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아르보이드를 죽이고, 나는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을 뻔한 것을 겨우 버텼다.
맨몸으로 불을 뚫지를 않나, 나보다 강한 놈을 상대로 도박 수를 쓰지를 않나.
내가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미친, 줄타기도 이렇게까지 아슬아슬하지 않겠다.”
나는 턱까지 흐른 식은땀을 닦아내고는 숨을 내쉬었다.
오늘 전투를 꽤 연달아서 해서인지 짙은 피로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검으로 줄기를 자르기 시작했다.
몇 분 후 잘린 줄기 사이로 아르보이드가 보였다.
채액을 쪽 빨리기라도 한 양 말라비틀어진 놈의 얼굴은 화장기만 남아 허옇게 보였다.
그것을 보고 나는 우선 놈이 쥐고 있던 부채부터 챙겼다.
[ 강철 쥘부채를 획득하였습니다. ]
[ 능력치를 계승시키겠습니까? ]
[ YES/NO ]
아니나 다를까, 계승 창이 나왔다.
하지만 얻는다 한들 부채로 싸울 자신은 없었기에 나는 예스만 눌러두고, 대충 아이템 창에 던져 넣었다.
능력치만 쏙 챙긴 셈이다.
그 뒤로도 나는 대충 더 뒤적거려 챙길 걸 챙겼다.
동양풍 옷도 일단은 능력치를 주길래 계승시켜놓고 아이템 창에 던져 넣었다.
죽은 놈이 입은 거라 신경 쓰인다기보다는.
판타지 세상에서 저 꼴로 다녔다간 십중팔구 표적 되기에 십상이라 안 했다.
이 험난한 세상을 그냥 살아가기에는 아직 내가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나는 놈의 몸에 새겨진 로마 숫자를 발견했다.
“5?”
보통 사도와 관련된 신도들은 자기 몸에 사도의 문양을 새기곤 한다.
그러나 이놈이 몸에 새긴 것은 특이하게도 로마 숫자로 새겨진 5였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회상의 쿨타임이 아직 돌지 않은 것에 나는 아쉬움을 느꼈다.
“그 에단이라는 놈이랑 뭔가 관련 있는 건가.”
잘은 모르겠지만 나는 말라비틀어진 놈의 몸을 두곤 몸을 일으켰다.
이것저것 뒤지느라 찌뿌둥해진 허리에서 두둑 소리가 한차례 났다.
그래도 싸운 만큼 얻은 것도 있으니 상황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게다가.’
나는 그림자 마도서를 꺼내 보았다.
이 책, 생각 이상으로 유용한 것을 꺼내 놓았다.
대체 뭐 하는 책인 걸까.
‘그러고 보니.’
나는 엘리사르가 이 책을 보고 반응했던 것을 떠올렸다.
“엘리사르.”
투둑!
내가 그렇게 엘리사르를 부르려던 순간이었다.
타오르던 벽과 천장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이거, 꼴을 보아하니 곧 건물 전체가 무너질 것 같았다.
이 이상 여기에 있을 수도 없어, 나는 당장 묻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그러던 내 눈에 선머니의 레하튼이 보였다.
“으, 으으.”
“와, 살아 있었던 건가.”
아르보이드에게 짓밟히고, 그 위층에서 떨어졌는데도 아직 생명력이 남아 있다니.
손뼉까지 쳐주고 싶은 경이로운 생명력이었다.
나는 주섬주섬 그를 들쳐 매었다.
왠지 어딘가에 쓸모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가자.’
어차피 엘리사르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나에게 불꽃은 피해를 주지 못한다.
대신 불에 탄다는 꺼림칙한 감각은 느껴지기 때문에 나는 바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건물에 깔리는 건 사양이었다.
그렇게 이제는 형태를 거의 잃은 복도를 질주하던 나는 앞에서 한 기척을 느꼈다.
이에 의문을 보이던 찰나, 콰앙하고 부서진 벽 사이로 나는 가면을 쓴 익숙한 인물과 마주했다.
“지온나 선배님?”
“여기 있었나.”
아무래도 엔드류 녀석이 그를 잘 찾아간 모양이었다.
일이 다 끝나고 나서 온 거라 아쉽긴 했지만, 그는 내가 들쳐멘 레하튼을 힐끗 보곤 고갯짓했다.
“따라와라. 바깥에는 병사들이 와있다.”
괜히 소란 피울 건 없다는 거겠지.
나는 그의 제안을 흔쾌히 받으며 곧장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우리는 불타는 건물에서 빠져나와 뒷골목을 따라 이동하였다.
그는 길을 잘 아는 듯, 무척이나 능숙하게 골목 사이를 이동했고, 잠시 후 나는 아는 얼굴들과 마주했다.
