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오잉!? 한새벽의 상태가...!
1.
새삼 다시 느끼는 거지만 이 집은 정말 영화에나 나올 법한 시설이었다.
지하 1층이 헬스장이었다면 지하 2층은 보물 창고였다. 은행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원형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위의 형광등이 켜지며 내부의 모습이 드러나는데-
“오...”
그 모습이 마치 역사적 유물을 보관하는 박물관 같은 모습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물품들을 만지지 못하게 씌워둔 유리 케이스가 없다는 것 정도?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리자 서강 아저씨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가볍게 헛기침을 한다.
“크흠. 여기에 있는 건, 전부 미궁에 관련된 물품이라네. 내 컬렉션들이지.”
은근슬쩍 자랑하는 아저씨, 하지만 이건 진짜 자랑할 만하다. ‘마력’이라는 힘에 전 세계가 열광하고 있는 지금, 미궁에서 나온 마력 관련 물품이라는 것은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니까. 역사 관련 박물관은 있어도 미궁 관련 물품 박물관은 없는 게 현실이거든.
어찌되었든 아저씨는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싱긋 웃는다.
“자네에게 선물할 연금술에 도움이 될 만한 물품을 가지고 올 테니, 한 번 쭉 둘러보고 있게나. 여기 있는 것들은 전부 만져 봐도 된다네.”
“...어? 그래도 되는 건가요? 보관한 거라면 귀중한 것일 텐데요?”
“사실, 여기 있는 것들은 별로 대단한 것들은 아니네. 마법적인 효과가 있는 것도 있긴 한데, 그 힘이 굉장히 ‘약한’ 일종의 골동품들이거든. 진짜 귀중한 것들과 위험한 것들은 따로 있지. 자네에게 선물할 것도 그중 하나야. 기대해도 좋을 걸세.”
웃으며 더 안쪽의 철문에 다가가 열곤 사라지는 흑대남 아저씨, 할 일도 딱히 없기에 혼자 남은 나는 천천히 방을 둘러보며 걸었다. 무기도 있고 방어구도 있는데, <아이템 정보>를 본다는 생각으로 하나씩 살펴보자 그 설명 텍스트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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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배틀 액스(Battleaxe)
무시무시한 날이 양쪽으로 달린 커다란 전쟁 도끼. 현재, 한쪽 날이 파괴되어 톱날처럼 되어 있지만 파괴력엔 별 이상이 없다.
대형 양손무기
데미지 15, 명중 -4
기본 공격속도 1.7, 최소 공격속도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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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평범하네요.”
한 번 둘러보면서 확인 결과, 대부분 별 다른 부가 기능이 없는 +1의 잡동사니들이다. 마력으로 강화되긴 했지만 밖의 공산품들과 별 차이가 없는 물품들. 아니, 좋은 공산품은 이런 평범한 +1 강화품들을 능가하지. 그렇게 박물관에 골동품 감상한다는 마인드로 돌아다니다가...
“...음?”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종이가 아니라 가죽 양피지로 엮은 고서(古書), 온전한 책은 아니었고 한 번 불에 타오른 듯 대각선으로 절반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전의 골동품과는 달리, 이 책에선 뭔가 특이한 마력이 은은하게 흘러나와서 뭔가 신기한 느낌이 들기에 살짝 만져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끄응.”
약간의 두통과 함께 내 눈 앞에 빈 텍스트창이 떠오르고, 이어서 타이핑 치듯이 빈 공간에 글자가 하나씩 새겨진다. <아이템 정보>와 똑같았지만 두통의 강도가 더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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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y The World!]
당신의 영혼과 자아 일부분은 르피너스에 의해 뜯겨져 게임 속 캐릭터의 능력을 ‘흉내 내도록’ 바뀌었습니다. 뜯겨져 나간 당신의 자아와 영혼의 조각이 특정 조건에서 주문 습득이나 기술 습득을 용이하게 하도록 돕습니다.
‘마법서’로 보이는 물품 감지 – 지식 습득을 시도해보시겠습니까? Y/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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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연금 용액 제조>를 익혔을 때와 비슷한 텍스트, 상태창 설명을 보아하니 이건 마법서인 듯했다. 근데, 마법서는 굉장히 귀중한 것 아닌가?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네. 어쨌든 지금 내 능력으로 이 마법서 안의 마법을 배울 수 있을 것 같기에 난 잠시 고민했다.
...근데, 내가 이걸 배워도 되는 걸까?
이 소설 속 세계에서 ‘마법’이란 것은 굉장히 터득하기 어려운 기술이다. 하나만 배워도 먹고 살 걱정은 사라진다는 게 정설. 당연히 배우고 싶긴 하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이 마법서를 이용한다면 마법서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게 문제다. 어떤 게임에선 마법 배우면 마법서가 사라지잖아? 그걸 걱정한 거지.
