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이종족 문화 교류회(지상 침략용)
4.
처음 들어설 때도 느낀 거지만, 동아리실은 꼭 ‘비밀 아지트’ 같았다.
그래, 애들이 모이는 좋아하는 것들만 꽉꽉 들어찬 아지트. 하프 애들이 들어간 방에는 놀랍게도 컴퓨터와 콘솔 게임기로 보이는 기기, 커다란 벽걸이 Tv가 있었다. 하프 오크-오혜영과 하프 드워프-지아라는 콘솔 게임기를 붙잡고 레이싱 게임 중이었고.
처음 보는 게임이지만 캐릭터를 보니 ‘마X오 카트’네. 그리고···
“어···? 그, 괜찮나요?”
하프 엘프-이경은 얌전하게 소파에 앉아있었다. 문이 열리자 날 바라보고 있는 중, 하지만 반쪽 깜귀-이영은··· 자기가 스파이더맨이라는 것 마냥 천장 쪽 모서리에 붙어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도게자 박을 준비하던 나로선 좀 당혹스런 위치였다.
그런 내 얼빠진 듯한 반응에 레이싱 게임을 하던 지아라가 힐끗 보며 대답한다.
“이영 찾는 거야? 걔 여기 안에 있어. 안 보이게 은신해 있을 뿐이지. 기분 꿀꿀하면 숨거든.”
“···저기 오른쪽 천장 모서리에 붙어있는데요.”
“뭐?”
내 대답에 지아라는 물론이고 이경와 오혜영까지 내가 가리킨 방향을 쳐다본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듯한 눈치. 나는 똑똑히 보이는 데 말이다. 애들의 시선이 자기 쪽으로 향하자 은근슬쩍 자리를 옆으로 옮기는 반깜귀,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서 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내가 계속 시선을 보내자-.
“!?”
‘팍!’하고 날 향해 도약하는 듯 하더니 잽싸게 옆쪽에 착지, ‘호다닥!’ 소리와 함께 날 지나 문을 밖으로 나간다. 이어서 현관문이 닫히는 듯한 ‘철컹!’ 소리까지 나는 걸 보니 아예 밖으로 나간 듯하네.
지금까지 ‘뭔 소리 하냐?’는 듯이 날 바라보던 세 사람도 방금 전 모습은 보인 듯, 눈들을 휘둥그레 뜬다.
“죄··· 죄송합니다! 다음에 봬요!”
이어서 이경이 재빨리 이영의 뒤를 쫒아 나가고 방 안엔 지아라, 오혜영, 그리고 나 세 사람 밖에 안 남았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소동에 어색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오혜영이 빙긋 호감가게 웃으며 날 바라본다.
“와, 대단함다. 이영이 <투명화>까지 써서 숨으면 아무도 못 찾았는데 그걸 찾다니? 어떻게 하신 검까!?”
“음, 그냥 보였다고 밖에 말 못하겠네요. 혹시, 제가 실례한 건가요?”
<투명화>를 썼구나. 근데, 내 <관찰자의 눈>에는 그냥 보였다. 천장에 붙어있기에 반사적으로 시선이 쏠렸는데 숨어있던 건 줄은 몰랐네. 생각지도 못한 기능이다. 그런 내 대답에 하프 드웝-지아라가 쥐고 있던 게임기 패드를 가볍게 휙 던지곤 어깰 으쓱인다.
“신경 쓰지 마. 그 반쪽 깜귀 년 되게 쪼잔하거든. 경이는 걔가 어떻게 사고칠까 안절부절못하고.”
“음, 이럴 줄 알았으면 모르는 척 할 걸 그랬네요. 그리고···”
두 사람을 향해 난 최대한 공손하게 90도로 허릴 숙였다.
“양우영씨에게 사연을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크게 실례했네요.”
“괜찮슴다. 전 딱히 신경 안 씀다.”
“···나도 그닥. 모르면 실수 할 수도 있지 뭐. 영이, 경이 두 녀석한텐 나중에 말해둘게.”
