
세계관이 중세풍 판타지이다 보니 느끼한 음식만 나오는 통에 나는 금세 입맛이 질려 버렸다.
게임 특성상 아마 자체 제작이나 요리 스킬이 없지는 않을 것 같은데.
거기에 관해서는 또 문외한이라는 점이 발목을 잡았다.
‘요리가 뭐, 별거 있나. 레시피 따라 만들면 결국 그게 스킬이지.’
하긴, 어차피 게임이 현실이 된 마당에 그런 스킬류는 생존에 아무런 의미도 없긴 했다.
‘스킬석이라는 거나 어디서 하나 구하면 좋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모험가 길드로 온 나는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이는 이들을 구경했다.
그중에서도 모험가들이 가장 많이 모인 장소는 다름 아닌 임무 게시판 앞이었다.
임무를 개인이 맡아서 할 수 있는 건 철급 모험가부터라 하였다.
그 말은 즉, 아직 동급 모험가인 나는 개인 임무를 맡을 수 없다는 거였다.
누군가 파티를 모으면 거기에 들어갈 수는 있는 정말 애매한 포지션.
동급 모험가는 임무 중에 도망치는 이들이 많아 그런 모양이었다.
하긴, 동급 모험가는 모험가란 증명 패도 없을 정도니 말 다 했다.
“재료 모으기가 쉽지 않겠는데.”
하지만 길드 방침이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나는 순순히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카운터 쪽으로 다가갔다.
“헉, 안녕하세요.”
내가 다가오자 카운터에 있던 여성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무척이나 친절하게 웃었다.
그건 아마 내 얼굴 탓인 듯하였다.
매일같이 얼굴이 박살 난 모험가들을 보다가 잘생긴 남자가 오자 기분이 좋아진 것이었다.
누군가를 기분 좋게 할 수 있는 건 참으로 뿌듯한 일이었다.
“동급 모험가 일거리를 좀 찾고 있는데요. 혹시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당연하죠. 그게 저희 일인걸요!”
그리 말한 카운터 여성은 동급 모험가를 찾는 일거리를 바로바로 꺼내주었다.
친절하시구만.
“하, 뭔데 저놈은 레테 양이 저렇게 부드럽게 대해줘.”
“아침부터 열받게 하네. 별 같잖은 게.”
문제는 이 얼굴은 괜히 다른 동성 놈들에게 적의를 심어주기 좋다는 거다.
모험가 자체가 일이 험한 만큼 당연히 여성이 적었고.
여기 있는 놈들 중에는 여성 직원인 레테에게 마음을 품은 모험가도 많았다.
‘귀찮네.’
폭력이 법으로 막혀 있는 현대 사회라면 모를까.
폭력이 일상화된 이곳에서 잘생긴 외형은 오히려 어그로만 끌었다.
어서 빨리 강해지든가 해야지, 나원.
“그렘린이랑 고블린은 어떠신가요? 둘 다 자리가 나 있는데 말이죠.”
“혹시 포레스트 울프 관련으로는 없습니까?”
내가 질문하자 눈을 깜빡거린 레테는 난처한 듯 자기 볼을 손으로 감쌌다.
“지금은 없기는 한데, 포레스트 울프같이 난이도가 좀 있는 몬스터는 보통 철급부터 모집해서요. 강철 급 모험가가 철급 모험가를 모으는 식이죠.”
역시 그런가.
“그렇다면 철급 모험가로 올라가려면 얼마나 일해야 할까요?”
어차피 헬리오스 때문에라도 모험가 등급은 좀 더 올려놔야겠다 싶었다.
평판작은 제쳐두더라도.
강철급 모험가도 무시한다는 그들이니 은급 모험가까지는 올려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산 씨는 어제 첫 임무를 달성하셨죠? 앞으로 열아홉 번 정도 같은 난이도의 임무를 클리어하시면 승급이 가능하세요.”
철급 모험가가 되기 위해서는 임무를 스무 번이나 해야 한다니.
생각보다 골치 아프네.
‘보통 그렘린 같은 일거리가 하루에서 이틀 정도 걸리는 모양이니.’
한 달 정도는 계속 일해야지 동급에서 철급으로 올려주는 모양이다.
사실상 인턴 느낌에 가까운가.
이건 어쩔 수 없겠지.
