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9화 (9/350)

3화. 눈을 크게 뜨고 보세요.

1.

미르는 헌터물 양판소의 교육기관처럼 쌈박질만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물론, 어느 정도 전투기술도 가르치지만 결코 그게 주(主)가 아니었다. 직접 소설 속 세상에 떨어져보니 왜 그런지 바로 이해가 갔다.

아니, 솔직히 누가 지하 던전 들어가서 목숨 걸고 피 튀기며 싸우는 걸 좋아하냐?

그것도 며칠간 씻지도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굴러가면서? 이건, 마우스 클릭으로 하는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다. 그리고, 야생동물은커녕 경험이 없다면 저항 못하는 가축을 죽이라고 해도 망설이는 게 사람이다.

근데, 괴물을 죽이라고?

날 향해 진짜 죽이겠다는 흉폭한 살기를 흩뿌리는 것들을? 단순히 짐승뿐만 아니라 인간 뺨치는 지성을 가진 놈들까지 있는데? 장담컨대 멘탈이 터질 거다. 거 헌터물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던전 들어가서 괴물 죽이는 새끼들은 싸패야. 싸패.

하다보니 말이 좀 딴 데로 샜는데, 어쨌든 마력 능력자가 지하 미궁으로 내려가는 일은 별로 없다.

미궁에서 나오는 재료 수급 같이 꼭 필요하지만 ‘위험하고 더러운 일’은 그냥 미궁의 이종족들에게 하청 줘버린다. 평범한 양판소 소설과는 달리 아주 ‘자본주의’스럽지. 아무튼 미르의 생도들이 주(主)로 배우는 것은 전투가 아니라 ‘마력’과 ‘마법’이라는 신비의 힘과 융합이 가능한 과목들이다.

화학, 생물학, 금속재료학 등 이공계 과목들과 마법학, 이종족 언어학, 마력학등의 과목들

그냥 대학교에 가깝다. 실제로 마력에 관한 것은 아직 발견된 지 얼마 안 되는 부분이기에 대학교 연구소와 협업이 많다고. 미르 부지를 대충 돌아다녀 봐도 대학과 기업 연구소가 널린 걸 알수 있다. 이렇게 미르 생도의 80%는 이런 연구직을 위한 길을 걷는다. 솔직히, 좀 깨긴 해.

근데, 내가 왜 난데없이 이런 넋두리를 하냐면...

“화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자다. 특성을 잃지 않는 범위에서 도달할 수 있는 물질의 기본적인 최소입자, 이 원자의 결합에 따라 물질의 형태가 결정되지. 원자보다 더 작은 구성요소인 양성자나 중성자, 업쿼크 다운 쿼크등이 있지만 그런 부분은 물리와 화학의 경계가 거의 사라지는 물리 화학 분야라서 아직은 몰라도 된다. 자, 이 원자의...”

고등학교 화학 수업을 다시 듣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내 기억에 있는 것보다 좀 심각하게 많이 심화된 수업을. 장담컨대, 결코 고등학교 수준이 아니었다. 게다가 진도 또한 꼬리에 불붙은 개새끼마냥 미친 듯이 나갔다. 덕분에 편입생반의 대부분은 혼이 나간 것처럼 멍하니 자리에 앉아만 있었다.

그런 편입생들의 모습에 동그란 안경과 단정한 포마드 머리가 인상적인 화학 교사는 칠판을 탁탁 두드리곤 입을 열었다.

“자, 집중! 너희들이 집중을 못하는 것은 이해한다. 보통 배우던 것에서 좀 많이 심화됐으니까. 하지만, 꼭 필요한 거다. 너희들 중 몇이 곧 배울지도 모르는 마법 같은 이능력에서 화학과 물리는 굉장한 도움이 되거든.”

“정확히 어떻게 도움 됩니까?”

손을 턱에 괸 삐딱한 자세로 물어보는 우리의 양아치 박혁, 그에 화학 교사는 피식 웃으며 양 손을 들어 올리곤 검지를 폈다. 그와 함께 그의 양 검지 끝에서 불꽃이 솟아오른다. 설마 화학 교사가 마력 사용자일 줄은 몰랐던 듯, 늘어진 편입생들의 눈이 일제히 커졌다.

