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당사자는 모르는)과거의 인연들
1.
보통 장르 소설에서 아카데미가 나오면 거기에 나오는 내용은 뻔하다.
선의의 경쟁, 유쾌한 청춘, 젊은 혈기의 도전정신... 그래, 뻔하지. 하지만, 동시에 즐겁고 유쾌하고. 그래서 나도 아카데미가 나오는 소설물을 좋아한다. 실제로 아카데미 부분만 재미있어서 고것만 읽고 이후 파트는 스킵한 적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현실은 시궁창이다.
있는 건, 무시와 따돌림뿐. 학생이 학교에서 따돌림 당한다고 하면 성인 입장에선 좀 가볍게 생각하곤 했는데 직접 당해보니 전혀 달랐다. 한 번 푸닥거리를 한 뒤로 직접적인 괴롭힘은 사라졌지만 아주 조-옷 같지. 내가 성인이라서 견뎠지 감수성 넘치는 청소년이었다면 방구석 폐인이 됐을 거야.
아무튼, 그렇게 난 12월부터 2월까지 3개월의 시간을 버텨냈다.
“후흡, 하! 후흡, 하!”
토요일 새벽, 미르 ‘스포츠 과학관’의 헬스장. 오늘도 기계적으로 호흡하며 나는 다시 랫 풀 다운(Lat Pull Down) 머신의 봉을 당겼다. 쥐어짜듯이 수축하는 등근육, 그와 함께 쥐고 있는 봉이 가슴께로 내려온다. 이어서 천천히 근육을 이완시키자 봉이 올라간다.
“후흡!”
그렇게 난 근육을 느끼며, 그리고 근육이 성장하기를 ‘소망’하며 15개 5세트를 반복한 뒤 머신에서 일어섰다. 옆에 둔 단백질 쉐이크를 마신 후, 목에 걸친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펑 젖은 내 몸을 바라봤다.
여전히 작고 볼품없는 몸
하지만, 3개월 전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를 이뤄냈다. 30kg 초반이던 체중이 40kg 중반으로 15kg이상 늘었으며, 그 무게가 전부 순수하게 근육이다. 키도 155cm로 6cm나 자랐다. 평범한 일반인은 꿈도 못 꿀만한 성장속도다.
그래서 지금 <상태창>으로 보이는 내 능력치는...
***
인간-초보자
HP 11/11 AC 0 힘 9 레벨: 1
MP 5/5 EV 0 지 10 신앙: 없음
소지금 0 SH 0 민 8 주문: 0/0 남음
***
피통은 3이나 올랐고 힘은 9로 이전의 2배가 넘었다. 티는 안 나지만 마나도 늘었지.
그래, 신체적으로 ‘평범한 사람’ 보다 약간 나은 수준이 됐다.
전부 <무한의 눈> 덕분이다. 완벽하게 운동 동작을 따라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언제 내 근육이 한계까지 파열되는지 그리고 언제 다 회복되는지 파악할 수 있어서 최대한도로 운동할 수 있었거든. 게다가 마력이 어떻게 근육과 몸을 키우는 지도 봤기에 그 과정을 내 몸에 적용할 수 있었고.
그렇게 어느 정도 근육이 올라온 몸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다가 난 문득 다른 편입반 애들을 떠올라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다른 애들은 치고 나가는데 나는 이제야 출발선이네요.”
객관적으로 경이로운 변화. 하지만, 다른 편입반 애들도 놀고만 있지 않았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실시하는 야간 자율학습이 진짜 ‘자율’로 하는 학습이 아닌 것처럼 김가트는 아직 머리가 굳지 않은 아이들을 제대로 굴렸다.
트레이너들과 함께 애들이 하루에 2시간 이상 운동을 하는 지 체크, 게다가 식단까지...
덕분에 아이들은 빠르게 환골탈태했다. 외모는 아직 많이 바뀌지 않았지만 남자 애들은 운동선수 같은 근육질 혹은 살결이 희고 호리호리한 아이돌 체형으로 변화하고 있었고, 여자 애들은... 더 변화가 컸다고만 말할게.
그래도 다른 애들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운동했으니 더 얻은 게 많아야겠지만 내겐 ‘저주’가 있었다.
‘허약함’, 그리고 ‘힘 약화’라는 돌연변이가.
<무한의 눈>으로 확인한 결과, 이 염병할 것은 의식하지 않으면 내 머릿속에서 신경망을 타고 마력이 흘러나와 근육과 키의 성장을 방해했다. 거기에 더해 평일 동안 근성장이 가장 활발히 이뤄지는 잠을 자지 않아서 성장이 더뎠다.
지금 이 상태도 아등바등 거리며 억지로 유지하는 거지, 운동을 안 하면 빠르게 이전 상태로 돌아갈 거다.
