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37화 (37/350)

9화. 오잉!? 한새벽의 상태가...!

4.

“으으으음!”

정신이 들자마자 난 눈을 부릅뜨며 기지개를 쫙 폈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니 아침 7시, 튀어오르 듯이 침대에서 있어나 가볍게 몸을 풀었다. 정신이 또렷하다? 잠들기 전에 먹은 ‘몽환의 물약’ 효과일까? 피곤함은 온데간데없고 아주 상쾌하기 그지없네. 평소 자고 있어났을 때보다 컨디션이 더 좋다.

그렇게 한 번 스트레칭을 하고 현관으로 내려가니...

“오, 다행히 제 시간에 깨어났군! 몸은 괜찮은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서강 아저씨가 반겨준다. 뿔테 안경을 쓰고 한손에는 아침 신문을 다른 한 손에는 커피잔을 쥔 모습, 검붉은 로브 차림이 아니라 양복을 입었다면 어디 미국 IT기업 사장님으로 착각할 것 같다. 그 안부인사에 난 고갤 끄덕였다.

“예, 포션을 마신 덕분인지 아주 말짱하네요. 죄송합니다. 갑자기 발작 때문에... 그 몽환의 물약이라는 거, 양산품 포션도 아니고 굉장히 귀중한 것이었을 텐데 말이죠.”

“하하, 신경 쓰지 말게. 포션은 쓰라고 있는 거니까. 초대한 손님인데 그 정도는 해야지. 어차피 그 포션 사용기한도 거의 다되는 물품이었네. 아주, 적절히 쓴 거지.”

고갤 저으며 보고 있던 신문을 접고 커피잔을 탁자에 내려놓는 서강 아저씨, 이어서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와서 어깨를 두드렸다.

“그나저나 좀 당황했네. 마법서 앞에서 피를 토하고 쓰려져 있어서 말이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혹시, 마법서를 통해 ‘마법의 깨달음’을 얻었는가?”

마법의 깨달음

형용할 수 없는 룬 문자의 형상을 영혼이 ‘본능적으로’ 깨닫고 마법을 깨우치는 현상을 말한다. 나도 마법서를 통해 알아낸 지식이다. 살짝 기대하는 아저씨의 모습에 난 차분히 고갤 저었다.

“아뇨, 그냥 마력 돌연변이로 인해 얻은 발작일 뿐입니다. 가끔씩 이래요. 예린양에게 물어보면 알겁니다.”

“그런가? 하긴, 그 책은 사실상 폐품이지. 마법의 흔적이 거의 없거든.”

내 대답을 의심하지 않고, 아쉽다는 듯이 입을 다시며 순순히 납득하는 서강 아저씨, 순순히 배웠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왜냐고? ...이 대한민국에서 마법을-그것도 ‘살상이 가능한 마법 종류’를 배웠다는 것은 아주 많이 골치 아프거든.

원래 있던 세계의 ‘총포·도검·화약류 등의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처럼 이곳의 ‘살상 마법 관련 법률’은 더럽게 빡빡하다.

마법 종류 증명서, 개인 사진, 병력 신고 및 개인정보 이용 동의서, 신체검사서, 마법의 출처와 용도를 증명할 수 있는 서류, 3년마다 제출해야하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소견서... 일단, 서류 준비만 저 정도인데다가, 폭력 사태에 연관될 시 집중 조사&가중 처벌을 받지.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이렇게 강력하게 처벌한다고 하는데 나로선 개소리지.

안 그래도 ‘마력 각성자’라고 해서 역차별 받는데 마법까지 배웠다고 더 차별 받으라고? 그러긴 싫어. 그러니 숨길 수 있으면 숨겨야지, 안 그래? 독마법 쓰다 들키면? 대충 연금술 응용해서 대처했다고 변명하면 되고. 실제로 파악된 독마법의 메커니즘 자체는 비슷하니까.

“아참, 이거 받게. 자네에게 주기로 한 선물이야.”

입을 다시던 아저씨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로브의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물건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뱀 가죽 같은 보랏빛 가죽으로 만들어진 작은 주머니, 보는 순간 그 ‘고급스런 가죽’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디자인 구닥다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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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 독사 가죽 자루(Mana Viper skin Sack)

짙은 보라색 비늘 가죽으로 만들어진 작은 주머니, 마력을 태워버리는 독을 지닌 ‘마력 독사’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이 자루는 내구력 자체는 평범하지만 외부의 마력 간섭에 내용물을 효과적으로 보호한다. 마력에 의한 변질을 막을 수 있기에 재료 채취용으로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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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템 정보>에 ‘과거를 보는 눈’-대충 <과거시>라고 이름 붙인 기술을 살짝 곁들이자 주머니의 정체가 파악된다.