“설명했다시피 마력은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서 현실의 물리 법칙을 잠시 일그러트릴 수 있다. 그 현상이 물리 법칙에 많이 위배될수록 마력은 더 많이 소모되지.”

동시에 두 검지 끝에 있는 불꽃이 주먹만큼 커진다. 그리고 보란 듯이 불꽃이 맺힌 손가락을 휘저으며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둘 다 똑같은 크기의 불꽃이다. 화력도 비슷하지. 하지만, 오른쪽의 마력 소모는 반 이하다. 왜 그럴까?”

“산소죠. 주위의 기류가 흔들리는 게 보이네요.”

맨 앞에 앉아있는 남궁 진아의 대답에 강사는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맞다. 연소의 3요소인 산소, 가연물, 점화원. 왼쪽은 이 모두를 마력으로 대체했다. 반면에 오른쪽은 마력으로 산소를 주위에서 끌어다 쓰는 방식으로 사용했지. 주위에 있는 걸 끌어오는 것과 아예 없는 걸 만들어서 대체하는 것. 당연히 후자가 더 힘들지.”

그 말을 끝으로 손끝에 맺힌 불꽃이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화려하게 터진다. 그 뒤, 그는 편입생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처럼 물질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좀 더 적은 마력’으로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너희도 마력을 사용하게 되다 보면 알 거야. 미르 출신 선배인 내 말을 믿어라.”

“...”

“하하, 다들 좀비가 됐구만.”

나름 주목할 만한 퍼포먼스를 했음에도 여전히 반쯤 멍하니 있는 생도들을 보며 그는 고갤 절래절래 젓곤 펼친 교재를 덮었다.

“좋아, 오늘의 화학시간은 여기까지! 오늘 배운 내용은 전부 복습해둬라. 다음 시간에 쪽지 시험으로 확인 할 거니까.”

그 말을 끝으로 화학 교사는 교실 밖으로 나갔다.

2시간 동안 계속된 정신 공격에 초토화된 교실, 한숨소리와 투덜거림이 교실 안을 감돈다. 성인인 내가 봐도 더럽게 어려우니 당연하겠지. 그나마 멀쩡히 있는 건, 아가씨랑 양아치 그리고 서예린 정도...

아, 아니네.

<관찰자의 눈>으로 살펴보니 남궁 진아만 제대로 하고 있다. 태블릿 PC에 손가락을 댄 상태인데 알아서 써진다. 신기하네. 박혁은 아예 필기 같은 걸 안하고 책상 서랍 아래에서 음소거로 건성건성 폰 게임을 하고 있었고, 서예린은 공책에 수업 내용 대신 몽실몽실하게 생긴 강아지 그림을 열심히 그려 놨다. 되게 진지해서 몰랐는데 말이지.

그렇게 애들이 축 늘어져 있을 때...

-쾅!

교실문을 박차고 근육질 거한-김가트가 들어왔다. 다음 교과 시간은 <전투>, 담당 교사는 김가트다. 그는 교실을 둘러보더니 씨익 웃곤 밖을 가리켰다.

“점심 먹은 후,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1시 30분까지 전투 체육장으로 와라.”

2.

점심을 먹고 좀 쉰 뒤, 난 전투 체육장으로 향했다.

돔형 체육관 형태의 건물, 내부는 콜로세움처럼 중앙이 모래사장이었고 그 외곽에는 계단식 관람석이 줄지어 있었다. 중앙 모래사장 넓이는 대충 농구 코트 4개를 합친 정도, 모래사장과 관람석을 가르는 높이 5m 남짓한 내벽에는 각종 살벌한 냉병기가 벽에 박힌 진열대에 깔려있었다.

“와, 살벌하네. 저기 있는 것들 진짜 칼 아니냐?”

