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58화 (58/350)

< 14화. 들키지만 않으면... >

1.

눈을 떠보니 낮선 천장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굉장히 당황하겠지만 난 이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서 이젠 그러려니 한다. 평소처럼 반사적으로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는데···

“으윽···!”

잠을 잔 것치곤 믿을 수 없을 만큼 머리가 지끈거렸다. 5일 동안 강제로 깨어있는 만큼, 잠을 잤다가 일어나면 굉장히 상쾌한 기분이건만 이번엔 다르네. 그 통증에 관자놀이를 붙잡은 채, 내가 왜 낮선 곳에 있는 지 생각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마빡 아가씨랑 소주 먹는 거였는데?

얼굴을 구기며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딱 보니 호텔방, 설마...!? 재빨리 옆을 보자 마빡 아가씨가 알몸으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은 라노벨 망상이고연.

옆의 탁자 위에 숙취 해소 음료와 깨진 분홍색 선글라스, 그리고 포스트잇이 붙어있는 게 보였다. 포스트잇에 적힌 마빡 아가씨의 필적, 읽어보니 술에 꽐라가 돼서 깨우려고 해도 안 일어나기에 근처의 호텔에 던져두고 간다는 내용이다.

“···소주 마시다가 필름 끊긴 거였군요오.”

상황 파악이 끝난 뒤, 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쓰게 웃었다. 대학교 새내기가 첫 MT가서 자기 주량 모르고 퍼 마시다가 꽐라가 돼서 뻗는 것처럼, 나도 내 몸의 주량을 모르고 그냥 냅다 처마시다가 쓰러진 것 같다.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저지르다니 어이가 없구만.

“끄응, 그나저나 이 몸 술버릇이 나쁜 건가요?”

뒤늦게 느껴지는 뺨의 통증에 난 볼따구를 쓰다듬으며 얼굴을 구겼다. 필름이 끊겼을 동안 도대체 뭔짓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뺨이 욱신거린다. 코도 코피가 흘렀던 것처럼 막혀있고. 게다가 선글라스를 또 깨먹었어? 원래 내 술버릇은 그냥 얌전히 자는 건데, 몸이 바뀌니 술버릇도 이상하게 든 것 같네.

“···크으.”

매슥거림에 곧바로 아가씨가 남겨놓은 한약 맛의 숙취 해소 음료를 따서 한 모금 들이켰다. 확실히, 느슥거림과 갈증이 좀 풀린다. 품 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2시다. 창밖을 보니 강남구인 것 같은데... 여기서 기숙사로 돌아가서 자는 건 너무 귀찮고 피곤한 일이다.

무엇보다, 그렇게 움직였다간 졸음이 완전히 깨고 다시 못 잘 거다.

다시 자는 건 싫지만 어쩔 수 없다. 반쯤 비몽사몽한 감각의 힘을 빌려 난 옷 품 안에서 휴대용 약통을 꺼냈다. 안에 든 것은 수면제, 저번에 북쪽의 보육원에서 예기치 않게 묶게 됐을 때를 기억해서 항상 챙겨두고 있지. 곧바로 꺼낸 수면제를 입에 털어 넣으려고 했지만···

“망할.”

수전증 걸린 것처럼 부들부들 떨리는 손, 무의식에서부터 두려움이 밀려온다. ···그냥 자지 않고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이미 금요일을 풀로 잤잖아? 게다가 지금도 어느 정도 잤고. 아, 그러고 보니 술 먹고 수면제 먹으면 간이 작살난다고도 하던데? 건강에도 안 좋아. 추가로 호텔에서 하룻밤을 더 자면 돈 많이 깨지잖아?

그 잠깐 동안, 잠을 안자도 될 이유 수십 가지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이 몸은 아직도 잠이 부족하단 걸.

지금 거부하고 도망쳐봤자 그것··· 아니, 환영과 환청을 마주할 시간을 앞당길 뿐이다. 크게 심호흡을 하면서 다닥다닥 떨리는 이빨을 악문 뒤, 재빨리 수면제를 입에 털어 넣고 절반 정도 남은 숙취 해소 음료를 들이켰다.

몸이 격렬하게 거부 반응을 보이며 위속의 내용물을 토해내려고 하지만 마력까지 운용해 억지로 다 잡았다.

