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8화 (8/350)

막간. 장붕이를 보는 세 시선

1.

편입반의 첫 수업이 끝난 뒤, 서예린은 식당가로 향했다.

미르 내에 있는 맥도날드 지점, 혼자 창가에 앉아 더블 치즈 빅맥를 먹으며 그녀는 햄버거를 쥐지 않은 손으로 반대편 팔의 팔뚝을 쓸었다. 잔뜩 솜털이 곤두선 피부, 그 질감을 되새기면서 그녀는 방금 전에 본 한 사람을 떠올렸다.

한새벽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정한 백색의 단발머리에 선글라스를 끼고 항상 생글거리고 있는 소년, 객관적으로 그건 연약해보이기 그지없었다. 그래, 겉으로 보기엔 그렇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겉보기일 뿐이다.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와 사회적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도로 입학했지만 그녀는 실력적으론 김가트 못지않은 전사였다. 그리고, 그러한 실력의 바탕은 바로 다른 이들보다 훨씬 민감한 감각에 있었다. 보통 민감한 것이 아니라서 바깥에서의 적응이 매우 힘들었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그 감각과 직감이 그를 보는 순간부터 요란하게 경보음을 토해냈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평범한 존재는 결코 품을 수 없는 ‘광기’, 그리고 그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저열한 살의’를. 지옥의 고위 악마에게서나 느낄법한 것이 그 녀석...

아니, ‘그것’에게서 느껴졌다.

김가트도 본능적으로 그런 꺼림칙함을 느꼈기에 그것을 몰아붙인 것이리라. 미궁에서 살아가던 모든 생명체라면 최소한의 생존본능은 가지고 있으니까. 아니, 그 정도 수준이라면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을 거다.

...어찌됐든 간에 그런 광기를 지닌 것이 약할 리가 없다.

설령, 지금은 약하더라도 빠른 시일 내에 강해질 거다. 의지에 따라 사역되는 마력이란 힘은 그런 거니까. 만약, 미궁에서 그것을 만났다면 당장 칼을 뽑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을 테지만...

‘하지만, 여기선 그래선 안 돼.’

지난 5년 동안 배운 교훈을 떠올리며 그녀는 함께 나온 감자튀김을 먹고 탄산음료를 들이켰다. 떡대-오크를 만나도, 귀쟁이-엘프를 만나도, 반토막-드워프를 만나도 공격해선 안 된다. 그게 이 ‘바깥세상’의 규칙이다. 안 그러면 바깥의 인간들에게 죽는다. 그것도 그래서 지금 얌전하게 있는 거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계속 경계해야겠네.’

혹시 모르니 계속 주시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옆에 빈 좌석에 수북이 쌓인 빅맥을 하나 더 집어 들고 느긋하게 씹어 먹기 시작했다.

2.

미르의 편입생들은 대부분 서로 처음 보는 사이였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기에 당연한 일.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듯 언제나 예외는 존재한다.

박혁과 그 근처에 앉아 있던 4명

그 다섯 명은 이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였다. 체력 측정이 끝난 후, 그들은 다른 편입생들과 어울리는 대신 그들끼리 모여 미르의 밖으로 향했다.

“형이 보기엔 오늘 어땠나요?”

옆에 걸어가는 후배의 말에 박혁은 가볍게 어깰 으쓱였다.

“인스타에서 보던 것하곤 완전 다르더라. 여자 애들 상태도 좀 많이 빻았고.”

“그렇죠? 형도 그렇게 느꼈죠?”

청소년, 초능력에 대한 동경심이 가장 클 때다. 그렇기에 그들은 각자 미르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정작 와서 본 건 평범한 애들뿐. 좀 실망스러웠다. 그런 후배의 반응에 박혁은 가볍게 혀를 찼다.

“뭐, 진짜들은 다르겠지. 교관이 한 말도 있었잖아? 마력을 품은 뒤부터 천천히 외모가 바뀐다고. 아, 그 아가씨 아우라 뿜어내는 애하고 흑인 누나는 괜찮더라.”

