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화. 장붕이는 꿈을 꾸지 않는다.
내가 가진 초월적인 시야로도 그 순간순간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변화무쌍한 변화, 그 기괴한 장면의 단면들이 그대로 뇌에 흘러들어온다.
껄껄 웃는 폭풍, 격분하는 해일, 조롱하는 태양, 장난치는 산사태...
상식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말장난 같은 것들. 하지만, 인간이 상상하고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는, 최소한 내가 목격한 그 ‘끔찍한 것’보다는 훨씬 인간적인 역설들이었다.
동시에 세상 또한 변화한다.
있을 리 없는 내 발밑이 부서져 내리고 날카로운 돌투성이의 뾰족한 봉우리들이 저 멀리 지평선으로부터 난데없이 나타난다. 땅이 꺼지는 듯한 감각에 허우적대다가 난 간신히 양 무릎을 짚고서야 고꾸라지려는 걸 버틸 수 있었다.
“흐읍...!! 허억! 허억! 허억!”
수km를 전력으로 달린 것 마냥 폐가 아려왔다. 몸이 격렬하게 산소를 원하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동안 정신없이 숨을 내쉬다가 깨달았다. 지금 내가 몸을 가지고 있단 걸.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무릎을 밀어 상체를 세웠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인간으로선 이해할 수 없을 아득한 거리
세상의 끝에서부터 그것이 걸어오고 있었다.
거인의 형상을 한 보랏빛 머리칼의 소녀, 그 자신감 넘치는 얼굴 뒤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산란된 자줏빛 후광은 정면으로 응시한 태양처럼 고통스러우면서도 미려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의 육신은 인간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곡선과 색채들이 모여 빚어낸 기적이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것이 다가오는 것과 함께 그것의 경이로운 존재감은... 마치 초신성의 광채 속에 터져나가는 별이 마지막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하늘에 펼쳐진 우주의 공허를 난폭하게 찢어발기며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그래, 자신이 온 세상의 주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그 모습은 신과 같았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봤던 모든 것들, 그리고 내 빈약한 상상력이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것보다도 우월한 존재의 형상. 단지 저걸 보는 것만으로도 종교적인 감동이 가슴속에서 차올랐다. 저 모습만 봤다면 분명 난 경외감에 차서 무릎 꿇고 기도했을 거다. 인간이라는 종(種)의 두뇌가 인지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치의 위대함이 실체화됐다면 분명 저런 모습일 테니까.
...하지만, 난 무릎을 꿇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지금 모습은 저것의 ‘한 단면’일 뿐, 진실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어마어마하고 소름끼치는 무언가. 사람과는 전혀 다른... 아니, 생명체보다는 미쳐 날뛰는 자연재해에 더 가까운 것. 광인들의 악몽이 난잡하게 뭉쳐서 탄생한 것과도 같은, 파괴적이고 원초적이며 동시에 기이하고 치명적인 것. 인간으로선 어떻게 이해할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섭리 그 자체.
그 사실을 다시 인지한 순간, 구역질이 나왔다.
씁쓸하고 화끈한 신물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다. 숨을 쉴 때마다 폐가 신음하며 메마른 입술 틈새로 병자 같은 희미한 숨을 색색 뿜어낸다. 쓰러질 것 같은 피로감이 온몸을 짓누르고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쏟아내는 땀은 턱을 타고 바닥에 뚝뚝 떨어진다.
두렵다.
미칠 듯이 두렵다. 죽음보다도 두려운 공포, 미지의 공포가 내 영혼을 짓누른다. 그렇게 내가 패닉에 빠져있을 동안, 그것은 어느새 영겁의 거리를 뛰어넘어 내 앞에 섰다.
거대하다.
커다란 산이나 바다 따위의 거대함이 아니다. 인간이 정상적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범주를 초월한 거대함, 굳이 묘사하려면 광년 단위를 써야할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 하지만, 아무리 거대한 산맥이라도 멀리서 바라보면 그 전체를 눈에 담을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이 떨어져 있었기에 난 그 형체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앞에 선 그것은 날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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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 들었던 천둥소리, 훈련소에서 처음 들었던 총소리, 자동차의 엔진소리, 시계의 톱니바퀴소리, 막 태어난 아이가 내뱉는 탄생의 울음, 쾌락에 젖은 여성의 비명, 화를 내는 남자의 고함, 죽어가는 노인의 탄식... 기억 속에 있는 수많은 소음들이 동시에 그것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동시에 소리가 뒤섞이지 않고 각자 또렷하게 내 머리를 뒤흔든다.
분명 언어가 아니건만 그 소음 하나하나가 유발하는 미묘한 감정의 편린들은 이내 서로 기괴한 화음(和音)을 자아내며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뜻으로 완성된다.