‘마력 독사’라는 미궁 생물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주머니, 그러고 보니 마법서를 통해 습득한 지식에도 저 마력 독사에 관한 것이 있는데... 미궁에서도 꽤 희귀한 생명체다. 별 다른 마법적 조치는 없지만 미궁 관련 물품들의 가격이 워낙 거품이 많이 낀 지라 저것도 엄청 비쌀 것 같다.

내가 주머니를 빤히 바라보자 서강 아저씨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어나간다.

“마력에 민감한 물건들을 담는 주머니라네. 이 가죽이 좀 특이해서 마력에 의한 외부 간섭을 막는데, 귀중한 물품 같은 것을 보관하는데 좋다네. 특히, 연금술을 하는 이들에게. 미궁에서 채취된 몇몇 특별한 재료들은 변질이 되기 쉽거든! 이것이 있으면 별 걱정 없지.”

“...에, 그렇군요.”

어서 받으라는 듯이 내밀지만 난 쉽게 받지 못했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을 잘 아는데... 지금까지 처먹은 게 너무 많다. 마법 요리, 몽환의 물약, 그리고 눈치 채지는 못하겠지만 마법서의 마법까지. 근데, 이것까지 받으라고?

“저기, 어제 먹은 물약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빚인데 이런 거까지 받으면...”

“괜찮네. 어차피 그리 비싼 것도 아니야! 주머니치곤 굉장히 작고, 무엇보다 이거 성능 상으론 냉장고랑 비슷하거든. 그냥 기념품으로 생각하고 가지고 있던 거야. 빨리 받게. 들고 있기 손 아파.”

흑대남 아저씨의 재촉에 난 결국 공손히 고갤 숙이며 주머니를 받았다. 나중에 빚을 갚을 걸 생각하면 막막하지만 그래도 거절할 수가 없다. 난 예의바른 사람이거든. 어른이 주시는데, 어떻게 거절하겠어? 주는 대로 먹어야지.

그렇게 내가 주머니를 조심스럽게 받았을 때, 타이밍 좋게 서예린이 거실로 나왔다.

헐렁한 티셔츠 차림, 물기 젖은 머리카락에 목에 걸린 수건을 보니 샤워한 것 같았다. 그런 서예린의 모습에 서강 아저씨는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 보곤 날 바라보았다.

“7시니까 시간은 충분하겠군. 빨래한 생도복은 가져다줄 테니, 자네도 샤워 한 번 하게. 그 뒤에 같이 식사하고 미르로 올라가지. 예린이가 나온 방향에 화장실이 있으니 가보게나.”

“아, 넵.”

아저씨의 재촉에 난 엉거주춤 일어나 곱게 화장실 쪽을 향해 움직였다.

5.

흰 머리칼의 소년이 엉거주춤 화장실 쪽으로 사라진 뒤, 서예린은 한가롭게 다시 소파에 앉아서 신문을 읽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저 모습, 미궁에서의 아버지와 지금의 아버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그리고, 방금 전의 태도도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저 ‘껄끄러운 존재’에게 친절하게 대하다니? 그렇기에 그녀는 그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으며 질문했다.

“아빠.”

“응?”

“저것에게 왜 이렇게 잘해줘?”

“저것? 아, 새벽이를 말하는 거구나.”

아직 서투른 한국어가 아닌 유창한 미궁 언어로 의아하다는 듯이 질문하는 딸을 향해 서강은 들고 있던 커피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부드럽게 웃었다.

“처신이지.”

“처신?”

“예린아, 네가 보건데 한새벽이란 소년은 위험하지?”

“응, 엄청 위험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는 서예린, 그에 서강도 방금 전에 봤었던 소년을 떠올리며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내가 보기에도 심상치 않았단다. 인간으로 의태하고 있는 고위 악마를 보는 듯한 은밀한 섬뜩함... 그건 정말 소름끼쳤지.”

“...”

“단순히 느낌만이라고 보기엔 밝혀진 이야기도 심상치 않았지. 특히, ‘강수영’ 연금술 세계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그 까다로운 천재가 요즘 폭발적으로 포션 공급량을 늘려서 도대체 어떻게 한 건가 싶었는데, 저 친구가 일하고 있다니. 분명 관계가 있겠지.”

“...”

“게다가 네 동작을 한 번 보고 불필요한 부분까지 완벽하게 따라했다면서? 분명히, 위협적인 존재야. 어쩌면 네 직감대로 고위 악마 같은 존재일 수도 있겠구나.”

고갤 주억이며 동의하는 서강,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서예린은 미간을 좁혔다.

“그럼 왜 안 죽여?”

‘고위 악마’ 같은 존재, 그것만으로 이야기는 끝났다. 무조건 죽여야 한다. 가지고 있는 힘이 약한 지금이 바로 적기였다. 실제로 한새벽이 진짜 악마라고 밝혀지면 그녀는 그를 죽일 생각까지 했다. 그의 아버지도 어느 정도 단단히 준비해뒀고.

