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61화 (61/350)

< 막간. 흐르는 핏빛 물결 >

1.

미궁이라는 전대미문의 재앙이 나타나면서 전 세계 국가들 간의 관계는 극적으로 변했다.

미궁 사태 이전까지 국가가 추구하던 것이 번영과 풍요였다면 이제는 ‘생존’이었다. 그리고, 생존에는 반드시 ‘식량’이 필요하다. 하지만, 국가 간 자원의 이동 및 교환이 활발해지고 상호의존성이 심화된 현 시대에서 식량의 완전한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나라는 의외로 드물었다.

1차 식량산업에 치중하던 국가들은 식량 비축분을 더 쌓기 위해 수출량을 조정했고, 당연히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미궁 사태 발발 1년 뒤에 뉴욕의 지하에서 튀어나온 3개의 악몽-룬수호자들에 의해 미 동부가 초토화 되고 공포가 더욱 심화된 이후에는 더더욱. 식량 생산을 위한 땅을 얻기 위해 크고 작은 국지전이 발생했으며 국가 간 어업 경계선은 휴지조각이 됐다.

대한민국의 서쪽 바다, 황해(黃海) 또한 마찬가지였다.

미궁 사태가 발생하기 전부터 심심찮게 국가 경계선을 넘어와 물고기를 쓸어가던 중국의 어업 선단은 더 난폭해졌다. 이전까진 그런 자국 어부들의 불법 행위를 못 본 척하던 중국 정부는 이젠 한 술 더 떠서 대놓고 ‘우리 어민들을 건드리면 좋지 못할 거다.’라며 한국 정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국 정부도 항의 했지만...

미국이 룬 수호자들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어 주저앉은 뒤에 ‘세계 제 1의 패권국’이 된 중국의 독주를 막을 수 있는 국가는 없었다.

중국 어부들은 한국 해경이 단속해도 도망치기는커녕 오히려 해경 고속단정을 일부러 들이받아 침몰시켰고, 해경이 그에 맞서 강경하게 나가면 총과 RPG-7의 모조품 대전차 로켓을 쏴댔다. 아예 군 차원에서 대응하려고도 했지만 중국이 항공모함을 대놓고 움직이는 걸 보고 한국 정부는 사실상 황해를 포기했다.

그렇게 미궁이 부상한 지도 어느덧 16년이 흘렀다.

미궁의 이종족들과 교류가 이뤄지면서 사람들은 미국에서 튀어나왔던 ‘룬 수호자’ 같은 재앙은 극히 예외가 된 것임을 알았고, 각국 또한 어느 정도 식량 자립이 이뤄지며 사람들 사이의 절박한 분위기는 많이 사라졌다. 덩달아 국가 간의 극심한 생존 경쟁 또한 많이 수그러졌다.

강경 일변도로 나왔던 중국 또한 주변국들의 국제적인 공조 압박에 슬그머니 ‘존중’을 시작했다.

하지만, 완전히 미궁 이전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이제 한국의 서해 어업에 대해 ‘관대하게’ 봐주는 중국이지만, 한 번 괴멸했던 어업이 한 순간에 복원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대한민국의 서해 영해는 여전히 중국 어선들이 넘어와서 성업 중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무전! 무전을 보내!”

“그··· 전파가 잘 안 잡힙니다!”

“그럼 옆에 있는 놈들에게 보내라고 말해봐! 새꺄!”

질척질척한 피를 연상케 하는 질감의 안개

저인망(底引網) 싹쓸이 어업을 위해 서로 바짝 붙어서 훑고 있던 20척의 어선들이 갑자기 나타난 핏빛 안개에 휘말렸다. 필시 ‘마력’과 연관된 비정상적인 현상, 선장들은 필사적으로 그 지역을 벗어나기 위해 엔진을 켜고 움직였지만 그들은 그 불길한 붉은 안개 밖으로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쿠웅!

더듬이를 자른 개미처럼 자기도 모르게 배의 타륜을 꺾어가며 서로 부딪쳐 좁은 구역에 오밀조밀 모여들었다. 하지만, 정작 어부들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

“이 미친놈아!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거야!”

