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1화 (1/350)

0화. 장붕이는 꿈을 꾸지 않는다.

1.

난 잘 때 꿈을 거의 안 꾼다.

눈을 감으면 얼마 안가 죽은 것처럼 잠이 드는 체질, 그래서 나이가 서른이 다 될 동안 꿈을 꾼 적은 손에 꼽는다. 정확히 4번, 꿈을 꾸는 것 자체가 특별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 횟수까지 기억하고 있지. 당연히 그 내용들도 전부 기억한다.

그렇게 아주 가끔 꾸는 꿈은 다른 사람들의 꿈과는 좀 다르다.

일단, 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꿈속에서 ‘나’라는 객체가 없다. 유령처럼 주위 상황을 듣고 보는 것이 전부, 때문에 몇 시간 동안 꿈속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주위를 살펴보는 게 내가 꾸는 꿈이다.

크면서 다른 사람의 꿈과는 많이 다르다는 걸 알았지만 딱히 생활엔 전혀 지장이 없기에 신경 쓰지 않고 살았다.

아무튼 그래서 난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서울 송파구의 지반이 무너지고 건물과 사람들이 지하 수km 아래에 처박힌다.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재앙, 지하에 떨어진 건물들은 놀랍게도 거의 온전한 형태였지만 그 위에 살아가던 수십만 명의 사람들은 그러지 못했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잘 익은 토마토처럼 으깨진 고깃덩어리가 되어 곳곳에 나뒹군다. 그래, 비현실적인 끔찍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재앙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송파구가 처박힌 지하 공동(空洞) 곳곳에 석재 구조물들이 솟아오르고 이어서 불청객들이 도로변에 나타난다. 지구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각양각색의 존재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듯, 그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경계했지만 이내 도심 곳곳에 널린 ‘사람이었던 고깃덩어리’를 보곤 탄성을 내지른다.

그리고, 탐욕스럽게 먹어치운다.

그것만으론 부족한 듯, 그것들은 이어서 재앙에서 살아남은 극소수의 사람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람들은 하나씩 괴물들에게 죽는다. 무기력하고 무참하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이, 그저 고깃덩어리로서.

단 한 명만 빼고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만든 건물을 벗어나 피비린내로 가득한 도로로 나오는 한 여자, 오락실 대전격투게임에서 나오는 투희(闘姫)형의 여자 캐릭터를 연상케 하는 그녀는 핏발 선 두 눈을 번뜩이며 자신과 마주친 괴물을 오히려 역으로 으깨고 찢어발긴다.

그래, 진짜 게임 속의 여전사처럼.

***

음, 자기 전에 읽은 판타지 소설이군.

‘르피너스의 장난감’, 작가 새끼가 돈 안 된다고 1부만 쓴 뒤에 빤스런 한 글이다. 로그라이크류 게임을 좋아하는 나로선 꽤나 취적이기에 2부를 써주길 기대했는데, 그 다음 글도 흐지부지해지며 중도 빤스런 했다.

시발놈...

당연히 르피너스 2부는 불확실한 상황, 요즘 볼 소설이 별로 없어서 1부 글을 다시 정독하다 치미는 짜증에 장르소설 게시판에 욕 한 번 써주고 분노의 100원 후원+욕설을 써준 뒤에 잠들었는데 그 영향으로 이런 꿈을 꾸게 된 듯하다.

뭐, 어찌되었든 간에 나로선 나쁘지 않은 일이다.

내가 저 상황에 처했다면 패닉에 빠졌겠지만 이건 꿈이다. 그러니 영화 감상하는 느낌으로 보면 된다. 아니, 그 어떤 블록버스터 영화보다 낫지. 이건 훨씬 더 박진감 넘치고 리얼하니까.

아무튼 난 즐거운 마음으로 주인공을 따라갔다.

***

소설 속 내용대로 주인공은 이내 얼마 없는 생존자 무리들을 만나고 함께 움직인다.

그러다가 몇몇 일행들과 불화로 인해 무리에서 빠져나가 혼자 움직인다. 핵&슬래시 로크라이크 게임의 주인공처럼 마주치는 괴물들을 모조리 죽이고 찢어발기면서 출구를 향해 움직이는 주인공, 이어서 그 뒤를 헤어진 생존자 일행들이 뒤쫓는다.

그리고, 주인공의 존재를 눈치 챈 한 괴물 또한 움직이기 시작한다.

주인공이 지금까지 마주쳤던 괴물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 ‘살아있는 죽음’이라고 불릴만한 그것은 절망과도 같은 짙은 어둠을 흩뿌리며 시체를 일으킨다. 그리고 자신의 ‘컬렉션’에 주인공을 추가시키기 위해 시체의 물결과 함께 그녀를 추적한다.

그 사실을 깨달은 주인공은 공포에 질리는 대신 깊은 빡침과 분노를 불태우지만 그녀를 뒤쫓는 생존자 무리는 달랐다.

