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10화 (10/350)

3화. 눈을 크게 뜨고 보세요.

“룬 수호자, 나는 전설 속에서만 들어본 이름이었다. 악마군주? 상위악마 한 마리만 마주쳐도 웬만한 인간 부족은 전멸할 각오를 해야 하는 재앙인데, 상위악마보다 훨씬 강한 군주급 악마는 너무나도 먼 이야기였지.”

“...”

“그것들을 죽여 버리고 룬의 완성에 도전하는 자라... 얼마나 대단한 재능을 가졌고, 또 어떤 아수라장을 걸어갔는지 짐작도 되질 않아.”

담담하고 진솔한 그의 설득에 아이들 사이에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김가트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설령, 내가 그녀와 똑같은 재능이 있다고 해도 난 그 길을 걷지 못할 거다. 미궁의 아래층, 거긴 정말로 끔찍한 곳이다. 내려갈수록 살육이 일상이 되고, 끊임없는 목숨의 위협에 단 한순간도 쉴 수 없다. 정신을 부수려는 악귀들과 영혼을 탐하는 악마들... 그건 너무 끔찍해.”

마지막에 가서 김가트는 어울리지 않게 살짝 두려움과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래, 소설로 읽었을 땐 즐거웠던 것들도 현실로 겪게 되면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은 것처럼 로그라이크 게임의 던전이 현실이 되면 끔찍할 만도 하지. 그 고백에 다시 납덩이같은 침묵이 내려앉는 가운데, 김가트는 얼마 안가 다시 정신을 차리곤 생도들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이 지금 어떤지 알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미르의 생도, 사방에서 천재라고 떠받들어주고 있지. 마력의 영향으로 몸도 점점 강하고 아름답게 바뀌어가니 어느 정돈 사실이야. 자존감이 한없이 부풀어 오를만해.”

말하면서 한쪽 벽을 향해 다가가는 김가트, 벽에 붙은 무기 진열대 앞에서 그는 땅을 박차고 도약해 4m 가량 위에 걸려 있던 대검을 낚아채곤 착지했다.

길이 1m 50cm 가량, 손잡이를 제외한 검신의 폭은 10cm 정도의 실전성이라곤 보이지 않는 대검. 그걸을 가뿐하게 어깨에 걸친 그는 이내 몸을 돌려 생도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면 너희들은 아무것도 아니야.”

“...”

“그 사실을 내가 똑똑히 알려주지. 자, 수업을 시작하자! 원래대로라면 전투에 익숙한 초인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눈앞에서 보여주기 위해서 전찬휘 경감님과 내가 가볍게 대련했을 거다. 하지만, 이번엔 좀 다르게 진행하고 싶군.”

“음? 다르게 한다는 말입니까?”

사전에 얘기한 것이 아닌 듯, 의아하다는 듯이 말하는 전찬휘 경감. 그에 김가트는 씨익 웃으며 대검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그 검 끝이 향한 곳에 있는 것은 바로 나... 가 아니라 내 뒤쪽에 있던 서예린이었다.

“서강 녀석이 항상 자랑했지. 자기 딸내미는 천재라고. 실력은 나랑 거의 맞먹을 거라고.”

“선생님, 생도를 상대로 싸움을 거는 건 좀 그렇습니다만...”

“지금 신입생들에겐 자극이 필요해. 자신들 위에 자기 또래의 ‘훨씬 더 대단한 이들’이 널렸다는 단순한 진리를 깨달을 자극이. 물론, 그녀가 거절하면 어쩔 수 없지만.”

그 말에 서예린은 뚱한 표정으로 고갤 돌려 경감을 바라보았다. 허락을 구하는 듯한 모습.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그가 작은 한숨과 함께 고갤 끄덕이자 그녀는 곧바로 근처의 벽을 향해 튀어 올라 검 두 개를 낚아채서 사뿐하게 내려온다.

“...”

두 번의 곡예 같은 도약, 그 어마어마한 움직임에 생도들 모두가 숨을 죽이는 가운데, 그녀는 오른손에는 펜싱검 같은 날렵한 세검과 왼손에는 한 뼘 반만한 크기의 단검을 서로 교차시켜 슥슥 긁어내 굵은 불똥의 튀기며 김가트를 응시한다. 그 도전적인 모습에 김가트도 씨익 웃었다.