“너야 말로 왜 직진으로 가는 사람을 들이박아?! 선단장님 무전 못 들었냐? 흩어지라고!”

서로에게 화를 내며 이 비정상적인 상황에 벌벌 떨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으로부터 군사 훈련까지 받은, 외국의 해경들과도 맞부딪친 전적이 있는 용감한 해상민병(생업에 종사하다 전시(戰時)에 군으로 편입되는 18~35세 중국 어민들)들. 하지만, 이런 초자연적인 일에까지 대담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20척에 있는 180여명이 그 핏빛 거미줄에 걸려들었고, 숨죽이고 있던 거미는 본색을 드러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이 미친 깜둥이 새끼가!?”

한 배에 탑등하고 있던 작은 체구의 동남아 선원, 호주머니에서 조잡해 보이는 흑요석 단검을 꺼낸 그는 기습적의 옆의 중국인 어부의 목에 찌르고 뽑았다.

정확히 대동맥을 가른 듯, 목에서 피분수를 뿜어지는 피분수.

목을 찔린 중국인 어부가 그 상처를 붙잡고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엎어지는 가운데, 안 그래도 정체불명의 상황에 허둥지둥하던 같은 배의 어부들은 그 모습에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불과 수 초 만에 정신을 차린 어부들은 곧바로 배 한 쪽으로 달려갔다. 외노자들은 출입이 허락 되지 않는 함교, 그 안에 들어간 중국 어부들은 곧 흉흉한 눈을 빛내며 밖으로 나왔다. 그런 그들의 손에는 어선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힘든 흉악한 것들이 들려있었다.

칼, 오함마, 낫, 그리고 인민해방군 제식 무기인 81식 자동소총...

평범한 어선에선 있을 수 없는 것들, 하지만 식량 안보를 위해 각국 영해를 누비는 ‘해상민병’들에겐 꼭 필요한 것이었다. 덤으로 돈을 벌기 위해 ‘위대한 조국’까지 와서 배에 탄 오랑캐놈들이 속았다며 반항할 때에도 필요하고.

“뭐여, 막내야. 넌 왜 총 들고 있냐?”

“어? 총을 안 씁니까?”

“뭔 총이여. 함부로 총 쏘면 배에 구멍 뚫린다. 그리고, 지금 총소리 나면 다른 배에 있는 애들도 신경 곤두 서. ···애미, 안 그래도 좆같은 상황인데 오랑캐까지 날뛰네.”

총을 들고 나온 막내에게 핀잔을 주는 낫을 든 어부, 그는 흉흉한 눈을 빛내며 반란을 일으킨 외노자에게 달려들었다. 동료가 죽었지만 전혀 겁먹은 기색이 없는 얼굴, 어부로 지내면서 그는 살인도 몇 번 해봤고 무엇보다 저 비리비리한 오랑캐보다 훨씬 더 체격이 좋았다.

기습으로 동료를 죽였지만 정면에선 절대 안 될 거라고 그는 생각했지만-.

-사각.

외노자는 절묘하게 낫을 피하는 것과 함께 왼손을 뻗어 낫을 쥔 어부의 손목을 낚아채 잡아당긴다.

동시에 중지 손가락만한 흑요석 단검의 날을 달려드는 어부의 목덜미에 꽂고 뽑았다. 순식간이 이뤄진 일련의 행위가 끝난 뒤, 낫을 든 어부는 똑같이 목에서 피분수를 뿜어내며 휘청거리다 목의 상처를 붙잡고 쓰러진다.

“이 개 같은···!”

-드르르르륵!

그 모습에 막내라고 불렸던 어부가 앞으로 나와 총을 쏴 갈겼다. 혹여 총알에 배에 손상이 가건 말건 신경 쓰지 않는 모습, 연발로 놓고 쏜 그 총알 세례가 까무잡잡한 남자를 덮쳤다. 당연히 피를 흩뿌리며 쓰러져야 하건만-.

“...!?”

남자는 쓰러지지 않았다. 겉에 쌓인 포장지가 찢겨나가는 것처럼 가무잡잡한 갈색 피부가 흩날리며 그 안에서 하얀 피부가 드러난다. 순식간에 30발 탄창을 다 갈긴 뒤에 나타난 것은 살짝 왜소했던 동남아인이 아니라-.