“그럼 번거롭겠지만, 가급적이면 하루 안에 끝날 것 같은 임무들을 알 수 있을까요?”
“번거롭다뇨. 저희 일 이래도요. 후후, 다른 창구 가지 마시고 저한테 자주 와주시면 제가 미리미리 찾아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노골적인 그녀의 대쉬 때문에 주위 남자들의 시선이 더 흉악해지긴 했지만.
나는 그냥 감수하기로 했다.
실보다는 득이 더 많은 상황이었으니까.
그렇게 레테 덕분에 나는 무사히 마을 근처 숲에서 약초를 캐오는 의뢰를 받았다.
이 정도 수준이면 모험가가 아니라 심마니가 아닌가 싶지만.
모험가라고 다들 몬스터 토발같이 위험한 일을 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오히려 소일거리 삼아 이런 일을 주로 하는 모험가들도 있다고 하니까.
숲이나 산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잠깐 산책 갔다 오는 겸, 다녀오면 되니 힘든 것도 없었다.
‘1시에 모험가 길드 입구 앞에서인가.’
이번 임무도 저번과 같이 철급 모험가 하나에 나랑 같은 동급 모험가 한 명이다.
1시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은 만큼 나는 시장으로 향해 육포와 견과류를 구매했다.
잼미니 녀석과 다녀보고 배운 건데, 이런 식량들은 미리미리 챙기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템 창이 있으니 식재료 비축이 쉽긴 하다만.’
지금은 지갑에 여유가 있는 게 아니니, 이런 건 나중에 생각해 볼 문제였다.
그렇게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구매한 나는 시장을 구경하다가 문뜩 발걸음이 멈췄다.
시장 한구석에서 한 노인이 웬 돌멩이들을 늘어놓고 앉아 있었다.
지나가는 이들은 그 노인을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지만.
나는 달랐다.
저 돌멩이들에 그려진 기묘한 문양.
그것이 어떤 걸 떠올리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관심 있나?”
노인이 입을 연 순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어떤 돌입니까?”
“신비한 힘을 가진 돌이지. 일반 사람들에게는 그저 돌멩이에 지나지 않겠지만, 특별한 사람에게는 다르게 보일걸세.”
말만 들으면 사기꾼 같았지만, 뭔가 촉이 왔다.
“좀 살펴봐도 됩니까?”
“물론.”
노인의 대답을 듣고 나는 돌 하나를 들어 올렸다.
거기에는 바람에 나뭇잎이 휘날리는 듯한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띠링!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알림창이 떠올랐다.
<대쉬>
[일반]
(스킬석)
― 순간적으로 민첩이 두 배로 상승하여 1m 거리를 도약합니다.
― 사용 시 1초 동안 치명타 확률이 소폭 상승합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60초
스킬석.
그것을 보자마자 내 두 눈이 부릅떠졌다.
설마 이런 곳에서 발견하게 될 거라곤 조금도 생각 못 했기 때문이었다.
‘구매가 가능한 거였어?’
나는 서둘러 다른 스킬석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은밀한 기동이 가능한 잠행.
내구가 올라가는 바위 피부.
활 공격 범위가 늘어나는 사거리 증가.
여러 가지 유용한 것들이 잔뜩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판타지 세계라 하면 흔히 나오는 마법같이 파괴적인 스킬은 없다는 점이지만.
느낌상 이곳은 초보자 스킬석 상점이 분명했다.
‘지금 내가 스킬 석을 꽂을 수 있는 건 3개.’
사도 신도의 검 쪽에 한 개와 그람에 두 개다.
그 말은 즉 스킬을 3개까지는 사용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사장님, 이 돌들 하나당 얼마입니까?”
“하나당 1 실버 50 쿠퍼일세.”
젠장, 비싸다.
수중에 있는 돈을 거의 다 털어야 하나를 겨우 살 수 있었다.
3개 정도는 사고 싶었건만.
이렇게 된 이상 하나밖에 못 건질 듯싶었다.
“혹시 내일도 여기서 장사하십니까?”
“모르겠군. 나는 떠돌이라서 말일세. 일주일에 한 번 정도라면 올 수도 있겠지.”
거기다가 랜덤 등장인가.
나는 혀를 차며 우선 하나 구매해두기로 하였다.