“...그래선 안 되죠.”
내가 운동에 미친 헬창은 아니지만 최소한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의 힘은 있어야 한다. 그래, 정상적인 삶을 위해서라도 운동은 필요하다. <무한의 눈>으로 등근육의 손상도를 확인한 후, 좀 더 조질 수 있을 거라 판단하고 다른 등 운동기구로 갔다...가 멈췄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니 오전 6시 30분
평일이라면 마음껏 더 운동해도 되겠지만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래서 수면제 먹은 뒤 잘 날인 토요일에 이렇게 깨어있는 거고. 괜히 운동 더 하겠다고 꾸물대다 예약한 버스를 놓치면 안 된다. 간신히 허락받은 외출인데! 암! 그렇고 말고!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난 발걸음을 돌려 샤워장으로 움직였다.
2.
인간은 결국 집단을 이루며 사는 사회적 동물이다.
그렇기에 인간관계라는 것은 참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내 인간관계는 아주 엉망진창이다. <꺼림칙한 존재감> 돌연변이로 인한 편입반에서 아싸 취급, 이것만으로도 심각한데 ‘진짜 한새벽’이 남긴 인간관계들까지 남아있었다.
정신병동에서 나오면서 받은 휴대전화에 수북하게 쌓인 문자와 부재중 전화들
봤으면 뒤늦게라도 답장하는 게 예의긴 했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내게 한새벽의 휴대전화란 전혀 모르는 사람의 휴대전화와 동일했으니까. 모르는 사람의 휴대전화를 들고 주인인 척 연기해야하는 건, 염치를 지나치게 아는 내 얇은 낯짝으론 힘든 일이었고 그래서 의도적으로 피해왔다.
하지만, 언제까지 계속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좋든 싫든 한새벽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상, 문제를 직시하고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그래, 죽어도 하기 싫지만 해야 해.
“그래도 이런 곳에 오게 될 줄은 꿈에서도 못 꿨는데 말이죠...”
아침 버스를 타고 도착한 정류장, 그 인근을 둘러보며 난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한국이지만 묘하게 한국 같지 않은 분위기, 재개발이 진행되다만 8, 90년대 가정집이 가득한 경기도 지방 도시 같은 풍경. 그리고, 도로 표지판에 걸린 개성(開城)이란 글자.
세상에, 내가 북한에 오게 될 줄이야.
이젠 대한민국이긴 하지만 말이지. 이곳에 떨어진 뒤,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한국이 통일 여파로 씹창인 거보고 ‘염병, 통일은 왜 돼가지고...’라고 생각했는데, 통일이 안됐으면 고도비만 미사일 돼지가 박수치며 굽어보는 공산주의 독재국가의 고아가 될 뻔 했다.
...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네.
역시, 어떤 대통령께서 말했던 것처럼 통일은 대박이 맞았다. 어찌됐든 풍경 감상은 접어두고 주위 택시를 잡아탄 뒤에 목적지로 향했다.
20분가량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도심 외곽 논밭 사이에 덩그러니 지어진 건물
작은 시골 학교를 개조한 듯한 그 건물의 교문에 세로로 걸린 현판에는 ‘한마음 보육원’이라 쓰여 있다.
“쓰읍, 하아.”
택시에서 내린 뒤, 난 그 현판을 바라보며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진짜 한새벽이 있었던 곳, 그리고 은행에서 대출한 5억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무시하고 싶었지만 여기서 온 문자나 전화를 보니 그럴 수 없었다. 최소한 매듭짓기라도 해야 한다. 그렇기에 힘들게 의사 선생의 허락을 받아서 왔고.
“가보죠.”
마음을 다 잡으며 안으로 들어서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는 남자 애들이 보인다. 운동장 안으로 들어온 날 보더니 축구를 그만두곤 술렁이는 녀석들, 그 뻘쭘함을 무릅쓰고 보육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새벽아!”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듯, 문을 열자마자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애가 이름을 외치며 달려들어 껴안으려고 했지만... 날 내려다보더니 멈칫한다. 그 뒤,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저... 누구신지?”
“한새벽입니다.”
“...네?”
내 대답에 뭔 개소리지 라는 표정을 짓는 여자애. 방금 전 외침에 내가 왔다는 소식이 돈 듯, ‘새벽이 왔어?’, ‘새벽 오빠?’등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리며 애들이 몰려온다. 초중고 각양각생의 나이대의 아이들은 물론이고 보육사로 보이는 남자까지.
쏟아지는 ‘쟨 누구?’라는 듯한 시선에 난 최대한 좋은 인상을 주도록 선글라스를 벗고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한새벽이라고 합니다.”
3.
