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범죄는 아니겠죠? >
1.
대략 한 달 전, 초대 받아서 방문한 서예린의 집에서 난 우연찮게 마법서를 발견하고 거기에 적힌 마법을 습득했다.
<게임 시스템>의 보조를 통해 한 순간에 마법서의 내용을 익히면서, 나는 그 ‘일련의 과정’이 본질적으로 내가 여기에 떨어지기 전에 꿨던 꿈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꿈에서 나는 뭐든지 볼 수 있었다.
사건 자체에 영향을 끼칠 순 없었지만, 과거로 갈 수도 있었고 마음먹으면 미래로 가는 것도 가능했다. 그 능력을 사용해서 나는 마법서와 연관된 과거를 보고 그 본질을 분석하고 있었다.
물체의 과거를 볼 수 있는 능력
난 새롭게 깨달은 그 능력에 대해 탐구했고 <관찰자의 눈>을 처음 사용했을 때의 경험을 살려 자연스럽게 꿈에서처럼 과거를 보기를 소망해 봤다. 그 결과, 좀 피곤하긴 했지만 <게임 시스템>의 보조 없이 특정 물품과 관련된 과거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걸 <과거시>라고 이름 붙였다.
참고로 미래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한 번 시도해봤는데 안 됐다. 정확히 말하면 불가능한 건 아닌데, 난이도가 ‘인간의 능력으론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고정된 과거완 달리 ‘현실에 영향을 끼치는 나’로 인해 바뀌는 미래들
아무 생각 없이 내가 숨을 내쉬는 것만으로도 미래가 요동치며 무한한 분기로 뻗어나갔다. 시도하는 순간, 뇌가 익는 것 같은 감각을 느끼며 기절했지.
뭐, 어찌됐든 간에 이 <과거시>는 내 꿈과 비슷한 특징을 지녔다.
단순히 시각적인 정보로만 파악하는 게 아니라 내가 꿨던 꿈들처럼 소리도 들리며, 누군가 말하는 언어는 설령 내가 모르는 종류의 것이라고 해도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완전히 똑같은 것은 아니다.
<과거시>는 꿈과는 다르게 정신력의 소모가 있다. 보려는 과거가 오래되었을수록, 그리고 그 과거를 더 자세하게 볼수록 더 많은 정신력이 소모된다. 그래, 굉장히 사기적인 능력이긴 하다만 자세히 따져보면 꿈에서 과거 시점을 보는 것의 열화판이다.
근데, 컨닝하는데 써보니까 이만한 능력이 또 없더라.
“~~♬”
서예린에게 시험지를 미리 빼돌려 주기로 약조한 지 6일이 지난 월요일 아침, 일찍이 교실에 도착한 난 책상에 앉은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게임 시스템>의 메모장에 적힌 빼곡히 적힌 문제들을 하나씩 느긋하게 풀어나갔다.
전부 이번 중간고사 시험 문제들
교수가 항상 들고 다니는 소지품을 대상으로 <과거시>를 사용한다. 그 물건과 관련된 과거를 거슬러 가는 중에 교수가 시험 문제지를 작성하거나 보는 순간이 나오고, 그걸 고대로 <메모장>에 사진처럼 찍어내면 끝!
게다가 시험 문제가 나오는 순간은 현 시점에 얼마 안 되지 않는 과거였기에 부담 또한 적었다!
부담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여러 번 사용해도 기절하지 않았다. <과거시>를 사용해서 문제를 빼돌리는 게 쉬울 거라고 생각은 했다만, 해보니 생각보다도 훨씬 더 쉬웠지. 말 그대로 부정행위에 최적화된 능력...!
살짝 양심이 찔렸지만 그래도 앞으로 잡스런 공부는 안 해도 된다 생각하니 양심도 ‘아ㅋㅋ 이걸 어케 참음ㅋ’하고 찬성하더라.
“이젠 이런 지겨운 수업들과는 안녕이에요.”