-손님이 있었네. 주인의 허락도 없이 훔쳐보는 아주 괘씸한 손님이.
이해할 수 있지만 이 세상의 그 어떤 언어도 아닌 언어.
수천억의 사람이 동시에 고함을 내뱉는 듯한, 듣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뼈가 덜덜 울리고 심장의 피가 증발하는 것만 같은 감정과 의지의 폭풍. 온 세상을 쩌렁쩌렁 울리는 그 메아리에 뭐라 대답하려고 했지만 그보다도 먼저 그것이 뜻을 이어나갔다.
-말 안 해도 알아. 널 인지한 순간부터 네 모든 것을 알았으니까.
허리를 숙이며 앞으로 얼굴을 들이미는 그것, 그와 함께 원근법이 무너지며 소녀의 얼굴은 형상을 잃는다. 개미가 코끼리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그 살갗의 일부만 인식할 수 있듯, 나약한 현실의 몸을 가지게 된 자신의 눈으론 가까이 온 그것의 얼굴을 전부 담아낼 수 없었다.
내게 보이는 건,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위압감과 함께 밀려오는 살덩이뿐.
-흥미로워, 무의식적으로나마 원하는 걸 볼 수 있는 힘이라니? 그게 너의 현실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것이라도 말이야. 너도 수많은 가능성, 그 무한의 편린을 보는 걸까?
그렇게 내가 주저앉지도 못하고 굳어있을 때,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진 그것의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휜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숙녀를 훔쳐본 대가를 치러야지!
하늘을 뒤덮은 그것의 눈이 거대한 자줏빛으로 불타올랐고 이어서 천둥이 치는 것처럼 그 광채가 내 망막에 새겨졌다. 번개가 눈을 통해 뇌로 뻗어와 불태우는 것 같은 감각, 이어서 그 고통은 그대로 척추와 신경을 타고 전신으로 내달린다.
단언컨대 지금까지 내가 겪은 그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웠다.
내가 반사적으로 무릎을 꿇고 두 눈을 감싸 쥔 채 울부짖고 있을 때, 그것은 계속해서 세상을 찢어발기는 듯한 의지를 내뱉었다.
-덕분에 흥미로운 것을 봤으니 네게 선물을 하나 주지! 난 자비로우니까! 그 뒤의 일이 궁금하다고 했지? 좋아! 아주 좋아! 과거의 기억에도, 미래의 가능성에도 존재하지 않던 변수! 이 세상의 인과율에 대한 반역이라니! 재미있겠어! 너무 재미있어서 날아갈 지경이야! 하핳! 하핳! 아하하하하핳!
무절제한 광소, 수많은 인간들의 악의에 찬 웃음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날 속박한다. 팔과 다리 같은 육체를 속박하는 것이 아니다. 인체의 오감으론 표현할 수 없는... 굳이 표현한다면 내 영혼이라고 불려야 할 것에 채워진 족쇄. 인지할 수 없어야 하지만 그 소름끼치는 차가움이 생생히 느껴진다.
-너도 게임에 초대하지. 그럼 날 즐겁게 해보렴. 내 ‘또 다른 장난감’아.
즐거움과 조롱이 섞인 의지, 그와 함께 날 속박한 족쇄는 깜깜한 심해에 가라앉는 것처럼 어딘가로 끌려 내려간다. 직감하건데,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어딘가로.
그렇게 난 비명을 내지르며 추락했다.
4.
“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난 튕기듯이 몸을 일으키며 깨어났다.
숨을 헐떡이며 주위를 둘러보자 보이는 것은... 깜깜한 방안, 몸을 덮은 이불, 땀에 흠뻑 젖은 병원복, 링거가 걸린 거치대, 손목에 붙은 주사기. 그렇게 허우적대다가 간신히 꿈에서 깼다는 것이 실감되자 힘이 쭉 빠졌다.
“망할.”
절로 욕설이 나왔다. 집에서 잤는데 왜 지금은 병원에 있는지는 모르겠... 아니, 꿈에서 겪은 일을 생각하니 병원에 온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쇼크로 비명을 지르니 옆집에서 신고해서 실려 온 것일 수도 있겠지. 그만큼 꿈에서 느낀 고통이 극심했으니까.
...이게 악몽이라는 건가?
사람들의 묘사를 생각하면 이게 맞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가끔씩 이런 것을 꾸는 건가? 이해할 수 없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것을 마주할 수 있다’는 공포를 이겨내고 매일 잠자리에 드는 걸까? 이건 트라우마에 걸릴 정도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조차 든다.