내 소개에 벙 쪄있는 이들에게 난 천천히 대외적으로 알려진 사실에 대해 설명했다.
마력이 있는 물품을 다루다가 발생한 사고, 그로 인한 돌연변이와 외형의 뒤틀림, 그리고 기억상실까지. 그래, 난 최선을 다했다. 세상 그 누구를 데려와도 이보다 진지하고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을 거다.
하지만, 세상 일이 다 그렇듯 노력한다고 무조건 잘되지는 않는 법이다.
“쟨 새벽 오빠 아니야!”
“새벽이 형 데려와!”
“자자! 얘들아! 진정하자!”
내 설명이 끝나자마자 초등학교 저 학년 나이대의 애들이 ‘빼액!’ 소리를 지른다. 어느 정도 말귀를 알아먹을 정도로 큰 애들이 말리기 여념 없지만 역시 떨떠름해 보이는 건 숨길 수 없다. 솔직히, 나 같아도 그럴 것 같긴 해. 그래,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야.
그렇기에 나는 당황하지 않고 여기서 해야 할 걸 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봉사활동이 뭐 있나요?”
보육원 오면 할 수 있는 게 뻔하지. 아이들에게 오랜만에 맛있는 것 사주는 것하고 놀아주는 것. 떨떠름해 하는 보육교사의 안내를 받아 난 점심시간에 피자가 오도록 인근 피자집에서 주문하고 어린 얘들과 놀아줬다. 아니, 놀아준 다기 보단 ‘진짜 새벽이 오빠를 데려와!’라면서 괴롭힘 당했다.
뒤질 것 같더라. 진짜.
“으어어어...”
그렇게 오후 5시, 반 놀이 반 난동을 부리던 아이들이 지쳐 잠든 뒤에서야 난 녹초가 된 몸으로 응접실 소파에 앉을 수 있었다. 나름 체력을 쌓아뒀지만 버틸 수가 없네. 그렇게 내가 피로에 쩔어 소파에 멍하니 앉아있을 때, 누가 내 앞의 탁자에 솔잎맛 캔음료를 내려놓는다.
내가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반겨준 여자애
화려한 염색 금발 머리에 왼쪽 귀에 있는 피어싱, 갈색 피부에 살짝 파인 교복 상의 가슴께에서 오른쪽 어깨로 이어지는 트라이벌 타투(Tribal Tattoo), 175cm 가량 되는 여자치고 큰 키에 옷 너머로도 보이는 여자 육상 선수를 연상케 하는 탄탄한 마른 근육... 딱 봐도 ‘나 잘나가는 일진임.’이라는 포스가 흐른다.
아직까지도 빈곤한 북쪽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
한새벽의 친구 ‘도시아’다.
내가 멍하니 바라보자 그녀는 맞은 편 소파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고생했는데 마셔.”
“네, 감사히 마시죠.”
취향은 아니지만 뭐. 줬으니 마셔야지. 캔을 따고 내용물을 홀짝이자 날 빤히 바라보며 자기 몫의 음료를 마시던 도시아는 이내 음료를 탁자에 놓곤 한숨을 뱉는다.
“하, 이거 걔가 싫어하다 못해 경멸하던 음료인데... 정말 새벽이가 아닌 다른 사람 같네.”
“하하, 많이 듣는 말이네요. 예전의 절 아는 사람들도 다 그렇게 말하거든요.”
“지금 네 모습이랑 차이가 크거든. 완전 달라. 체격, 키, 분위기... 그러고 보니 너 왜 존댓말 하냐? 애들이랑 놀아줄 때도 존댓말하던데.”
그 질문에 난 씁쓸하게 웃었다.
정신병동에 갇혀서 극도로 조심하다보니 습관이 된 존댓말, 또래 친구라도 사귀면 자연스럽게 그 말버릇이 고쳐졌을 텐데 의사 선생과 약사 양반만 만나 이야기하다보니 이 꼴이다. 이젠 반말 하려는 것이 더 힘들어.
“습관이죠.”
“습관?”
“3달 동안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정신병동에 갇힌 채, 모든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공손하게 대하다보면 자동으로 입에 붙어버린답니다.”
“...힘들었겠네.”
“그리 좋지는 않았죠.”
내 대답에 내리 앉은 침묵, 어떻게 이 어색한 분위기를 없애기 위해 난 머리를 굴려 휴대전화에 있는 도시아와의 문자 내용에 대해 떠올렸지만... 딱히 이야기 할 만 한 건 없다. 도대체 뭘로 이 분위기를 깨트려야 될지 고민하다가 난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날 친절하게 대해 준 사람들은 여러분들이 처음이네요.”
“처음?”
“예. 최소한 제 또래에선 처음 만난 사람들 모두 절 꺼려했거든요. 절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인 것 같아서 거부감이 든다고 하고, 절 처음 보는 사람은 뭔가 꺼림칙하다고 하고...”
