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27화 (27/350)

6화. (당사자는 모르는)과거의 인연들

“후우, 진정해야죠. 진정. 진정. 진정. 진정. 진정. 진정. 진정. 진정. 진정.”

이전의 무감정한 음성이 아닌 살짝 들뜬 어조, 잠깐 동안 고장 난 축음기처럼 진정만 중얼거리던 그것은 이내 고갤 돌려 주위에 있는 보육원생들을 향해 이전처럼 쾌활하게 웃었다.

“그럼 전 여기까지 하죠. 과거의 저였다면 몰라도 지금의 전 이 사람에게 딱히 악감정 없으니까요.”

권종진에게서 등을 돌린 한새벽은 도시아에게 다가가 손에 쥔 회칼을 내밀었다. 도시아가 그 회칼을 물끄러미 쳐다보자 한새벽은 빙긋 웃는다.

“물론, 여러분은 다르겠죠. 알아서하세요. 그럼 전 이만 자러 가보겠습니다.”

도시아에게 피 묻은 회칼을 넘긴 뒤, 한새벽은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 한 채 조용히 2층 계단 너머로 사라졌다.

8.

한새벽이 위로 사라진 뒤, 장내엔 침묵이 감돌았다.

7명, 아니 배신자까지 8명 중 5명이 쓰러진 상황. 이제 상황은 역전됐다.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한새벽이 넘겨준 피 묻은 회칼을 물끄러미 보던 도시아가 입을 열었다.

“왜 배신했냐?”

나지막한 질문, 그에 창백한 얼굴로 침묵하던 배신자-이선균은 움찔했다. 동시에 아이들의 눈도 그를 향한다. 분노, 배신감, 살의가 뒤섞인 수십 쌍의 눈동자들. 작지만 살벌한 그 시선들이 그를 압박했다.

“아, 아니.. 그러니까...”

“이해는 가.”

막 대답하려는 이선균의 말을 도중에 끊으며, 도시아는 회칼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향해 웃었다.

“왜소한 체구, 좀 눈치 좋은 것 빼곤 딱히 특출 난데 없는 머리. 졸업하고 나서 공장에 취직하는 것도 힘들어 보여. 유일한 희망은 새벽이에게 좀 빌붙는 거뿐. 근데, 새벽이가 병신이 됐네? 자길 구제해주는 것도 힘들어 보이고? 그러니 저 새끼에게 선을 대려고 한 거겠지.”

“...”

“여자애들은 창녀로, 남자애들은 발품팔이로, 그리고 넌 중간에서 우릴 관리하는 마름이 되려고. 이해해. 이해하고말고.”

“아.. 아니야! 나, 난 이렇게 될 줄 몰랐어! 그냥 오랜만에 선배에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시아가 눈짓하고 바닥에 떨어졌던 쇠파이프를 쥔 남자애가 가차 없이 무방비로 드러난 이선균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앞으로 고꾸라진 이선균을 향해 그녀는 천천히 다가갔다.

“근데, 성공했다면 모르겠지만 실패했으면 댓가를 치러야지.”

쓰러진 이선균 앞에 쪼그리고 앉아 호주머니를 뒤지는 도시아. 그 주머니서 꺼낸 열쇠를 근처의 아이에게 넘긴 후, 그녀는 손에 쥔 회칼로 가차 없이 이선균의 발목에 내리꽂았다. 그 날카로운 고통에 기절했던 이선균이 다시 깨어나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엿 됐다.’

권종진은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괴물이 사라지고 그것이 뿜어내던 기묘한 공포가 사라지면서 제대로 머릴 굴릴 수 있게 되었다. 분위기가 붕 떴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습격이 실패했다. 그러면?

죽는다.

다급하게 몸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지만...

“조져!”

악에 받친 도시아의 외침과 함께 주위의 아이들이 달려든다.

대부분 고등학생 이하의 아이들, 하지만 숫자가 많았다. 몸을 던져서 두 사람의 무기를 쥔 손을 붙잡았고 나머지는 주위의 물건들을 집고 내리찍었다. 그렇게 두 똘마니는 피라냐 떼에 먹히는 물소들처럼 침몰했다.

