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6화 (6/350)

2화. 미르 생도 ‘한새벽’

3.

한국의 초상 능력 교육 기관 미르

중-고등학교가 합쳐진 이 기관에 입학하는 생도의 나이는 제각각이다. 인간이 마력을 개화하는 시기는 각각 다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 그래도 많이 차이나는 건 아니다. 개인마다 편차가 있지만 대략 90% 이상이 10~13세 사이에 마력을 인지하고 사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나머지 10%는 다르다.

중장년층이나 청소년층에서도 중에서도 뒤늦게 마력을 깨우친 이들이 종종 나온다. 그리고, 이들도 마력에 대한 교육과 그에 따른 주의사항을 알아야 한다. 너무 나이가 많은 이들은 따로 교육을 받지만, 미르의 생도들과 나이차이가 별로 없는 이들은 마력에 관한 단기 속성 교육을 받고 4학년 과정에 입학한다.

이렇게 도중 편입하는 생도가 매년 30명가량

그리고, 나도 이번에 편입생으로 들어가게 됐다.

몸의 원래 주인인 한새벽은 미르의 정규 생도였지만 새롭게 몸의 주인이 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쩌리. 내가 기억상실증에 걸려 기초적인 마력 운용방법도 까먹었다고 말하자 윗선에서 해준 배려다. 나로선 감사할 따름이다.

“휴우.”

12월 초, 미르 내 부속 건물들 중 하나인 ‘스포츠 과학관’의 한 교실. 쌀쌀한 아침 바람을 뚫고 도착한 목적지 앞에서 난 심호흡을 한 번하곤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산뜻한 청백색으로 꾸며진 강의실 내부

원목으로 만들어진 의자가 층층이 늘어서 있었고 나처럼 편입하는 이들이 드문드문 앉아있었다. 맨 뒷자리는 좀 노는 걸로 보이는 애들이 차지했고 앞쪽에는 범생이들로 보이는 애들이 차지했다. 그 광경에 난 살짝 추억에 젖었다.

평범한 고등학교 새학기 교실과 별 다를 바가 없네.

좀 다른 게 있다면 분위기가 더 들떴다는 정도? 그래, 꼭 선망하던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들 같다. 하긴, 이 세상에서 미르의 위상은 명문대 이상이니 이해는 간다. 강의실의 들뜬 열기를 느끼며 난 대충 중간 구석 쪽으로 가 앉았다.

“야, 쟤 좀 봐봐.”

자리에 앉자 곳곳에서 날 보면서 수군거리는 것이 보인다.

흔치 않은 백발에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왔으니 특이하게 보이겠지. 느껴지는 분위기도 좀 그지 같겠고. 턱을 괸 채 스마트폰을 하는 척을 하면서 난 <관찰자의 눈>으로 교실 안의 생도들을 훑었다. 그리고 그 중 하나를 응시하며 상상했다.

로그라이크에서 몬스터를 클릭했을 때 떠오르는 메시지를

***

지표면에 거주하는 건방진 털 없는 유인원. 마력에 노출되어 어느 정도 마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연약하다. 드워프들은 그들을 연약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엘프들은 그들을 멍청한 존재라고 생각하며, 괴물들은 그들을 맛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HP(체력): 14   EV(회피): 4

AC(방어력): 3    MR(마법 저항력): 0

크기-중형

***

가벼운 지끈거림과 함께 응시하는 생도 옆에 빈 창이 떠오르더니 간단한 플레이버 텍스트와 대략적인 스펙이 한자씩 채워진다. 지난 4개월 간 병동에 있으면서 확인한 , 그러니까 <게임 시스템>의 능력 중 하나다. 대충 돌죽에서 가능한 기능들이 현실에 대입되어 사용 가능하더라고.

그렇게 생도들을 하나씩 살펴봤다.

