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12화 (1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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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간. 장붕이랑... 비밀친구 할래?

1.

눈을 뜨니 낮선 천장이다.

...또 다른 이세카이로 온 것인가? 육안으로 보이는 흐릿한 시야에 반사적으로 <관찰자의 눈>을 사용하려고 했지만, 곧바로 관자놀이에 송곳이 박히는 듯한 통증이 느껴져서 그만뒀다. 그것 외에도 몸이 욱신거리는 것이 많이 안 좋은 것 같았다.

그렇게 통증에 신음을 흘리며 눈만 끔뻑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와 내 얼굴을 내려다본다.

“괜찮니?”

목소리를 드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당연하지 시발! 이 사람에게 잘못 보이면 다시 정신병동에 처박히게 될 테니까. 정신 병동에서 날 담당하던,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씩 보는  의사 정한솔 선생. 찌르는 듯한 통증에도 난 재빨리 <관찰자의 눈>을 켜고 고갤 끄덕였다.

“나쁘지 않네요.”

“하, 넌 항상 하는 말이 그거 밖에 없구나. 싱거운 녀석.”

살짝 코웃음을 흘리며 고갤 절래절래 젓는 그녀, 그 모습을 보며 난 최대한 머리를 쥐어짜며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떠올리려했다.

그래, 생각난다.

전투 과목을 받던 도중 워낙 못해서 <관찰자의 눈>을 이용해서 서예린의 동작을 따라했었다.

그 장면을 떠올리는 순간, 난 반사적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공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파악하는 초월적 시야, 그것을 통해 본 서예린, 전신의 신경 시냅스를 내달리는 섬광, 그에 따라 반응하는 근육, 동작을 완성시키는 관절, 주위의 법칙을 일그러트리며 힘을 더하는 마력...

육안으로 본 것과는 차원이 다른 복잡함이 안 그래도 지끈거리는 머리를 더 골치 아프게 만들었다.

하지만,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과는 별개로 뭐가 있었는지 기억났다.

난 그 초월적 시야로 서예린을 봤고 그녀의 동작을 미흡하게나마 따라했다. 그러다가 뭔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린 것인지 서예린이 갑자기 날 향해 가검을 휘둘렀고 가슴팍에 한 대 맞고 기절했다.

“아프냐?”

내가 한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얼굴을 찡그리자 심드렁하게 물어보는 의사 양반, 그에 난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아, 좀 그러네요. 저... 상황이 정확히 어떻게 된 겁니까?”

“어떻게 되긴, 전투 체육관에서 수업 받던 도중에 사고로 실려 온 거지.”

고갤 삐딱하게 기울인 채로 날 내려다보며 그녀는 옆구리에서 차트를 꺼냈다. 그리곤 안의 내용을 살피며 말을 이어나갔다.

“X레이로 확인 결과 흉골과 갈비뼈 5대가 부러졌다더구나. 다행히 부러진 뼈가 폐를 찌르지 않아서 빠르게 포션 주사로 조치, 부러진 뼈도 다 붙었고 내일쯤이면 완전히 나을 거라는 소견이야. 근데, 다른 쪽이 심각해서 내가 다급하게 이쪽에 왔고.”

“다른 쪽이요?”

“응급조치를 다 끝냈는데도 눈과 코에서 피를 흘리고 계속 간헐적으로 발작을 일으켜서 응급실 의사가 혹시나 해서 다른 검사까지 진행했다. 그 확인결과, 뇌파가 간질 환자처럼 날뛰는 걸로 나왔고. 그것 외에도 팔과 다리 근육도 무리를 했는지 파열된 게 확인됐다.”

의미심장한 의사 선생의 말에 난 입을 다물었다. 가슴과 다리의 근육 파열은 내가 서예린의 동작을 무리하게 따라하려고 해서 그런 것 같고, 뇌파가 날뛰던 건... 공간을 읽어 들이는 방식으로 쓴 <관찰자의 눈> 때문일 거다.

어찌됐든 간에 거기까지 설명한 의사 선생은 펼친 차트를 접곤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다행히 내가 와서 늦지 않게 조치했단다. 근데, 왜 그렇게 됐는지 의심되는 것이 있니?”