하지만,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에 있는 건, 별로 가치가 없으니 만져도 된다고 했다. 그럼 들어가는 거지 뭐! 진짜 날려 먹어도 뭐라 하지 않겠지. 아저씨 말대로라면 가치가 별로 없는 거니까. 곧바로 Y/N에서 Y를 누른다고 생각하는 순간...
“에게게가가가가각!”
난 기묘한 비명과 함께 피눈물을 쏟아냈다. 시야가... 시야가 사라지는 것과 함께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리고 나는 다른 곳에... 아니,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동시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내 꿈을 꿀 때 보던 겪었던 내 ‘원래 능력’ 중 하나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이 책과 연관된 과거의 한 장면에 서 있었다.
2.
그것은 도마뱀 인간이었다.
서강이 입었던 마법사 로브 차림, 하지만 그 색은 구정물처럼 새카맣다. 목을 앞으로 빼고 허리를 구부정하게 서 있는 자세로도 거의 2.5m가 넘어 보였으며, 로브 사이로 드러난 윤곽은 서강 아저씨 못지않은 근육질 덩어리... 아니, 서강보다 더하네.
-...
뒤집어 쓴 로브의 후드 아래, 샛노란 눈을 번뜩이며 그 도마뱀 인간은 청색 비늘이 뒤덮인 왼손을 뻗어 옆에 무릎 꿇고 있는 다른 도마뱀 인간에게 흑요석 칼을 건네받아 쥔다. 그리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희생양 앞에 선다.
그 앞에 있는 것은 좌우 통나무에 손발이 포박되어 대(大)자로 묶인 인간 남성
입에 재갈이 물린 채, 벌벌 떨고 있는 그는 도마뱀 인간에게 등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도마뱀 인간이 왼손에 쥔 흑요석 칼을 뻗어 인간 남자의 등에 살짝 대자-.
-!!
인간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격렬히 발버둥을 친다. 하지만, 도마뱀 인간은 오른손으로 그런 남자의 어깨를 짓눌러 발버둥을 억누르며 작게 글자를 하나씩 새긴다. 새겨진 글자 상처에 비해 과한 반응이라고도 볼 수 있었지만-.
남자의 피부 상태가 점점 심상치 않게 변한다.
단어로 보이는 문자를 하나씩 새길 때마다 그 상처에 수포가 생겨나고, 이어서 샛노란 피지낭종이 올록볼록 부풀어 올라 터지며 고름을 줄줄 흘린다. 글자가 새겨지고 있는 남자의 상태 또한 빠르게 나빠졌다. 쪼그라드는 글자 주위의 피부는 검게 변하며 벗겨져 나가고, 이어서 그 독기가 남자의 몸속으로 퍼져나간다.
한 글자, 또 한 글자.
도마뱀 인간이 글자를 새길수록 묶여있는 남자의 발악은 심해졌지만 20 글자 이상 새겨지는 순간부터 오히려 잠잠해졌다. 빠르게 말라가는 남자의 몸, 항문에서는 배설물과 피가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줄줄 흘러나오고 얼굴 구멍에서는 고름 섞인 피를 쏟아낸다. 그 눈은 이미 고름으로 변해 쏟아진 지 오래다.
도마뱀 인간이 등판에 글자를 빼곡히 새기고 흑요석 칼을 떼어냈을 때, 남자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체액을 쏟아내며 오그라들다가 약해진 목뼈는 머리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똑!’소리와 함께 부러져 피와 오물로 덮인 바닥에 떨어졌다. 눈도 없고 피부도 쪼그라들었지만 놀랍게 그것은 살아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남자의 모든 육체는 이내 먼지 덩어리처럼 바스라진다.
남은 건, 바닥을 더럽히는 오물과 불길한 글자가 새겨진 등가죽뿐.
피와 오물이 쏟아진 바닥 위에 선 도마뱀 인간은 그 등가죽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런 도마뱀 인간의 뒤편에는 그보다 질이 좋지 않은 칙칙한 갈색 로브를 두른 채 무릎을 꿇고 있는 수십 명의 도마뱀 인간들이 있었다.
-시이잇! 쉿!
불길한 문자가 새겨진 등판 가죽을 들어 올리며 ‘쉿! 쉿!’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도마뱀 인간. 그 ‘쉿! 쉿!’ 거리는 소리는 ‘언어’였지만 인간의 언어가 아니었다. 하지만, 난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 알 수 없는 말을 해도 알아들을 수 있었던 이전의 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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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는 음성이나 뜻을 평면에 기록하기 위해 쓰여진 기호지. 하지만, 룬 문자는 다르다.
룬 문자는 읽을 수가 없다. 애초부터 음성-공기의 떨림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의 권능을 모방한 것이 바로 마법이고, 그 마법을 일으키는 수단이 룬 문자다.