마력을 사용하는 인간. 웹서핑-트리 위키를 통해 얻은 자료대로라면 이런 마력 각성자는 명백히 일반인보다 더 우월했지만 표기되는 플레이버 텍스트나 스펙은 대부분 고만고만하고 볼품없다. 하지만, 몇몇 비범한 스텟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모델 잡지에서 나올 법한 힙한 옷차림의 예쁜 흑인 누나

팔짱을 낀 채, 도도한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는 파란색 머리띠를 찬 아가씨

맨 뒷자리에서 일진들과 시시덕거리고 있는 건장한 체격의 금발 태닝 양아치

흑인 누나는 피부색만 봐도 한국인이 아니라서 좀 놀랐다. 순수 흑인은 아닌 것 같다. 눈동자가 금색이고 외모는 서양인에 더 가까웠거든. 한쪽 옆머리를 싹 밀어버린 원블럭 머리카락, 콧잔등과 뺨 입술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2개의 흉터, 여자치곤 넓은 어깨와 등빨에서 흘러나오는... 큼큼, 꼭 커다란 검은 표범이 나른하게 누워있는 것 같았다.

이들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려고 관찰하려는 순간...

─쾅!

강의실 문이 부서질 것처럼 흔들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쌀쌀한 겨울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는 쫙 달라붙는 하얀 반팔티에 청바지차림의 근육질 남자,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그는 검붉은 머리카락이 사자의 갈기처럼 난잡하게 뻗어있고 드러난 팔뚝과 얼굴에는 심상치 않은 찰과상 흉터가 잔뜩 나 있었다.

그래, 사자를 의인화 시킨다면 저렇게 생겼을 것 같다.

나를 포함한 교실에 있던 생도들이 모두 깜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는 가운데, 그는 한번 교실을 훑곤 씨익 웃으며 당당히 강의실 단상으로 위에 올라섰다.

“32명, 전부 왔군. 반갑다! 난 김가트라고 한다. 내년 2월에 있는 정식 개학 전까지 여러분들에게 마력을 이용한 신체 활용 방법을 가르쳐줄 선생이지. 너희 편입반의 임시 담임 선생이기도 하고. 정규 과정에선 ‘전투 I’ 과목을 담당하고 있다.”

특이한 이름, 그리고 한국인이라 보기엔 좀 이질적인 외모와 말의 억양. 생도들이 묘한 표정을 보이자 그는 웃으며 말을 이어나간다.

“몇몇은 눈치 챘겠지만 난 미궁 출신이다. 지금은 한국에 귀화해서 한국인이지. 나 같은 사람은 밖에선 보기 힘들지만 미르에선 꽤나 자주 보게 될 거다. 선생들과 생도들 중에서 미궁 출신이 꽤 되거든.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야.”

미궁 출신의 인간, 라비린노이드(Labyrinoid)라고 불리는 인종이다. 트리 위키에 의하면 여기 세상 사람들은 미궁에서 나온 인간들을 보며 경악했다고 한다. 유전자까지 100% 순수 인간이었거든. 하긴, 다른 행성에서 인간이 살고 있다면 나 같아도 놀랄 것 같다.

뭐, 내 입장에선 그러려니 한다.

돌죽에서도 인간종족이 있었는데 미궁에도 인간이 있는 건 별로 이상하지 않지. 그나저나 소설에서 묘사된 ‘미궁’에서 살아온 인간이면 되게 살벌할 줄 알았는데, 저 남자는 좀 거칠게 느껴질 뿐 살벌하진 않았다.

생도들의 눈이 흥미로 반짝이자 그는 가볍게 박수를 한 차례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자, 잡설은 여기까지 하고! 대한민국 최고-유일의 이능력 교육기관에 입학한 걸 환영한다! 다들 차이가 있겠지만 설렘과 걱정에 잠을 설쳤겠지. 빛나는 미래를 상상하거나, 혹은 여자나 남자를 꼬실 생각을 하거나.”