“가짜겠지. 어떻게 저 많은 것들을 관리하겠어? 그것도 경기장 벽에 달린 걸? 그나저나 좀 웃기네. 총이 있는 시대에 저런 걸 쓴다니?”

“미국에서 활동하는 히어로들 못 봤어? 투창으로 장갑차를 관통하는 거?”

“아니, 그건...”

겨우 하루 지났건만 어느새 친분을 다진 듯 끼리끼리 모여 이야기 하는 아이들. 물론, 나는 여전히 혼자다. 시발... 어떻게 끼어들 구석이 없나하고 보고 있긴 한데, 그럴수록 날 슬슬 피하는 게 보여서 더 슬프다. 그렇게 궁상맞은 고독을 씹던 와중에 드디어 김가트가 입구에서 나타났다.

“모두 다 왔냐?”

입구에서 걸어오는 김가트. 그리고, 그 뒤에 함께 걸어오고 있는 경찰복 차림의 젊은 남자. 하지만 평범한 경찰복이 아니었다. 특별한 처리가 되어 있는 듯, 반사광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새카만 검은 코트. 그리고 왼쪽 어깨 견장에 달려있는 두 개의 쇠사슬이 교차된 표시.

생도들의 시선이 같이 온 남자에게 집중되는데, 김가트는 그를 소개했다.

“자, 이분은 오늘 수업을 도와주실 전찬휘 경감님이시다. 4년 전에 졸업한 너희의 선배이기도 하지.”

“반갑다. ‘경찰청 이능력 전담부’ 소속, 전찬휘라고 한다. 이렇게 후배들을 만나니 반갑군.”

새카만 경찰모를 벗어 가슴께에 놓고 고갤 까닥이며 인사하는 남자. 짧은 머리카락에 각이 잡힌 발걸음, 나지막하고 딱딱한 음성, 그리고 절제된 동작과 분위기까지. 꼭 잘 훈련된 사냥개를 연상케 하는 남자였다. 모자를 다시 착용한 후, 그는 무심한 동시에 강렬한 눈빛으로 생도들을 훑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오늘 여기에 온 이유는 왜 여러분들이 ‘전투’라는 과목을 들어야 하는 지에 대해 설명해주기 위해서다.”

“...”

“물론, 김가트 선생님 혼자서도 훌륭히 설명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전투 직종의 관계자에게 직접 듣는 것이 좀 더 현장감이 있다고 윗선에선 판단했다. 그런 이유로 전투 수업 첫날에는 이렇게 이능력자 군인 혹은 경찰이 파견 와서 설명을 한다.”

이어서 코트 주머니에서 손가락만한 리모컨을 꺼내 누르는 전찬휘 경감, 그와 함께 경기장 중앙 위에 붙은 원통 형태의 대형 스크린이 켜진다.

원형의 스크린 화면에서 나오는 것은 각종 뉴스들

심각한 어조로 말하는 뉴스 앵커들과 그들 뒤의 연기가 피어오르는 도심 폐허... 내가 있던 세상에서도 많이 보이던 부류다. 다른 점이라면 터번을 쓴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이종족들의 모습과 초능력을 사용하는 인간으로 바뀌었다는 거다.

“15년 전, 지하에서 미궁이 솟아오른 이후로 각국은 수많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

“...”

“미궁에서 올라와서 지상에 풀려난 위험한 이종족들,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미쳐 날뛰는 초능력 범죄자들, 초능력을 이용한 테러와 기술 탈취까지...”

그렇게 몇 분가량 영상을 틀어준 뒤, 그는 리모컨을 조작해 스크린 화면을 끄고 다시 생도들을 응시했다.

“세상은 혼란스러워졌고 이러한 재난을 막을 이들이 필요해졌다. 우리 사회를, 우리 국가를, 우리 세상을 지킬 ‘수호자’가. 역사가 증명하듯, 이런 중요한 일을 외부인에게 맡기는 건 너무 위험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무거운 직책을 맡을 이들을 여러분들 중에서 뽑는다.”