“크흐흐.”

손을 들어 팔뚝으로 눈가를 가린, 온갖 상처로 몸이 뒤덮인 근육질의 백인 노인이었다.

총알 세례가 끝나자 노인은 눈가를 가린 손을 내리며 웃는다. 피 흘리는 잇몸이 보일 정도로 환한 웃음, 그 모습을 본 어부들은 어떤 ‘압박감’을 느꼈다.

단순한 분위기나 느낌이 아닌, 실제로 상대를 짓누르는 어떤 무형의 것을.

전투에 노련한 중국인 어부들이었지만 그 이질적인 압박엔 곧바로 움직이질 못했다. 그리고, 건장한 근육질의 백인 노인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환한 웃음과 함께 그는 곧바로 어부들에게 달려들었다.

“주.. 죽여! 죽여! 7번! 7번 어선에서 적 출현! 적 출현!”

간신히 정신을 차린 칼든 어부가 소리치며 있는 힘껏 녹슨 중식도를 휘두르고, 노인은 순식간에 멈추며 그 궤적을 피하면서 다시 진입해 이전처럼 목에 단검을 꽂아 넣으려고 한다. 어부 하나만 상대하는 것이었다면 그걸로 끝이었겠지만 이전과는 달리 어부는 혼자가 아니었다.

“흐읍!”

칼을 든 어부의 뒤편, 오함마를 들고 있던 어부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칼을 한 번 휘둘렀던 동료의 옆에서 튀어나와 있는 힘껏 노인의 관자놀이를 향해 오함마를 휘두른다. 그물질하며 단련된 양 팔의 근육으로 아주 정확하게 해머를 노인의 옆통수에 꽂아 넣었지만-.

-투웅!

때린 순간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그의 경험에 의하면 사람의 머리를 오함마로 찍으면 손에서 ‘살짝 도자기를 깨는 듯한 감각’이 느껴져야 했다. 하지만, 노인의 머리통을 때리는 때의 느낌은... 꼭 커다란 고무 타이어를 내리친 것 같았다.

그런 어부의 느낌이 맞다는 걸 증명하듯, 휘두른 오함마는 반대편으로 튕겨져 나왔고 반면에 노인은 멈추질 않았다.

“..커!?”

머리통을 맞았음에도 기어코 단검으로 중식도를 쥔 어부의 목 대동맥을 끊어버리는 노인, 찌르자마자 순식간에 다시 단검을 뽑으면서 그는 일반인이 인지하지 못할 속도로 손가락을 놀려 오함마를 휘둘렀던 어부를 향해 날렸다.

“...!”

어부의 목에 정확하게 날아가 꽂히는 흑요석 단검. 두 눈을 부릅뜬 채, 목에 박힌 그 단검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바라보던 어부를 향해 노인은 가볍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 순간, 어부의 목에 박힌 단검은 빨려 들어가듯이 뽑혀 나와 던졌던 노인의 손 안에 ‘착!’ 되돌아온다.

“하하하!”

중식도를 든 어부, 해머를 휘두르던 어부. 두 사람의 목에서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피를 맞으며 노인은 경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동시에 피를 맞은 부위를 중심으로 노인의 상처들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가... 각성자! 각성자다!”

그 비정상적인 상황에 어부들은 상대가 정체불명의 마력 사용자라는 것을, 그리고 주위를 뒤덮은 핏덩이 같은 붉은 안개가 벌어진 것의 ‘원인’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신할 수 있었다. 평범한 어부들이었다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저주하며 공포에 질린 채 죽겠지만-

“죽여!”

그들은 평범한 어부가 아니다.

이 돌발상황이 발생한 순간부터 어부들은 각자 배에 있는 무기들을 꺼내 단단히 무장하고 있었다.

-드르르르륵!

“아악! 미친놈들아! 사선(射線)! 사선!”

근처의 배에서 노인을 향해 쏟아지는 소총 사격, 총알이 엇갈리면서 노인과 같은 배에 타고 있는 어부는 물론이고 근처 배의 어부 몇 명이 맞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런 피해를 각오한 총탄 세례도 노인의 몸뚱이도 꿰뚫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만들어진 엉성한 화망(火網)의 충격은 잠시나마 그를 붙잡아 둘 수 있었고-.

