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4화 (4/350)

1화. 새로운 새벽이 밝았습니다.

***

[Play The World!]

당신은 르피너스의 게임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영혼과 자아 일부분은 르피너스에 의해 뜯겨져 게임 속 캐릭터의 능력을 ‘흉내 내도록’ 바뀌었습니다. 이로 인해 발생한 일그러진 존재감은 타인에게 본능적인 꺼림칙함을 불러일으키지만, 당신의 뜯겨져 나간 조각은 상태창을 비롯한 플레이버 텍스트(Flavor Text)를 작성하거나 특정 조건에서 주문 습득이나 기술 습득을 용이하게 하도록 돕습니다.

이 특수 능력에 소모되는 사항: 정신력

***

보아하니 소설 빙의물에 흔히 나오는 <게임 시스템>이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능력이겠지. 분명 특전이어야 하는데, 읽어보니 이것 때문에 인간관계 파탄 돌연변이를 얻은 것 같다. 좀 그렇네. 대충 넘기고 곧바로 다음 항목을 주시했다.

***

[관찰자의 눈]

본래 당신이 가진 능력입니다.

원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었지만 르피너스에 의해 상당부분 손상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용이 가능합니다. 그 위력은 예전에 비해 월등히 떨어집니다만 활용도만큼은 여전히 무궁무진합니다!

이 특수 능력에 소모되는 사항: 만복도, 정신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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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능력이라.”

<관찰자의 눈> 설명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 르피너스도 날 향해 원하는 것을 보는 능력이라고 했었다. 스킬창에 있는 것을 보면 아직 쓸 수 있는 것이겠지. 잠시 고민하다가 난 두 눈을 감은 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꿈속을 관찰하는 감각을 상기했다.

주위가 보였다.

육안(肉眼)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육신의 눈에 얽매이지 않은 채, 꿈속에서처럼 자유로운 시야로 보고 있었다. 그 성능은... 그냥 평범한 정도, 원래의 초월적인 시야에 비하면 많이 안 좋지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모든 게 모자이크처럼 보이는 장님수준이었는데 이렇게라도 볼 수 있으니 정말 다행이다.

“돌아가는 건 안 되네.”

혹시나 해서 원래 내가 있던 세상을 보려고 시도했지만, 벽에 가로 막힌 것처럼 이 몸에서 멀리 벗어나갈 수 없었다. 이리저리 움직이며 눈대중으로 범위를 재어보니 대충 몸에서 30m 가량, 아쉬움에 입을 다시며 난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었다.

병적으로 창백한 피부에 새하얗게 탈색된 머리칼을 가진 소년.

키는 150cm가량? 그래, 아직 2차 성징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은 곱상하게 생긴 소년이다. 선이 얇고 뭔가 요사스런 느낌이 드는 외양이 좀 꺼림칙한데...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소설 속 주인공은 난데없이 여자가 됐는데 최소한 난 TS는 피했으니까.

“으으음.”

빙의한 육신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을 때, 갑자기 머리가 핑 도는 듯한 느낌에 눈을 해제했다. 누군가 고무망치로 계속 후들기는 것처럼 지끈거리는 머리, 그리고 무지막지하게 허기가 느껴졌다. 만복도를 소모한다고 써 있긴 했는데, 5분도 안 되서 유지하기 힘들다니 효율이 무지 나쁘구만.

다시 바닥에 드러누운 뒤, 난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며 쓰게 웃었다.

그래도 여기서 어떻게 먹고 살 수는 있을 것 같다. 아무런 능력도 없이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막막했겠지만 초능력을 가졌다. 30m 안이긴 하지만 시점의 변화가 가능하단 점을 이용하면 투시(透視)도 가능하니 뭐든 먹고 살 방법은 있겠지. 인간관계 파탄 돌연변이가 있다만 이 초능력으로 어떻게 커버될 것 같다.

향수병?

여긴 한국이다. 그것도 현대. 소설 속 상황을 생각하면 좀 디스토피아 비스무리 하겠지만 그래도 즐긴 건 다 있을 거다. 그냥 다른 지역으로 이사 왔다고 치면 되지 뭐. 원래 세상에 계신 부모님들이 약간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나 없이도 잘 사실 분들...

