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31화 (31/350)

8화. 송파구의 지하에는...

1.

초인과 괴물이 나오는 현대 양판소 물을 보면 길드(Guild)가 나온다.

말 그대로 초능력자들 모인 무력 집단, 이들은 비현실적인 공간인 게이트에 들어가서 괴물을 죽이고 신소재를 채취해오거나 다른 길드와 이권을 두고 싸우거나 그런다. 근데, 조금만 생각하면 그런 건 사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는 사실이지만 국가의 정체성은 ‘폭력의 독점’이다.

법치라는 것도 결국 강제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 강제력의 근원은 거슬러 올라가보면 결국 국가가 휘두르는 ‘폭력’이다. 계속 제멋대로 굴면 좆될 거라는 것을 알기에 대다수의 사람이 순순히 법을 따르는 거다. 그런데, 그런 폭력의 독점이 위협할 만한 집단이 나타난다?

그건, ‘군벌’이다.

그래, 아프리카에서 흔하게 보이는 내전을 벌이면서 자국을 초토화시키는 것들. 사실, 현판소에 나오는 것들은 말이 길드지 그냥 하는 꼬라지를 보면 초능력 조폭들이다. 당연히 제 정신인 국가가 그런 놈들이 있는 걸 지켜보겠는가? 무조건 박살낸다.

그렇기에 한국에선 ‘마력 사용자 협회’는 있어도 사제 무력 집단인 길드 같은 건 없다.

어쨌든 이러한 이유로 미르에선 ‘무력을 가르치는 것’에 아주 까다롭다. 전투 I 수업을 받기 위해선 인성 검사, 적성 검사를 받아야 하고 윤리학 I 또한 필수로 수강해야 한다. 나도 이런 조치에 대해선 납득한다. 괜히 양아치 같은 놈이 힘을 가지면 감당이 힘들게 뻔하니까.

...근데, 그런 까다로운 검정을 뚫고서 전투 I 과목을 들을 가치가 있을까?

“더! 더 빨리 움직입니다!”

미르 외곽의 야산에 위치한 훈련장, 아래에 있는 교관의 재촉에 난 이를 악물고 수직에 가까운 바위투성이의 절벽을 올랐다. 그냥 올라가도 아주 힘든 난이도, 하지만 더 엿 같은 건 따로 있었다.

-퐁! 퐁! 퐁!

위에서 날아오는 골프공만 한 고무탄, 위에 있는 조교 새끼들이 시위 진압용 고무총을 들고 쏘는 거다. 그냥 스펀지 공을 맞아도 빡칠 텐데, 고무공은 존나 딱딱해서 맞으면 시퍼렇게 멍이 든다. 싯팔! 황금 같은 금요일 저녁에 이 개고생이라니...

장학금이고 나발이고 그냥 지금이라도 GG치고 런하는 게 맞지 않을까?

“캑!”

내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동안, 또 한 놈이 위에서 날아오는 고무탄에 머리통을 맞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덤으로 그 아이 바로 밑에 있던 애도 같이 휘말려 떨어진다.

거의 아파트 7~8층 높이

바닥은 매트 하나 깔리지 않은 그냥 시멘트 바닥이다. 그대로 떨어졌다면 대가리가 깨져서 뒤질 상황, 하지만 지상에 있는 한 남자가 떨어지는 생도들을 향해 손가락을 움직이자 근방에 돌풍이 불며 머리부터 떨어지는 생도들의 몸을 바로 세운다.

하지만, 떨어지는 것 자체를 막진 않았다.

-퍽!

“으아아아악!”

기괴한 방향으로 다리가 꺾인 채 비명을 지르는 두 생도, 그런 두 부상자를 향해 대기하고 있던 의료 지원 인원들이 데려가 치료를 시작한다. 내가 있던 세상에서 이런 일이, 그것도 고등학생 또래 애새끼들 상대로 벌어졌다면 난리가 났겠지.

하지만, 여기는 꿈과 희망이 넘치는 판타지 세계다.

“안 해! 안 해! 안 한다고! 으허허헣!”

다리가 박살난 생도가 의료 지원에게 실려 가면서 울부짖으며 소리치고, 그 소리에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파릇파릇한 뉴비들의 안색이 파래진다. 저걸 보니 내가 일진 애들 콧뼈 좀 내려앉히고 손가락 꺾고 허벅지를 바늘로 찌른 건 진짜 별거 아니었구나! 어쩐지, 쉽게 용서해주더라니!

그 모습에 절벽 위에 서 있는 김가트는 팔짱을 낀 채 의기양양하게 소리친다.

“그만 두고 싶은 사람은 지금이라도 그만두면 된다!”

그런 김가트의 말에 다음 번 절벽 타기를 대기하고 있던 생도 한 명이 용감하게 손을 든다. 이어서 그 용기에 감명 받은 몇 명이 추가로 손을 든다. 그래, 현명하다. 바로 코앞에서 다리 관절이 역으로 꺾이는 모습이 보이는데, 그냥 깔끔하게 포기하는 게 낫지. 나라도 그러겠다.