“...아뇨. 딱히.”

왜 그런 결과가 벌어졌는지는 짐작이 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으니 그냥 모르겠다고 하는 수밖에. 내 대답에 선생은 잠시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내 눈을 뜨고 날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조교의 동작을 따라하는 거요. 그 순간, 조교가 뭔가 수틀렸는지 절 때렸죠.”

“아, 너 기절해 있을 때 내가 그 조교 얘도 만나봤거든? 근데, 걔 말을 들어보니까 네가 자신을 공격하는 줄 알았다고 하더라고.”

이어지는 의사 선생의 설명을 들어보니 형편없이 검을 휘두르던 내가 갑자기 피눈물을 흘리며 웃더니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흉악한 검격을 휘둘렀고, 그 앞에 있던 조교-서예린은 거기에 식겁해서 반사적으로 반격했다는 소리였다.

그 설명을 다 듣고 난 쓰게 웃었다.

서예린의 입장도 이해가 된다. 마지막으로 휘둘렀던 칼질은 내가 서예린의 몸 내부를 보면서 그녀의 모든 것을 어설프게나마 따라한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그 전에 피눈물을 흘리며 웃기까지 했는데 그녀 입장에선 좀 식겁할 수밖에.

그나저나 선생은 내 대답과 상황을 듣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일종의 플래시백인가?”

“...그게 뭔가요?”

“과거의 기억에 강렬하게 몰입되어 그 당시의 감각이나 심리 상태 등이 그대로 재현되는 증세를 뜻하는 심리학 단어지.”

항상 들고 다니는 지휘봉 모양의 마법봉을 꺼내곤 내 허벅지를 쿡 찌르는 선생, 통증에 내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자 그녀는 빙긋 웃는다.

“스스로 근육을 파열시킬 정도로 움직이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어. 특히나 칼 같이 가벼운 물체를 고작 몇 번 휘두르는 정도로 근육을 파열시키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 뇌에 일종의 락(Lock)이 걸려 있어서 그런 손상을 일으킬 정도로 힘쓰는 걸 막거든. 특수한 훈련을 받지 않는 이상 불가능해. 근데, 넌 그걸 해냈어.”

“으음.”

“인간의 기억은 뇌뿐만 아니라 이런 근육 신경에도 있단다. 특히나 운동에 관한 것은 그 비율이 높고. 아무래도 몸을 움직이는 수업이 자극이 되어 신경에 저장된 기억이 떠오르고, 자연스럽게 지금의 네 수준으로 불가능한 동작을 억지로 하려다가 손상된 걸 거야.”

그녀는 내 허벅지 쪽에 있던 마법봉을 천천히 긋듯이 머리 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렇게 예전에나 가능하던 동작으로 움직이니 자연스럽게 뇌에도 자극이 갔을 거야. 그럼 머릿속에서 관찰된 뇌파의 혼란도 어느 정도 설명되거든.”

진실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선생의 설명에 난 고갤 끄덕였고 그녀는 내 머리 쪽에 있던 마법봉을 회수하곤 입을 열었다.

“사실, 이건 네 증상을 현대 의학에 어거지로 끼워 맞춰서 설명한 거란다. 마력에 의한 정신 이상 및 신체 이상은 아직도 미지의 영역이 훨씬 많으니까 전혀 다른 것이 원인일 수도 있지. 수업을 듣는 것이 힘들면 계속 병동에 있는 것도 가능한데, 어떻게...”

“아뇨, 괜찮습니다. 전혀 힘들지 않아요. 완전 정상.”

내가 미쳤다고 다시 거기에 들어 가냐? 건재함을 어필하기 위해 재빨리 고갤 젓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그녀는 계속 누워있으라는 듯이 다시 마법봉으로 내 가슴을 찌르며 고갤 주억였다.

“알겠어. 알겠으니 오버 좀 하지마라. 이거나 받으렴.”

빈 손으로 의사 가운 주머니에서 갈색약병을 하나 꺼내는 선생, 초록색 라벨에 단풍잎 같은 것이 그려져 있다.

“CBD오일이란다.”