“아, 안 돼! 아직 난 도망 못-”

그 사이, 근처의 배의 어부들이 ‘69식 화전통’을 들고 나왔다.

RPG-7의 중국식 복제품, 대전차 로켓을 겨누는 동료의 모습을 보곤 노인과 같은 배에 타고 있는 어부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애원했지만 로켓을 들고 나온 어부들은 굳은 얼굴로 노인이 있는 배의 바닥을 조준했다.

너무 가까워서 쏜 그들도 폭발에 휘말릴 수 있었지만,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투-ㅇ!

-투웅!

-콰아아아-앙!

연이서 쏘아진 2발의 대전차 로켓, 이어진 폭발의 굉음. 폭발에 가까이 있던 어부들은 그 파편에 즉사했고, 옆의 배에 있던 이들은 후폭풍에 쓰러진 채 눈과 귀에서 피를 쏟아내며 신음했다. 현대화기에 조준한 이상 인간의 몸뚱이 따윈 반응 못하고 터져나가야 정상이건만-,

“카.. 캬하하핰!”

노인은 로켓이 발사된 순간에 놀라운 속도로 도약하여 폭발의 충격파를 등에 받아내며 옆으로 날아갔다. 그리곤 기괴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너부러진 어부들을 상대로 다시 살육을 이어나갔다.

-타다다당!

흑요석 단검 대신에 근처에 떨어진 날붙이를 주워 근처 어부의 목을 베고, 다른 손으론 소총을 집어 들어 쏴 갈기는 노인. 아직 멀쩡한 다른 배에서 다시 대전차 로켓과 소총을 쏴 갈겼지만 노인은 광견병에 걸린 미친개처럼 빠르게 배 사이를 뛰어다녔다.

“쏴! 모조리 쏴 갈겨! 아니! 아예 오지 못하게 자침시켜!”

너무나도 빠른 그 움직임에 로켓이 제 역할을 못하자 어부들은 목표를 바꿨다. 징검다리가 될 만한 배들을 침몰 시켜서 아예 오지 못하게 하는 것, 그러나 기괴한 핏빛으로 물든 바다에 떠 있는 배들은 가라앉질 않았다.

그렇게 어부들은 노인을 막기 위해 발작적으로 총과 화기를 쏴대다가-.

-딸깍! 딸깍!

“으... 으으으! 총알! 총알 있는 배 없나!”

탄을 다 써버렸다.

총알이 없는 총은 그저 고철 더미일 뿐, 최소한의 저항까지 불가능해지자 어부들은 공포에 질린 채 무작정 배 밖으로 몸을 던지려고 했다. 붉은 안개가 휩싸인 핏빛 바닷물은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지만 일단 저 괴물에게 찢겨지는 것보단 나았다.

하지만, 그런 결심에도 어부들은 바다에 뛰어들지 못했다.

배 밖으로 뛰어들려고 하던 이들은 몇 발자국 못가서 발걸음이 느려졌다. 그리곤, ‘배 밖으로 뛰어내린다.’는 생각 자체가 사라진 것 마냥 허둥지둥 거리다가 배 안을 뱅뱅 돌거나 혹은 조금이라도 학살자에게서 멀리 떨어지기 위해 다른 배로 허겁지겁 뛰어넘어갔다.

그렇게 통속에 갇힌 햄스터 마냥 배 위를 빙빙 돌다가 하나씩 사냥 당했고, 채 30분도 되지 않아서 어부들은 단 한 명을 제외하곤 전부 시체가 되었다.

“흠~ 흠흠~”

마지막 남은 한 명의 생존자를 향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가가는 노인.

다가오는 그 도살자를 향해 마지막 남은 희생양-어선들을 이끌던 선단장은 뒷걸음질 치며 덜덜 떨다가 무릎을 꿇고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사... 살려주시오! 내... 내 모든 것을 주겠소! 내 처남이 우한 샤오쓰향의 가..간부요! 그것 말고도 내 재산이...”

“모든 것이라... 그래, 마침 자네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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