지금까지 수집한 중간고사 시험지를 다 푼 뒤, 난 쫙 기지개를 펴며 활짝 웃었다.
미르의 수업들은 누군가에겐 대단히 쓸모 있겠지만, 이미 반쯤 미래가 보장된 내겐 쓸모가 없다. 그래도 점수관리 한다고 꼬박꼬박 밤에 공부했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지! 밤에 걍 게임이나 웹서핑, 유튜브하고 놀아도 돼~ 아, 너무 달아!
-드르륵.
“안녕하세요. 다들 잘 지냈나요.”
들뜬 마음에 스마트폰을 켜고 원래 세상에서 내가 즐겼했던 게임-16년 전에 나온 고전 게임들을 찾아보고 있는데, 교실문이 열리며 강사가 들어온다. 월요일 오전에 편성된 ‘마력 각성자 연구 심화 과정 이론 및 경향성’ 수업의 강사, 월요일 딱 한 차례 밖에 없기에 아직 시험 문제를 빼돌리지 못한 과목이다.
“복습은 잘 해왔겠죠? 이번 시간에는 2장 챕터 전체를 쪽지 시험을 보도록 한다고 했는데?”
교탁에 서자마자 오른손에 쥔 쪽지 시험지로 보이는 종이뭉치를 들어 올리며 흔드는 아지매. 그 지랄 맞은 모습에 애들의 얼굴이 썩어나는 가운데, 난 심호흡하며 강사가 들고 온 노트북을 향해 <과거시>를 사용했다.
그와 함께 노트북을 중심으로 하는 과거의 장면들이 난잡하게 밀려들어온다.
연구소 같은 곳에서 실험 자료를 정리하고 있는 강사, 그리고 그 자료들을 USB에 옮기고 노트북에 꽂는다. 그리고, 누군가와 만난다. 중국어로 쏼라쏼라 거리는데..? 파일 내용이 한국에 있는 이능력자 명단과 신체 조건에 대한 기록? 이능력자의 신체 능력 실험?
...시발, 이게 뭐지?
아직 중간고사 문제에 관한 내용이 나오기 전이었지만 난 <과거시>를 종료하고, 내가 본 이미지들을 생각했다. 일단, 저 강사가 일하는 곳은 ‘국가마력기술연구소’라는 곳이다.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다만 정부 소속의 중앙기관인 건 확실해. 그런데, 거기서 연구한 자료를 몰래 누군가에게 넘겼으면···
스파이다.
2.
장장 4시간에 걸친 수업 폭격이 끝난 뒤, 난 예정대로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점심시간 막 시작된 이른 시각, 다행히 옥상엔 먼저 교실에서 나간 서예린을 제외한 다른 사람은 없었다. 팔짱을 낀 채 벤치에 앉아서 초조하게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서예린은 내가 나타나자마자 고갤 휙 돌려 바라본다.
“···가져옴?”
“주세요.”
옆자리에 앉으면서 내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재빨린 빈 공책을 내민다. 그에 난 품 안에서 전자 담배를 꺼내며 그녀의 공책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이전처럼 <메모장>의 중간고사 시험지를 복사해 찍어냈다. 특별히, 내가 푼 문제의 해답까지 모두 포함해서.
“일단, 오전에 듣는 공통수업의 시험지는 모두 적었어요. 해답은 제가 임의로 적었고요. 중간고사가 대충 2주 남았죠? 나중에 시험문제가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많이 바뀌지는 않을 것 같아요.”
“음! 음!”
내가 건넨 공책을 받아들고 문제를 확인하기 여념 없는 서예린. 그런 그녀를 뒤로 한 채, 난 전자 담배를 뻐끔거리며 방금 전에 안 사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겉보기엔 흔한 40대 학교 여선생 같은 강사가 사실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산업 스파이라니···
이걸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난감했다. 그냥 모른 척 해야 하나? 근데, 왠지 꼴 받네. 그럼 신고를 해야 하나? 근데, 증거 없잖아.