“자, 그럼 생도들은 모두 관람석으로 올라가도록!”

3.

김가트의 지시 이후, 생도들은 모두 위쪽 관람석으로가 앉았다.

모래사장, 그리고 그 안에서 무기를 쥔 채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 콜로세움에서 목숨 걸고 싸우던 고대의 검투사가 이러했을까? 바라보는 생도들마저 마른침을 삼킬 정도의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생도들과 함께 앉은 전찬휘 경감은 두 사람의 대치를 보며 해설하듯 입을 열었다.

“김가트 선생님의 자세는 전형적인 오른쪽 상단 자세다. 다리에서부터 시작해 허리-흉근-삼두 근육을 모두 사용해 강하고 빠른 참격을 날릴 수 있는 전형적인 공격일변도의 자세. 자신이 상처를 입더라도 상대에게 더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고 하는 의지가 담긴 자세다. 그리고, 서예린의 자세는... 말하기 힘들군.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자세다.”

서예린의 자세는 검술을 모르는 내가 봐도 요상했다. 짧은 단검을 든 왼손을 앞으로 내밀고, 긴 세검을 쥔 오른손은 뒤로 뻗었다. 말 그대로 기괴한 자세, 하지만 그녀에게서 뭔가가 스멀스멀 뻗어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잠시 동안 계속 대치가 이어지는 줄 알았던 순간...

“!?”

서예린의 상체가 살짝 낮아지더니 갑자기 몸이 쭈욱 늘어나며 김가트를 향해 쇄도한다. 이어서, 검광이 번뜩이며 쇠끼리 부딪치는 강렬한 소음이 연이어 들리더니 서로 10m 가량 거리를 벌린다. 불과 2~3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이뤄진 공방, 생도들 대부분이 봤으면서도 뭐가 벌어졌는지 몰라서 멍하니 두 눈을 껌뻑였다.

하지만, 나는 <관찰자의 눈> 덕분에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녀가 돌진하는 순간, 김가트는 대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타이밍을 빼앗겼는지 좀 늦었다. 대검에 힘이 완전히 들어가기 전에 서예린은 이미 안쪽까지 접근해 있었고, 그녀는 힘이 잘 실리지 않은 대검의 칼날에 단검의 코등이를 대고 그대로 미끄러지듯 힘을 흘려내며 계속 접근해 오른손의 세검으로 김가트를 찔렀다.

그러나, 김가트는 거기에 당하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 판단을 내리고 손잡이를 쥐고 있던 양손 중 오른손을 놓고 그대로 찔러오는 세검을 향해 뻗어 중지와 검지로 그 검의 옆면을 후려쳤다. 이어서 세검을 후려친 반동으로 오른손을 튕기듯이 서예린의 목젖을 향해 뻗었다. 그 목을 틀어쥐려는 것처럼.

서예린도 반응한다.

세검을 쳐냈을 때부터 몸이 뒤틀리더니 거의 주저앉듯이 앉았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목을 향해 뻗어오는 손을 피하고 이어서 수축했던 허벅지의 반동을 한번을 풀어내 회전하며 다시 단검과 세검의 연격을 시작했다. 그에 김가트도 빠르게 오른손을 회수해 검을 고쳐 잡고 휘둘렀다.

김가트가 피지컬적인 우위로 찍어 누르듯이 공격하면

서예린은 곡예를 하는 것처럼 변칙적으로 흘려내고 반격한다.

그렇게 한 번 크게 호흡할 시간에 13차례나 더 공방이 오가고 김가트가 손해를 감수하고 몸으로 우악스럽게 파고들어가 대검으로 그녀를 날려 보냈다. 이게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이다. 평범한 인간을 초월한 움직임에 생도들이 멍하니 있는 가운데, 김가트는 목젖 부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서강 녀석이 천재라고 자랑할 만하군. 진짜 목숨 걸고 싸운 거였으면 위험했겠어.”