논란?

악마 같은 존재라면 그런 논란을 뒤집어쓰더라도 죽일만한 가치가 있다. 이젠 지상의 인간들도 악마라는 존재가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아니까. 그녀의 아버지가 ‘지상에 올라온 악마’를 추적하는 일에 종사하는 걸 생각하면, 악마 같은 존재라서 죽였다고 하면 불이익은 그리 심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한 서예린의 불퉁한 반응에 서강은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갤 저었다.

“악마 같은 존재지, 악마가 아니니까. 의심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없잖니?”

“...

“그리고, 예린아. 설령, 악마라도 밖에서는 친구가 될 수 있단다.”

“...친구!?”

“그래, 친구.”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아니 반 경기를 일으키며 반응하는 딸을 향해 서강은 다 읽은 신문을 내려놓곤 양 손 깍지를 끼면서 ‘지상에 나오면서 깨달은 진실’을 찬찬히 설파했다.

“예린아, 몇몇 악마들이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활보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

“응, 깜짝 놀랐어. 인간을 죽이지 않고 흉내를 내다니?”

“근데, 밖의 인간들은 그 사실을 알고도 내버려두는 경우가 있단다. 나도 추적하면서 몇 번 봤지.”

서강의 고백에 서예린은 두 눈이 멍하게 변한다. ‘그걸 용납하냐?’는 듯한 딸아이의 모습에 서강은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그래, 크게 볼 때 말이 안 되지. 악마라는 존재의 목적은 결국 ‘지성체의 고통과 파멸’이니까. 뭔 짓을 하더라도 나중엔 사람들에게 해가 될게 뻔해. 무조건 죽여야 하지.”

“그럼 왜...”

“하지만, 말이다. 그 악마가 끼칠 폐해가 내가 아니라 ‘다른 이’-정확히 말하면 적에게 쏟아진다면 어떨까?”

“...?”

“어찌 보면 <악마 소환>과도 비슷한 맥락이지. 적이라는 지성체의 앞에 지성체의 고통과 파멸을 바라는 악마를 던져놓는 거니까.”

적 앞에서 악마를 소환해 던져놓는다는 비유에 좀 이해가 된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서예린, 하지만 아직도 그녀의 얼굴엔 의아함이 가득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다르지 않나?’는 그 모습에 서강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나도 미궁에서 생활할 때는 몰랐단다.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알았지. 아니,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이해가 안 가는 게 많단다.”

“음...”

“하지만, 예린아. 여긴 미궁과는 다르단다. 설령, 악마 같은 존재라고 하더라도 이익을 위해서 협력해야 할 때가 있지.”

얼굴을 구긴 딸의 모습에 서강은 쓰게 웃었다.

특출 난 감각을 지닌 아이, 그렇기에 흑백이 나뉘는 미궁에선 항상 옳았다. 하지만, 선명하게 흑백이 나뉘지 않고 거미줄처럼 복잡한 인간관계가 펼쳐져 있는 밖에선 서투르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큰 손해를 보지 않는 선에서 ‘서로 약간씩 돕는다.’면 더 안전하고 풍요롭게 삶을 살아갈 수 있어. 그래서 그 소년과 친분을 쌓아두는 거란다. 그 소년은 분명 대단한 영향력을 가지게 될 게 분명하니까.”

“어려워.”

“확실히, 미궁 밖의 인간관계는 우리에겐 너무 어렵지. 그 종류도 많고 너무나도 복잡하니까. 하지만, 너도 언젠간 이해하게 될 거란다.”

“...”

“아무튼, 그를 너무 적대하지 말거라. 나름 사회에 녹아들려고 노력하는 게 보이니까. 나쁜 일도 벌이지 않은 것으로 보이니까. 그런 사람을 굳이 적대해서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지 않니?”

“...알겠어.”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고갤 끄덕인 후, 자기 방으로 향하는 서예린. 그런 그녀의 뒷모습에 서강은 쓰게 웃었다. 감이 좋은 만큼, 그 소년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건 힘들 거다. 하지만, 그런 딸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 소년과 사이가 틀어져선 안 된다.

지금이 딱 적기다.

힘이 약한 상태, 약간의 도움만으로도 생색을 내기 좋다. 대화하면서 파악한 그의 성격을 보건데, 이렇게 친분을 쌓아둔다면 최소한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 이건 바깥 사회의 보험이라는 계약과 똑같다.

예상이 틀리다면? 그럼 어쩔 수 없는 거다. 어차피 이 정도는 지금의 자신에게 ‘약간의’ 투자일 뿐이고, 그리 큰 손해는 아니다. 이 작은 투자로 저 위험해 보이는 존재와 괜찮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시도할 가치는 충분하지 않은가? 남는 장사다.

“좋아, 아침밥부터 만들어 볼까.”

고개를 끄덕이며 서강은 아침식사를 만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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