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64화 (64/350)

< 15화. 범죄는 아니겠죠? >

내 옆의 파워렉에 모델 같은 비율의 늘씬한 여자가 선다.

명품 츄리닝 차림에 특유의 푸른색 머리띠로 이마를 훤히 드러내는 우리의 마빡 아가씨, ‘매너도 모르는 새끼’라는 경멸의 시선에 난 피식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안 피웠을 거예요. 근데, 지금 우리 빼면 사람도 없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지켜야 할 게 있죠. 안쪽엔 여기 상주하는 트레이너도 있던데.”

“에이, 딱딱하게 굴지 마세요. 그나저나 진아씨는 평소에 운동하시나요?”

“집에서 자주해요. 전담 트레이너와 장비가 있거든요.”

대답하면서 가볍게 뛰어올라 파워렉의 위쪽, 턱걸이용 바를 붙잡고 턱걸이를 하며 그녀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나저나 도대체 왜 부른 거죠? 톡으로는 하기엔 좀 민감한 주제라니? 뭔가 심상치 않아서 오긴 했는데.”

“아, 궁금한 게 있어서요.”

“궁금한 거?”

“그... 보통 기업에선 산업 스파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나요?”

내 질문에 마빡 아가씨는 하던 턱걸이를 멈추곤 착지하며 날 바라보았다.

“산업 스파이? 그런 건 그냥 톡으로 질문해도 될 텐데... 설마, 누가 산업 스파이인지 파악한 건가요?”

“그건, 일단은 비밀. 어쨌든 설명해줘 봐요.”

“···짜증나죠.”

한숨을 푹 내뱉으며 그녀는 옆에 있는 원판 정리대에서 20kg짜리 원판들을 꺼내 봉에 끼우며 말을 이어나갔다.

“DK그룹은 화학섬유 특화재벌이에요. 섬유, 산업자재, 화학, 중공업, 무역이 강하고 요즘엔 정보 통신, 금융에 투자하고 있죠. B2B기업이기에 대중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섬유 화학 기술력부분에선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혀요. 그리고, 그 만큼 산업 스파이들의 타겟이 되죠.”

그렇게 올린 원판은 총 6개... 120kg? 아니, 봉까지 하면 140kg구나. 하지만, 아가씨는 거뜬하게 어깨로 들어 올리며 스쿼트를 시작한다. 와, 난 원판 2개만 해도 후들거리는데, 준비운동도 없이 저 중량을 들다니... 이 아가씨도 티가 나지 않았지만 괴물이네. 하긴, 마력 사용자니 저 정도는 하지.

그렇게 10회 반복-한 세트를 가볍게 마친 후, 마빡 아가씨는 파워렉에 봉을 걸치며 숨을 내뱉는다.

“특히, 중국이 많아요. 개발자들을 돈으로 후려쳐서 매수하거나, 스파이짓이 들켜도 오리발 내밀고 ‘감히 자기들을 의심하냐!’며 역으로 화내면서 각종 제재로 기업을 압박해버리죠. 시발, 좆같은 만인계획(万人计划)...”

훤히 드러낸 마빡에 핏줄을 세우며 ‘빠드득’ 이빨 가는 소리를 내는 마빡 아가씨. 생각만으로 속이 타는 듯, 그녀는 옆에 뒀던 스포츠 드링크를 벌컥벌컥 들이마신다. 본성은 다를지 몰라도 항상 고상한 말과 행동을 하는 우리 아가씨가 자제하지 못하고 쌍욕을 처박다니...

“만인계획? 그건 또 뭔가요?”

“...중국 정부의 국가 주도 인재 양성 프로그램이에요. 지금은 중단됐다고 하지만, 실상은 여전히 진행 중이죠. 겉으로 드러난 목적은 ‘미궁 사태 극복을 위해 해외 유출된 인재를 재확보 한다.’라고 말하는데.”

한숨을 푹 내뱉으며 마빡 아가씨는 고갤 절래절래 젓는다.

“그건 구라고, 실상은 해외로 진출한 중국 사람들에게 연구 성과를 자국에 가져와서 이를 바탕으로 비공개적인 ‘그림자 실험실’을 설립하도록 하는 거예요. 그걸로 기업의 기술을 쪼옥 빼먹죠.”

“허, 진짜요?”

“진짜니까 이런 말을 하죳!”

뾰족하게 소리치며 오른손에 들고 있는 스포츠 음료 패트병을 옆 파워렉 탁자에 후려치듯 내려놓는 대답하는 마빡 아가씨. 그 박력에 내가 찔끔했지만 마빡 아가씨는 그런 내 반응을 눈치 채지 못한 듯 식식 거리며 말을 이어나간다.

“그래서 국가를 막론하고 기업들 사이에선 중국 출신 인재에 대한 불신이 커요. 설령, 양심 있는 개인이 거부해도 소용없어요! 공안이 찾아가서 납치하니까! 아니면 중국에 있는 가족들을 포섭해서 협박하니까! 외국인이라도 기술 제공 의향만 밝히면 귀화까지 해준다니까요?”