“끄응.”

<관찰자의 눈>의 시점을 뱃속으로 이동시켜 계속 확인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흉문을 따라 알약이 소장으로 간 게 보인다. 이제 토해봤자 돌이킬 수 없어. 약효가 돌기 전에 난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에서 방광의 오줌을 뺐다. 그리고, 인터폰으로 호텔 카운터에 연락해 하루 더 연장하겠다고 한 뒤에 침대에 대자로 누웠다.

“흐, 흐히히하하핳! 흐흐히하힣!”

서서히 감기는 눈, 그와 함께 입에서 흘러나오는 병적인 웃음. 침대에 대자로 드러누운 채 난 알콜과 수면제의 힘을 빌려 다시 피할 수 없는 심연의 아래로 떨어졌다.

2.

호텔에서 일요일을 꼬박 수면으로 보낸 뒤, 난 월요일 새벽에 송파구로 돌아와서 주섬주섬 생도복으로 갈아입고 미르에 출근했다.

“···다들 어느 정도 알고 있겠지만 영체(靈體)라는 것은 오직 ‘마력 각성자’들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개념입니다.”

월요일 편입반의 오전 시간 필수 과목은 ‘마력 각성자 연구 심화 과정, 이론 및 경향성’. 대학교 강의에서나 나올 법한 강의 이름이고, 실제로 그 내용도 고등학교 나이대의 애들에게는 참 난해한 주제다. 하지만, 이 세상은 그런 걸 꾸역꾸역 가르친다. 어쩌겠나, 걍 배워야지.

대부분의 편입반 애들이 멍하니 중년의 초청 강사를 바라보는 가운데, 난 <게임 시스템>의 <메모장>기능을 켜고 강의를 필기해나갔다.

“이 영체는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 ‘스스로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청사진’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체의 이미지는 현실의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게 되지요. 여러분들의 외모만 봐도 알 수 있어요. 마력 각성 이후로 천천히 바뀌어가기 시작하니까요. 하지만, 사실 그런 변화는 사소한 것에 속합니다.”

초청 강사가 리모컨을 누르자 교실 앞에 떠오른 스크린의 장면이 넘어간다. 화면에 떠오른 것은 붉은 형광색의 액체가 담긴 유리병-포션이었다. 화면을 계속 넘기자 포션을 사용하는 사진들이 나온다. 그걸 보여주면서 강사는 지루한 설명을 이어나간다.

“이러한 상처 회복 포션의 예를 들어보죠. ‘치료 물약을 사용하면 몸에 난 상처를 치유한다.’, 보통 이렇게들만 알고 있지만 사실 포션의 효과는 마력 각성자와 일반인 둘 사이에 ‘명백한 차이’가 있답니다. 작용 기전이 다르죠. 자세한 내용은 책 66p를 보세요.”

와, 그나저나 저 아지매 장난 아니네. 꽥꽥 소리 지르는 것 같은 시끄러운 목청인데도 어찌나 지루한지 나도 모르게 눈꺼풀이 감기려고 한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눈꺼풀이 감기는 느낌이야.

광역으로 수면 마법을 날리는 건가?

초청 강사라서 마력 사용자도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잠드는 것에 병적인 공포가 있는 나도 이럴 진데 다른 애들이야 뻔하지.

어찌됐든 난 이를 악물고 책을 넘기며 최선을 다해 강의에 집중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포션 치료는 한계가 명확합니다. 물론, 굉장히 빠른 속도로 치료 합니다만 그런 빠른 세포 분열로 인한 텔로미어의 감소 그리고 암 세포의 발생의 위협이 나타나죠. 게다가 이빨 같은 법랑질도 복구하지 못하며, 뼈가 부러진 곳에 잘못 사용했다간 이상하게 붙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력 각성자는? 다릅니다.”

다시 스크린이 넘어간다. 앞서와 똑같이 상처를 치료하는 장면들, 하지만 미묘하게 그 종류가 다르다. 이전의 장면들이 화상 같은 상처에 포션을 사용하는 것이 주를 이뤘다면 이번에 나오는 사진들은 좀 더 심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소용없는 건 똑같지만 빠른 시간 내에 포션으로 치료하면 일반인보다 월등히 뛰어난 효과를 보입니다. 이빨이 부러져도 붙습니다. 뼈가 부러져도 적당히 맞추고 부으면 치료됩니다. 뼈가 잘못 붙을 수도 있지만 통계적으로 일반인에 비해 낮아요. 왜냐고요?”