숨 막힐 것 같은 진지한 어조에 생도들의 분위기가 착 가라앉는다. 군대까지 다녀온 어른인 내가 듣기에도 답답한데, 이제 고딩들인 생도들은 오죽할까? 그런 무거운 분위기에 답변하듯 그는 고갤 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여러분들 모두가 이런 전투가 필요한 일에 종사하지는 않는다. 미르의 졸업생 중 5~10% 정도. 그러나, 나중에 전투 기술을 가르치려면 힘들기에 이렇게 ‘일종의 맛보기’를 보여주면서 경험을 키워놓는 것이다.”

“어, 그럼 전투가 필요하지 않는 직종이 장래희망이면 전투 수업에 빠질 수 있나요?”

“아니, 못 빠진다. 기초 전투까지는 필수과목이다.”

싫다는 표정의 여자 생도의 질문에 답한 후, 그는 리모컨으로 대형 스크린을 조작해 전투 과목을 잘 수료할 시에 선택할 수 있는 진로에 대해 설명했다.

대충 ‘전투 I’부터 전문적으로 특전사 커리큘럼을 혼합한 고강도의 전투훈련을 받고 미르를 졸업하고 나서도 경찰대, 사관학교 송파구 캠퍼스에서 여러 추가 교육을 계속한다. 그리곤 군대나 경찰, 혹은 국정원등으로 빠진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그렇게 몇 차례 질문과 답변-주로 연봉이나 대우등에 대한 설명-이 이십 여분 가량 이어지고 막판에 가서 한 남학생이 손을 들었다.

“저기, 진로에 관한 것 말고 질문은 가능한 건가요? 전투에 관한 건긴 한데...”

“답변할 수 있는 것이면 말해주겠다.”

“마력 사용자는 싸우다보면 점점 강해진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그 질문에 전찬휘 경감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이내 천천히 고갤 끄덕인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그렇다.”

“그럼 저희도 계속 싸워 나가다보면... 그 다크 노바처럼 될 수 있을까요?”

살짝 기대가 섞인 질문, 그 질문에 계속 담담하던 표정의 전찬휘 경감이 묘한 표정을 짓고 지금까지 옆에서 서 있었던 김가트가 실소를 흘렸다. 그리곤 경감이 대답하기 전에 김가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거기엔 내가 말하지. 내 대답은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불가능에 한없이 가깝다.’다.”

“그럼 가능성은 있단 거군요?”

“가능성? 그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지. 그럼 질문을 하지, 넌 다크 노바가 될 정도의 노력을 할 자신이 있나?”

가당치도 않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질문하는 김가트, 그 모습에 질문한 학생은 살짝 발끈하듯 대꾸한다.

“그래도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기엔...”

“난 지상의 나이로 따지면 55세가량 된다.”

학생의 말을 도중에 끊고 말을 하는 김가트, 험악하긴 하지만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의 외모를 생각하면 대단히 많은 나이였다. 설마 그렇게 나이가 많을 줄은 몰랐다는 듯 학생들이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는 가운데 그는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지상에 올라온 10년 정도를 제외하고 난 그 시간 동안 쭈~욱 ‘전사’로서 싸워왔다. 한 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곳-미궁에서 말이야. 목숨의 끊어질 위기를 셀 수도 없을 만큼 경험하면서. 그런 내 실력이 어느 정도 될 것 같나?”

“...”

“오크 기사, 그 중에서 좀 특출난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 겨우 그 정도야. 근데, 그것도 엄청난 거다. 그럼 묻겠는데, 너희가 과연 내 45년 동안 쌓아온 노력을 따라잡을 수 있겠나? 이 지상에서 설렁설렁 놀면서?”

다시 질문한 남학생을 바라보는 김가트, 생각보다 더 커다란 세월의 무게에 남학생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는 가볍게 웃곤 다른 생도들을 바라보았다.

“물론, 너희들 중 몇몇은 날 따라잡을 거다. 불합리한 재능을 가진 이들은 언제나 존재하니까. 당연히, 수 년 간의 뼈를 깎는 노력을 수반하겠지. 그런데 다크 노바는?”

한숨을 내뱉으며 김가트는 고갤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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