목젖 부근을 틀어막은 김가트의 손 사이로 가늘게 흘러나오는 피, 마지막에 손해를 감수하면서 그녀를 날려 보냈을 때 생긴 상처였다. 김가트의 대검을 세검으로 막으며 서예린이 단검으로 목을 가볍게 그었다. 아마 실전이었으면 더 크게 갈라졌을 거다.

“귀쟁... 엘프 검수를 연상케 하는 날카로운 칼질, 하지만, 그 녀석들에겐 없는 기괴함이 있군. 박자를 빼앗는 선공으로 상대의 반격을 유도한 뒤, 그 반격을 반격하는 더 치명적인 일격으로 끝장내는 검술이라. 확실히, 엘프들보다 더 까다로워.”

소감을 말하며 그는 상처에서 손을 뗐다. 어느새 목에 있는 상처는 아물려는 것처럼 피가 멎어 있다. 가볍게 손에 묻은 피를 핥...으려다가 멈칫하며 털어낸 김가트는 대검을 다잡았다.

“근데, 나도 진지하게 한 건 아니란다.”

김가트가 두 눈을 부릅뜬다. 이어서 그 흰자위에 핏발이 서기 시작한다. 동시에 몸에서 ‘으득! 으득!’ 거리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부풀어 오르며 안 그래도 빡빡했던 티셔츠가 찢어진다. 사자갈기 같이 뻗쳐있던 검붉은 머리카락이 더 뻣뻣하게 솟아오르고 전신에서 보이지 않는 뭔가가 스멀스멀 뻗어 나온다.

그 모습에 서예린의 미간을 찡그리며 왼손에 쥔 단검을 바닥에 놓고 허리춤 뒤에 메고 있던 단검집에서 단검을 잡으려고 할 때...

-탕!

날카로운 총성이 옆에서 울렸다.

영화나 Tv에서 들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큰 소음, 모래사장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생도들이 기겁하며 총성이 울린 곳을 바라보자 거기엔 전찬휘 경감이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서서 특이하게 생긴 권총을 꺼낸 채 서 있었다. 김가트도 등 뒤에서 들려오는 총성에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근데, 그게 끝이 아니다.

-탕!팅! 탕!팅! 탕!팅! 탕!팅! 탕!팅!

연이어 울리는 총성, 그리고 이어지는 도탄(跳彈)음. 김가트의 가슴 쪽을 향해 전찬휘 경감이 권총을 쐈고 김가트는 놀랍게도 그 총탄을 검을 비스듬히 들어서 막아냈다. 그렇게 5발을 연이어 쏜 뒤, 전찬휘 경감은 김가트를 향해 권총을 겨눈 채로 입을 열었다.

“선생님, 진짜 생도 죽일 생각입니까?”

“난 이 상태에서도 사람을 안 다치게 조절할 수 있는데.”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였지만 그래도 꽤나 멀쩡히 대답하는 김가트, 그에 전찬휘 경감은 한숨을 푹 내뱉는다.

“제가 생도 때도 그 상태가 되어 날뛰다 서강 선생님 허리를 부러뜨렸잖습니까.”

“안 죽였잖아? 나중에 회복도 잘 됐고.”

“이건, 단순한 대련입니다. 그것도 생도와의 대련. 그런 위험한 건, 전 허락 못합니다.”

완강하게 고갤 젓는 전찬휘 경감의 모습에 김가트는 다시 으르렁 거린다.

“위험한 건, 네가 쏜 총 아니냐.”

“일부러 모래사장에 한 발 쏴서 기척을 내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쏜 방향도 가슴 쪽으로 한정했고요. 무엇보다 이런 권총은 몇 발 맞아도 안 죽으시면서.”

그 대꾸에 김이 샌다는 듯이 혀를 차는 김가트, 그와 함께 그의 핏발 선 눈과 부풀어 오른 근육들이 빠르게 정상으로 돌아간다. 흘러나오던 기세 또한 마찬가지. 그 모습에 전찬휘 경감도 권총을 넣었고, 서예린도 허리춤에 매단 단검 대신 허릴 숙여 바닥에 놓은 단검을 다시 집는다.

“쯧, 티셔츠만 버렸구만.”