“확실히, 그 두 사람은 제 상상하던 미르 생도 같더라고요. 그 외모에 몸매하며...”

딱히 할 말이 없기에 뒤로도 그들의 생도 평가는 이어졌다. 그리고 당연히 한새벽에게까지 다다랐다. 어찌되었든 간에 편입생 무리에서 유별나게 눈에 띄던 이들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그 한새벽이라는 녀석도 특이하던데.”

“아, 그 백발? 난 좀 그렇더라.”

후배들의 부정적 평가, 박혁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혼자서 선글라스를 끼고 빙글빙글 웃고 있는 꼴이 많이 건방져보였고, 그런 주제에 체력 평가 결과는 형편없었다. 그래서인지 냄새를 풍겼다. 맛있는 ‘먹잇감’의 냄새가.

박혁도 고갤 끄덕였다.

“나도 비슷하다. 재수 없었지. 묘하게 건방지다고 해야 하나?”

“그렇죠? 체력 측정 결과를 보면 진짜 별것 아니던데. 여자애들보다 약한 거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다니까요?”

“그럼 다음 셔틀은 걔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후배들의 대화에 박혁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그와 후배들 간의 나이 차이는 3살, 사회에선 별 차이가 아니지만 성장기에 3살 차이는 생각의 깊이가 다를 정도로 크다. 아무리 먹잇감 냄새가 난다고 해도 미르에서 그런 짓을 하려고 하다니... 이건 탈이 될 확률이 높았다.

그렇기에 박혁은 말을 꺼냈던 아직 생각이 짧은 후배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하지마라.”

“예?”

“괜히 미르에서 일 벌리지 말라고.”

190cm에 달하는 큰 체격의 그가 이제 갓 중학생 졸업한 아이와 어깨동무 하니 꼭 위협하는 것 같았다. 후배들이 살짝 움찔하며 그를 올려다보는 가운데, 박혁은 내려다보느라 자연스럽게 그늘진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혹시라도 흠 잡히면 곤란해져. 그리고 그 녀석, 편입생이 아니야. 사고 때문에 편입했지만 기존 미르 생도지. 분명, 미르 내에 아는 이들이 있을 거야. 섣부르게 작업 걸었다가 잘못하면 너희들이 역으로 먹힐 수도 있다? 몸이 약하다고 무조건 찐따는 아니잖아?”

“아, 넵.”

“물론, 하지 말란 게 아니야. 좀 확실해지면 달려들라는 소리지.”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후배들의 모습에 박혁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끄덕이며 다독였다. 너무 옥죄기만하면 불만이 쌓이는 법이니 풀어주기도 해야 한다. 그렇게 박혁이 후배들을 다독이며 미르의 교문까지 도달했을 때-,

“오~ 박혁! 미르 생도복이 멋있는데?”

밖에 있던 한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남자 1명과 여자 5명으로 이뤄진 무리. 패션에 신경을 많이 쓴 듯, 하나 같이 세련된 모습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다들 살짝 앳된 기색이 남아있었다. 그 환대에 박혁은 후배들의 어깨동무를 풀곤 남자를 향해 웃었다.

“하, 진짜로 여기까지 왔냐?”

“베프의 미르 입학인데 당연히 와봐야지! 수능도 끝났고 딱히 할 일도 없으니까. 이야, 너희들도 멋있는걸?”

남자의 칭찬에 박혁의 옆에 있던 후배들이 고갤 꾸벅 숙이고, 박혁은 혀를 차며 미르의 교복 어깨를 먼지 털듯이-하지만 명백하게 과시하듯이 털었다.

“멋있긴. 그래봤자 교복인데.”

“미르의 교복은 좀 다르지. 그래, 다시 고등학생이 된 소감이 어때?”

“고등학생?”

“내년부터 미르 4학년 과정에 편입하잖아. 4학년 과정이면 고등학교 1학년 나이이고.”

