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선도부 할 거야 안 할 거야!
1.
토스트와 우유로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마친 뒤, 우린 지상의 미르로 복귀했다.
서강 아저씨는 수업을 하러 간다고 했고 서예린과 난 함께 편입반 오전 수업을 듣고 각자 선택 수업으로 갈라졌다. 내가 화요일에 듣는 선택 수업은 물품 감정 I, 미궁 고고학 I, 그리고 윤리학 I. 애초에 관심 없는-억지로 듣게 된 수업이었기에 대충 끼적이는 것들이었다.
“미궁에선 평균적으로 39시간마다 지형이 변화하는 변천이라는 이상 현상 때문에 문명이 탄생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특정 지역’은 변천이라는 변화의 한계가 정해져 있고 그 덕분에 문명이 탄생하기도 했죠. 여러분들이 흔히 엘프라고 부르는...”
뭐라고 말하고 있는 미궁 고고학 선생, 평소에도 그러지만 오늘은 더더욱 수업 내용이 들어오질 않았다.
원래 남자는 새 장난감-골프채나 낚싯대, 게임을 사면 며칠 동안은 그거 가지고 놀 생각에 학교나 직장에서도 싱글벙글한다. 나도 똑같지.
아니, 오히려 더 하다.
마법이라는 궁극의 장난감을 배웠으니까. 지하에선 눈치가 보여서 못했지만 수업 끝나고 나서 이번에 얻은 것들을 테스트해볼 생각만이 가득했다.
“...이런 문명의 흔적들은 놀랍게도 이 바깥세상의 것과 흡사한, 아니 완전히 똑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종족들의 언어와 표현 중 몇 가지가 라틴어 발음과 표현이 그대로 적용된 것들이 있죠. 그리고, 인간형 이종족들의 모습은 세계 곳곳의 전설이나 설화 속의 괴물들의 모습과 너무나도 비슷했답니다. 그 특징도 어느 정도 일치했고요.”
그나저나, 마법도 배웠고 분명 성장했는데 왜 레벨은 안 오르는 걸까? 흠, 어떻게 하면 레벨을 올릴 수 있지? 이번에 터득한 <과거시>의 정확한 체력 소모 기준은 뭐고, 성능은 어떠하며, 또 몇 번 쓸 수 있을까? 무한의 눈은 일주일에 두세 번 총 6분 정도가 한계인데 말이야.
“이런 흔적들을 토대로 한 가설이 대두되었는데, 바로 ‘세계 분화설’입니다. 원래, 이 세상은 마법과 이종족이 존재했지만, 어느 순간 미궁으로 분리되었고 그 흔적이 설화로 남아있다는 설이죠. 미궁에서 거주하는 인간의 DNA가 밖의 현생 인류와 똑같은 것도, 문명의 흔적이 밖과 똑같이 있다는 것도 이러한 분화 과정에서 말려들어갔다고 하면...”
추가로 마법에 대해 연구도 해봐야지. <무한의 눈>으로 룬 문자의 원형을 보고 인간을 초월한 지성으로 파악한 결과, 마법서에서 표현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응용 가능할 것 같거든. 실제로 그와 비슷한 과거를 보기도 했고. 마법서를 든 이들은 잘 모르는 것 같지만 난 가능할 것 같다.
“...거기, 생도?”
그러고 보니 싸장님에게 설비 좀 빌려서 마법서에 나온 도구도 만들어봐야겠다. 아니, 마법 장비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라니? 내 수준으로 가능할지 모르겠다만 그래도 시도는 해야지. 겸사겸사 싸장님의 물약 레시피도 몇 개 베껴야지. 미궁 재료가 안 들어가는 걸로. 그리고 또 뭘 할 수 있을까? 흐음...
“...거기, 쬐끄만 하얀 머리.”
“아, 네! 넵!”
대충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날 부르는 선생의 목소리를 모르고 있었다.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빼고 허겁지겁 살짝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하자 교실에 있는 80명의 시선이 확 쏠린다. 쩝, 좀 부끄럽구만.
그렇게 어리벙벙한 내 모습이 못 마땅했는지, 선생은 교보재로 끌고 온 커다란 조각상 파편을 가리키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질문을 퍼붓는다.
“자, 지금까지 설명해준 미궁의 문명의 특징들을 토대로 이 석상이 어떤 문명의 것인지 말해보세요.”
“...죄송한데, 가까이서 봐도 될까요? 눈이 안 좋아서 형태가 잘 안보여서.”