혼자 고민해봤자 답이 없는 질문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머리론 알아도 실행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야. 원래 사람이 고민하는 것들 대부분은 부먹 vs 찍먹처럼 답이 없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결국 머리로 이해하고 있던 개념 ‘답이 없다.’는 걸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거지.
그렇게 전자 담배를 뻐끔거리며 쓸데없는 생각에 내가 잠겨있을 때-.
“선택수업의 시험지는?”
진짜 중간고사 시험지라는 걸 확신한 듯, 살짝 상기된 얼굴로 책가방에 공책을 집어넣으며 날 바라보는 서예린. 두 눈을 반짝이는 그녀의 질문에 난 전자 담배의 연기를 빨아들이며 어깰 으쓱였다.
“음, 그건 예린양이 듣는 수업을 모르니 빼돌릴 수가 없더라고요.”
“5개다. 교육 심리학 I, 논리학 I, 현대 철학 I...”
“진정해요. 진정. 근데, 그런 수업이 미르에 있나요? 제가 알고 있는 수업 중에서 비슷한 것도 없던데요?”
속사포처럼 다급하게 말하는 그녀에게 진정하라는 듯이 손을 들어 올리며 말하자, 서예린은 작게 심호흡을 한 뒤에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대학교 인터넷 수업임.”
“...엥? 대학교 인터넷 수업이요? 아니, 그런 것도 미르에서 선택수업으로 인정해주나요?”
“나도 잘 모름. 선택 과목, 아빠가 골라줌. 난 이거 들어도 됨.”
말하는 서예린도 잘 모르는 눈치다. 그래도 미르의 교직원들 중 하나인 서 강 아저씨가 해준 거라니 맞겠지. 허, 그나저나 인터넷 수업이라니···
“흠, 그럼 문제를 빼돌리는 게 좀 곤란하겠는 걸요?”
“...어째서?!”
맹수처럼 내 어깨를 붙잡는 서예린, 그에 난 난처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몰래 문제를 빼돌린다는 게 그리 쉬운 게 아니니까요. 그래도 미르 안이라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말이에요. 생각해봐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교수가 만드는 시험지 내용을 제가 어떻게 빼돌리겠어요?”
이건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 정하려면 송파구를 벗어나서 대학 교수에게 접근해 시험지를 빼돌려야 하는데, 아침 7시부터 오후 11시까지를 미르 등교와 물약 상점 알바로 날리는 나로선 힘들지. 새벽에 교수에게 접근해서 시험지를 빼돌리라고요? 아니, 그건 좀...
“아. 아아. 아.”
그 대답에 붙잡은 내 어깨를 놓곤 나라 잃은 표정으로 멍하니 있는 서예린, ‘어째서? 철학? 왜?’라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걸 보니 얼마 안 가 예전처럼 발작할 것 같다. 거, 교사의 꿈은 멀고도 험하구나. 고갤 절래절래 저으며 난 빈말로나마 그녀를 위로했다.
“그래도 공통수업은 시험 준비를 안 해도 되니까 한 번 열심히 해봐요.”
“···불가능. 나, 하나도 이해 못함.”
“주위에 그 과목에 대해 아는 사람 없어요? 인터넷 수업이라도 같이 듣는 학생이라도 있을 텐데?”
내 나름의 충고하자 어깨를 추욱 늘어트리는 서예린. 하긴, 서예린도 나와 비슷한 아싸찐따다. 다만, 나처럼 따돌림이 아니라 너무 잘나서 애들이 피하는 수준이지. 그리고, 아찐 탈출하려는 마음도 없는 것 같고. 오전 시간을 함께하는 반에서도 이런데, 선택수업에선 어떻게 나올지 예상이 간다.
“그럼 그 과목에 대해 알 것 같은 사람 붙잡고 한 번 도와달라고 말이라도 해봐요. 자기에게 피해가 안 갈 정도라면 대부분 흔쾌히 도와주니까.”