패닉에 빠진 생존자 무리, 죽음의 물결에 몇 명이 죽고 간신히 앞서가던 그녀의 흔적을 따라잡지만 보이는 것은 막다른 골목 뿐, ‘결국 다 죽을 거다.’라는 절망이 그들 사이로 퍼져나간다. 그리고 양아치 고등학생 무리가 ‘어차피 죽을 거, 재미 좀 보자.’며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자신을 보호하던 경찰을 죽이고 여자를 강간하는 놈들

얼마 안가 살아있는 죽음이 그들 앞에 나타난다. 마침내 마주한 절망에 생존자들이 모두 멍하니 있을 때-,

한쪽 흙벽이 무너지며 주인공이 나타났다.

살아있는 죽음이 어떻게 대처하기 전에 주인공은 한 손에 쥔 마법의 두루마리를 외웠고 두루마리에서 뻗어나는 빛과 함께 모든 삿된 것들이 움직임을 멈춘다. 이어서 그녀는 살아있는 죽음에게 달려들어 붙잡고 미리 마법봉으로 파둔 깊은 구덩이로 함께 떨어졌다.

이어지는 사투

구덩이에 다 들어가기 직전, 살아있는 죽음이 부리는 ‘영웅의 망령’에 다리가 잘렸지만 주인공은 아무렇지도 않게 도끼로 미친 듯이 살아있는 죽음의 머리통 부분을 난타한다. 살아있는 죽음도 얌전히 당해주는 것이 아니다. 주인공의 얼굴을 붙잡고 눈알을 터트리고 얼굴 가죽을 쥐어뜯는다.

객관적으로 볼 때, 주인공이 불리했다.

하지만, 소설 내용대로 승자는 주인공이었다.

임기응변을 통해 만들어낸 쇠창살 왕관에 난 틈, 그 사이로 주인공의 박치기가 작렬하고 ‘살아있는 죽음’이 비명을 내지른다. 두개골이 부서지며 무너져 내리고 망령들과 죽음의 물결 또한 흩어진다.

주인공도 멀쩡하진 않았다.

뒤따라온 망령들에게 등에 칼빵을 맞았고 양팔까지 잘려나간 상태, 승리에 웃던 그녀도 이내 탈진해 정신을 잃는다. 마지막 일격을 가한 주인공이 탈진해서 깊은 구덩이 바닥에서 정신을 잃은 동안, 양아치들은 급작스럽게 걷히는 어둠에 살았음을 짐작한다.

그리고, 생존자를 찾는 외침이 저 멀리서 들리자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은폐하기 위해 살아있던 여자를 죽이곤 도망친다...

***

그 모든 것을 난 만족스럽게 감상했다.

지금 꿈에서 나오는 주인공은 내가 상상한 것보다 더 강렬하며 매력이 흘러넘쳤고 그에 맞서는 괴물도 아주 혐오스럽고 끔찍했다. 양아치 놈들의 행동? 어찌나 빡치는지 주먹을 날려주고 싶을 정도야! 주인공이 ‘황금 자두’라는 기물을 내걸고 찾은 것이 이해될 정도다.

어쨌든 양아치 놈들이 사라진 뒤, 난 조용히 깊은 구덩이 안에 있는 주인공의 옆을 지켰다.

수분이 지나도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에 자기 전에 읽었던 소설 속 내용을 떠올렸다. 소설 속 내용에 따르면... 기절한 주인공은 꿈속에서 자신을 그 꼴로 만들어버린 ‘르피너스’를 만난다. 그리고 깨어났을 땐, 잘려나간 양 팔다리가 복구된 상태였고.

다시 주인공을 살펴보니 잘린 팔다리의 단면에서 거품이 부글거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도마뱀 마냥 잘린 단면이 조금씩 회복되는 모양새. 근데, 너무 느리다. 이런 속도라면 어림짐작해도 하루는 꼬박 더 있어야 할 정도로. 그 모습을 보며 난 가볍게 정신을 가다듬었다.

여기는 내 꿈속이다.

좀 특이해서 영향력을 끼치지는 못하지만 시점 자체는 자유롭다. 시간을 빨리 돌려서 하루를 넘기는 건 간단하지. 곧바로 시점을 하루 앞당기려고 했지만-.

문득 든 생각에 멈췄다.

내가 꾸고 있는 이 꿈의 배경-그러니까 ‘르피너스의 장난감’에서 주인공은 꿈속에서 르피너스를 만난다. 그냥 주인공이 머릿속에서 꾸는 꿈인 만큼, 나로선 볼 수 없는 장면이겠지만 지금 떠올리니 그 생각이 진짜 맞나 싶다.

여긴, 내 꿈이잖아?

근데, 꼭 여기에만 있을 필요가 있나? 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고 볼 수 있는 시야 자체는 한정되어있지만 그 어디라도 보고 싶다는 생각만 하면 시점을 이동할 수 있다. 그래, 어디로든 지 갈 수 있다.

그렇다면 주인공의 꿈속에서 르피너스와 주인공이 대화하는 장면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주인공의 꿈속이긴 하지만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 공간 자체가 내 꿈속이라는 무대니까. 구덩이 바닥에 너부러진 주인공의 얼굴을 응시하며 난 간절히 소망했다. 내가 원하는 장면, 르피너스와 주인공이 대면해서 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그 순간, 눈부신 빛의 터널이 내 앞에 펼쳐졌다.