하지만, 권종진은 달랐다.

“꺼져!”

똘마니들보다 빨리 상황을 파악했고 재빨리 오른 손등에 박혔던 회칼을 뽑아서 무기로 삼을 수 있었다. 게다가 정식 조직원답게 덩치와 기량 또한 똘마니들보다 뛰어났다. 덩치를 앞세워 돌격, 주위의 아이들을 쓰러지는 볼링핀처럼 튕겨내며 그는 현관문으로 당도했다.

“막아!”

그 모습에 덩치가 좀 큰 애들이 바닥에 떨어진 쇠파이프나 회칼을 쥐고 달려든다. 그에 왼손으로 처음 보는 전자식 현관문 버튼을 닥치는 대로 누르고 있던 권종진은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려 막아야 했다.

“이 간나 새끼들! 비키라! 안 비키면 죽는 기야!”

중국-러시아-남쪽, 주위의 각종 독종들이 모이는 무법지대 북쪽. 이곳에선 비범하지 못하면 먹힌다. 그리고 권종진은 아직 경험이 부족한 상태에서 규격 외의 괴물을 만나 허무하게 무너진 것이지 일반인들에 비하면 충분히 비범했다.

북한 특수부대식 나이프 파이팅

옛날 고아원 선생들에 배웠던 것을 구사하며 그는 아이들의 공격을 맷집으로 버티고 찔렀다. 그렇게 왼손에 쥔 회칼로 달라붙는 애들을 떼어내는 한편 짬짬히 손가락 밑동 마디만 남은 오른손을 뒤로 뻗어 필사적으로 현관문 버튼을 닥치는 대로 눌렀다. 부디, 문을 여는 버튼이 있기를 기도하며.

그리고 마침내-.

-띠리릭~♬

“길티!”

경쾌한 알람음과 함께 현관문이 열린다. 곧바로 쾌재를 지르며 문을 밀고 나가는 권종진, 그로서는 최대한 재빨리 움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불행하게도 빼앗은 열쇠로 거실에 있는 그림 뒤편의 ‘금고’를 여는데 충분한 시간이기도 했다.

-탕!

귀를 찢는 듯한 총성

종아리가 불타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권종진은 앞으로 엎어졌다. 이를 악물며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지만 왼쪽 발이 말을 안 들었다. 그런 그의 뒤편에서 도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른쪽 종아리도 총 맞고 싶으면 계속 움직여봐. 새꺄.”

총성 이후 내려앉은 침묵, 그리고 그 침묵 사이에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 권종진은 엎어진 채로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다가오는 도시아를 붙잡아서 인질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왼손에 쥔 회칼을 꽉 쥐며 그는 도시아가 다가올 때를 기다렸지만...

-탕!

다시 한 번 들리는 총성, 손등의 화끈거림과 함께 회칼을 쥔 왼손이 제멋대로 풀린다. 손등이 으스러지는 둔탁한 고통에 권종진이 낮은 신음을 흘리는 가운데, 다가온 아이들이 손을 뻗어 엎어진 그를 뒤집었다.

“...”

구 북한군 AK소총을 들고 있는 아이들, 총구를 겨누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에 권종진은 감히 저항하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한 배신자 때문에 허무하게 당했지만, 보육원은 원래대로라면 결코 호락호락하게 당할 곳이 전혀 아니었다.

일종의 군부대

무기고 안에는 한새벽이 구해놓은 구 북한군 총기들이 가득했고, 아이들도 어느 정도 기초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소년병들이다. 권종진이 창백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을 동안, 도시아는 초연이 피어오르는 권총을 쥔 채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너희들과 선생들이 사라졌을 때, 난 기뻤어. 그래, 순수하게 기뻤지. 지옥 같은 생활도 끝이라고 말이야. 근데 말이지...”

떨리는 눈으로 말을 하지 못하는 권종진, 그런 그를 향해 그녀는 떨리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하곤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웃었다.

“시간이 지나 두려움이 좀 가시고 난 뒤에 간간이 선생들과 너희들에게 당한 기억들을 꿈에서 만나서 깰 때마다 화가 나더라. 내가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아니, 최소한 곱게 보내면 안 됐는데 하면서.”