“쓰읍, 개소리.”
고갤 저으며 쓸데없는 생각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벗어났다.
몸이 엄청 피곤하긴 한데, 도저히 잠을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오줌도 좀 누고 세수도 해야지.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1인실인 듯한 병실, 옆에 있던 링거가 딸린 거치대를 끌고 출구 근처에 있는 개인 화장실로 가서 불을 켰다. 그리고 변기에 오줌을 누는데...
풍경이 좀 요상하다.
심각하게 흐릿한 시야. 일어났을 땐, 어둡고 막 깨어나서 잘 안 보이는 건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화장실의 모든 것이 뿌옇게 번져보였다. 간신히 형체만 구분될 정도로. 마치 모자이크를 한 동영상처럼. 눈가를 좁히며 전면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보이는 내 모습이...
“...?”
흐릿하다 하더라도 많이 이상했다. 그래, 이상하다. 평소보다 한참 아래인 시점, 심각하게 왜소한 체형, 새하얀 머리칼, 그리고 무엇보다...
꿈속의 그것과도 같은 색의 눈동자
그 색채를 본 순간, 심장에 얼음송곳이 박히는 것 같은 느낌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누고 있던 소변이 환자복을 적셨지만 그런 사소한 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그것, 그것의 색이 있다. 가슴 깊숙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공포에 난 손으로 얼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제멋대로 덜덜덜 떨리는 하얗고 나약한 손
이건 내 손이 아니란 것을
이가 ‘따닥따닥’ 소리를 내며 부딪친다. 입을 다물려고 해도 제멋대로 떨린다. 아니지? 그래, 아니야. 아닐 거야. 눈이 흐릿해서 잘못 본 것이다. 다시 거울을 보면 확실해질 거다. 곧바로 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으으으윽! 으으이이익!”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기에 힘겹게 세면대를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몇 분간 끙끙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나서야 난 다시 거울을 응시할 수 있었다. 역시, 가까이 있건만 형체를 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하다.
하지만, 눈동자에 있는... 상대방을 조롱하고 비웃는 듯한 ‘자색의 광채’는 잔혹할 정도로 또렷했다.
“...”
그 저주받을 색채를 없애기 위하여 손을 뻗었다. 하지만, 뇌의 일부분에서 전기가 흐르는 듯한 감각과 함께 손이 덜컥 멎는다. 손은 움직이는데, 눈알을 손으로 뽑으려고 하는 순간부터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 이건 꿈이다.
꿈이 틀림없다.
악몽은 아직 끝나질 않았다. 그러니 어서 깨어나야 한다. 거울에 비치는 자색의 광채를 향해 주먹으로 후려쳤다. 후려쳤다. 후려쳤다. 후려쳤다. 후려쳤다. 손에 상처가 까지고 뼈가 드러날 정도로. 그렇게 몇 번을 두드렸을까?
-쨍그랑!
마침내, 후려친 부위의 거울이 깨져나간다. 하지만, 깨진 거울의 파편 속의 자색의 광채는 여전히 또렷하다. 아니, 아니다! 하나가 아니다! 여러 개로 쪼개져서 모두 날 보고 있다! 저 광채! 저 광채가! 여전히 날 바라본다! 르피너스처럼! 그 광경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꿈.. 꿈이야. 꿈!”
피범벅이 된 손, 덩달아 손에서 흘러나온 피가 잔뜩 묻은 세면대. 몰랐는데 거울을 후려친 오른손에서 통증이 올라온다. ...그러나 이게 현실이라는 증명은 아니다. 꿈에서 르피너스를 마주했을 때도 고통은 느껴졌으니까. 아니, 오히려 그 무엇보다 아팠지.
그래, 통증을 느끼다보면 꿈에서 깨어날 거다!
곧바로 세면대에 떨어진 거울의 파편 중 적당한 크기의 조각을 손에 쥐었다. 그리곤 피범벅이 된 손톱 끝을 후벼팠다. 거기에서 올라오는 날카로운 통증, 꿈에서 느낀 거에 비하면 미약하지만 그래도 통증을 느끼다보면 결국엔 꿈에서 깨어날 거다. 다른 사람들이 꿈에서 깨는 것처럼!
그래서 후벼팠다.
계속해서 후벼팠다.
거울조각이 깨질 때까지.
모든 손톱이 피범벅이 되도록.
갑자기 입구 쪽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비명, 고갤 돌리자 간호사로 추정되는 형체가 보이고 그 너머 창문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내 얼굴을 비춘다. 그 잔혹한 햇살을 느끼고 나서야 난 깨달았다. 아니, 기껏 외면하던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건, 꿈이 아니라는 것을.
공포와 절망에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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