2.

그 빛의 터널에 빨려 들어가자 내 앞에 펼쳐진 것은 우주(宇宙)였다.

거리감을 일그러트리는 장대한 넓이, 위아래를 구분할 수 없는 공간감각, 새카만 공간 너머로 찬란하게 펼쳐진 별의 길과 구름... 그 어떤 곳에서도 보지 못했던 광경에 난 그대로 압도되었다. 우주 비행사가 아닌 이상 이런 모습은... 아니, 우주 비행사도 이런 건 못 봤을 것이다. 꿈속에서의 내 시야는 인간의 것을 아득히 초월했으니까.

아, 이럴 때가 아니지.

펼쳐진 우주의 장엄함에 감탄하다가 이곳에 온 목적을 잊고 있었다. 빠르게 주위를 살피며 주인공을 찾았다. 그리고, 얼마 안가 발견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우주 공간을 둥둥 표류하고 있는 주인공, 눈을 감고 있는 걸 보아하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듯했다.

스토리 진행은 아직인 건가?

그래도 나쁘지 않다. 여기선 이 아름다운 광경을 감상할 수 있으니까. 물론, 이것도 계속 보다보면 결국 질리겠지만 남은 시간 동안 즐기기엔 충분하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상태라면 저 멀리 있는 행성도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내가 즐거운 마음으로 꿈속 우주 탐방을 생각하고 있을 때...

뭔가가 변했다.

갑작스런 변화. 그런데, 뭐가 변했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무겁고 정적인 공기가 주위를 감싸는 듯한 기분. 단순한 기압의 변화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보고 들을 수만 있을 뿐, 그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기압의 변화 같은 것을 느낄 리가 없다. 그렇게 얼마 동안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나서야 난 뭐가 변했는지 파악했다.

세상이 멈춰버렸다.

우주 공간을 자유롭게 표류하던 주인공도, 저 멀리 천천히 돌아가던 은하도, 별을 향해 질주하던 혜성도, 우주의 모든 것이 미동도 하지 않고 전시용 오브제처럼 얼어붙어있었다. 그래, 죽어버렸다. 이전 꿈에선 경험해보지 못한 일에 당혹감을 느꼈지만, 이내 ‘주인공과 연관됐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에 다시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우주 공간에 멈춰있는 주인공

그 앞에 펼쳐진 공허한 어둠과 빛나는 별빛...

...!

그제서야 난 깨달았다.

3.

그것은 ‘얼굴’이었다.

얼굴에는 본디 실체가 있는 법이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경계선 없이 시야의 한계까지 넓게 펼쳐져 우주와 그 위에서 춤추는 성단과 빛을 모두 담고 있다. 눈의 구실을 하는 은하수의 별빛들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며, 주위의 공간은 빛을 일그러트리며 성운으로 이뤄진 소름끼치는 웃음을 우주의 공허 위에 그려냈다.

분노, 쾌락, 고통, 괴로움, 황홀함, 탐욕, 흥미로움...

말로선 전부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감정들이 난폭하게 날뛰는 시선이 자신의 모든 것을 해체하듯이 샅샅이 보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 쥔 날파리를 보는 것처럼 느긋하고 조용하게.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난 차가운 손길이 심장을 옥죄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더 이상 관찰자가 아니었다.

이 세상 속에 속한 하나의 객체일 뿐. 그리고, 꿈속의 존재가 나를 인지하고 역으로 날 관찰하고 있었다. 여기가 내 꿈인 것을, 일종의 자각몽인 것을 알고는 있지만 너무 소름끼쳤다. 곧바로 있을 리 없는 사지를 발버둥 치며 이 꿈속에서 깨어나려고 했다. 깨지 못한다면 최소한 다른 곳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왜인지 모르겠다만 알 수 있었다. 저 ‘시선’이 자신을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단 걸. 치밀어 오르는 공포에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입이 없었다. 눈을 감으려고 했지만 눈꺼풀이 없기에 불가능했다. 하다못해 시선을 돌리려고 해도 어디에서나 시선이 느껴진다.

수천의 얼굴을 지닌 그것이 모든 곳에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거울에 비춘 형상처럼 현실이 물결치며 그것의 얼굴을 모든 곳에 그려냈다. 언 듯 보면 모두 똑같아보면서도 자세히 보면 각기 따로 움직이는 그것을. 인간의 알량한 지각력으론 결코 인지하지도 상상하지도 못 할 그 움직임을...

불행하게도 내 눈은 그것을 그대로 포착하여 빈약한 머릿속에 억지로 밀어 넣는다.

머리가 터질 듯한... 감당 못할 것을 꾸역꾸역 받아들인 내 영혼과 자아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부풀어 찢겨져 나가는 듯한 감각. 그것을 보는 순간부터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가있었다. 육신이 있었다면 난 이미 죽었을 거다.

도대체 얼마나 지났을까?

찰나 혹은 영겁과도 같이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고, 내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 그것은 난잡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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