능글맞은 어조의 농담, 생도들 사이에서 웃음이 자그맣게 터져 나오자 그가 다시 웃는다. 하지만, 생도들의 웃음과 달리 다시 웃는 김가트의 웃음은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육식 동물의 섬뜩함이 베여있는 미소

내가 생각하던 그런 살벌함, 동시에 잔향과도 같은 마력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난 별 다른 이상을 못 느꼈지만 생도들은 다른 듯 안색을 굳힌다.

순식간에 가라앉은 분위기

그래, 이래야 좀 야성적인 미궁 출신답지. 내가 속으로 만족할 동안, 그는 굳어있는 생도들의 면면을 스윽 훑으며 이전까지완 다른 ‘스산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좀 더 자신의 위치를 자각해야만 한다. 미르의 생도들은 대한민국을 수호할, 더 나아가 인류를 수호할 이들이니까. 오크, 엘프, 드워프... 그것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면 말이지.”

“교관님, 죄송합니다만 그건 좀 종족 차별적 발언 아닙니까?”

살벌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그를 향해 한 생도가 태연하게 손을 들며 반문한다. 유별나게 스펙이 높았던 3명 중 하나인 노란머리 양아치, 그 대답에 김가트는 재미있다는 듯 웃는다.

“차별?”

“예, 유전자적으로 밝혀진 바로는 그들도 인간이라 던데요?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네안데르탈 같은 아종이긴 하지만.”

“인간? 그것들이 인간이라고? 아니야.”

완강하게 고갤 저으며 김가트는 양아치를 응시한다.

“너흰 그것들의 본성을 모르고 있어. 지금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고 있지. 왜? 인간이 세력이 크고 강하기 때문에. 미궁에서처럼 함부로 깝치다간 종족 째로 갈려나갈 테니까. 하지만, 그 강약이 역전된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봤나?”

반문을 제기한 양아치도 미간을 찌푸리며 아무런 말을 못하는 가운데, 김가트는 진심이 절절히 느껴지는 음성으로 말을 이어나간다.

“어떻게 될지 난 미궁에서 이미 봤다. 여자는 엘프나 드워프들에겐 종족의 숫자를 빠르게 늘릴 임신 주머니. 남자는? 필요 없지. 번식이 빠른 오크나 혼혈이 불가능한 종족들에겐 그저 장난감이나 먹잇감에 불과했다.”

“...”

“그래, 그런 관계였다. 거의 일방적으로 사냥당하는 입장. 그것들은 인간보다 강했으니까.”

노골적인 말에 불편한 분위기가 감돌자 김가트는 어깰 한 번 으쓱였다.

“뭐, 솔직히 말하면 같은 인간끼리도 집단이 다르면 사이가 그리 좋진 않았다. 기회가 되면 서로 죽이고 약탈했으니까. 부족한 식량, 그리고 더 많은 여자를 더 얻기 위해서. 하지만, 명백히 말할 수 있는데 이종족들보다는 사이가 좋았어.”

“...”

“솔직히, 난 지금도 하루하루가 꿈만 같다. 인간이 이렇게 좋은 시절을 누릴 수 있다니 말이야.”

고갤 절래절래 젓던 그는 단상을 꽉 쥐며 생도들을 응시한다.

“이런 평화를 위해서라도 인간이 힘을 쥐고 있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너희들은 인간 중에선 몇 없는 마력을 다루는 이들이지. 미르는 너희들을 그냥 놔둘 생각이 없다. 너희가 원하건 원치 않건 간에.”

구구절절 옳은 설명에 난 고갤 끄덕였다.

그래, 르피너스의 장난감이란 좆망 소설은 현시창을 제대로 보여주는 반 디스토피아물이었다. 그런 소설 속 세상이 러브&피스로 흘러갈 리가 없지. 근데, 귀쟁이나 오크를 인간 취급해주다니? 개소리 집어치우라고 그래!