...?

위화감을 느낀 순간, 난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하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부모님 이름이, 그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기억 안 나는 것은 아니다. 함께 했던 시간들, 내게 뭐라고 잔소리 했었는지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하지만, 기억의 부분 부분에 검은 먹칠이 되어있는 것처럼 얼굴과 목소리,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기억을 더듬으니 부모님뿐만이 아니다.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인간관계들이 이렇다.

그런데... 난 누구였지?

이곳에 떨어지기 전에 내 이름도, 내 얼굴도, 내 목소리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 순간,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자신이 누군지 알 수 없다는 것, 경험해 보지 못하면 절대 이해하지 못할 종류의 공포였다.

그렇게 반쯤 패닉에 빠져있을 때, 문득 상태창에서 읽은 한 문장이 떠올랐다.

“...당신의 영혼과 자아 일부분은 르피너스에 의해 뜯겨져 게임 속 캐릭터의 능력을 흉내 내도록 바뀌었습니다.”

곧바로 [Play The World!]의 플레이버 텍스트를 다시 띄우고 한 문장을 읽었다. 영혼과 자아의 일부분을 뜯겼다는 말, 처음 읽었을 때는 그냥 게임 능력이거니 하고 대충 넘어갔지만 지금 보니 의미심장했다. 내가 나 자신을 기억 못하는 건 이 영향인가? 그게 아니라면 나는...

르피너스가 만든 꼭두각시에 불과한가?

“아니, 아니야.”

고갤 세차게 저으며 불안한 생각은 애써 떨쳐버렸다. 잘 살 거라는 행복회로를 돌리면서 버티는 것도 힘들 판에 이런 걸로 멘탈이 깨지면 안 된다. 어차피 진실은 알 수 없다. 그러니 좋게 생각하자. 내가 나에 대해 기억을 못하는 건 르피너스의 수작 때문이다.

확실해. 그럼! 그렇고말고!

“흐. 흐히히... 하! 하핳! 하하핳하!”

밀려오는 불안감과 공포, 하지만 감정과는 달리 내 입에선 웃음이 흘러나온다. 진정해보려고 해도 마음속에서 공포가 차오를수록 웃음소리는 커진다. 멈출 수 없는, 지나치게 유쾌한, 세상을 쩌렁쩌렁 울리던, 르피너스의 웃음소리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게 느껴지는 그 염병할 웃음이.

방 안을 끊임없이 메아리치는 그 웃음소리에 나는 또다시 정신을 놓아버렸다.

3.

마력이란 힘이 나타난 뒤, 인류의 기술은 마력을 이용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연구자에게 있어서 ‘미답의 영역’에 첫 발자국을 남긴다는 것은 굉장히 매력적인 일이었다. 이미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선배들이 밟고 또 밟았던-이제 밝혀질 것이라곤 자잘한 곳밖에 없는 기존의 과학 기술 영역보단, 자신의 이름이 아이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남길 수도 있는 새로운 영역에 관심이 쏠리는 것이 당연했다.

정신의학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하 미궁에서 나오는 물품과 마법들 중에선 지성체의 정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들이 존재했고, 인류는 그런 지식들을 받아들여 조심스럽게 활용하기 시작했다. 물론, 악용될 여지가 매우 높고 그 부작용 또한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기에 검증된 소수만 지식에 접근-사용하도록 해놨지만 말이다.

‘정한솔’도 그런 검증된 소수 중 한명이었다.

미르의 1기 졸업생, 인간의 정신에게 영향을 끼치는 마법을 연구하고 또 능숙하게 이용하는 그녀는 미궁 탐사대의 멘탈 관리나 기존 치료로는 가망이 없었던 정신병 환자들을 치료함으로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아직 초기 단계인 ‘마력 정신 의학’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선도자

그런 그녀에게 이번에 들어온 ‘마력에 의한 정신이상으로 추정되는 환자’는 꽤나 진귀한 표본이었다.

“막대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을 받아들인다고 상상하세요. 저항하면 안 됩니다.”

미르에 속한 마력 의학 연구소, 특별 격리 병실을 방문한 정한솔은 쥐고 있는 나무 막대를 환자의 정수리 위에 올려놓았다. 그와 함께 지휘봉 형태의 마법 막대에서 정제된 푸른빛의 마력이 흘러나와 환자의 정수리로 흘러들어간다.