근데, 시발. 난 이미 절벽 타는 도중이라서 포기할 수가 없네...

한숨을 내뱉은 후, 이를 악물고 스퍼트를 올렸다. 정신을 집중해 전투할 때의 서예린의 신체 상태를 모방했다. 어설프게나마 마력을 끌어올리고 이어서 뇌의 전기 신호를 모방한다. 그와 함께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인다. 끝나고 좀 피곤하겠지만 어쩔 수 없지!

“흡!”

앞선 경쟁자들을 제치고 갑자기 빠르게 절벽을 올라가는 내 모습에 조교들의 고무탄 집중 견제가 쏟아졌지만 <관찰자의 눈>을 이용해 최대한 피하고 피할 수 없는 것은 타격이 덜가는 부위로 맞으며 올랐다.

“37번, 한새벽 생도! 통과!”

정상에 한 손을 걸치자 선언하는 김가트, 곁에 있는 조교들이 내 손을 잡고 끌어올리고 난 한숨을 내뱉으며 기어올랐다. 빨리 올라오긴 했지만 괜히 시선이 쏠려서 드럽게 많이 쳐 맞았다. 이어서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들에게 간단한 상처치료를 받은 후, 난 그대로 드러누웠다.

한국의 군필 여고생들은 다 알겠지만 전투라는 건 사실 존나 시궁창이다.

무협지나 판타지 소설에선 무공 하나만 익히면 별 노력도 없이 앉아서 숨 몇 번 쉬고 허공에 ‘얕얕!’ 주먹질 몇 번하면 꼬맹이도 수십 년 간 전장에서 구른 병사보다 잘 싸우게 되는데, 상식적으로 그게 될 리가 있겠는가? 시발, 여기도 소설 속 세계긴 한데 여긴 애미가 없는 리얼리티 소설이다.

한 마디로, 전투 수업은 특전사 훈련을 받는다는 것과 비슷했다.

진짜 특전사 훈련보다는 약할 거다. 전투 I 은 수업은 일주일에 고작해야 8시간, 그것도 금요일 오후 1시부터 9시까지 몰아서 하는 형태니까. 하지만, 그 목적은 같았다. 사람의 정신력이 가진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것, 내가 전경 출신이라서 유격 훈련을 겪어보진 못했다만 그래도 그런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빡센 루틴으로 보이는 것이 계속 이어졌다.

장애물을 넘으며 산을 타고, 음식물 쓰레기가 섞인 진흙탕에 처박히기도 했다.

수업 시작 전에 갈아입은 군복은 이미 넝마 상태, 게다가 저녁 밥도 못 먹었다. 정말 너무할 정도로 몰아붙였다. 덕분에 오늘 의기양양하게 ‘전투 I’ 수업을 신청했던 120명 중 80명이 낙오했다. 힘들어서 포기했다기보단 전투가 시궁창이라는 것을 알게 되서 그만둔 거에 가깝다.

나도 지금 조온나 그만두고 싶어...

“샤워하고 싶어요오오...”

그렇게 내가 힘이 빠져 혼자 구시렁구시렁 거리고 있을 때-

“생각보다 빨리 올라왔네요.”

먼저 올라와 있던 이들 중 하나가 다가와 말을 걸며 바닥에 드러누운 날 내려다본다. 파란 머리띠가 인상적인 마빡 아가씨, 놀랍게도 이 도도한 아가씨도 전투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몸에 오물이 묻건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최상위권으로 종목들을 통과했다. 난데없는 아가씨의 친한 척에 나는...

“...하하, 일반인도 할 수 있는 거니까요.”

화들짝 놀라 어색하게 웃었다.

며칠 전의 당당함은 모두 사라진지 오래다. 당연하지! 이 아가씨에게 한 방 먹인 뒤, 나중에 뒷조사해봤는데... 오우 싯팔! 기업 대 기업을 상대하는 곳이어서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재계 서열 20위 안의 재벌가 자제였다.

그리고, 난 재벌가의 존귀하신 분에게 따귀(정신)를 갈긴 미친놈이 됐고.

이게 성별만 바뀐다면 딱 한국 아침 드라마 스토린데 말이지? 그러다 사랑에 빠지고, 신데렐라가 되어서... 아니, 왜 행복회로가 돌아가고 있지? 성별도 성별이지만 그렇게 될 리가 없다. 여긴 판타지라도 인간만큼은 리얼리티 소설이거든. 20살도 안된 꼬맹이지만 길 땐 기어야지.

그렇게 내가 간신 모드로 비굴한 웃음과 함께 대답하자 아가씨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재미있었어요. 위를 안 보면서도 날아오는 공을 피하는 모습.”

“...”

“지금도 눈을 감고 있군요. 맨날 선글라스 껴서 몰랐는데... 뭔가 특별한 감각이 있나보죠?”

“아, 하하. 하.”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러나왔다. 훈련에 들어가면서 강제적으로 선글라스를 벗었는데 이렇게 될 줄이야. 그리고, 아무리 뚜들겨 맞았다고 해도 간단한 시선 처리도 못하다니... 근데, 솔직히 이해해줘야 한다. 5일간의 불면에 피곤에 쩔은 뇌, 게다가 거의 7시간 동안 구르고 또 굴렀으면 맛이 갈만 하지. 그렇게 내가 어색하게 웃자-.

