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32화 (32/350)

8화. 송파구의 지하에는...

2.

해진 군복을 벗고 샤워장에서 몸을 빡빡 씻은 뒤, 난 서예린과 함께 미르 내부의 패스트푸드점에 왔다.

1시부터 9시까지 이어지는 전투 I 수업에는 저녁 식사 시간이 따로 없었기에 당연한 선택이었다. 난 생도복 차림인 반면에 그녀는 사복차림, 여자 힙합 패션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그녀의 몸에선 강력한 인싸의 아우리가... 읏! 찐따 죽는다!

어찌됐든 시킨 햄버거 세트를 들고 테이블에 앉은 뒤, 난 반대편에 앉은 그녀를 향해 질문했다.

“왜 절 부른 거죠?”

“알려줄 것이 있슴.”

그 말을 한 뒤에 쌓여있는 8개의 빅맥 중 하나를 집어 들고 호쾌하게 한 입에 절반을 먹어치우는 서예린, 진지하게 맛을 음미하며 고갤 끄덕이던 그녀는 이어서 콜라를 들이켠 후에 말을 이어나갔다.

“너에 대해 추가사항 들음. 수업 때, 봐주지 말코 냉정하게 평가.”

“냉정하게... 평가하라고요?”

“응, 총무콰에서.”

발음이나 강세가 어색한 한국어지만 그 내용은 충분히 알아먹을 수 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내가 멍청하게 눈을 깜빡이는 동안, 그녀는 감자튀김 기름이 묻은 손가락을 쪽 빨곤 천천히 말한다.

“전투 장학생, 기준 미달되면 바로 떨어짐. 그러니 공정하케. 그 뒤에 추가로 말 엿들으니 언론 플레이? 뭔지 모르겠지만 그걸 막는다구.”

“...아.”

대충 뭔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전투 장학생 기준을 탈락했으니 지급한 1억 700만원을 내놓으라고 했던 미르 총무과, 근데 남진우가 인맥 같은 걸 사용해서 다시 붙었다. 하지만, 지금 서예린의 말을 들어보니 내가 기준에 미달되면 곧바로 탈락시킬 예정인 것 같다.

...한 번 가정해 보자.

이번에 다시 전투 장학생으로 들어갔다가 기준 미달이 되서 도중 탈락했다고. 그 뒤에 내가 언론 플레이를 하면... 답은 금방 나왔다. 총무과의 속셈을 파악한 뒤, 난 쓰게 웃었다.

‘미르가 처음부터 병신으로 인정하고 탈락시켰을 때’

‘자신이 어떻게 해보려다가 능력 부족으로 탈락했을 때’

이 둘의 느낌은 다르다. 첫 번째는 불행한 사고의 느낌이 강한 반면, 두 번째는 말 그대로 능력 부족의 느낌이 강하지. 언론 플레이를 한다고 해도 사건으로서의 ‘임팩트’가 떨어진다. 그 주목도도 다를 테고.

이놈들, 어떻게든 내가 받아낸 장학금을 토해내게 만들려고 수작부리네??

“뭔지 암?”

내가 살짝 허탈하게 웃자 어느새 3번째 빅맥을 우걱우걱 씹고 있는 서예린이 되묻고, 난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돈 문제와 관련된 거네요.”

“돈?”

“제가 이 돌연변이에 당하기 전에 장학생이었는데...”

내 몫의 햄버거를 베어 물며 난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차분히 설명했다.

미르에서의 사고, 얻게 된 돌연변이, 그 여파로 인한 체력 약화와 정신의 이상, 그로 인한 사고와 장학생 탈락, 그 동안 받았던 돈을 토해내야 하는 상태, 그리고 언론... 언론에 대한 설명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어찌됐든 대충 이해한 그녀는 고갤 끄덕였다.

“1억 700만. 대단히 매우 많은 돈. 이해함.”

“하하, 그렇죠. 아무래도 투자금을 확실히 받아내려고 수작부리는 것 같아요. 뭐, 이해는 합니다만 짜증나긴 하죠. 흐음, 남진우. 그 양반, 의도치는 않았겠지만 날 엿 먹였네요.”

한숨을 내쉬며 난 입학식에서 만난 녀석을 떠올렸다.

정황상, 그 녀석이 어떻게 해보려다가 빌미를 준 게 틀림없다. 내가 ‘언론 플레이’를 언급한 사람은 남진우 밖에 없으니까. 하긴, 얼굴은 영화 실미도의 특작부대원처럼 살벌하게 생겼지만 고작해야 20살도 안 된 애송이다. 인맥이나 힘을 쓴다고 해봤자 미숙할 수밖에 없지.

어찌되었든 난 앞에서 빅맥을 처묵처묵하고 있는 서예린에게 고갤 숙였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몰랐던 걸 알게 됐네요. 많은 도움이 됐어요. 근데...”

“근데?”

“제게 왜 이런 걸 알려주죠?”