자신의 의지로 마력을 통제하고, 그 마력을 통해 룬 문자에 공명하여 신들이 행했던 이적-현실을 일그러트리고 순리를 역전 시키는 것이 마법이다.
그런 비밀이 간단하게 표현될 리가 없다.
높이를 가진 물체를 평면에 온전히 적을 수 없는 것처럼 진정한 룬 문자는 이렇게 가죽 위에 평범하게 표현할 수 없다.
애초에 그것은 글자가 아니라 어떠한 형상에 가깝다.
이 현실엔 존재할 수 없는, 그렇기에 볼 수도 없고 직관적으로도 떠올릴 수도 없는... 어떤 초월적인 형상. 귀쟁이들은 수학이라는 것을 동원해 그걸 고차원적 형상이라 부르며 추상적으로 생각한다더군.
고깃덩이를 칼로 잘랐을 때, 어떤 방향으로 잘랐느냐에 따라 드러나는 단면의 형태가 다른 것처럼 현실에서 관측되는 룬 문자는 주위 현실의 마력 흐름에 따라 계속해서 변화한다. 그렇기에 각기 전승되는 룬 문자들은 다르다.
하지만, 그것들 또한 전부 진실이다.
보아라, 이 가죽을. 여기에 새겨진 룬 문자의 파편들을 보라. 그리고 이 가죽에 남겨진 마법의 잔향을 느껴라. 이 흔적들을 보면서 너희의 영혼으로 진정한 룬 문자의 형상을 터득하여라.
그리하여, 마법을 손에 넣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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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뱀 인간이 인간 남자의 등판에 새겨 넣은 문자, 그것은 ‘룬 문자’를 묘사한 기호였다.
글자를 새겨 넣으면서 그는 그 문자가 상징하는 마법을 사용했고, 동시에 희생양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흘러나온 ‘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정신력에 마력이 응집되는 것을 이용하여 모종의 특수한 조치를 취해 그 가죽에 ‘마법의 흔적’을 남겼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마법의 서린 가죽’을 뒤쪽의 수습생들로 보이는 갈색 로브의 도마뱀 인간들에게 넘긴다.
수습생들은 그 가죽을 보고 만진다. 냄새를 맡고 핥기까지 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영혼이 룬 문자를 파악하기를 기원한다. 그 모습은 마치 장님이 코끼리 일부분을 만지면서 코끼리의 전체 형상을 떠올리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는 다르다.
<무한의 눈>이 펼쳐진다. 등가죽에 새겨진 그 지식이, 그 잔향이. 룬 문자의 진정한 형상이 내 앞에 낱낱이 드러난다. 이어서 르피너스에 의해 조각나고 제멋대로 조립된 내 영혼의 일부분이 발광하며 인간의 육체적 한계를 뛰어넘는 직감과 영감이 솟구치며 내가 본 일련의 과정을 파악하고 그 지식을 억지로 내 영혼에 새긴다.
그 느낌이 새삼... 소름끼친다.
배움과 경험은 인간을 다르게 바꾼다. 그래, 배움과 경험을 통해 인간은 이전과는 다르게 변화한다.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할 수 있는 지가 나의 행동 양식을 결정하며, 그렇기에 배움이란 것은 결국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은 대부분 서서히 진행된다.
하지만, 거대한 지식을 한 순간에 얻는다면?
인격과 주관 또한 ‘한 순간에’ 바뀐다는 뜻과 동일하다. 연금 용액 제조 때는 그 양이 적어서 별로 차이가 없었지만 이건 다르다. 내 인격이 실시간으로 뒤틀리며 다른 존재로 변하는 것 같은, ‘내가 아니게 된다.’는 감각이야. 사실, 이러한 숙고 자체도 밀려 들어오는 지식으로 지성이 확장돼서 하게 된 거지만...
어차피 이미 갈 때까지 간 몸이다.
‘가장 충격적인 경험’을 겪었고, 이런 지식은 그것에 비하면 별 것 아니다.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하나도 남김없이. 가죽 책의 인피지(人皮紙) 한 장이 묘사하려는 룬 문자를 머릿속으로 받아들였고, 다음 인피지의 제작 과정과 거기서 설명하는 룬 문자 또한 받아들였다.
한 장, 또 한 장.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다.
몇몇 이들이 마법서를 보고 마법을 터득했고 그 중에는 도마뱀 인간들을 죽이고 마법서를 얻은 이들도 있었다. 주인 또한 계속 바뀐다.
엘프, 드워프, 오크, 뱀파이어...
그 투쟁의 과정 속에서 책의 몇 장은 소실되었고, 또 어떤 장은 추가되었으며, 심할 땐 불타올랐다. 그 오랜 시간의 칼날 앞에 영원할 것 같았던 마법의 잔향 또한 희미해지지만 상관없다. 난 과거의 온전했던 모습을 전부 알고 있으니까.
그 압도적인 기억의 홍수에 난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삼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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