전혀 수업을 듣고 있지 않았기에 <과거시>를 사용하는 감각으로 보려고 했지만... 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관찰자의 눈>의 범위 30m 밖에 있어서 안 되는 것 같았다. 선생이 고갤 끄덕이자 난 가까이 갔고 그러자 <과거시>가 정상적으로 발동한다.
과거로 돌아가는 시야
동시에 <과거시>의 능력과 소모를 체크했다. 물체를 기준으로 볼 수 있는 범위는 반경 30m 가량, 과거로 돌아가는 기간이 길수록 정보의 난잡함이 클수록 정신력을 많이 소모한다. 사람에게 쓰는 건 힘들 것 같고, 물건을 대상으로 하면 일주일에 7~8번이 한계일 것 같네.
어찌되었든 이 시야를 통해 확인된 조각상의 출처는...
“...중국산 짝퉁인 것 같은데요?”
-푸, 푸하하하!
진지하게 말한 건데 나머지 생도들 모두 ‘빵!’ 터지며 웃는다. 하지만, 진짜다.
중국에서 채취한 대리석을 중국인 조각가들이 수작업으로 형태를 만들었고, 그렇게 미국에 수입된 것을 오크 마법사들이 후속 가공했으며, 최종적으로 명품을 두른 멋들어진 외모의 귀쟁이 브로커가 미르에 팔아넘겼다.
인간, 오크, 엘프.
세 종족의 환상의 콜라보 작품
미궁의 이종족들이 얼마나 현대 사회에 잘 적응했는지 보여주는 물건이었다. 나도 좀 당황했어. 내심 속으로 제노포비아적-‘세상은 인간의 것이고 이종족은 모두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웃으며 악수하는 엘프-오크의 꼬라지를 보니 그냥 음흉한 인간들이랑 똑같다.
하지만, 우리의 고고학 선생은 이 숨겨진 진실을 모르는 듯 했다.
“생도, 이름이 뭡니까?”
“한새벽이라고 합니다만...”
“한새벽 생도, 태도 점수 1점을 감점하겠습니다.”
“아니, 그게...”
“이건, 여러분들이 흔히 리자드맨이라고 부르는 종족의 문명 유물입니다. 리자드맨의 모습이 아니기에 착각하기 쉽지만...”
태블릿 PC로 내 점수를 깎은 뒤, 반박의 여지를 주지 않으면서 말을 이어나가는 선생. 아오, 내가 틀렸으면 말을 안 하는데 맞았는데도 이런 취급이라니... 게다가 태도 점수? 여기가 무슨 사관학교냐?
아,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니 절반은 사관학교긴 하지.
그렇게 내가 불퉁한 표정으로 앉아있자 선생은 들으라는 듯이 ‘미궁 고고학은 미궁에서 출토되는 마법 물품 감정과 미궁의 환경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미궁 탐사를 목표로 하는 이들은 집중해서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완 상관 없는 개소리다.
과거를 볼 수 있는 이상, 내게 ‘미궁 탐사 I’이나 ‘물품 감정 I’ 같은 수업은 필요가 없다. 물품 감정은 말 그대로 마법 물품에 외부 마력을 투사해서 그 반응을 보고 그 성질(+1 강화 혹은 어떤 속성에 저항)을 알아내는 작업인데, 내 <아이템 정보> 능력이 훨씬 더 정확하다.
...이런 수업을 언제까지 들어야 하나?
지난주부터 전투 장학생으로 분류돼서 억지로 듣게 된 6개의 과목, 전투 I은 나름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자 덤으로 윤리학 I도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한다고 치고.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머지 4개 ‘미궁 고고학 I’, ‘물품 감정 I’, ‘미궁 환경 I’, ‘이종족 언어학 I’은 도움이 안 된다.
수업을 듣기 시작한 지 고작 1주 지났지만 단언할 수 있다. <과거시>를 터득하기 전에도 쓸모없다고 느꼈는데 이젠 완전히 쓸모가 없다. 짝퉁을 진짜로 아는 고고학 선생을 보면 말 다했지. 그 4개 과목만 해도 주 14시간, 하루 반 이상을 버린다고 생각하니 회의감만 드네.
“...결국 돌고 돌아서 돈 문제네요.”
때려치울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장학금 반환 문제에 관자놀이를 짚었다.
저번 주 금요일에 서예린이 들려준 정보에 의하면 내가 ‘전투 장학생 복귀’가 된 이유는 지난 3년 동안 지급해준 장학금-대략 1억 원을 돌려받기 위해서 수작을 부린 것. 아마, 미르 총무부에선 내가 자연스럽게 능력 미달로 떨어져나가기를 기대하고 있을 거다. 언론 플레이를 해도 임팩트가 약하도록.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생각해보고 있긴 한데, 아직까진 뾰족한 방법이 없다.