남진우가 날 물 먹인 건 그렇다고 쳐도 서예린이 이 사실을 알고 내게 알려준 건 정말 의외였다. 그런 내 말에 그녀는 특유의 뚱한 표정으로 콜라를 빨아먹곤 답한다.

“약속.”

“약속이요?”

“먼저 적대하지 않는 이상, 상대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음. 서로 약간 배려, 혹은 이유 없이 배척하는 걸 그만.”

“아.”

방학 때, 서예린이 내 갈비뼈를 박살내고 병문안 왔을 때 했던 약속. 그걸 기억하고 내게 이렇게 경고해주다니. 역시, 돌연변이 효과가 있더라도 현실인 이상 완전히 적용되는 건 아닌 것인가!? 이거, 살짝 감동...

“난 말함. 탈락시켜도 내 탓 아님.”

“하하, 네. 네.”

음, 그냥 일 터지면 책임 회피인 것 같네.

뭐, 그래도 나쁘지 않다. 쓰게 웃으며 난 햄버거를 베어 물었다. 어찌됐든 총무과 쪽의 속셈은 파악했으니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생각해봐야겠다. 이대로 전투 공무원으로 끌려가서 전투원으로 구르기도, 그렇다고 곱게 1억 700만원을 토해내기도 싫으니까.

그렇게 내가 생각에 잠긴 채로 햄버거를 씹고 있을 때, 어느새 빅맥 7개를 다 해치운 그녀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을 걸었다.

“그리구, 내일 시간 됨?”

“...네? 내일요?”

“우리 아빠가 너 보고 싶어함.”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잠시 두 눈을 깜빡이다가 난 고갤 저었다.

“죄송하지만 안 돼요.”

“다다음 날은?”

“일요일도요. 전 평일 24시간 깨어있고 토요일, 일요일에 잠을 몰아서 자거든요. 그래서 평일 밖에 시간이 되지 않습니다.”

내 대답에 햄버거 씹던 것을 멈추곤 두 눈을 찌푸리는 서예린, 그녀는 이내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대꾸한다.

“...그런 짓 왜 함?”

“잠을 못자는 병이 있어서요. 약을 먹고 억지로 자야하죠.”

쓰고 있는 선글라스를 들어 올리며 나는 보란 듯이 눈을 떴다.

충혈됐다 못해 거의 시뻘건 수준의 흰자위, 5일 간의 피곤에 찌든 눈이다. 사실 아무 짓도 안하면 10일까지 버틸 수 있지만, 5일째부터 서서히 내가 내가 아닌 느낌과 환각이 나오기 시작해서 곱게 잔다. 자는 것도 너무 두렵지만... 르피너스가 나오는 환각 또한 미쳐버릴 것 같거든.

다시 두 눈을 감고 선글라스를 쓰자 서예린은 혀를 쯧쯧 찬다.

“잠, 매우 중요.”

“예, 중요하죠.”

“그럼 월요일?”

“되긴 하는데, 도대체 왜 예린양의 아버지가 절 보자고 하는 건가요?”

의아한 일이다. 왜 날 보자고 하지? 그런 내 질문에 살짝 고민하던 서예린은 이내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뱉곤 입을 열었다.

“얘기하다가... 너에 대한 감상을 말함.”

“감상이요?”

“지옥의 고위 악마에게서나 느낄법한 것이 느껴진다.”

그 대답에 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응시하자 서예린은 살짝 눈을 돌리며 내 시선을 피한다. ...황당하네. 아니, 지옥의 고위 악마?! 하지만, 어처구니가 없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가 처음에 날 경계했던 것도 이해가 된다. 실체는 찐따지만 그런 ‘감’이 느껴졌다면 경계할 만하지.

한숨을 내뱉으며 난 고갤 끄덕였다.

“좋아요. 월요일 수업 끝나고 2시간 정도면 되죠?”

“응. 응.”

어처구니가 없지만 이 얼마 없는 인간관계를 망가트리지 않으려면 가야지. 게다가 어찌됐든 도움을 받았으니까.

3.

16년 전, 송파구는 완전히 가라앉았다.

지하 7km가량에 초거대 동공을 형성하며 처박혔고, 지상에는 그 가라앉은 송파구로 향하는 통로-누가 봐도 인위적인 가로, 세로 15m 규모의 정사각형 석제 출입구 20개가 뚫렸다.

그 토굴의 통로는 일직선이 아니라 개미집처럼 구불구불하고 어느 곳은 올림픽 축구 경기장을 뛰어넘는 공터 형태로 난잡하게 꼬여있는데, 그 총 면적은 36km²로 지상 송파구 면적과 비슷했다.

현실적으론 말이 안 되지만 토굴 안은 꽤 쾌적하다.

어디선가 신선한 공기가 항상 유입되고 좀 어두컴컴하지만 광원을 알 수 없는 미량의 빛이 감돈다. 그래, 모든 괴물과 이종족들의 고향 ‘미궁’처럼 말이다.