“느낌이 어떤가요?”

“좋네요.”

“좋다고요? 이전 치료와 비교하면요?”

“별 다른 건 못 느끼겠는데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는 환자. 그 대답에 그녀가 묘한 표정으로 환자를 바라보자 환자는 의아하단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전 것보다 더 좋은 거였나요?”

“아뇨.”

고갤 저으며 그녀는 환자의 머리 위에 놓았던 마법 막대를 떼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전까지 제가 사용한 정신 마법의 효과는 <평온>과 <진정>이었지만, 이번 건 <무기력>이었답니다. 나름 저항력이 있는 마력 사용자라고 해도 무방비로 받아버리면 축 늘어질 강도의. 하지만, 생도는 좋다고 하네요. 별 다른 조짐도 전혀 보이질 않고요.”

“하, 하하.”

그 말에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는 환자, 그녀는 한숨을 쉬며 가지고 온 진료 차트에 결과를 끼적였다.

“어느 정도 예상되던 것이었지만 한새벽 생도에게 정신에 영향을 끼치는 마력은 전혀 듣질 않아요. 약물을 통해 뇌의 생리효과에 간섭하는 것은 효과가 있는데, 정신에 간섭하는 마력 치료는 전혀 듣지 않는다니... 일단, 마법 치료는 그만하고 다른 치료 비중을 늘리겠습니다.”

“넵.”

“그리고, 마법 치료가 통하는 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생도의 상태는 빠르게 호전되고 있어요. 발작의 빈도도 줄었고 여타 정신 진단 결과도 좋아요. 저 말고 다른 의사들의 소견도 똑같고.”

“그러면...?”

기대감 섞인 환자의 목소리에 그녀는 단호히 고갤 저었다.

“아직 퇴원은 안 됩니다.”

“그럼 스마트폰이라도 주시면 안 되나요?”

“환자가 스마트폰을 쓰는 건 치료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재활 치료가 더 진행된 후에 드리겠습니다.”

그녀가 단호하게 단도리하자 환자는 한숨을 푹 내쉬며 애원하듯 그녀를 바라본다.

“...하다못해 TV나 신문, 책이라도 좀 보면 안 됩니까?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니 답답해서요.”

“흠, Tv는 안되겠지만 책과 신문은 될 것 같군요. 현대사나 시사상식 책이면 될까요?”

“예, 그럼 감사하죠!”

감사의 표시로 꾸벅 고갤 숙이는 환자에게 곧바로 책을 보내주겠다고 한 뒤, 정한솔은 병실에서 나와 자신의 진료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방금 전에 진료한 환자의 차트를 펼쳤다.

맨 앞장에 있는 것은 환자의 사진이었다.

두 눈을 감은 채로 생글생글 웃고 있는 백발 소년, 항상 눈을 감고 있는 이유는 자줏빛으로 변이된 자신의 눈동자를 보이기 싫어서라고 했고, 항상 미소를 띠고 있는 이유는 그냥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여서라고 했다.

그런 환자의 사진을 뚫어져라 보며 그녀는 미간을 찡그렸다.

“역시, 이상해.”

여자애 같은 중성적인 외모, 호불호가 좀 많이 갈릴 테지만 마력을 다루는 생도답게 매우 잘 생겼다. 그래,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분명 호감이 가는 모습이다. 사진으로만 본다면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보면 전혀 다르다.

꺼림칙하다.

목소리나 체취, 행동... 심지어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히 의자에 앉아있어도 느껴진다. 완전히 정신이 돌아버린 환자들에게서나 느껴지는 ‘섬뜩함과 꺼림칙함’이. 처음 만났을 때, 그 사실에 얼마나 놀랐던가? 자신뿐만 아니라 그 환자를 담당하는 다른 의사들과 간호사들도 공통적으로 느끼는 사항이었다.

그러한 환자-한새벽의 상태를 생각하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 존재감도 마력에 의한 돌연변이 중 하나일 수도? 그러고 보니 코드 108 중 ‘사르카즈’나 ‘리브라소’를 믿는 이들 중에서 저런 돌연변이가... 아, 아니지. 아니지.”