“CBD오일?”

“알아듣기 쉬운 말로 대마초 오일. 다른 성분들도 포함된 복합형이지.”

대마초 오일이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내 표정이 찡그려지는 가운데, 그녀는 마법봉을 회수하곤 보란 듯이 한쪽 손으론 내 입술을 잡고 다른 손으론 약병을 잡았다.

“의료용이니 걱정 마렴. 몸을 움직이는 수업을 받기 전, 이렇게 입술 안쪽에 한두 방울을 떨어트려. 기분이 좀 나른해질 텐데, 그건 어쩔 수 없고. 그 대신에 오늘처럼 간질이 일어나는 일은 확실히 막을 수 있을 거야. 알겠니?”

“아, 옙. 근데...”

“근데?”

내가 말끝을 흐리자 고갤 갸우뚱하며 반문하는 선생, 그녀가 건넨 약병을 받으며 난 살짝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발작 한 번 일으켰다고 이런 것을 주는 건 정상이 아닌 것 같은데요. 이거 마약 아닙니까?”

“경증환자면 당연히 약한 것부터 줬겠지. 하지만, 넌 이미 중증환자거든.”

“...중증환자요?”

“약물 처방 없이는 며칠 간 아예 잠을 못 자는 환자가 먹는 약이 정상일리 있겠니? 네가 자려고 매일 먹는 약들도 마력으로 정제된 마약성분이 대량으로 들어가 있단다. 그중에는 CBD성분도 당연히 있고.”

그 말에 난 잠깐 멍하니 있다가 이내 쓰게 웃었다. 어쩐지 먹을 약을 주면서 다른 사람에게 주지 말라고 강하게 경고하더라니...

그래, 난 아직도 약 없이는 잠을 못 자는 병신이다.

입으로는 르피너스를 욕해도 자려고 누울 때마다 그 끔찍한 기억이, 꿈속에서 그것과 다시 마주하지는 않을까하는 그 비정상적인 공포가 가슴 속에서부터 올라와 나를 옥죈다. 그래서 맨 정신으론 절대 못 잔다. 내 무의식이 생존 본능을 거스를 정도로 발작한다.

...사실, 약을 먹고 잠드는 것도 두렵기는 매한가지다.

그래서 최대한 버티고 버티다 한계가 오는 주말쯤에 이틀을 몰아서 잔다. 대소변이 마려워서 도중에 깨지 않도록 하루 전부터 되도록 소식한 뒤, 약을 삼키고 침대에 눕지. 물론, 선생에겐 비밀이고. 이런 인간을 억지로나마 잠들 수 있게 해주는 약이 정상적일 리가 없었다.

“그건 한 달마다 한 병씩 새로 줄게. 그럼 잘 쉬렴. 깨어났으니 난 퇴근하러 이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선생이 사라진 뒤, 난 잠깐 내 손안의 대마초 오일을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뱉었다. 내 신세가 참... 피곤함이 몰려왔지만 겨우 피곤한 걸론 잠을 잘 수가 없다. 그래도 쉬긴 쉬어야지.

그렇게 <관찰자의 눈>도 해제하고 육안도 그대로 감았을 때...

2.

-똑! 똑!

뭔, 의사 양반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새로운 사람이 들어 오냐. 두통을 무릅쓰고 다시 <관찰자의 눈>을 켜서 확인하니 김가트와 서예린이다. 침상에서 상체를 일으킬 동안, 두 사람은 내 쪽으로 다가왔다.

“깨어났다고 들었다. 몸은 괜찮나?”

김가트의 질문, 난 고갤 끄덕였다.

“예, 몸이 욱신거리는 거 빼면 별로 없네요.”

“그래, 제 때에 약물로 집중 치료하면 뼈나 근육의 손상은 별거 아니지.”

고갤 주억인 김가트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자, 같이 따라온 서예린이 조심스럽게 들고 있는 과일 바구니를 침대 옆 서랍장 위에 올려놓는다.

“음, 미안하다. 서예린이 아직 지상에서의 적응을 다 끝내지 못했다는 걸 내가 고려하지 못했어. 수업을 진행하는 교관으로서 내 잘못이 크다.”

