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46화 (46/350)

12화. 이종족 문화 교류회(지상 침략용)

1.

싸장님의 보은 아래, 나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더 이상 ㅈ같은 선도부 필수 과목 안 들어도 됩니다! 새벽은 자유의 몸이에요! 대신에 알바 시간이 하루 3시간씩 늘었지만 그 정돈 감수할만한 희생이었지. 다음날, 바로 수정 강의 신청서 받았고 교장실에 가서 교장에게 사과도 받았다.

근데, 교장 이름이 정원용이라고 해서 잠깐 기분이 묘했다.

‘르피너스의 장난감’ 소설 속에 잠깐 지나가듯이 한 번 나왔던 이름이었거든. 16년 전에 부사관이셨냐고 물어보니 놀라고, 그 송파구 독가스 살포 작전 전에 돌아왔냐고 물어보니 더 깜짝 놀라더라. 어찌되었든 간에 이 세상이 진짜 소설 속이라는 것을 확인해주는 시간이었다.

이 세상 어딘가에서 주인공도 ‘씨발씨발!’거리면서 미궁을 뚫고 있겠지.

그리고, 주조연급의 인물들도 살아가고 있겠고. 흥미로운 이야기긴 하지만 나완 상관없는 이야기다. 난 소시민이라서 여기서 먹고 살기도 바쁘거든. 미궁 그딴 건 모르겠고 오늘도 열심히 살아가는 레후.

어찌되었든 간에 난 쓸모없는 강의들을 던져버리고 그 다음 주부터 새로운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이전에도 말했다시피 마력으로 약물을 가공하는 기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기존 약물’의 약리학적 작용을 일부분을 폭발적으로 증가 시키는 증폭(Boosting), 다른 하나는 일일이 단계 별로 섬세한 마력 가공을 거쳐 전혀 새로운 효과를 조립하는 창조(Creating). 약동학(藥動學)의 시선으로 보면 증폭 계열 약물은...”

정신나갈것같애정신나갈것같애정신나갈것같애정신나갈것같애!!

아니, 싯팔. 이 좆망한 이세카이는 적당히 지랄해야지 이렇게 섬세하게 지랄할 줄은 몰랐다. 판타지라면 대충 수2 배우면 모두 떡을 칠 수 있게 끝나야 되는 게 아니냐? 편입 준비반에서 3달간 수업했을 때도 수업 수준이 매우 높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 대학교 수준이다.

하지만, 나완 달리 ‘마력 약리학 I’을 듣는 40여명 가량의 생도들은 불평하지 않고 노트필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므로 인체가 보일 수 있는 반응 또한 창조 계열과는 달리 한계가 또렷합니다. 인체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어요. 따라서 적당한 강도로 증폭하는 것이 필수죠. 이번 시간에는 증폭 약물의 일반인의 최대한도를...”

하긴, 생각해보면 약리학이라는 것 자체가 똑똑한 의사나 약사 양반들이나 배우는 것이지.

근데, 약물을 만드는 것만 잘하면 되지 저런 걸 배울 필요가 있나 싶다. 수업을 못 따라갈 정도는 아니지만... 싸장님의 알바생으로 하는 것만 잘해도 되지 않나? 딴 애들은 저런 지식이 필요할지 몰라도 난 ‘게임 시스템’이라는 보조를...

“거기, 백발 생도? 한새벽 맞죠?”

“넵.”

대충 멍하니 무지성으로 <게임 시스템>-메모장에 필기하고 있을 때, 교수가 갑자기 날 부른다. 다행히, 이전 고고학 수업 때처럼 완전히 넋을 놓진 않았기에 곧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내가 대답하자 교수는 홀 중앙으로 내려오라는 듯이 손짓한다.

“이야기는 들었어요. 생도는 실습 키트가 없으니 제가 가져온 키트로 함께 하죠. 아, 그리고 수업 끝나고 교수실에 와서 키트 받아가세요.”

어쩐지 다들 여행용 캐리어 크기의 커다란 목제 상자 하나씩 가지고 있어서 뭔가 했더니만 실습 키트였구만? 어찌됐든 그 말에 난 얌전히 홀 계단을 내려와서 교수님의 옆에 섰고, 교수는 보란 듯이 키트를 연다.

...다 아는 것들이네.

이공계 화학 실습에서 나올 법한 도구들, 마력에 반응하는 소재로 가공되어서 마력으로 작동하는 ‘제약 도구’들이다. 근데, 우리 싸장님의 물약 제조실에서 보는 장비들에 비해 크기도 작고 구조도 단순하며 조잡해 보인다.