“시... 시아야!”

“근데, 오늘 그 꿈을 실현시킬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그래야만 해.”

뒤에서 뻗어온 손아귀들이 그의 양 발목을 붙잡는다.

“걱정마, 죽이진 않을 거야. 난 니가 살아서 오래도록 비참함을 꼽씹기를 원하거든. 하지만, 다음에도 이런 일 없도록 확실하게 가야지 않겠어?”

담담한 음성, 하지만 권종진은 거기에 담긴 잔혹함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사람을 담굴 때 꼭 저렇게 말했으니까. 인생에 마침표를 찍는 선고, 그 원초적 공포에 그는 성대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발버둥 쳤다. 그가 담궜던 다른 이들처럼.

하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그가 담궜던 다른 이들처럼.

붉은 손가락 고랑을 남긴 채, 보육원의 현관문은 굳게 닫혔다.

9.

“끄으윽...”

방문을 닫은 뒤, 난 신음을 흘리며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아래에서 비명소리와 총소리가 들리지만 애써 무시하며 ‘들끓는 살의’를 억눌렀다. 다행히도 몸에 힘이 없었다. 말 그대로 살인적인 피로, 일주일간 잠 안자고 깨어있었던 피로와 <무한의 눈>을 사용한 피로가 합쳐져서 내 몸을 짓누른다.

그 피로가 살의를 상쇄한다.

다행이었다. 멀쩡했다면 이 충동을 참기 힘들었을 걸. 이런 생각조차도 못하고 감정에 휘둘렸을 테고, 눈깔이 뒤집힌 채로 칼을 휘둘렀겠지. 차분히 숨을 내쉬며 난 아래에서의 일을 복기해봤다.

고작 1분 남짓한 싸움, 하지만 진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쥐어짜냈다.

“뭔, 만화도 아니고...”

총알 쳐내기, 총구의 방향을 보고 궤도를 예상하고 손가락 근육과 신경의 타이밍을 보고 피하거나 비스듬히 막은 것이었다. 막는 회칼이 박살나거나 권총의 반동으로 총구 궤도가 틀어지면 그냥 끝장이었다. 운에 목숨을 맡긴 행동이었고 지금 생각하면 그냥 미쳤지 싶다.

총알을 다 쳐낸 이후에도 순탄치 않았다.

접근해서 근돼 녀석의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무한의 눈>이 끊겼다. <관찰자의 눈>도 사용하기 힘들 정도의 방전 상태, 그 상태에서 녀석이 반항했으면 고꾸라진 건 나였을 거다. 머리가 반쯤 돌아버려서 그런 것들은 생각지도 못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하나하나가 위기였다.

그래, 한 마디로 결과는 매우 좋지만 미친 짓이었다.

좀 굴욕적이지만 피할 수 있는 위기를 자처했고, 어처구니없는 우연과 요행으로 막아냈다. 복기를 해봐도 그냥 깔끔하게 도망치는 게 현명했어. 미르에서 일진들 두들겨 팰 때도 그렇고 특정 감정 상태가 되면 막나가다니... 언제 삐끗해서 뒤질지 모른다.

“...그나저나 나도 진짜 초인이군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난 손을 들어 올려 퉁퉁 부은 손목을 보았다.

처신이 현명하건 현명하지 않았건 간에, 지금 내가 ‘인간을 초월했다’는 것이 좀 실감났다. 초월적인 시야를 가졌고 마력 또한 다루긴 했지만, 그래봤자 몸은 일반인 수준이어서 난 평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총알을 쳐내다니? 원래 세상에선 픽션에나 나올 일이다.

하지만, 별개로 기분은 그리 좋지 않다.

이 세상에 떨어져서 초인이 된 대가로 얻은 ‘결함’ 또한 생생하게 느꼈으니까. 특히, 스스로 자해하면서 권종진을 협박하는 도중 느꼈던 ‘질투심에 의한 살의’는 정말이었다. 시야가 끊겨서 이길 가능성이 없음에도 그냥 달려들어 칼로 찌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피로에 쩔은 상태가 아니었다면... 난 기쁜 마음으로 놈의 얼굴에 칼을 찔렀을 거야.