...그냥 1억 포기하고 그만 둘까? 어제 이 시간까지만 하더라도 생각지도 못할 선택지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때려치우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과거시>라는 사기 기술을 터득했고 연금술에 상당히 도움이 되는 독마법을 터득했으니까. 이제 1억 700만원은 그리 막막한 금액이 아니다.
그래, 레시피 빼돌린 뒤에 미친 척하고 싸장님 수목원 약초를 조금씩 빼돌려서 포션 만들어 팔아버리면 한방에 갚아.
게다가 알바 페이도 더 늘릴 수 있다. 그 동안, 더 일하고 싶어도 ‘마나 회복’ 때문에 주 5일 하루 4시간밖에 못했지만 마법서에 배운 마법 <피의 승화>를 응용하면 6시간은 더 할 수 있거든. 근데, 4개 과목을 포기하면 남은 선택 과목으로 졸업 요건을 채울 수 있는지 모르겠네.
-♫~♬
수업을 듣는 척하면서 진로에 대해 생각하니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그렇게 수업이 끝나고 다음 수업으로 가려고 할 때-.
“한새벽.”
처음 듣는 목소리가 날 불렀다.
차갑게 보이는 외모의 남자애, 군대식으로 짧게 깎은 스포츠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고 생도복에 초록색 기장을 보니 나와 똑같은 4학년. 윗주머니에 달린 뱃지를 보니 선도부원이다. 그러고 보니 애도 휴대전화 메신저에 있던 얼굴인 것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나네.
내가 고갤 돌려 바라보자 녀석은 내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을 이어나간다.
“외모가 엄청 많이 바뀌었군. 체형도 30cm이상 쪼그라들었어. 어쩐지, 찾을 수 없더라니... 오늘 지적을 듣지 못했으면 계속 눈치 못 챘을 거다.”
“하하, 그렇게 됐네요. 혹시, 이름이...”
“조남원이다. 너와 같은 선도부원이지.”
그래, 대충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다. 내가 고갤 끄덕이자 녀석은 날 향해 한발자국 다가오며 추궁하듯 물어본다.
“그나저나 왜 지금까지 휴대전화를 받지 않았지? 문자도 하지 않고. 심지어 선도부 메신저 톡방에서도 나갔더군.”
“하하, 그게 너무 바빠서요...”
남자애의 추궁에 난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했다. 하지만 실제로도 엄청 바빴다. 수업 내용들을 공부하고 또 틈틈이 알바하기도 바빠. 그리고 무엇보다, 한새벽의 행세를 하며 그가 남긴 인연들과 친해지는 것은 나로선 너무 힘든 일이었다. 고아원 이후로 나머지는 거의 방치수준으로 남겨두고 있었지. 언젠가 하긴 해야 하는데 말이야.
그런 내 반응에 녀석은 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방과 후에 선도부로 와라.”
“...네? 왜요?”
“왜라니? 너도 선도부원이잖나?”
그 말에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그리고 내가 멍해지건 말건 조남원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추가적인 전투 훈련 받아야지. 그리고, 선도부로서 해야 할 일도 해야 하고. 그 동안 너만 빠졌다. 연락도 안 받고, 메신저 문자도 보지 않고... 저번 전투 시간에 조교를 담당하던 선배들이 접근하려고 했는데 서예린 조교님이랑 먼저 같이 빠져나갔다더군.”
...그래, 남진우에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전투 장학생이면 무조건 ‘선도부’에 속한다고 했었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 싯팔 당연하지! 저번 주 월요일에 억지로 전투 장학생 복귀되었다고 소식을 받았는데 선도부를 생각할 겨를이 있겠어?
아니, 선도부? 내가 거길 들어가야 한다고?
“수업 끝나고 와라. 그리고, 이사 준비도 하고.”
충격 받은 내 모습이 전해졌는지 녀석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려 사라진다. 선도부, 원래 세계에서도 안 했던 선도부...
그래, 당장 런해야 한다.
어떻게 조금씩 버텨보면서 생각해보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나중에 불리하게 작용하더라도 상관없다. 난 여기서 빠져나가야겠어! 싯팔, 아무리 그래도 선도부는 선 넘었지! 오늘 당장 가서 때려치우겠다고 말하자. 돌연변이 부작용으로 선도부는 불가능하다고.
이를 갈며 나는 손가방을 들고 다음 수업을 향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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