넝마가 된 흰 티셔츠를 거칠게 뜯어낸 후, 김가트는 상처로 가득한 상체를 드러낸 채 다시 서예린과 격돌했다. 흉흉한 기세로 달려들어 그가 대검을 휘두르고, 서예린은 반 박자 빠르게 움직이며 그 공격의 맥을 끊고 반격을 가한다.

그 광경을 생도들은 손에 땀을 쥔 채, 바라보았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초인들의 싸움, 나도 동영상으로도 마력 능력자 간의 싸움은 여러 번 봤지만 이런 현장감은 느낄 수 없었다. 대검이 공기 가르는 소리와 칼이 ‘쩡! 쩡!’ 맞부딪치는 소리가 관람석에서도 다 들렸다.

하지만, 두 사람은 싸우고 있지 않았다.

움직임이 대단해서 박진감 넘쳐 보일 뿐, 코앞에서 보니 서로 눈짓하고 움직이는 게 빤히 보였다. 김가트는 일부러 크게 움직였고 서예린은 가뿐하게 반응한다. 처음에 있었던 두 사람 간의 긴장감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재미있긴 했다. 짜고 치는 레슬링이 재미있는 것처럼.

그렇게 3~4분가량 검투가 진행된 뒤, 김가트는 대검을 내렸고 서예린도 칼을 내렸다.

겉보기엔 살벌한 쇼가 끝나자 생도들에게서 박수가 터져 나온다. 콜로세움의 검투사처럼 김가트는 한 손을 들어 화답한 뒤, 객석 위의 생도들을 향해 소리쳤다.

“다들 봤겠지? 초인은 이렇게 일반인을 능가하는 신체능력을 가질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은 고되겠지만 말이지! 그리고, 이제부터 서예린은 전투 과목에서 조교다. 봤다시피 얘는 내가 딱히 가르칠 게 없어. 날 도와서 전투 과목 수업을 진행할 테니 지시에 잘 따르도록.”

“...”

“그리고 서예린, 조교도 월급이 나오니 넌 수업 끝나고 중앙관 교무실에 와라. 교직원 등록해야하니까.”

조교를 하라는 말에 미미하게 미간을 찡그렸지만 이내 월급이 나온다는 말에 표정이 풀어지는 서예린. 흠, 월급의 힘은 미궁 출신도 풀어지게 만들 정도로 강력하군. 저 누님, 겉보기엔 쿨하지만 자세히 보면 행동들이 은근 귀엽다. 물론, 따지고 보면 내가 훨씬 연상이겠지만.

그렇게 멋진 한판을 보고 생도들이 들떠 있을 때, 전찬휘 경감이 나지막하지만 또렷이 들리는 목소리로 그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보았다시피 마력 사용자는 저렇게 강하다. 그에 따라 사법처리도 일반인에 비해 매우 엄격하다. 마력 사용자가 경찰의 체포에 불응할 시, 바로 사살 요건이 된다는 걸 명심하도록. 너희들은 무조건 경찰의 말을 들어야 한다.”

“...”

“물론, 마음먹으면 경찰들을 뿌리치고 도망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나중에 찾아올 ‘이능력 특전단’을 감당할 수는 없을 거다. 전문적인 장비와 훈련을 받은 그들은 하나하나가 미궁의 강자들도 긴장할만한 실력자다. 그들을 뿌리친다면 미궁 출신들도 올 거고.”

그렇게 경감의 찬물에 살짝 달아올랐던 생도들의 분위기가 가라앉자 김가트는 한숨을 푹 내뱉는다.

“...하, 넌 왜 수업에 초를 치냐?”

“그게 제 일이니까요. 이능력자로서 얻을 수 있는 특권과 그에 따른 책임을 ‘분명히’ 알려주는 것.”

대답과 함께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김가트를 향해 가볍게 고갤 숙였다.

“그럼 일이 다 끝났으니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서예린양, 덕분에 쉽게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서예린에게도 깍듯하게 인사한 후, 김가트에게 리모컨을 넘기곤 곧바로 몸을 돌려 문 쪽으로 향하는 전찬휘 경감. 김가트는 ‘딱딱한 녀석.’이라고 중얼 거린 후, 관람석의 생도들을 향해 손짓했다.

“자, 모두 내려와라! 이제부터 싸움 요령을 가르쳐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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