생각해보니 [르피너스의 장난감]의 주인공도 비슷한 것을 겪었다. 머리로는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안 좋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주인공은 항상 일을 벌였지. 르피너스가 심어놓은 ‘비정상적인 광기’에 휘둘려서. 다르다고 보기엔 그 주인공과 내 처지가 비슷하다.

...난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똑똑.

내 처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누군가 안으로 들어온다. 흐릿한 육안에 보이는 건 노란색의 긴 머리카락, 도시아다. 얼굴에서 피를 쏟아내는 날 보고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뱉기에 난 억지로 입 꼬리를 올렸다.

“아, 마력 돌연변이라고... 그러니까 사고의 부작용일 뿐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푹 쉬면 나아요.”

“미친?! 베개가 피로 펑 젖었는데 이걸 걱정하지 말라고? 당장 병원에...”

“내가 병원 갔다간 일이 괜히 더 꼬여요. 왜 이런 상처 입었냐고 추궁하면 좀...”

아무리 정당방위라도 미르 생도 신분 생각하면 귀찮아질 게 많다. 왜 이런 상처가 났는지 설명하면 일반인에게 폭력 휘두른 거까지 밝혀질 수도 있어. 그럴 바엔 그냥 버티고 말지. 내 완강한 거부에 도시아는 한숨을 작게 내쉰 후, 손에 들고 온 구급상자를 침대에 내려놓는다.

“손 줘봐. 붕대라도 감게. 그나저나 얼굴을 닦지도 않고 뭐하는 거야? 침대보 빨기 얼마나 힘든데. 그러고 보니 그 옷도 빨아야겠네.”

옆의 화장실에서 가져온 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아내고 투덜거리는 도시아, 뭐 할 말이 없다. 그냥 피곤해서 쓰러졌으니까. 퉁퉁 부어오른 오른손목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은 뒤, 그녀는 곧장 아래에서 여분 잠옷을 가져와서 침대에 축 늘어진 날 일으키곤 옷을 벗긴다.

음, 예쁜 일진 눈나가 직접 내 옷을 벗겨주는 느낌이란...

“헤으응... 은 아니고 평범하네요.”

“...뭐?”

“아니, 아니에요. 그냥 혼잣말이랍니다.”

시발, 일본 동인지 망가도 아니고. 난 그런 거에 흥분하는 변태 새끼가 아니다! 그냥... 30대 아조씨인 내 인생에 없을 거라고 생각한 상황이다 보니 좀 묘했을 뿐이야, 흠흠. 뭔가 낌새를 눈치 챈 듯한 낌새에 난 재빨리 말을 이어나갔다.

“그나저나 철수는 어떤가요?”

“계속 정신을 못 차려서 차 태우고 병원에 보냈어. 아, 이번에 온 놈들도 같이. 죽은 애를 생각해서 그냥 조용히 파묻을까 했는데... 우릴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로 한 번 보여주려고.”

“그러고 보니 그 녀석들이 제가 칼 휘둘렀다고 말하면 좀 곤란해지는데... 이능력자가 민간인을 때리면 가중처벌 받거든요. 저는 한 번 전과가 있어서.”

정당방위라도 일단 한 대라도 때리면 쌍방폭행이 되는 대한민국에 너무 익숙해서 일까? 습격한 놈들이 병원에 갔다는 말에 갑자기 걱정부터 든다. 진짜 생각할수록 뒤도 생각 없이 저질렀구나.

그런 내 반응이 웃긴지 도시아는 피식 웃으며 걱정마라는 듯이 옷을 벗기면서 드러난 내 등짝을 찰싹 때렸다.

“걱정마! 다 해결하는 방법이 있어. 이 북쪽에 그런 놈들이 한 두 명일 것 같아? 사람 몇 명 죽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곳이야. 진짜 너 남한 사람 다 됐구나.”

“그런가요? 흠, 그러면 다행인데... 그러고 보니 112에다가도 신고했어요. 나중에 경찰이 오면 뭐라고 변명하죠? 그것도 걱정이네요.”