“뭐, 당신만의 비밀이 있겠죠. 이해해요. 아, 대화는 여기까지 해야겠네요.”

마지막 생도가 올라오고 종료를 외치는 김가트, 그에 재벌집 아가씨는 의미심장하게 웃곤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간다. 시잇팔, 도대체 왜 이렇게 인생이 꼬이는지. 내가 한숨을 푹푹 쉬는 동안 김가트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 옆에는 조교로 서예린도 따라오고.

난 힘겹게 누워있던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래, 첫 수업을 받은 소감은 어땠나?”

“...”

“더럽고 힘들지?”

죽은 듯이 말이 없는 생도들과 생글생글 웃으며 약 올리듯이 말하는 김가트,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나는 오물을 뒤집어쓰고 8시간 동안 굴렀는데 당연히 더럽고 힘들지. 인내심 없는 애들이라면 더더욱. 그런 짜증 어린 생도들의 시선에 김가트는 팔짱을 낀 채로 고갤 저었다.

“이건 아무 것도 아니다. 앞으론 더 힘들어질 거다.”

“...”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냐고도 묻겠지. 왜냐면 진짜 전투는 처절하고, 지독한 것이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40명의 생도들의 얼굴을 훑어보면서 김가트는 조용히 말을 이어나갔다.

“전투 I을 듣는 순간, 너희들은 앞으로의 직종을 전투와 관련된 것으로 잡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현 시대에서 전면전은 거의 일어나지 않아. 대부분 테러리스트 혹은 특수전의 소수가 맞부딪치는 일이지. 그런 소수는 불행하게도 평범한 인간들이 아니다.”

“...”

“그래, 똑같은 마력 사용자. 단련에 따라서 짐승과도 같은 힘과 반사 신경을 지닐 수 있고, 빠른 회복 능력도 보유하고 있으며, 독과 질병에 대한 저항력도 높아서 평범한 사람들은 죽음에 이르는 강화 약물들을 섭취하는 괴물이 너희들이 상대해야 할 적이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김가트는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이건 고작 특전사들이 받는 훈련을 약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 지금 너희가 받은 훈련은 고작해야 마력이 없는 일반인도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이다. 앞으로의 수업은 더 더럽고 힘들 거다. 마력 사용자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으니까.”

“...”

“그것뿐인가? 이런 걸 배웠다는 것 자체가 흉악한 무기를 들려준 것이나 다름없고 그 만큼 의무 또한 짊어지게 된다. 마력 사용자의 폭력 범죄에 대한 처벌은 일반인에 비해 매우 엄격하지만 이 수업을 들으면 더 엄격해질 거야.”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포기해라. 진심으로 권한다. 미르도 이런 전투 과목의 포기에 대해서는 편의를 봐주고 있다. 금요일의 과목들을 선택해서 도중에 들어갈 수 있어.”

김가트의 회유에 남아있는 몇몇이 손을 든다. 그런 그들을 꾸짖지 않고 ‘잘 생각했다.’라는 칭찬으로 답하는 김가트, 그렇게 몇 명이 빠져나가고 남아있는 인원은 30명이 되지 않았다. 솔직히, 나도 그냥 때려치울까 갈등했지만 싸장님의 진심 어린 충고-전투 과목은 들어둘 만 하다-를 떠올리곤 참았다.

그렇게 끝까지 남은 이들을 향해 김가트는 싱글싱글 웃는다.

“이렇게 권유를 받아도 남았다는 건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됐다는 것이겠지? 좋아! 다음 주부터 제대로 굴려주지. 자, 오늘은 이만 해산! 조교들은 장비 정리하고! 샤워장에 가서 씻고 숙소로 가라!”

걸걸하게 소리친 후, 그대로 우리가 올라왔던 30m 정도 되는 절벽-아파트 10층 높이 아래로 뛰어내리는 김가트. 평범한 사람이라면 자살 행위겠지만 김가트는 ‘쿠-ㅇ!’하는 둔중한 착지음과 함께 콘크리트 바닥에 안착한다. 그리곤, 지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과 뭐라 떠든다.

거 참, 괴물 같은 인간이네.

우리가 저렇게 갈 수는 없다. 옆에 따로 마련된 철제 사다리를 타고 가야지.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나 비척거리며 조교들을 도와 장비를 정리하려고 할 때, 누군가 다가와 내 어깨를 잡았다.

“끝나고 시간 있슴?”

서예린-군대 유격 조교처럼 빨간색 유격모와 조교복을 쓴 그녀는 날 보며 뚱한 표정으로 말을 건다. 예쁜 여자 사람의 시간 있냐는 물음에 난 가슴이... 딱히 설레지 않았다. 딱 봐도 연애 감정은 100% 아닌데 뭐. 싫다는 것을 의무적으로 하는 것에 가까워.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제안에 난 조용히 고갤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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