털털하게 넘어가는 두 사람, 아무래도 그 반쪽 깜귀가 유별나게 과민반응한 것 같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가운데, 지아라는 자기 옆에 앉으라는 듯 방바닥을 툭툭 두드린다.
“그건 그렇고, 그 동안 너 뭐했는지 썰 좀 풀어봐라. 궁금하다.”
“저도 궁금함다!”
“음, 그닥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괜찮아, 내가 알고 있는 한새벽과 지금의 너와는 많이 다른 것 같아서 말이야. 좀 자세하게 말해봐.”
지아라의 권유에 난 마지못한 척 옆에 앉았다. 그래, 이렇게 수다 떨면서 조금씩 친해지는 거지. 오혜영이 ‘이런 건 과자 먹으면서 들어야 함다!’라고 하면서 밖으로 나가 거실 테이블에 있었던 과자들을 공수해온 가운데, 난 천천히 내가 겪은 썰들을 풀어냈다.
정신병동에서 깨어난 기억에서부터 돌연변이, 알바, 북쪽 보육원 방문, 선도부와의 갈등···
도중도중 오혜영이 감탄하며 맞장구를 치거나, 지아라가 질문을 하면서 이야기가 길게 늘어졌다. 그렇게 지난 9개월 간 겪었던 이야기가 다 끝났을 땐 2시간가량이 지나있었다. 이렇게 여자애들이랑 오래 대화한 건 처음이네. 몇몇 부분은 넘어갔지만 내가 여기 와서 겪은 거의 모든 이야기를 들은 지아라는 고갤 절래절래 저었다.
“진짜, 너도 불쌍하네. 르피너스의 손길이 닿다니... 확실히, 그 <꺼림칙한 존재감>이란 돌연변이 덕분인지 널 처음 봤을 때 좀 그랬어.”
“어땠나요?”
“소리장도 같은 느낌? 항상 생글생글 웃고 있지만 뭔가 꿍꿍이를 숨기는 듯한. 묘하게 우릴 깔보는 것 같은 느낌도 났고. 그 까탈스런 반깜귀년이 빡칠만도 하다고 생각했지.”
“하하, 전혀 아니에요.”
소리장도라니··· 참 묘하네.
하지만, 이해는 간다. 난 르피너스의 것과 비슷한 생글거리는 웃음이 그냥 패시브로 달렸으니까. 어떻게 참아보거나 바꿔보려고 해도 잠깐뿐, 지워지질 않으니 처음 보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렇게 내가 쓴 웃음을 흘리는 동안, 오혜영이 지아라를 보며 질문한다.
“아라, 질문 하나 해도 됨까?”
“뭐, 임마.”
“소리장도가 뭔 말입니까? 소리? 장도? 소리로 만든 도?”
머릴 긁적이며 말하는 오혜영, 그에 지아라는 한숨을 푹 뱉곤 얼굴을 쓸어내린다.
“한자 공부 좀 하··· 아니, 사자성어로 그런 게 있다.”
“한자? 그럼 우영 오빠에게 물어봐야겠슴다.”
“물어 보지마. 걔 한자 잘 몰라. 소리장도는 ‘웃음 속에 칼을 숨긴다.’라는 뜻이야. 얼마 안가 뒤통수 때릴 거다 정도로 생각하면 돼. 그거면 충분해.”
고갤 저으며 대답하는 지아라, 두 사람이 투덕거리는 모습을 난 가만히 지켜보았다. 절반은 인간이라서 그런 걸까? 그다지 이종족이라는 느낌은 나질 않는다. 딱 자기 나이대의 여자애 같은 느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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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흐뭇하게 두 사람을 보고 있을 때, 갑자기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온다.
어떤 소리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뒤죽박죽 뒤섞인 소음, 하지만 왠지 모르게 웃음 같은 느낌의 섬뜩한 소음이. 감은 눈구덩이를 가볍게 문지르며 난 살짝 시선을 돌려 벽걸이 시계를 살폈다. ...오후 7시, 피곤해서 그런가? 이른 시간이지만 유별나게 반동이 빠르다.