“산!”
엔드류가 제일 먼저 나를 발견하며 안도한 듯 외쳤고, 뒤늦게 남은 둘의 얼굴도 이쪽으로 향했다.
아벨 녀석은 치료를 잘 받았는지 이곳저곳에 붕대를 둘둘 매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제프람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놈의 붕대 수가 훨씬 더 많았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상처가 더 많았다는 소리겠지.
“어이, 다들 잘 살아 있었냐.”
“그, 런 소리를 할 때야?”
내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에 겨우 안도한 아벨이 눈물까지 글썽였다.
나를 믿어주긴 했지만, 걱정은 별개였던 모양이었다.
그런 아벨 녀석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어깨를 툭 두드려준 나는 제프람을 돌아보았다.
“제프람, 다리는.”
내 말을 듣고 그가 자기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붕대 사이로 진물이 약간 보이긴 했으나, 그래도 더 이상 상처가 불타 보이지는 않았다.
“……불이 꺼졌다.”
옳지.
저주는 잘 사라진 모양이다.
나는 한차례 씩하니 웃었다.
“앞으로 평생 고마워해라. 그냥 날 쭉 받들어 모셔.”
내가 능청스럽게 말하자 제프람은 대답 대신 침묵을 택하였다.
그러다 이내 내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이런 쪽은 진지하게 감사 인사를 할 줄 아는 놈이란 말이지.
나는 놈의 인사를 받곤 가볍게 손을 들었다.
“오냐.”
“그래서 감사 인사 나누기는 대충 끝났나.”
우리 이야기를 기다리던 지온나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그를 돌아보자 그는 가면을 주섬주섬 벗어 손목에 채웠다.
“일이 훨씬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우드발 교단이 점거한 곳을 습격한 무리 때문입니까?”
“그래, 사도 신도와 같이 사도를 숭상하는 게 아니라 사도의 힘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신생 집단이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아르보이드가 떠올랐다.
놈의 그 기묘한 힘은 사도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거기에 더해 앞에서 봤던 그 개구리 남자도 분명 아르보이드 녀석과 한패일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 두 놈 다 그 신생 집단 소속인 모양이었다.
“그들은 사기를 직접 사용하고 있다. 사도 신도라면 불경하다며 절대 쓰지 않을 그 사기를 직접 말이다.”
하지만 이어진 말을 듣고, 내 고개가 한순간 기울여졌다.
나야 엘리사르 덕분에 사기에 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지만.
사기는 사도 신도들이 흔하게 쓰는 게 아니었던 건가.
‘그러고 보면.’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도 신도 중에 사기를 쓰는 놈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럼 혹시 처음 사기를 다룰 줄 아는 그놈도 그 신생 집단 소속이었나?’
근처에 있어 우연히 죽이게 되긴 했지만.
설마하니 내가 처음 죽인 그놈도 신생 집단 소속이었을 줄이야.
보아하니 우드발 교단에 잠입하여 숨어 있던 것을 내가 우연히 잡은 모양이다.
“그리고 놈들은 지금 우드발이 젤다니오스의 부활을 위해 모아놓은 사기를 노리고 있다.”
그놈들은 우드발이 고생고생하며 모은 사기를 얌체 같이 가로챌 모양이다.
“그럼 그놈들이 선머니를 습격한 건.”
“우드발 교단이 사기를 모아놓은 장소를 알아내려는 속셈이겠지. 놈들은 일정 인물들만이 사기 구슬을 받아 모아놓고 있었으니 말이다.”
대충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눈치챘다.
어쨌든 사도잡이인 우리 처지에서는 적들 두 명이 지금 맞부딪치는 상황이란 소리였다.
“그러니 우리도 급해진 상황이다. 당장 우드발 교단이 사기를 모아놓은 장소를 알아내지 못하면 큰일이 벌어질 거다.”
큰일은 이미 앞에서 충분히 설명했다.
십중팔구 대폭발이겠지.
우드발 입장에서는 열심히 모아놓은 사기를 빼앗길 바에야 폭류 마법을 펼칠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당연히 이든은 통째로 날아가고 만다.
그 사실을 알아들은 세 사람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나는 그 녀석들과 다르게 내 옆에 기절해 있는 레하튼을 바라보았다.
지금 들으니 왜 아르보이드 녀석이 레하튼 녀석의 숨통을 안 끊어 놨는지 알았다.
이놈을 이용해 정보를 캐내 보려는 속셈이었겠지.
‘혹은 선머니를 습격함으로써 우드발 교단을 초조하게 만들어 실수를 유도하려는 속셈이었을 거고.’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선머니의 대가리인 레하튼 이놈은 우드발이 당황할만한 정보를 쥐고 있다는 거다.