미궁 원주민의 증언들을 모아놓은 마력 질병 관련 자료를 뒤져보려던 그녀는 이내 오늘 올려야할 보고서를 떠올리곤 문서 파일을 켰다. 그리고, 진료차트에 있는 의학용어들을 쉽게 풀어서 보고서의 소견란에 추가했다.

***

해리성 기억상실과 수면 장애를 겪고 있음.

잠을 자는 것을 특히 두려워하는데, 공포를 느끼는 뇌 영역을 마비시키는 마력 약물과 수면 유도제 처방이 없으면 아예 잠을 자지 못함. 수면 유도제 처방을 안했을 당시, 일주일 간 수면 기록이 아예 없음. 환자의 건강을 고려해 다시 약물 처방을 했지만, 그 이상 안 자는 것도 가능할 듯함. 생리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걸 보면 마력 돌연변이가 확실.

추가로 환자에겐 정신에 영향을 끼치는 마력이 통하질 않음.

<평온>, <안정> 이외에도 <무기력>, <공포> 같은 각종 부정적인 효과까지 모두 면역에 가까움. 정신 오염이 의심되긴 하지만 <복종> 같은 방향은 아닌 것으로 추정됨. 영향을 끼친 코드 108-르피너스에 대해선 분노하는 동시에 두려워함.

그리고 환자에게선 매우 이질적인 꺼림칙함이 느껴지는데 이 또한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은 돌연변이로 의심됨.

***

오늘 알아낸 내용들을 추가한 뒤, 정한솔은 잠시 키보드에 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채, 냉정하게 판단하려고 노력했다. 객관적으로 환자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기억 상실을 포함한 각종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상태, 평범한 환자였다면 그냥 상태가 호전될 때까지 계속 가둬두겠지만...

“끙.”

미르의 윗선-지인인 정원용 아저씨에게서 되도록 중간 편입반의 입학에 맞춰서 재활을 마쳐달라는 부탁이 있었다. 무시할 수도 있지만 그러기엔 그녀 자신의 자존심-대한민국의 정신 치료 관련의 선두자라는 타이틀에 스크래치가 간다. 고작 이런 걸로 윗선에 흠을 보이고 싶진 않다.

“3개월 안에 밖에서 활동 가능하게 만들 수 있냐는 건데... 그래, 미르 안에서라면 통제가 가능하겠지.”

그렇게 몇 분가량 고민하던 그녀는 결정을 내리고 마지막 문장을 완성했다.

***

현재 증상이 심각하긴 하지만 3달 뒤 편입 기간에 맞춰 외부 활동이 가능할 정도로 호전시키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할 것으로 사료됨. 하지만, 이후에도 지속적인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고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송파구 부지 이외로 나가지 못하도록 모니터링이 필요.

***

마지막으로 보고서를 확인한 그녀는 고갤 끄덕이며 전자 메일을 보냈다.

4.

이곳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인 뒤, 난 여기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했다.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의사들에게 최대한 상식적으로 대답했고 식사를 가져다주는 간호사들에게도 존대했다. 진짜 극한의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것 같은 생활이었지. 현대인이 Tv도, 컴퓨터도 없이 멍하니 방 안에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봐라.

돌아버릴 거다.

그나마 내가 가진 능력들을 하나씩 테스트하면서 신경을 쏟은 덕분에 어찌어찌 정줄을 놓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그런 피나는 노력 덕분에 난 이곳에 떨어진 지 이주 만에 구속복을 풀었고, 한 달 만에 여기의 책과 신문을 받아볼 수 있었다.

“허, 곤란한데요...”

이번에 받은 책을 덮은 뒤, 난 <관찰자의 눈>을 사용한 부작용으로 지끈거리는 왼쪽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침대에 드러눕곤 한숨을 내뱉었다. 책의 내용과 신문을 통해 파악한 정보에 따르면 여긴 ‘르피너스의 장난감’이 진행되는 소설 속이었다. 그래, 여기까지는 예상대로다. 근데, 내 예상과는 다른 것도 있었다.

소설 속 세상이긴 한데... 시점이 예상과 달랐다.