“전 이만 가봐야겠네요.”
“음?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인데 먹고 가지? 우리 부실 냉장고에 백화점에서 사온 부대찌개 밀키트 넣어놨어.”
자리에서 일어서자 날 보며 말하는 지아라, 그에 난 고갤 저으며 선글라스를 살짝 들어 올리곤 두 눈을 떴다. 피곤함에 잔뜩 충혈된 눈, 그런 내 눈을 본 오혜영과 지아라 두 사람 모두 흠칫하는 가운데 난 두 눈을 다시 감고 입을 열었다.
“이전에 설명했던 사고의 여파 중의 하나로 전 정상적으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그래서 평일 밤에도 항상 깨어있죠. 대신, 토요일과 일요일에 약 먹고 몰아서 자야한답니다. 슬슬 잘 시간이라... 양해해 주세요.”
“어... 응,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살짝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갤 끄덕이는 지아라, 반응이 좀 섭섭하네. 웬만하면 나도 끼고 싶지만 요즘 알바 시간이 2배로 늘어서 그런지 피곤함의 임계점이 빨리 찾아온다. 벌써부터 귓가에 환청(幻聽)-르피너스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면 말 다했지.
빨리 안자면 환각도 나올 거다.
그건... 너무 무서워...
“그럼 다음에 봬요.”
두 사람에게 손 인사한 뒤, 난 서서히 들려오는 웃음소리의 메아리를 외면하며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방문을 나섰다.
5.
“어땠냐?”
“으음, 이전의 새벽 오빠완 완전히 다름다.”
한새벽이 다급하게 동아리 밖으로 나간 뒤, 지아라의 질문에 오혜영은 팔짱을 낀 채로 고갤 절래절래 저었다.
“몸의 반응, 숨의 박자, 체취... 완전히 다른 사람에 가깝슴다. 그리고, 소리장도. 완벽한 비유임다. 웃음 속에 칼을 숨기는 듯한 느낌. 돌연변이 때문이라고 말은 했지만···”
“믿기 힘들지.”
“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이상함다? 진짜 ‘소리장도’라면 저렇게 대놓고 수상한 분위기를 풍기지 않을 것 같지 말임다?”
“그것도 맞는 말이야. 정말 이상한... 사람이 됐어.”
팔짱을 낀 오혜영의 대답에 지아라는 안경을 벗고 뻐근한 눈가를 주무르며 한새벽이 앉아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생글생글 웃던 소년의 섬뜩한 눈을 떠올리며 지아라는 살짝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심상치 않은 힘을 가지게 된 건 확실해. 이영, 그 까탈스런 년이 숨으면 아무도 못 찾았는데 단숨에 알아봤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마지막에 눈을 보여줄 때 빼곤 전부 눈을 감고 있었어. 근데, 아무런 지장도 없이 움직이는 것만 봐도 이상하지.”
“흐음.”
“게다가 그 짧은 시간에 <연금술> 계열 마법을 터득하다니···”
마법의 습득 난이도를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속도, 그에 오혜영은 어깨를 으쓱인다.
“걍 ‘어리석은 선물’을 받아서 그런 거지 않겠슴까? 실제로 르피너스의 상징물을 건드렸다고 하고.”
“뭐? ‘어리석은 선물’? 그건 또 뭐냐?”
“음? 아라는 그 동화 모름니까?”
“...그게 뭔데?”
“어, 오크의 구전 동화임다.”
“오크도 아닌데 내가 그걸 어케 아냐.”
끊임없이 투쟁해 나가야 하는 미궁, 그 안에서 문화란 것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어린 아이들의 교육을 위한 ‘구전 동화’는 조금이나마 있었다.
특히, 오크들은 수많은 구전 동화로 빠르게 자라나는 동족들에게 교훈과 지식을 주입했는데, 대부분 ‘세로쉬가 최고고 다른 신은 약하다.’, ‘어느 종족은 위험하다.’ 수준이지만 미궁에서 필수적인 지혜가 담겨있었다.