“흠, 지금까지 고등학생이었으니 딱히 특별한 소감은 없는데? 그런 것보다 수진아~ 오랜만이다~”

어깰 으쓱이곤 자연스럽게 무리의 한 여자애의 허리를 감싸 안는 박혁, 그 태평한 모습에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씁쓸하게 웃었다. 불과 3개월 전, 마력을 각성하기 전만 하더라도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처지였건만 이젠 너무나도 차이가 난다.

녀석은 미래가 보장된 미르생도.

자신은 별 볼일 없는 양아치.

녀석과 함께 목포에서 주먹으로 나름 날렸지만 그런 것도 고등학교까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한다. 그리고, 미래를 준비하지 않았던 일진 선배들이 어떤 꼴이 되는 지는 지겹게 봐왔다.

배달 기사, 비허가 중고차 딜러, 조폭 용역 업체 직원...

일진임에도 공부를 잘하는 이들, 혹은 부모가 돈이 많은 이들은 깔끔하게 과거를 세탁하고 잘 살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부모가 돈이 많지도, 그리고 그리 영리하지도 않았다. 고3이 되고 좀 정신을 차려서 미용 관련 자격증 몇 개를 따뒀지만 솔직히 마음에 들진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친구인 박혁과 얼굴도 잘 모르던 일진 후배들이 마력을 각성했다. 그 순간부터 그들은 미래가 보장됐다. 그러니 저렇게 태평하게 있는 거겠지.

솔직히, 배가 아프다.

자신보다 생각 없이 태평히 살아가던, 내심 한심하다고 생각했던 박혁이 마력 사용자가 되다니? 도대체 왜 신은 자신이 아니라 저런...

‘아니, 아니지.’

남자는 마음을 다잡으며 구겨진 얼굴을 빠르게 폈다.

지금은 저들을 시기할 때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인연을 가질 수 있음을 감사해야 한다. 잘만하면 이 인연을 토대로 뭐라도 건질 수 있겠지. 이전까지는 이름도 잘 모르는 후배였던, 그리고 앞으로는 자신의 윗사람이 될 게 분명한 아이들을 향해 그는 웃으며 데려온 일행을 소개했다.

“아, 너희들은 모르지? 얘네들은 AH연습생이야.”

“우와! AH연습생이요?”

“그래. 중학교 댄스 동아리에 있을 때부터 알고 지냈던 애들인데, 이번에 혁이와 너희들이 미르에 입학한다고 해서 불렀지. 어차피 AH 사무실이 서울이라서 가깝거든. 너희들도 인사해. 내가 말했던 후배들.”

“안녕하세요~”

서로 통명성을 나누며 빠르게 화기애애해지는 남자애들와 여자애들. 당연한 결과다. 남자는 결국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법이고, 오늘 데려온 여자애들의 외모는 평범한 애들과는 급이 다르니까. 이제 고등학교 입학하는 나이의 애들이 이 유혹에 저항할 리가 없다. 여자애들도 선망되는 미르의 생도와 사귈 수 있으니 나쁘지 않다.

그 좋은 분위기를 살려 그는 박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일부터 바쁘다고 했지? 오늘은 좀 놀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좋~지! 근데, 근처에 놀데가 있나? 서울은 아는 곳이 없어서.”

“여긴 좀 그렇고. 내가 아는 형들 중에 홍대 클럽에서 일하는 형이 있거든? 그쪽으로 가는 게 어때?”

“좋아.”

박혁은 웃으며 무리와 함께 섞였다.

3.

무리를 짓는 동물은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 서열이 나뉜다.

우두머리와 그 아래의 상위 서열, 더 아래의 중위-하위 서열까지. 이러한 서열에 따라서 무리 내에서의 가치가 정해지고, 서열이 높을수록 좋은 음식과 거처를 차지한다. 당연히 서열이 높은 개체가 낮은 개체보다 생존과 번식에 훨씬 더 유리하다. 무리 생활하는 동물의 DNA에는 이러한 정보가 ‘본능’으로 새겨져있다.

그리고, 인간도 무리를 지어 사는 동물이다.