“그것도 걱정마, 이 지역 파출소 서장과는 잘 아는 사이야.”

“아는 사이요?”

내 질문에 도시아는 잠옷을 입혀주며 고갤 끄덕였다.

“여기 보육 선생으로 명단에 등록된 사람이 파출소 소장의 조카거든? 출근하지도 않고 국가에서 나온 월급을 따박따박 받아가. 월급 자체가 적긴 하지만 말이지. 그리고 너가 출세하면 서장과 조카에게도 뒷배가 되기로 해줬고. 충분히 무마할 수 있어.”

“...허, 수완 좋네요.”

“우리가 한 게 아니야. 다 네가 포섭한 인맥이지.”

어깨를 으쓱이는 도시아, 그 대답에 난 쓰게 웃었다. 하긴, 내가 있던 세상의 대한민국만 해도 일가친척을 직원으로 올려서 회삿돈 빼먹는 건 유구한 전통이었으니까. 근데, 고딩도 안 된 녀석이 그런 딜을 파출소 소장에게 하다니. 한새벽, 알아볼수록 영리하고 대단하다.

어찌됐든 간에 내가 걱정해야 할 건 더는 없는 것 같다.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생각나질 않는다. 어차피 있어봤자 대처도 불가능할 것 같고. 참나, 아무생각 없이 ‘한새벽의 흔적이나 보러가 볼까?’ 해서 방문했건만 진짜 별의별 일을 다 겪었네. 난데없이 코앞에서 사람 죽는 것도 보고, 빡 돌아서 조폭 같은 놈들과 싸우고...

“자, 끝!”

옷을 다 입히고 침대의 베개 시트까지 다 갈아준 뒤, 도시아는 마지막으로 물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아주곤 날 침대에 눕혔다. 그렇게 눕자 피곤이 몰려온다. 어떻게 버틸 수 있는 피곤함이 아니다. 임계를 넘은 피곤함, 곧 수면이 곧 다가온다.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난 입을 열었다.

“도시아양?”

“뭔 양이야? 걍 시아라고 불러.”

“음, 시아양?”

“...어휴, 됐다. 뭔데?”

“제가 이제 잠을 좀 잘 건데... 이것도 사고의 후유증이라서 하루를 꼬박 잘 거예요. 근데, 월요일이 개학이거든요? 월요일 아침 6시 버스 좀 예약해주세요. 그리고 버스를 탈 수 있도록 깨워주시는 것도 잊지 마시고.”

“알겠어.”

대답을 듣고 난 그대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평온하진 못했다. 추운 것처럼 이빨이 가늘게 다닥다닥 떨린다.

두려움

아래에서 싸웠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두려움이 가슴 속에서 샘솟는다. 그 반응이 겉으로 드러난 것인지 눈을 감았음에도 도시아가 빤히 바라보는 기척이 느껴진다. 그런 그녀의 기척에 난 다시 눈을 뜨고 억지로 입 꼬리를 올렸다.

“아, 고..곧 나.나아지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오. 바, 바쁠 텐데 가도 좋아요오오...”

누가 들어도 겁에 질렸다는 것을 알 정도로 목소리가 떨린다. 역시, 수면제 먹지 않고 잠을 기다리는 것은 너무 무서워. 떨린다. 날 혼자 두지 말라고 붙잡고 싶다.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무섭다. 무서워!! 정신 나갈 것 같애. 정신 나갈 것 같애!

“...잘 때까지만 옆에 있을게.”

붕대로 감싼 오른손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온기, 하지만 가슴 속에서 솟구치는 초월적 공포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난 그 손길을 부서져라 꽉 붙잡았다. 곧 마주쳐야하는 공포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무기력한 행위뿐이기에.

“온다온다그게온다제발안돼이게아냐난살고싶어죽어도좋아보고싶지않아어째서왜이게아니야밤이끝나지않는거야뭐지여긴어디야정신차려날돌려놔이선율은뭐야감당할수없어그게내게말하고있어모두허상이야문드러진고기가치없게부스러질먼지아그분이온다그분이온다그분이온다...”

실낱 같은 그 온기를 붙잡으며 난 서서히 심연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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