주인공이 활약한 시간대는 15년 전, 그러니까 소설 속 내용의 15년 뒤란 소리다. 의사로부터 이 몸의 주인이 ‘미르’라고 불리는 괴상한 초능력 학원 생도라고 들었을 때부터 뭔가 좀 이상했는데 아주 엿 됐다. 왜 엿 됐냐고?

이곳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인 뒤, 난 지금 내가 처한 상황과 비슷한 ‘양판소 속 빙의물’처럼 살기로 결심했거든.

그래. 미래 정보를 바탕으로 다른 놈들이 차지할 기연이란 기연은 쏙쏙 다 빼먹고, 미래에 대성할 능력자들을 저점 매수해 하청 굴려가며 주지육림을 세우는 그거. 그거 따라하려고 했다. 근데, 내가 아는 소설 속 내용은 이미 한참 지난 이야기네? 완전 나가리 된 거다.

...그것뿐인가? 이 세상은 내가 있던 세상보다 너무 많이 망가지고 뒤틀렸다.

이 세계에서 미국은 ‘룬 수호자’라고 불리는 3개의 재앙에 의해 한 차례 초토화됐다. 그래, 주인공에 의해 퇴치되기 전까지 진짜 세계 멸망의 기로에 섰었다. 어찌어찌 토벌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미국의 동부-절반이 완전히 폐허가 됐다.

그리고, 그 피해의 여파는 단순히 미국이 절반 날아간 것 그 이상이었다.

충격과 공포에 기축통화인 달러는 물론 각종 돈의 가치가 휴지 조각이 됐고 안 그래도 미궁 때문에 얼어붙었던 경제는 한 번 박살이 나버렸다. 어찌어찌 살아남긴 했지만 세계 경제는 아직까지도 그 파탄 난 여파를 회복하지 못했다.

추가로 북한은 ‘지하 미궁’이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외부의 지원이 사라지자 망해서 대한민국에 흡수 통일 됐다.

...그래, 이 세계에서 한국은 통일 국가다.

평상시라면 중국이나 일본, 러시아 등의 주변국의 간섭이 있었겠지만, 미궁이라는 초유의 비상사태에 제 코가 석자라 아무도 안 가지려고 하는 폭탄 덩어리를 억지로 안 긴 거라고 한다. 먹여 살려야 하는 2500만의 거지 난민 덕분에 한국 경제와 치안은 아직도 완전히 회복을 못했다고.

“에휴.”

...그래, 그 썅년이 그냥 인생 날먹할 수 있도록 보내줄 리 없지.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내쉰 후, 난 상태창 능력에 포함된 <메모장 기능>을 활성화 시켰다. 그리고, ‘소설 빙의물 완전 공략’이라 적힌 메모장을 띄웠다.

빼곡히 적힌 글

어떻게 소설 속의 주요 인물들에게 접촉하고 친분을 다질지에 대한 장대한 계획들이었다. 지난 한 달 동안 머리를 굴려가며 틈틈이 이것들을 적었던 것을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앞을 가리네. 혹시 지금 시점에서도 쓸 만한 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 메모장을 훑어봤지만...

“쩝.”

역시나 죄다 쓸모가 없을 것 같은 내용들뿐, 힘겹게 손가락을 움직여 공략 메모를 지웠다. 들어간 노력이 아쉽지만 가지고 있어봐야 미련만 커지니 지워야지. 그렇게 한 달 간의 쓸모없는 노력을 날려버린 뒤, 난 옆에 있던 다른 메모장을 켰다.

제목은 ‘르피너스의 장난감’

내가 쓴 게 아니라 스마트폰에 깔린 기본 어플리케이션처럼 메모장 기능을 켰을 때부터 있던 거다. 공략도 이걸 보면서 세운 거지. 지워지지도 않는다. 살짝 이를 갈며 목차를 훑었다. 이 염병할 소설을 또 읽으면서 지금 이 시간과 상황에 내가 써먹을 만 한 것들을 뽑아내야 한다.

...과연 있긴 하려나?

그래도 할 수 있는 게 이것 밖에 없네.

내가 그나마 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보다 우위에 선 항목이니까. 딱히, 이 정신병동에서 할 것도 없고. 빈 메모장을 새로 띄운 뒤, 난 막막함에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읽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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