인간의 DNA에도 ‘서열이 높을수록 생존과 자손을 퍼트리는 것이 유리하다.’라는 사실이 새겨져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무리 내에서 높은 서열을 원하며 자신의 서열을 올리려 투쟁한다. 무력, 인간관계, 금전... 여러 수단을 동원해 서로 싸우고 갈등한다. 오직, 더 높은 서열을 위해서.

이런 일련의 행위를 저열한 말로 ‘정치질’이라고 한다.

갓 입학한 초등학생 무리 안에서부터 한 나라의 방향을 결정하는 정치판까지, 각자 무리를 이루는 곳에서 정치질이 없는 곳은 없다. 인간에게 정치질은 본능이다. 이런 정치질을 잘하는 자가 결국 높은 자리에 올라가며 계속 높은 자리에 유지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남궁 진아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오늘 어떠셨습니까?”

“나쁘지 않았어요.”

오후 5시. 편입반의 여자 애들과의 뒷풀이가 끝난 뒤, 남궁 진아는 자신을 맞이하러 온 비서의 승용차 뒷좌석에 앉아 자신의 푸른색 머리띠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반응이 거의 예상대로더군요. 미리 준비해간 화제들도 잘 먹혔고.”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머리띠를 매만지는 것을 끝낸 후, 그녀는 뒷좌석 팔걸이 박스에서 태블릿 PC를 꺼내곤 문서 파일을 열었다. 문서에 있는 것은 올해 미르의 편입반에 있는 32명의 명단, 이름 옆엔 사진과 추정되는 성격과 취미 등이 적혀있었다. ‘원활한 학원 생활’을 위해 그녀가 준비한 자료였다.

“그러고 보니 이번 자료들, 전부 혼자 준비하셨나요?”

“저 혼자 일을 끝내기엔 살짝 시간이 벅찬 감이 있어서 친구 녀석에게 좀 도움을 받았습니다. 딱히 비밀스러운 일도 아니고 해서...”

“어느 분이죠?”

“비서실에 있는 김일훈이라는 녀석입니다. 스케줄이 비어서 한가하다고 하기에 같이 좀 해달라고 했죠.”

차의 시동을 걸면서 비서가 대답하자 남궁 진아는 한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김일훈씨라... 그분에게도 보답을 해야겠네요.”

“어휴, 됐습니다. 이런 건 일도 아닙니다. 전문적으로 뒤를 캔 것도 아니고 그냥 중고등학교 생활기록부하고 SNS기록 좀 보고 추정한 것들인데요. 뭐.”

됐다는 듯이 고갤 젓는 비서였지만 남궁 진아는 온화하게 웃으며 고갤 저었다.

“그렇긴 하죠. 하지만, 이건 원래 진환씨나 일훈씨가 할 일은 아니지 않나요? 제가 해야 할 개인적인 일을 시간을 쪼개 도와준 거죠. 그러니 감사함을 표현해야죠.”

“그래도...”

“요번에 좋은 와인이 들어왔는데 보답으로 괜찮을 것 같네요. 집에 도착해서 받아가세요. 일훈씨 것도 챙겨드릴 게요. 돈이 아니니 뇌물도 아니고 괜찮죠?”

남궁 진아의 부드러운 음성에 비서는 입을 꾹 다물더니 이내 고갤 끄덕였다.

“계속 거절하는 것도 결례이니...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좋은 판단이에요.”

“...정말, 저희 같은 사람을 챙겨주시는 건 아가씨가 유일합니다. 재훈 도련님에게 배정된 녀석들은 얼마나 앓는 소리를...”

신나서 떠들다가 나중에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깨달은 비서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고갤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주제넘은 말을 했습니다!”

말이 비서지 그들은 실상 머슴이나 다름없다. ‘기업의 오너가’라는 양반댁을 모시는 머슴, 그런 머슴이 일가친척이긴 하지만 감히 주인의 가족을 평가하다니? 그것도 면전에서? 당장 해고돼도 할 말이 없는 중죄였다.