스스로 강의에 취한 듯, 강사는 꾸벅꾸벅 조는 아이들에겐 시선도 주지 않은 채로 화면을 보며 말을 이어나간다.

“마력 각성자에게 치료 포션의 효과는 단순히 ‘상처를 치료’하는 개념이 아니라, ‘영체의 형태로 현실의 육체를 수복’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사진이 넘어간다. 나온 것은 얼굴이 완전히 작살난 한 남자의 CCTV사진, 눈알은 터지지 않았지만 코와 광대가 주저앉았고 아랫턱이 완전히 짓뭉개져 있었다. 그 옆에는 다른 CCTV에 찍힌 듯한 정상적인 얼굴 모습이 있었다.

“4년 전, 신생 멕시코의 마약 카르텔인 코왈테르 카르텔. 그 두목인 ‘코왈테르’는 마력 각성자로 미국에서 활동했는데, 군의 포위망이 좁혀나가자 성형수술을 하고 도망치려 했죠. 하지만, 오크 출신의 미 해병대의 민감한 후각을 생각하지 못했고 붙잡혔답니다. 이렇게 얼굴이 쥐포가 되어서요. 그리고 포션으로 조치하는 순간-”

사진이 넘어가고 동영상이 나온다. 대충 손으로 부서진 턱뼈의 위치를 바로 잡고 그 상처에 포션을 들이 붙는 영상, 그 아래에 x60이라는 것을 보면 60배속으로 빠르게 재생되는 것 같았는데 부서진 얼굴은 점점 그 형태를 잡아가더니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 나타난다.

“그는 성형수술 이전으로 돌아갔죠. 일반인들의 상처 치료 포션의 효과와는 다르게...”

몸을 돌려 칠판이 아닌 생도들을 보는 강사, 광역 수면 마법에 전멸한 생도들의 모습에 그는 미간을 찡그리더니 칠판을 쾅! 쾅! 내리쳤다. 애들이 화들짝 놀라며 앞을 바라보고, 강사는 불퉁한 표정으로 잠시 숨을 고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력 각성자와 일반인 간의 분쟁 시 불리한 법적 조항들은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각성자는 극심한 부상을 입어도 최대한 빨리 포션으로 조치하면 후유증이 있을 순 있어도 어느 정도 털고 일어날 수 있어요. 그러니 일단, 일반인과의 분쟁이 일어날 시엔 위급하지 않는 이상 참아야 합니다. 알겠습니까?”

일방적으로 으름장을 하듯이 말하는 강사, 내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왠지 심술로 짜증내는 것 같았다. 마력 각성자에 대한 시기와 부러움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하긴, 마력 각성자는 일반인에 비해 수명도, 노화도, 외모도 모든 면에서 뛰어나니 부러워할 만도 하지.

어찌됐든 애들이 힘없이 ‘네.’라고 대답하자 그녀는 가볍게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고 아직도 반 시체 상태인 생도들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이렇듯 마력 각성자는 이렇듯 영체가 현실을 왜곡시켜버린답니다. 구조적으로 말도 안 되는 각성자의 퍼포먼스도 그러한 이유에서죠. 이런 영체에 대해 연구가 진행되고 있답니다. 그것들 중 하나가 바로 ‘마법 장비’가 있죠. 이게 오늘 강의의 주 초점이에요.”

리모컨을 누르자 창과 칼 같은 냉병기들이 나타난다. 실전성이 떨어질 것 같은 화려한 외형, 하지만 저것들은 전부 ‘마법 장비’-유물(Artifact) 취급 받는 국보 수준의 것들이다. 인터넷 상에서도 돌아다닐 정도로 유명한 지라 나도 저 이름들을 안다.

착용한 자에게 강력한 활력과 젊음을 주는 강철 장갑 ‘불굴의 의지’

전차의 전면부 장갑판을 뚫어버리는 마력 화살을 만들어내는 장궁 ‘용의 파멸’

공간을 일그러트려서 최대 1km 밖까지 타격할 수 있다는 삼지창 ‘현실의 균열’

남자애의 로망을 자극하는 동시에 VS 놀이로 삼기 딱 좋은 것들. 하지만, 저런 것들로도 초청 강사의 지루한 강의를 바꾸지는 못했다.