내 말에 천천히 고갤 끄덕인 후,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로 다시 책가방을 메고 ‘논리학, 철학, 심리학···’을 중얼거리며 문 쪽을 향해 걷는 서예린.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난 전자 담배를 뻐끔거리면서 턱을 매만졌다.
서예린에게 한 충고
솔직히, 그냥 별 생각 없이 내뱉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내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방금 전에 안 산업 스파이에 관한 것을 혼자 고민해봤자 답이 없다. 그러니 알 것 같은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말이라도 해봐야 한다. 그리고, 산업 스파이에 관해 알 만한 사람은... 내 주위에서 딱 한 명밖에 없네.
스마트폰을 꺼내서 난 곧바로 마빡 아가씨에게 톡을 날렸다.
3.
미르 고학년의 오후 수업은 대학교처럼 선택 수업이고, 그렇게 수업을 선택하다보면 필연적으로 공강(空講)이 생긴다.
그리고, 난 그 빈 시간에 운동을 조진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하루에 무조건 2시간씩은 근력 운동을 하지. 미르의 헬스장들은 24시간 열어놓기 때문에 낮에 못하면 새벽에라도 간다. 대단히 성실하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사실은 나도 존나하기 싫다.
이 엿 같은 돌연변이
르피너스가 던지고 간 이것들 때문에, 난 평범한 사람 수준의 근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필사적으로 운동해야 한다. 근손실이 무지막지하게 빠르게 일어나기 때문에 웬만해선 빼먹을 수가 없어.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헬린이, 그것도 노력해도 근성장이 거의 없는 헬린이가 되었다...
“후욱. 후욱. 후욱.”
그렇게 월요일 6교시 빈 시간, 미르의 내 부속 건물들 중 하나인 고등부 ‘스포츠 과학관’의 헬스장에서 오늘도 살기 위해 운동을 조졌다. 빈 바에 20kg짜리 원판 두 개를 꼽고 속으로 비명을 질러가며 간신히 스쿼트 한 세트를 조졌을 때...
“우웁...”
급작스럽게 위에서 올라오는 신물에 내던지듯 바를 스쿼트용 파워렉(스쿼트를 놓는 철제 구조물)에 놓고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오전 수업 때 <과거시>로 거의 2년가량의 노트북과 관련된 행적을 자세하게 살펴봐서 그런지 오늘 따라 더럽게 힘들다. 머리가 쪼개질 듯이 아프네.
참 어처구니가 없어.
몸은 쌩쌩한데 머리가 혹사돼서 힘들게 느껴지다니... 한숨을 내뱉으며 난 파워 렉에 등을 기댄 채 달달 떨리는 손을 뻗어 바닥에 놓은 물병을 기울여 한 모금 마셨다. 이어서 손가방에서 전자 담배를 꺼내곤 카트리지를 교환한 뒤에 입에 물곤 힘껏 빨아들였다.
“쓰읍, 휘우... 엿 같아요. 정말로.”
평소의 대마초 오일이 아닌 싸장님 가게의 재료들을 조금씩 빼돌려 만든 진통제+각성제가 혼합된 약물, 잠잘 때가 다가올수록 점점 심해지는 두통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몰래 만들어 피우는 물품이다. 마약성? 우지챠는 그런 거 모르는 레후.
하아, 두통이 서서히 잦아드니 좀 살 것 같네.
그나저나 몸이 쌩쌩해서 몰랐는데, 정신은 거의 금요일 수준의 피곤함이다. 잘못하면 또 자야 할 것 같다. 망할, 고작 이런 것 때문에 잠을 자야하다니. <과거시>를 자제했어야 했는데, 너무 자세히 훑어봤다. 쓰읍.
그렇게 내 중대한 실수에 한숨만 푹푹 쉬고 있는데-.
“...당당하게 헬스장에서 담배 피우는 건 또 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