하지만, 미궁과는 달리 토굴은 변천이라는 변덕스런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형태는 어느 정도 고정되어있고, 지하의 송파구 쪽 입구를 틀어막으면 미궁으로부터의 유입을 차단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정확히 어떤 기준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추가로 토굴을 확장해도 무너지질 않았다.

어떻게 보면, 토굴은 안전한 ‘거주지’가 될 수 있다.

거기에 착안한 정부는 지하 송파구를 차지한 오크의 지도자와 딜을 걸었다. 함께 협력해서 토굴을 ‘완벽한 지하 도시’로 개발하자고. 미친 짓이지만 그 만큼 당시의 한국은 새로운 국가 동력을 찾기 위해 급박했다. 오크의 지도자도 지하 송파구에서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불쾌한 이웃에 슬슬 짜증나 있던 터라 승낙했다.

그렇게 해서 ‘뉴-송파구’ 이종족 중립 자치구가 탄생했다.

오크 종족의 지도자-‘오무혁’(한국 귀화했다)의 지배하에 총 100만에 달하는 이종족들-80만의 오크와 20만의 나머지 종족들이 거주하는 곳, 확장 공사로 지하의 총 면적은 176km²로 5배 가까이 늘어났다. 그 안에는 백화점, 방송국, 각종 오락 시설, 유명 식당, 운동 시설, 학교, 안전하고 쾌적한 주거지등 현대 문명의 모든 편의를 느낄 수 있도록 인프라를 때려 박았다.

지하 이종족들의 낙원

그런 ‘뉴 송파구’의 95%는 이종족 자치구지만, 5%부분은 지상의 인간들이 통제하고 있다. 토굴 지역을 완전히 오무혁에게 넘겨주면 나중에 곤란할 수도 있다는 판단 하에 콘크리트로 메꿔서 공간을 분리하고, 지하에 처박힌 옛 송파구로 다이렉트로 향하는 통로를 만들었다.

그리고, 인간이 장악한 그 5% 지역에는 미궁 연구를 위한 시설들과 미궁에서 올라온 인간들이 거주한다.

“우와아...”

그리고, 서예린이 살고 있는 장소는 그 인간 거주 지역이었다.

송파구 지상에 위치한 20개의 통로, 미르의 내부에도 통로가 하나 있는데 바로 그곳이 뉴-송파구 인간 구역으로 향하는 통로였다. 나도 처음 알았다. 그렇게 약간의 검문검색을 마치고 들어간 지하는 정말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꼭 서울의 세련된 지하철역 같았다.

물론, 규모는 훨씬 더 거대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고 마법사로 보이는 이들도 보였다. 심지어 편의점과 식당도 있다. 그 신기한 모습에 내가 두리번거리자 그녀는 시골에서 막 올라온 촌놈을 바라보는 도시 사람처럼 우쭐한 표정으로 피식 웃는다.

“그렇게 대단하나?”

“대단하죠. 와, 지하가 이런 공간이었구나.”

“흐음, 아직 멀음. 엘리베이터를 타야 함.”

구석진 곳으로 향하는 서예린, 그곳에 엘리베이터 하나가 있었다. 건설용 같은 투박한 디자인, 미르 생도용 ID카드를 대자 문이 열리고 서예린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재빨리 따라 들어갔다. 최하층 버튼을 누르자 이내 문이 닫히며 거의 추락하다시피 한 속도로 내려간다.

1분, 2분, 3분...

“이거, 언제까지 내려갑니까?”

“음, 10분 정도.”

“...10분이요? 엘리베이터로?”

아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10분이나 내려간다고? 상식을 파괴하는 말에 내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자 서예린은 어깨를 으쓱인다.

“지하 5.2km. 어쩔 수 없음.”

...저 말을 들으니 새삼 이 지하 공간이 얼마나 광대한지 실감이 난다. 그러니까 100만 명 이상의 이종족이 별 다른 불평불만 없이 거주하고 있겠지. 그렇게 내가 혀를 내두를 동안, 엘리베이터는 계속 떨어지다시피 한 속도로 내려간다.

그리고, 마침내 멈춘다.

문이 열리자 드러나는 것은 고속도로 터널을 연상케 하는 규모의 커다란 토굴. 바닥 또한 흙이네.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에 봤던 곳이 세련된 지하철역이라면 여기는 그냥 아무런 조치가 안 된 것 같다. 이런 곳에 살다니 좀 안타깝...

-쿠웅! 쿠웅! 쿠웅!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토굴 저 멀리 코너 쪽에서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느껴진다! 뭔가 돌진하듯, 연속해서 땅을 울리는 진동과 소음. 코뿔소가 돌진해오는 건가? 내가 식겁한 반면에 서예린은 밖에선 보지 못했던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달려간다.

터널 코너 쪽에서 드러난 그 소음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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