“미리 말하지만 사도잡이에게는 민간인을 심문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 있다.”
그러는 순간 지온나가 꽤나 꽉 막힌 이야기를 해왔다.
그러나 그는 가면을 다시 눌러쓰며 자기 손뼈를 두둑하니 풀었다.
“하지만 사도 신도와 손을 잡은 시점에서 그것은 전부 무의미해진다.”
규칙은 확실하게 지킨다 이건가.
“심문 도와드립니까?”
“됐다. 애들 손 빌릴 거 없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레하튼을 한 손으로 들어,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적당히 여기서 대기해라. 심문이 끝나면 바로 이동한다.”
지금이야말로 고양이 손이 본격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
그는 우리에게 돌아가라는 말 대신, 이곳에서 기다리란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세 사람에게서 슬쩍 멀어져 엘리사르를 불러 보았다.
[ 묻고 싶은 게 많은 눈치군. ]
“그래, 당연히 그렇지. 네가 사람에게 사기를 주입해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그 기술.”
[ ……그래, 내가 죽은 뒤에 누군가가 빼돌린 게 분명했다. ]
엘리사르는 엘리아의 검으로서 줄곧 살아왔다.
가문 상황을 대강 적으로 알 수는 있겠지만, 자세한 사항까지는 알 수 없었을 터.
[ 산, 기회가 된다면 엘리아를 한 번 방문해줄 수 있겠나. ]
그가 이를 빠드득 가는 소리가 머릿속에 들려왔다.
그의 처지에서는 사도를 죽이기 위해 만든 기술이 오히려 사람을 해치는 데 사용되고 있었으니.
당연히 분노할만한 일이었다.
“알겠어.”
나도 이쪽은 흥미는 있고 말이지.
사도와 그 신도만으로도 머리 아픈 상황인데 새로운 집단까지 나타났으니.
내 입장에서도 상황을 파악해두고 싶었다.
‘내 기억 속 장승민 녀석이 이야기한 것 중에 이런 내용은 딱히 없었고 말이야.’
그놈의 헛소리가 그리워지는 날이 있다니.
사람 인생을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다른 질문을 했다.
“그럼 그건 됐고, 그림자 마도서에 관해서 너 아는 게 있지.”
내 질문을 듣고, 엘리사르는 한차례 침묵하였다.
이 반응을 보니 역시 아는 게 있는 것 같았다.
[ 그게, 불확실하긴 하지만, 예전에 사기에 관해 연구하는 과정에서 한 사도 신도에게 들은 게 있다. ]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엘리사르에게서 정보가 튀어나왔다.
[ 그건 분명 사도가 강림하기 전 살아가는 세계와 이어진 책이라 하였다. ]
“사도가 살아가는 세계?”
[ 그건 그림자 뒤편의 세계라 불린다. ]
그런 세계가 있었나.
그것보다 사도가 살아가는 세계와 이어진 마도서라니.
듣기만 해도 꺼림칙하기 그지없었다.
[ 내가 사기를 연구할 생각을 했던 것도 엘리아 가문이 그림자를 다루는 비술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런 연관성이 있었을 줄이야.
[ 우리 가문에 비술이라면 사도의 세계에 보다 쉽게 접근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시작이었지. ]
엘리사르가 착잡한 얼굴을 하는 게 느껴졌다.
그 과정에서 결국 자신의 가문에게 처형당하기까지 했으니.
그로서는 착잡할 수밖에 없으리라.
[ 어찌 되었든 위험한 물건임은 확실하다. 그걸 네가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군. ]
아니, 나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조금 전에 퀘스트를 완료하면서 어쩌다 얻었을 뿐이지.
‘그런 물건이 퀘스트 보상으로 지급되어도 괜찮은 건가.’
어쩌면 엘리사르가 말한 엘리아 가문의 그림자 비기와.
사도가 살아가는 그림자 뒤편의 세계는 깊은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림자 마도서를 얻게 된 것은 엘리사르의 저주를 해결해 주면서였으니 말이다.
‘그럼 내 몸이 엘리아 가문의 비기를 능숙하게 다루던 것도 혹시.’
엘리아 가문과 연관된 스토리가 딥판 속에 존재했기 때문이 아닐까.
‘다이나 녀석.’
이번에 돌아가면 좀 친해질 필요가 있을 거 같다.
“그래, 이건 이제 됐고.”
의문점은 풀렸으니 남은 건 이제 내가 보상을 받을 차례였다.
“이제 사기 쓰는 법 가르쳐 주라.”
당장 코앞에 큰일이 터지게 생겼는데 기술 하나 정도는 더 익혀야지.
나는 준비를 철저히 하는 성격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