“저번에는 간에 작용하는 물질의 가공 과정에 대해 배웠지요? 이번에도 간에 작용하는 물질을 배울 겁니다. 다만, 저번에 배웠던 ‘비구아나이드제’는 간과 말초조직의 인슐린 감수성을 증대시켰다면 이번에는 β cells 의 SUR 와 결합하는 술포닌 계열을 강화하는 방법입니다. 여기서부터 마법이 약간 사용되는데, 완전한 <연금술> 수준은 아니고 일부분만...”

말과 함께 칠판에 복잡한 수학 공식을 써내려가기 시작하는 교수, 미르에서 마법을 발동하는 ‘룬 문자’에 대한 교육은 뜬 구름 잡는 듯한 다른 이종족들의 방식이 아닌 수학적으로 룬문자를 표현하는 엘프들의 방식으로 가르친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고 실제로 연습하다보면 마법 또한 어설프게 쓸 수 있거든.

근데, 난 봐도 잘 모르겠다. 많이 어질어질하네.

“자, 대략적인 설명은 전부 끝났으니 제가 한 번 시범을 보여드리죠. 잘 보세요.”

키트의 장비에 정제되어 있는 약품을 넣고 차근차근 설명하면서 마력 가공을 시작하는 교수 양반. <무한의 눈>으로 보지 않아도 사용하는 장비와 변화 과정을 보니 대충 어떤 기교를 쓰는지, 또 어떤 룬 문자를 활성화 했는지 짐작이 갔다. 설명보다 실습으로 보니 훨씬 쉽네. 내가 평소에 하는 작업보다 많이 단순하다.

얼마 가지 않아, 교수는 보란 듯이 살짝 탁한 청색으로 변한 결정을 들어올린다.

“자, 이게 완성된 술포닌 약물 입니다. 설명을 들으면서 눈치 채셨겠지만 이번에 만들어낼 것은 지난 4주 동안에 배웠던 마력 가공 테크닉들도 한 번씩 쓰게 된답니다. 일종의 종합 복습이죠. 그리고, 제가 이번에 낼 1학기 중간고사 시험이기도 하고.”

그 설명에 생도들의 얼굴이 썩어 들어간다. 저게 그렇게 어렵나? 아무리 내가 치트키를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굉장히 쉬운 건데? 생도들이 표정이 썩어나간 말건 교수는 생글생글 웃으며 좀 얄밉게 말한다.

“좀 많이 어려울 거예요. 하지만, 마력 약리학이란 과목은 이렇게 ‘제약’에 관한 기술 또한 가르치는 것이 원칙이랍니다. 그냥 단순히 약물의 효과에 용법에 대해 가르치는 거라면 앞에 ‘마력’이란 단어도 붙지 않았죠. 그리고 여러분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도 배웠겠고.”

“...”

“여러분들은 마력 사용자고 필연적으로 마력에 관련된 직종을 구하게 될 겁니다. 반드시 배워야 해요. 사실, 마력 가공이 진짜 여러분이 신경 써야할 부분이란 거죠. 수업 끝나고 방과 후에도 키트를 잡고 부지런히 연습해보세요. 그러면 할 수 있을 거랍니다.”

집어든 결정을 내려놓고 교수는 박수를 짝 치며 옆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비닐팩을 가리킨다. 낱개로 포장된 약품들이다.

“자, 다들 앞으로 나와서 약물 결정을 받아 가시고 연습해보세요. 제가 돌아다니면서 미숙한 부분을 가르쳐드리죠. 아, 한새벽 생도? 생도는 이전 시간에 안 나와서 모르겠죠? 하나씩 가르쳐 드릴게요.”

날 바라보며 말하는 교수님의 모습에 난 잠깐 고민했다.

미숙한 척을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본색을 드러내야 하나? 하지만,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괜히 몇 분 만에 끝날 거 몇 시간 동안 선생 옆에서 붙잡고 있는 것도 고역이다. 그리고 싯팔, 이럴 때 잘난 척을 안 하면 언제 해보냐?

멈출 수 없는 충동데쟈아앗!

“혼자 해봐도 될까요?”

“음? 보기엔 쉽지만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닌데요?”

‘처음와서 뭘 모르는구만.’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교수, 그래도 해보라는 듯이 턱짓하기에 난 옆 테이블의 낱개 포장된 약을 한 봉지 가져와 넣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공을 시작했다. 내 능수능란한 마력 가공에 교수는 물론이고 생도들도 두 눈이 동그랗게 커지는 가운데, 1분 만에 결과가 나왔다.