“마력 각성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마력’이라는 기적의 효과를 받을 수 있는 장비. 힘이 더 강해지거나, 지능이 더 높아지거나, 건강이 더 좋아지거나... 하지만, 마법 장비가 영체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총량은 한계가 있어요. 착용할수록 영체에 부담이 가고, 무조건 많이 마법 장비를 착용한다고 해도 적용되지 않는다는 거죠.”

여전히 아이들은 동태눈으로 스크린을 보는 가운데, 강사는 신경 쓰지 않고 스크린을 넘긴다. 커다란 인체 모형과 그 팔, 가슴, 다리의 부위에 따른 각종 지표와 계산식들, 다행히 수식 자체는 고등학교 과학 수업에서 나오는 계산 공식과 비슷했다.

“이종족들의 경험으론 이런 ‘마법 장비’는 여러 부위에 따라 착용함으로서 그 영체에 가해지는 부담을 최대한 줄일 수 있다고 합니다. 실체로 연구소에서 측정한 결과 또한 비슷하게 나왔고요. 지금 나오는 이것은 작년 미국 영체 연구소에서 발표한 ‘영체의 부위에 따른 마력 한계치’랍니다. 자, 일단 영체의 마력 한계치라는 것은...”

처음 듣는 ‘마력 한계치’라는 개념을 설명해주는 초청강사. 한 마디로 마법 장비는 착용 부위에 따른 능력치 한계가 있으며, 인간과 아인종은 ‘머리, 목, 가슴, 등, 팔, 손가락 2개, 부츠, 한손에 장비 하나씩’ 최대 마법 장비를 10개를 착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손에 쥐는 장비에 대해선 두 손으로 쥐는 것과 한 손으로 쥐는 것에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양손으로 쥘 경우, 한손으로 쥐는 것에 비해 2배의 마력 한계치를 가지게 됩니다. 그에 따라서 운용 또한 달라지는데, 비유 하자면...”

그냥 간단히 말 하나로 끝날 걸, 수식이니 계산이니해서 배워야하는 지 모르겠네. 하지만, 학교라는 교도소에 교복이란 죄수복을 입는 학생답게 닥치고 우겨넣어야지. 그렇게 정신을 놓은 채, 무지성으로 <메모장>에 필기를 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흘러...

-♬♫♪~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오늘은 이만 끝내죠. 그리고, 다음 시간에는 2장 챕터 전체를 쪽지 시험을 보도록 할 테니까 복습을 해오도록 하세요.”

그렇게 오전 시간표 전체-4시간 동안 이어진 수면 마법 폭격이 끝난 뒤, 초청 강사는 책을 챙겨서 총총 나간다. 그제서야 애들은 이제야 해방됐다는 듯이 그대로 얼굴을 책에 처박았고. 점심시간인데 곧바로 밥 먹으러 밖으로 나갈 생각도 못하는 걸 보면 말 다했지.

쓰읍, 도대체 어떤 새끼가 이 필수과목 시간표를 짰는지 궁금해지네.

도중에 쉬는 시간 딱 한 번, 4시간 동안 스트레이트로 저딴 수업을 듣게 하다니... 막장 대학교 강의도 이러진 않는데 말이야. 칼찌 마렵네 진짜. 어찌됐든 난 그나마 타격이 적었기에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가방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 옥상으로 향했다.

“하아.”

아직까지 아무도 없는 옥상의 벤치에 앉은 후, 난 가방에서 아침에 사온 크림빵과 우유를 꺼내 한 입 베어 물고 한숨을 내뱉었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이게 뭔 궁상이냐...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일요일에 잤던 호텔이 생각보다 피눈물 나게 비싸서 당분간 긴축 재정이야. 그나마 몸이 워낙 작은 지라 이것만 먹어도 배가 차는 게 그나마 다행이지.

“...오늘도 알바 가서 싸장님에게 좀 빌붙어야겠네요.”

정신 병원에 감금됐을 당시에 습관이 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빵을 조금씩 먹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철문이 열리는 ‘덜컹!’ 소리가 들린다. 고갤 돌리지 않고 <관찰자의 눈>으로 확인하니 마빡 아가씨다.