하지만, 그녀는 별 것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어깰 으쓱이곤 팔걸이 박스 안의 냉장고에서 캔콜라를 꺼낸다.

“신경 쓰지 마셔요. 친척들에게 뭐라고 하건 별 감흥은 없으니까. 물론, 저에 대한 험담이라면 조금 다르겠지만.”

“아, 아뇨. 아가씨는 정말 좋으신 분입니다. 비서실 애들 모두 아가씨에 배정된 녀석들을 엄청 부러워하는 걸요!”

“그래요? 고마워요.”

캔콜라를 따서 마시며 그녀는 사촌들을 떠올렸다.

제왕의 손자손녀로 태어난 년놈들, 하나 같이 성급하고 오만하기 그지없다. 물론, 외부에 알려지진 않았다. 기업오너 가족들의 도덕적 해이는 언론사에게 좋은 먹잇감인 만큼, 가족 내에서 조심하라고 나름 철저하게 교육시키니까. 혹여 피해자들이 발생하면 입막음도 잘 시키고.

하지만, 비서실 인원들에겐 다르다.

비서실 인원을 뽑는 기준은 능력이 아니다. 능력 또한 고려하지만 다른 부서와는 달리 최우선 사항이 아니다. 비서실이 가장 우선하는 기준은 바로 ‘절박함’, 배신하기 힘든 처지의 사람을 우선으로 뽑힌다. 직장이라는 밥줄을 포함해 몇 가지 목줄을 쥐고 있으니 반항하지 못한다. 그래선지 그들 앞에서 사촌들은 쉽게 본색을 드러낸다.

참 한심하고 참을성이 없는 것들이다.

왜 그렇게 제멋대로 지랄하지 못해서 안달인 것인지... 아랫것들이 뭐라 하건 상관없다는 것인가? 밑의 평판 또한 나름 훌륭한 자산인데? 참는 것을 못해서 그런 자산을 버린다고?

‘뭐, 내가 알 바는 아니지.’

입을 다신 후, 그녀는 사촌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그리곤 태블릿 PC 액정에 검지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그녀의 검지 끝에서 올라오는 푸른 스파크, 그와 함께 태블릿PC에 뜬 문서가 알아서 정렬되기 시작한다.

마법(魔法)

미궁이 솟아나면서 알려지게 된 마력의 또 다른 사용처, 액정의 터치를 인지하게 만드는 전류는 그녀의 손안에서 일일이 통제되기 시작한다. 그에 힘입어 그녀는 일반인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문서를 수정해나갔다.

오늘 오리엔테이션 뒷풀이를 함께한 여자 애들은 총 16명

그 과정에서 3개의 파벌이 형성됐다. 자신이 택한 파벌은 가장 숫자가 많은 8명이 있는 곳, 이 안에서 곧 서열 다툼이 있을 거다. 물론, 전부 제압 가능하다. 힘으로나 돈으로나 영향력으로나 전부 우위, 게다가 정보까지 어느 정도 모았으니까.

그렇게 여자 쪽 명단을 다 수정한 뒤, 그녀는 남자 쪽으로 들어갔다.

‘얘는 생각보다 별로였어. 허세가 심했지. 앤 전형적인 찐따. 얘는 평범했고...’

오늘 본 남자 애들에 대한 단편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며 그녀는 좀 순화된 표현으로 문서를 하나하나 고쳐나갔다. 그렇게 수월하게 문서를 고쳐나가다가 한 이름에서 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박혁

일진, 학교에서 좀 거들먹대는 놈이 아니라 목포 일대의 고등학교를 주먹으로 평정했으며 권투를 준 프로급으로 배웠고 그 덕분에 조폭 조직에서 스카웃 제의까지 왔다고 정보란에 적혀있다.

처음 이 내용을 읽었을 때 어처구니가 없었다.

옛날 70~80년대도 아니고 2030년대에 지역 고등학교를 주먹으로 평정? 그리고 조폭에게 스카웃 제의를 받아? 미디어의 조폭물에서나 나올 법한 내용에 그녀는 SNS내용들을 토대로 쓰다 보니 이상한 허세가 섞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보니 웬걸?