“됐습니다.”

미약한 광채가 흘러나오는 보석처럼 보이는 투명한 청색 결정, 책상 위에 결과물을 놓으니 옆에 교수의 것보다 더 예쁘다. 실제로 완성도도 훨씬 더 높다. 교수가 가르쳐주는 방식이 아니라 싸장님이 사용하는 방식과 룬 문자 컨트롤대로 했거든. 교수도 눈치 챘는지 살짝 떨떠름한 목소리로 묻는다.

“어... 한새벽 생도? 혹시 <연금술>에 대해 배웠나요?”

“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좀 배웠습니다.”

“...아르바이트에서요?”

“강수영의 물약상점이라고 시내에 물약 모양의 건물에 있는 데요.”

“가... 강..수영? 설마, 그 미친 치와와...!”

말하던 도중 흠칫하더니 스스로의 입을 틀어막는 교수. ...그나저나 미친 치와와라니, 앙증맞은 주제에 성격은 지랄 맞다는 점에서 우리 싸장님이랑 완전 잘 어울리네. 별명하난 잘 지었다. 잠시 교실 분위기가 요상해지자 그녀는 ‘크흠!’ 거리며 헛기침을 하곤 고갤 끄덕였다.

“하긴, 수영 선배에게 배웠으면 그럴 만도 하죠. 단순히 마력을 이용하는 걸 넘어서 <연금술>에 해당하는 계통 마법까지 사용하다니. 그 깔끔함이 남다르네요. 만들어진 결정의 완성도가 웬만한 제약 술사들보다 나아요.”

“감사합니다.”

“근데, 마력 가공면으론 더 이상 배울 게 없는 것 같은데...”

살짝 날 떠보는 교수, 실제로 싸장님도 그런 말 했다. 내 가공 실력은 지금 당장 어딜 가더라도 먹히는 수준이라고. 하지만, 그 실력을 증명해주는 증명서-자격증을 얻기 위해선 국가가 공인한 절차가 필요하다. 높은 자격증일수록 그 응시 요건도 까다롭다.

기술 자격증 중에서 최고봉인 기술사(技術士, Professional Engineer)

국가 자격증을 따고 최소 동종 업계 7~8년 종사해야 간신히 시험을 ‘응시’할 수 있는 전문가 타이틀이지만, 마력에 관련된 기술은 아직까지 나타난 지 16년 밖에 안 되기에 그 기준점이 상당히 낮다.

그리고, 그 ‘최소 응시 자격’ 중에 하나가 관련 분야 미르의 교수의 추천이지.

“이론적인 지식은 전혀 없습니다. 수업은 꾸준히 듣겠습니다.”

약리학 I, II 에서 상위권 안에 들면 자동으로 추천을 받고 응시 자격을 얻는다. 한 마디로 배울 것 없더라도 수업을 들어야 가장 빨리 마력 기술사가 될 수 있다는 거다. 그리고, A+학점은 덤이겠고.

“좋아요. 자리에 가도 좋아요.”

내 대답에 알겠다는 듯이 고갤 끄덕이는 교수, 덩달아 아이들의 시기어린 시선이 쏟아지는 게 느껴진다. 이거 애들이 죄다 미남미녀라서 꼭 Tv 청춘 드라마 속에 들어온 것 같구만. 아아, 이 몸은 ‘천재’인 것인가? 양학을 하니 기부니가 쵸큼···

“어억!?”

-철푸덕!

잘났음을 만끽하며 계단을 오르고 있다가 발이 도중에 걸렸다. 엉키는 발, 운동신경이 있으면 그래도 엉거주춤하며 버텼겠지만 그런 건 없기에 균형이 무너지며 그대로 계단에 엎어졌다. 그런 날 보며 조용히 하지만 들리게 ‘쿡쿡’ 웃는 애새끼들, 쓰읍. 쪽팔리게 이게 뭐냐. 게다가...

“아오...”

한쪽 렌즈가 깨진 선글라스를 보며 난 얼굴을 찡그렸다. 지하에 내려갔을 때, 거대 비숑이 박살낸 선글라스를 대신해서 서예린이 사준 비싼 거. 근데, 한 달도 안 되서 또 깨졌다. 쓰읍, 이 정도면 마가 꼈네. 또 사는 건 좀 그런데... 그냥 눈을 감고 다니는 걸 감추지 말아야 하나?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깨진 선글라스를 벗은 후, 난 다시 넘어지지 않도록 시선을 발쪽으로 향한 채 내 자리를 향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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