그 합리적인 주장에 생도들도 어느 정도 공감하는 듯 보이자 김가트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 마냥 의무만 요구하는 게 아니다. 권리 또한 가지게 될 테니까. 하지만, 마냥 권리에 취해 의무를 잊지 마라. 알겠나?”

-예!

생도들의 씩씩한 대답, 그는 만족한 듯 고갤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정식 개학까지 앞으로 3달, 오늘부터 여러분은 주 5일 하루 10시간씩 마력에 관련된 과목을 소화할 거다. 다른 생도들이 3년간 쌓아올린 과정을 일부라도 따라가려면 아주 빡세겠지. 기대해도 좋을 거야.”

“...”

“그나저나 이번 기수 편입반은 어느 정도 소양을 갖춘 친구들이 좀 있군? 내 기세에 굳지 않은 이들이 4명씩이나 있다니 말이야.”

그의 시선이 나를 포함해서 유별나게 스펙이 좋았던 세 명을 차례대로 훑는다. 그러더니 마지막으로 시선이 흑인 누나에게서 멈췄다.

“그러고 보니 서강 녀석의 딸이 이번에 미르로 편입한다고 했는데...”

“네, 서예린 입미다.”

김가트의 시선에 고갤 끄덕이며 대답하는 예쁜 흑인 누나. 피부색과는 어울리지 않는(인종 차별 아니다) 한국식 이름과 김가트보다 훨씬 더 어색한 한국어 발음을 보면 역시 이 사람도 미궁출신이다. 고갤 끄덕인 김가트는 다음을 향해 말해보라는 듯이 턱짓했다.

도도한 아가씨는 남궁 진아

금발 태닝 양아치는 박혁

교관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나였고 난 앞에서처럼 이름을 말했다. 근데, 앞의 세 명은 이름만 듣고 다음으로 넘어간 것과는 달리 내 이름을 듣곤 괴상한 표정을 짓는다.

“...한새벽?”

“예.”

“일어서서 선글라스를 벗어봐라. 앞 머리카락도 넘기고.”

순순히 지시에 따랐다. 이어서 감고 있는 눈도 뜨라는 추가적인 요구엔... 살짝 망설이다가 <관찰자의 눈>을 해제한 뒤에 응했다. 그렇게 드러난 내 모습을 뚫어져라보더니 그는 천천히 입을 뗀다.

“외모는 약간 남아있지만 체형과 키, 말투, 분위기... 모든 게 완전히 달라졌군. 완전히 다른 타인으로 느껴질 정도로.”

“절 아시는 것 같은데, 죄송하지만 전 교관님이 기억 안 나네요. 기억상실증인지라.”

“알고 있다. 미르에서 네 사고 소식은 유명하니까. 그래, 너도 편입반으로 온다고 했었지.”

두 눈 가득 의심의 기운을 팍팍 뿜어내며 날 훑는 교관. 시발, 막 전입 온 폐급 신병을 보는 분대장 같은 시선이네... 어찌되었든 그는 이내 다시 앉으라는 듯이 손짓했고, 내가 자리에 앉자 그는 궁금하단 듯이 날 힐끗 거리는 생도들을 향해 대답했다.

“한새벽 생도는 기존 미르 생도다. 지난 8월 초에 수업 도중 사고를 당했지. 여러 가지 사정으로 기존 교과를 따라잡는 것은 힘들다고 판단되어 편입반에 오게 됐다. 기억을 잃었다고 하는데 그래도 기세에 저항하는 걸 보면 몸은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는 것 같군.”

그 뒤, 그는 앞으로 있을 수업 일정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렇게 20여분 가량 설명을 한 그는 종료를 알리듯이 힘차게 박수를 친다.

“자, 오늘은 간단한 체력 측정과 마력이 신체에 미치는 개략적인 이론에 대해 설명하고 일찍 끝날 예정이다! 먼저 체력 측정부터! 그럼 이동하지!”

강단에서 내려와 강의실을 나가는 김가트, 나를 포함한 생도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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