“죄송합늬돠...”

김가트가 먼저 사과를 하고 이어서 서예린이 살짝 불퉁한 표정으로 고갤 꾸벅이며 사과한다. 그 불성실한 모습에 김가트가 그녀에게 눈치를 주려는 찰나, 난 입을 열었다.

“의사 선생님에게 대략적인 사정을 들었습니다.”

“...”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이해한다는 듯이 가볍게 대답하자 김가트의 얼굴이 안도와 의아함이 감돈다. 왜 이렇게 무난하게 넘어가나 싶겠지. 사실 나도 처음엔 차량 접촉 사고 났을 때처럼 뒷목을 잡고 엄살 부릴까도 생각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피눈물 흘리면서 웃는 모습은 내가 봐도 섬뜩했고, 그걸로 괜히 저 어린애-서예린에게 꼬장부리는 건 좀 양심에 찔렸거든.

“어, 그래?”

“예, 고의는 아니지만 저도 오해를 할 만한 행동을 했으니까요. 피눈물 흘리면서 웃다가 칼을 휘두르다니, 옆에서 보는 입장에선 좀 날카롭게 반응할 수도 있죠. 딱히 몸에 후유증도 없는 것 같고 이대로 끝내면 될 것 같습니다. 아, 병원비 정도는 좀 내주셔야겠지만.”

“그건 걱정마라. 미르의 의료시설은 생도에겐 전부 무료니까. 하하!”

내 대답에 감가트가 맘에 든다는 듯이 활짝 웃는다. 서예린도 겉으로 티는 내지 않으려 하지만 안도하는 기색이고. 직장 관련 문제라서 그런 건가? 하하. 그래, 그건 다 똑같지. 그렇게 웃던 김가트는 고갤 끄덕이며 나와 서예린을 번갈아 바라본다.

“좋아, 다행이군. 그럼 난 바빠서 이만 가볼 테니 여기 서예린 양이랑 이야기하며 오해를 풀어라. 예린이가 바깥에서 잘 적응을 못하고 있거든? 다른 생도들이랑 잘 어울릴 수 있도록 네가 잘 좀 봐주렴.”

“...?!”

“그럼 잘 부탁하네. 조교 선생? 뭐해? 사온 과일이라도 깎아줘.”

서예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발하려 하지만 이어지는 ‘조교 선생’이라는 한마디에 침몰한다. 근데, 김가트 저 양반도 어지간히 또라이네. 문제 삼지 않겠다고 하니 곧바로 나가려는 것 보소. 나와 서예린이 당혹함을 느끼건 말건, 김가트는 능글맞게 웃으며 병실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병실에 남겨진 나와 서예린

어색한 침묵이 감고는 가운데, 김가트가 나가고 축 늘어져 있던 그녀는 이내 넋나간 얼굴로 바구니에서 사과 하나를 꺼내곤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검을 꺼내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어이구, 날을 보니 이가 잔뜩 나가고 군데군데 녹이 끼어있다. 사과를 깎아도 저런 걸로 깎다니...

딱 봐도 내키지 않아하는 모습

단순히 가해자가 피해자를 마주하는 껄끄러움 그 이상으로 꺼려하는 기색에 난 솔직하게 말했다.

“제가 싫은가요?”

급작스런 직구에 놀랐는지 사과를 깎던 손이 덜컥 멈춘다.

곧 아무 말 없이 다시 사과 깎기를 이어나가지만 저 반응이 뭘 뜻하는 지는 뻔하지. 진짜 아무 짓도 안했는데 날 싫어하는 걸보면... 돌연변이, 성능 확실하구만? 쓰게 웃으며 난 말을 이어나갔다.

“흠, 억울하네요. 전 딱히 그쪽에게 피해를 끼친 적이 없는데.”

“...”

“오히려 그쪽이 좀 과민하게 반응해서 제가 피해를 받았잖아요?”

예쁘게 토끼 모양으로 깎아놓은 사과 조각, 녹이 약간 묻었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고 집어먹었다. 그렇게 내가 말하자 조용히 침묵을 지키던 서예린이 손을 멈추고 날 빤히 바라본다. 그리곤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연다.