기회가 있을 때 잡아야 했으니 말이다.
‘가장 괜찮아 보이는 건.’
역시 처음에 잡은 대쉬였다.
범용성도 높고.
RPG 특성상 회피기라는 게 무척이나 중요하니 말이다.
“이걸로 하나 사겠습니다.”
“고맙네.”
나는 값을 지불하곤 노인에게 인사를 한 뒤 그 자리를 떠났다.
그래도 스킬석을 하나 얻은 건 큰 수확이었다.
내가 지닌 스킬석 슬롯은 3개.
나는 큰맘 먹고 산 거니 이걸 그람에 넣기로 했다.
사도 신도의 검은 결국 새 무기를 얻으면 바꾸게 될 테니까.
“이렇게 하면 되나?”
그람을 꺼낸 나는 대쉬 스킬석을 검 위에 올려 보았다.
띠링!
[ ‘그람’에 ‘대쉬’를 장착하시겠습니까? ]
[ YES/NO ]
[ *스킬석이 장착된 아이템을 아이템 창에 다시 넣을시 스킬석 회수가 가능합니다. ]
그러자 바로 창이 하나 떠올랐다.
회수가 가능하다.
그것을 알고 나는 크게 기뻐하며 YES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그람에 푸른빛이 한 번 깃들었다가 사라졌다.
스킬석이 장착된 것이었다.
스킬 발동은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시험 삼아 발을 한번 굴러보았다.
상태창을 켤 때 떠올린 것과 같이해보면 될 것 같았다.
‘대쉬.’
스킬을 머릿속에 떠올린 그 순간 내디딘 발이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뻗어졌다.
잠깐의 바람과 함께 순식간에 1m를 도약한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스킬을 직접 몸으로 써보니 생각 이상으로 유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와, 이거…… 앞으로 스킬석 있으면 죄다 사들여야겠는데?”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가 또 하나 생겨난 순간이었다.
‘이런, 늦겠다.’
스킬이 하나 생긴 것에 기뻐하던 나는 뒤늦게 시간을 확인하곤 바삐 걸음을 옮겼다.
아침에 받아둔 임무의 집결 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급히 모험가 길드 앞으로 걸음을 옮겼고, 저 멀리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남성 두 명이 보였다.
아마 저들이 이번 임무를 같이할 멤버겠지.
그들을 보고 내가 먼저 인사하려던 순간.
번들거리는 이마가 다 드러나도록 갈색 머리카락을 올린, 뒤 챙이 조금 큰 모자를 쓴 까칠한 눈빛의 남자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등에 멘 가방에서 비죽 튀어나온 지팡이 같은 게 있는 걸 보니 마법사 같았다.
“바르그산이 너냐?”
그리고 그도 내 이름을 제대로 발음할 줄 모르는 듯하였다.
“발음 제대로 못 하겠으면, 그냥 산이라 불러라.”
“산, 그래, 산 좋지.”
그러면서 그는 품에서 시계 하나를 꺼냈다.
체인으로 이어진 시계는 딱 봐도 고급품으로 보였다.
돈도 많아 보이는데, 왜 약초 캐기 같은 걸 하는 걸까.
“시간은 딱 맞았군. 1분만 더 늦었다면 버리고 갈 속셈이었다만, 운이 좋아? 산?”
그리고 왜 철 등급 모험가 놈들은 하나같이 성격이 나쁜지 모르겠다.
“아이고, 마법사 나으리, 뭐 그리 신경 쓴답니까. 자자, 어서 임무 끝내고 오지요.”
내가 두둑하고 목을 푸는 순간 옆에 있던 동급 모험가가 나서서 그를 달랬다.
배불뚝이의 남자는 이런 아부가 무척이나 익숙한 듯하였다.
“하, 어서 가도록 하지.”
그 덕분에 조금 기분이 풀린 건지 마법사는 냉담하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그놈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 동급 모험가가 내게 눈짓했다.
마치, 이런 건 자신에게 맡기라는 양 구는 그를 보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앞으로 이 짓을 19번만 하면 된다는 거지?’
사사건건 잼미니처럼 부딪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만약 상대가 먼저 선을 넘는다면.
‘그람의 새로운 친구가 생기는 거겠지.’
부디 앞으로 친구 사귈 일이 많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두 번째 임무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