평소엔 자기 패거리들 끌고 식사하러가는 분이 여긴 왜 왔을까?

마빡 아가씨는 내 뒷모습을 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들으라는 것처럼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를 내며 다가온다. 그 제스쳐에 내가 고갤 돌려 바라보자, 그녀는 팔짱을 낀 채로 특유의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는다.

“점심 안 먹고 여기서 뭐하고 있어요?”

“음, 이게 점심입니다만.”

“어라, 그게요?”

재벌 아가씨의 놀랍다는 말투와 표정, 빈곤한 임금 노동자인 내 맘이 퐈악~! 상해부렀스요. 어른이라서 넘어갔지 마음이 여리여리한 진짜 어린애였으면 민감했을 거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 고갤 돌려 다시 빵과 우유를 섭취하는데-,

“삐졌어요?”

마빡 아가씨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니, 이거 놀리는 거지? 그에 난 단호하게 어른답게 대처했다.

“아~뇨, 제가 왜 삐졌겠어요? 전~혀~ 안 삐졌답니다아~”

“...그럼 왜 어제 톡을 보냈는데 하루 종일 씹어요?”

그래도 맘이 퐈악~ 상해버렸던 티를 좀 냈는데, 이어지는 말을 들어보니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어제 내게 톡을 보냈다고? 그리고, 내가 하루종일 그걸 씹었고? 그래,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 그 질문에 난 피식 웃으며 답했다.

“아, 그건 제가 어제 하루를 꼬박 자서 그래요.”

“하루를 꼬박 자서?”

“전 돌연변이 피해로 정상적으로 잠을 못 잔답니다. 약을 먹고 억지로 자야해요. 제게 있어선 잠을 자는 게 그리 유쾌한 건 아닌지라 한 번에 몰아서 자요. 이번 토요일은 시험 때문에 깨어있었지만, 원래 토, 일요일은 아예 비번이에요. 톡해도 전 못 받아요.”

“...아.”

“그래도 오늘 아침에 톡을 봤으면 답장했을 텐데, 토요일과 일요일을 꼬박 호텔에서 내리 자면서 스마트폰을 충전하지 못했어요. 스마트폰은 기숙사 충전기에 꼽고 왔답니다.”

“그렇군요.”

내 대답을 다 듣고 고갤 끄덕이는 마빡 아가씨, 왠지 모르겠지만 살짝 다행이라는 눈치다. 하하, 카톡 안 오늘 걸 걱정해준 건가? 이거 고맙네. 피식 웃으며 난 다시 빵을 베어 물었다.

“그나저나 제가 토요일에 소주 몇 잔에 골아 떨어졌죠?”

“...네? 그건 왜 물어보는 거죠?

“대충 소주 한 병 마신 것까진 기억나는데. 그 이후의 일은 기억나지 않거든요. 제 느낌으론 고작 한 병으로 곯아떨어질 리가 없는데 말이에요. 돌연변이가 발생한 이후로 처음 마시는 거였는데, 생각보다 제 주량이 많이 약해졌나 봐요.”

“흐응~”

이어진 내 질문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비음과 함께 씨익 웃는 아가씨, 딱 봐도 묘하게 좋아하는 느낌이다. 뭐지? 미소가 진해지는 것을 보면 좀 이상한데? 어찌되었든 간에 마빡 아가씨는 곧 입을 열었다.

“대충 각자 2병까지 마셨죠.”

“흠, 엄청 약하네요. 다음부터 조절해야겠어요. ...그나저나 제가 취해서 뭔 짓 벌어진 않았나요?”

“음, 좀 고약한 짓을 하긴 했어요.”

“...그 어떤 짓을 했죠?”

대답해주지 않고 능글맞게 웃는 아가씨, 그에 난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재벌 3세에게 뭔 짓을 하진 않았겠지? 제발 그랬기를 빈다. 잠시 능글맞게 날 골리는 것처럼 간을 보던 마빡 아가씨는 이내 천천히 고갤 젓는다.

“음, 그건 비밀.”

“...”

“하, 그냥 별 일 없었어요! 아, 그리고 아싸단에 절 소개시켜주기로 했는데 기억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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