“맞는 말이야. 솔직히, 나도 좀 꺼림칙해. 거부감도 들고. 음, 인간 모양의 마네킹? 같은 느낌이야.”
크게 고갤 끄덕이며 소파에 몸을 파묻는 도시아, 그 솔직한 대답에 내가 쓴웃음을 짓자 그녀는 피식 거리며 자기 몫의 음료를 한 모금 들키곤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넌 새벽이니까.”
“새벽이요?”
“그래. 설령 기억을 잃었어도, 외모가 변했어도, 습관이 달라졌어도... 우리가 네게 빚진 것을 생각하면 그래선 안 되지. 나도, 그리고 여기 애들도 알고 있어. 심술을 부릴지언정 말이지.”
“...그 정도입니까? 예전의 제가?”
“그래, 기억을 잃기 전의 넌 여기의 희망이었거든.”
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보란 듯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질문했다.
“네가 보기에 이 보육원은 어때 보여?”
“꽤 좋아 보이는데요. 애들도 좋아 보이고.”
2층 폐학교를 개조한 것으로 보이는 보육원, 기본 골조가 옛날 학교였지만 설비는 정말 괜찮았다. 2층은 창문 부분을 모두 뜯어내서 만든 유리 외벽이고, 안쪽은 내가 있는 미르 기숙사보다 세련되고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깨끗하고 고급스럽다. 애들의 상태도 좋다. 옷도 깨끗하고 체격과 혈색도 좋으며 자기들끼리 잘 웃는다.
내 대답에 그녀는 고갤 끄덕였다.
“지금은 그렇지. 하지만, 예전엔 아니었어. 오히려 지옥 같은 곳이었지.”
“지옥이요?”
“그래, 지옥.”
이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내가 의아하다는 듯이 묻자 그녀는 자조하듯이 웃으며 담담히 말을 이어나간다.
“통일 이후, 넘쳐나는 고아를 수용하기 위해 폐건물을 부랴부랴 재활용한 곳. 관리? 그런 게 될 리가. 지원도 없고 애들은 넘쳐나니 얼마 안가 남쪽에서 온 착한 보육선생들도 지쳐서 떠나버렸지.”
“음...”
“그것뿐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하는데, 나중에 여기에 온 북한군 출신 보육선생 놈들은 일에 소홀한 걸 넘어서 아예 다른 마음을 품기까지 했거든.”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도시아, 하지만 ‘다른 마음’이라는 단어에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꺼내기 민감한 주제일 것 같기에 그냥 넘어갈까 고민했지만... 동시에 한새벽으로서 살아가면서 알아야 할 내용 같기에 잘 떼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그 다른 마음이란 게 뭐죠?”
“뭐긴, 돈벌이지. 남자 애들은 밭이나 공장 같은데 가서 일하고, 좀 반반한 여자애들은... 세상엔 젊을수록 좋다는 사람이 많으니까.”
가볍게 어꺨 으쓱이는 도시아, 그 대답에 난 음료수를 쥐지 않은 왼손으로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원래 내가 있던 ‘대한민국’이라면 상상하기 힘든 일, 하지만 지금 이 세상의 대한민국은 상황이 좀 다르다. 마력이란 판타지가 나타났음에도 더 시궁창이니까.
이 참담한 소설 속 현실에 내가 말을 하지 못하는 동안, 그녀는 살짝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나간다.
“어른들만 그 지랄이었으면 그래도 괜찮았을지 몰라. 하지만, 우리들끼리도 그리 사이가 좋은 게 아니었지.”
“...”
“닫힌 공간, 피해를 호소할 곳도 없는 곳. 부모들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그리고 이런 곳에 있다는 사실에 있다는 분노가 향할 유일한 곳은 자기보다 약한 아이들뿐이었거든. ...나도 그랬고.”
마지막 문장은 고해하듯이 내뱉는 도시아, 그 뒤에 그녀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는 날 보며 다시 어깰 으쓱였다.
“뭐, 다 옛날이야기야. 네가 전부 해결했으니까. 더 이상의 나쁜 사람도 없고, 여기 시설도 좋아졌지. 네가 기억을 되찾으려면 좀 더 자세하게 과거 이야기 하는 게 좋을 텐데... 솔직히, 말을 꺼내는 게 좀 그러네. 그다지 좋은 기억은 아니라서.”
“말 하지 않아도 좋아요.”
“...뭐?”
괴로운 기억일 것 같기에 한 말,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내 기대와는 달랐다. 내 대답에 얼굴을 굳히더니 이어서 날 보며 살짝 날이 선 목소리로 묻는다.
“너, 그거 무슨 뜻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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