그런 지아라의 대꾸에 오혜영은 머릴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음. 대충 설명하자면 어느 작은 부족에서 최고 미녀를 걸고 남자들끼리 싸움이 벌어졌는데, 한 게으른 오크가 스스로 실력을 갈고 닦을 생각도, 세로... 아니, 오크 신에게 기도도 하지 않고 변덕스런 혼돈의 신 제단에서 기도했다고 함다. 자기가 이기게 해달라고.”
“근데?”
“그 기도를 들은 혼돈의 신은 웃으면서 오크가 바랐던 모든 것을 줬다고 함다. 황금 갑옷과 수정검 같은 절세의 무구들, 그리고 심지어 비물질적인 지식-전설적인 전사의 실력과 기량까지 줬담다. 그렇게 오크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모든 걸 얻었슴다.”
“...나도 르피너스 믿을까?”
”끝까지 들어야 함다. 그렇게 모든 경쟁자를 이기고 그 오크가 설레는 마음으로 천막에서 부족 최고의 미녀를 기다리고 있을 때, 르피너스는 오크를 고양이로 바꿔버렸담다. 갑자기 고양이로 변한 오크가 당황하고, 타이밍 좋게 들어온 여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천막에 있는 그 건방진 고양이를 잡아서 먹었다고 함다.”
“거 더럽게 살벌한 동화네.”
잠깐 벗었던 안경을 다시 끼며 말하는 지아라, 그 대답에 오혜영은 씨익 이를 드러내 웃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혼돈의 신을 믿지 말아야 한다는, 당장 선물을 주는 것 같지만 더 큰 걸 가져간다는 교훈을 주는 동화임다. 새벽 오빠도 비슷하지 않슴까?”
“흠...”
“그리고, 혼돈의 신에 관한 다른 동화도 있슴다. 한 오크 전사가 평생을 성실히 혼돈의 신을 섬기다 그 변덕스런 장난질에 결국 너무 화가 나서 배교했더니, 그 동안 자기 장난감으로 고생했다며 크고 단단한 냉동 생선과 전설적인 마법서를 그 면상에 던져버렸다는 내용이었슴다.”
“...종잡을 수 없네.”
지아라의 대꾸에 오혜영은 바로 그거라는 듯이 반색하며 고갤 끄덕였다.
“바로 그검다. 르피너스는 종잡을 수 없단 것이 르피너스에 관한 동화의 진짜 교훈임다. 참고로 그 전사는 르피너스가 준 커다란 냉동 생선을 양손검 삼아 휘두르는 마전사가 되었다고 함다.”
“...동화의 교훈이 좀 이상하지 않아?”
“아님다. 밖의 학자들 조사에 따르면 몇몇 리자드맨과 엘프의 기록에 커다란 냉동 생선을 휘두르는 오크 마전사에 관한 내용이 있는 걸 봐서 실화일 확률이 높다고 함다.”
“...”
“르피너스에 관한 동화는 대부분 그렇슴다. 걍, 이해하는 걸 포기하고 받아들이심쇼.”
포기하면 편하다는 표정인 오혜영의 모습에 지아라는 한숨을 푹 내뱉었다.
“하, 예전 새벽이는 좀 든든했는데... 그래, 양우영 그 새끼가 허가 했으니 능력 면에선 좋겠지! 걍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자고! 반귀 애들에게도 우리가 파악한 내용을 문자 보내주고.”
“알겠슴다. 그나저나 오늘 우리 둘만 남았으니 쐬주 어떠심까?”
“...준비했냐?”
“변하기 전에 새벽 오빠가 좋아하지 않았슴까? 당연히 준비 했슴다. 부대찌개랑 같이 냉장고에 박아 놨슴다.”
“콜, 지금 당장 먹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지아라, 이어서 일어난 오혜영과 함께 두 사람은 동아리실 부엌을 향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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