“내 눈, 속일 수 없음.”

“속여요? 제가?”

“넌 평범한 사람이 아님. 아주 위험한... 인간.”

위험한에서 잠시 말을 멈추고 고민하다가 나중에서야 인간이라고 말하는 서예린.

허허, 아무리 봐도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 같은데? 그나저나 예상 밖이다. 너무 약해서 경멸 한다는 거라면 이해할 텐데, 일반인보다 약한 내게 위험한 인간이라니? 이해가 안 되는...

아니, 어쩌면 그녀는 내 스스로도 인지 못하는 것을 느낀 걸지도 모르겠다.

난 위험하진 않지만 평범한 인간은 아니니까. 좋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좀 많이 나쁜 의미에서. 저렇게 경계심 가득한 사람에게 지금 다가가 봤자 친해지긴 힘들겠지. 한숨을 내뱉으며 난 천천히 생각해둔 말을 꺼냈다.

“뭣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이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위험하지도 않고 오히려 엄청 약하답니다. 여자애들보다도 신체능력이 떨어질 정도로요. 체력 측정 때 보셨을 텐데요?”

“...”

“뭐, 안 믿으신다면 어쩔 수 없죠. 지금 이 상황에서 서로 친하게 지내는 건 힘들겠네요. 그래도 이거 하나만은 말할 수 있어요.”

나름 진심을 보이기 위해 감고 있던 두 눈을 뜨고, 난 똑바로 그녀와 눈을 맞춘 채로 또박또박 말했다.

“저는, 상대가, 먼저 적대하지 않는 이상, 상대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아요.”

“...”

“바깥세상의 문명인답게 서로 사이좋게 지내자고요. 러브 엔 피스, 러브까지는 아니더라도 평화롭게. 괜히 날카롭게 반응해서 적을 늘리는 것보단 낫잖아요?”

“...”

“보아하니 조교 직장이 마음에 들어 하던 눈치던데, 만약에 제가 이번 일을 문제 삼았다면 예린양은 미르에서 조교로 활동하지 못했을 거예요.”

계속 침묵을 지키기에 결국 비장의 패-직장을 언급하자 살짝 움찔하며 황금색 눈동자를 옆으로 또르르 굴려 시선을 피하는 서예린, 그런 그녀를 향해 나는 빙긋 웃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을 배려해서 넘어가줬죠. 이걸로 약점 잡으려는 게 아니에요. 이미 괜찮다고 지나간 일이죠. 그냥, 제가 한 것처럼 약간의 배려 혹은 이유 없이 배척하는 걸 그만 해줬으면 하는 거랍니다.”

“...조아.”

내 설득에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서예린, 그 모습에 나도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그래, 첫술에 배부를 순 없지. 첫 인상이 나쁘더라도 다른 모습들을 계속 보여주면 결국 평가도 바뀔 거다. 하나씩 하나씩 고쳐나가야지.

쥐고 있던 사과 조각을 입에 털어 넣은 후, 난 입을 열었다.

“네, 그 정도면 되요. 그럼 가셔도 좋아요.”

“...?”

“저랑 있기 껄끄럽잖아요? 괜히, 여기 더 있어봤자 할 말도 없을 텐데 이 정돈 배려해 드릴 수 있답니다.”

“...”

“아, 사과 깎아준 거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깎아둔 사과 조각을 하나 더 집어 들며 말하자 그녀는 반색하며 고갤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 밖으로 쌩하니 사라졌다. 허허...

음, 가란다고 진짜 가다니 좀 섭섭하네.

하지만, 이게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최선이다. 난 누구와도 친해질 수 있는 인싸와는 거리가 먼 노말 펄슨이니까. 아싸는 아니야. 아니라구...

“에휴.”

다시 침상에 드러누웠다. <관찰자의 눈>과 게임 시스템 능력은 정말 괜찮은 능력이다만, 인간관계를 희생하고 얻은 거라는 걸 상기하면 그다지 좋은 것 같지는 않다. 뭐, 어쩌겠나. 바꿀 수도 없고 감내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한탄을 하며 난 손에 쥔 사과 조각을 베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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