체력 측정을 했을 때, 알 수 있었다. 녀석은 벌써 본능적으로 힘을 쓰기 시작했다. 주변의 사소한 물리법칙들이 일그러지며 움직임을 도왔다. 아무리 자신이 육체 쪽 단련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지만, 마력에 입문한지 2년 차에 그 동안 강사들로부터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자신과 비슷한 힘을 내다니...

‘조사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육체적인 재능은 엄청 뛰어나. 포섭하고 싶지만 보인 행동거지나 이 자료를 보면 자기 위에 우두머리를 둘 성격이 아니야. 적당히 안면만 익히고 나중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정도로 거리를 두면서 있어야겠다.’

조그맣게 <우호 필요> 표시를 한 그녀는 차분하게 내려갔다.

그리고 ‘서예린’이라고 적힌 문단에서 한 번 더 멈췄다.

텅텅 빈 프로필, 서예린에 관한 자료는 구할 수 없었다. 미궁 출신이라서 그런지 SNS도 안하고 학생기록부도 없다. 적응기관에 자료가 있긴 할 텐데 자신이 가진 인재 풀로는 접근하지 못했다. 오늘 보기 전에는 어떻게 생긴 지도 몰랐다.

하지만, 오늘 한 번 본 것으로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고독한 늑대, 나쁜 말로는 외톨이. 무리를 만들 녀석은 아니야. 현대 사회의 인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직 모르는 것이겠지. 미궁 출신들은 인간관계에 서툴고 개인의 무력에 집착하는 편이 많으니까. 실제로 실력은 생도수준이 아니었어. 좋아, 얘도 관리하면 충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겠어.’

오늘 본 서예린에 대한 소감을 적어놓은 후, 그녀는 마지막 문단으로 갔다. 그리고, 그 이름을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한새벽

사고로 인해 편입반에 오게 된 기존 미르 재학생. 문서에 적힌 대로라면 한새벽은 대단히 뛰어난 인재였다.

북쪽 보육원 출신의 고아였지만 자립했으며, 미르 내의 교우관계도 꽤나 좋았고, 성적도 준수하며, 출신 보육원에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등 인품 또한 흠잡을 때가 없었다. 고아가 아니었다면 자신처럼 작정하고 이미지 관리하는 건 줄 알았을 거다.

하지만, 오늘 본 ‘한새벽’은 완전히 다르다.

건장한 체격과 호남 같은 외모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여자애들보다 작고 나약한 몸과 가늘고 요사스러워 보이는 외모였다. 솔직히, 사고 이전의 모습보단 지금의 모습이 자신의 취향이긴 했다. 하지만...

입가에 항상 걸린 생글거리는 웃음은 왠지 좋게 봐줄 수 없다.

그래, ‘꺼림칙’하다. 오늘 모인 여자애들 사이에서도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꺼림칙하다. 약해보여서 볼품없다. 괴롭히고 싶다... 좋든 싫든 간에 여자애들에겐 찍혔다. 남자 쪽에서도 좋게 보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고. 실력이라도 있다면 모르겠다만 오늘 본 실력도 평균 이하였고.

애매하다.

여기가 보통 고등학교였다면 최하 계급-왕따 확정, 다들 싫어하는 북쪽 출신인 만큼 100% 확신 할 수 있다. 아무리 외모가 뛰어나다 한들, 이 미숙한 아이들이 매기는 계급은 본능에 우선하니까. 하지만, 기존 미르 재학생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이 편입반 내에선 최하 계급인 건 확실해.’

이런 애들에게 손을 뻗는 건 손해가 크다. 얽히는 순간, 기존의 집단원들이 급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며 싫어하니까.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집단의 장악력이 떨어지게 된다. 그에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일단, 보고 난 뒤에 결정하자.’

한새벽에 대한 기존 프로필을 싹 지우고 ‘보류’라고 적은 뒤, 태플릿 PC를 끄곤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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