상당히 과격하게 반응하는 아가씨, 반응을 보니 몇 번 당한 듯 싶다. ...그나저나 이 세계에서도 중국은 참 양아치 짓을 하는구나. 그 답변에 내가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마빡 아가씨는 살짝 기대 섞인 눈으로 날 바라본다.

“그나저나 불러서 하는 이야기가 산업 스파이라니. 뭔가 있나보죠?”

“음...”

그 추궁에 난 대답하는 대신에 다시 봉을 등에 대고 스쿼트를 시작했다.

말없이 날 바라보는 마빡 아가씨의 시선은 이제 ‘분명, 뭔가가 있구나!’하는 것 같다. 잘 아는 것 같은 사람에게 물어본다고 했다가 이렇게 들키네. 그냥 뭉개기엔 지금까지 마빡 아가씨와 쌓아놓은 친분 때문에 그렇고...

에라, 모르겠다.

스쿼트 한 세트를 마친 후, 난 파워렉에 봉을 걸치고 가쁜 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헤엑! 헤엑... 스파이가 있어요. 정확히 말하면 중국 쪽에 포섭된 듯한 사람이. 후우.”

“역시, 그렇군요. 어디서 일하는 사람이죠?”

“우리나라 국책 연구소에서 일하는 사람이에요. 자료도 빼돌리는 것 같고.”

내 대답에 눈가가 좁아지는 마빡 아가씨, 어느 정도 숨을 돌린 듯 아가씨는 봉에 20kg짜리 원판 2개를 추가로 끼운다. 아무리 마력 사용자라고 해도 저런 체형으로 힘들 텐데, 평소에 굉장히 노력을 하시나보네.

그렇게 증량한 봉을 등에 대고 들어 올리면서 그녀는 지나가듯 질문했다.

“확실한 건가요?”

“물증은 없지만 확실해요.”

내 대답에 얼굴을 찡그리며 스쿼트를 시작하는 마빡 아가씨, 난 그 옆에서 물을 마시며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답답해서 상담하려고 말하긴 했다만, 이걸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이에요. 어떻게 스파이인 걸 파악했는지 설명하기가... 좀 그렇거든요. 정확한 물증도 없는데, 괜히 건드렸다가 안 좋은 꼴만 볼 것 같고.”

“후욱! 현명한. 선택. 후욱! 이에요. 후우! 그나저나. 정확히. 후욱! 어떤 연구?”

“음, 각성자의 신체 조사에 관한 것인 것 같아요. 범죄자 신분의 마력 각성자를 통한 인체 실험 자료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잠시만!”

파워풀하게 한 세트를 마친 뒤, 마빡 아가씨는 목에 건 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멀찍이 떨어져서 스마트폰으로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들려오는 내용을 보면 ‘비서실에 어쩌구~’하는 걸 보니 그룹의 영향력을 사용해 뭔가 하려는 것 같다.

설마, 스파이를 처단하려는 건가?

이전에 스파이에 당한 것 같아 보였으니 그럴지도? 어찌됐든 마빡 아가씨가 어딘가에 통화할 동안 난 다시 스쿼트를 시작했고, 아가씨는 내가 스쿼트를 마치고 슬슬 다른 운동기구로 가려고 할 때가 되어서야 전화를 끝내고 내게 다가와서는-.

“천만 원 드리죠. 내용에 따라서 더 많이 드리고. 그 스파이가 누구에요?”

“뎃?!”

갑작스런 거금을 제안했다. 아니, 왠 돈? 아, 아까 전에 중국에 대해 이를 갈더니 복수하기 위해 그러는 건가? 잠깐 당황해서 기괴한 반응이 나왔지만 이내 상황 파악을 끝낸 난 활짝 웃으며 아부하기 위해 손을 비볐다.

“헤헤, 돈 받으려고 알아낸 건 아닌데, 이렇게 챙겨주시다니 어쩔 수 없죠. 여윽시, 국위선양하시는 기업의 자제답게 우리 아가씨의 나라 생각하는 애국심은 한국 제일...”

“뭔 개소리에요? 전 정부에 알릴 생각 없는데요?”

“...예?”

“스파이가 빼낸 연구 자료, 그걸 우리도 빼돌려야죠. 연구소에서 직접 빼돌리는 것보다 훨씬 쉬울 거예요. 할아버지에게 칭찬 받을 수 있는 기회기도 하고. 후훗.”

살짝 눈을 내리깐 채로 음흉하게 웃는 마빡 아가씨, 내 상식을 파괴하는 그 말에 난 당혹감을 느꼈다.

“아니, 신고하는 게 우선 아닌가요? 그래도 국가 기관에 스며든 스파이인데요?”

“물증이 없다고 했잖아요? 그럼 신고해도 소용없어요. 설령, 진짜 스파이인 게 드러나도 별 다른 처벌도 없을 거고요.”

...이게 뭔 소리지? 진짜 스파이인 게 드러나도 별 처벌이 없다니? 내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바라보자 그녀는 입 꼬리를 올리며 냉소한다.

“스파이인 게 밝혀져도 중국 정부가 크게 처벌하지 못하도록 손을 써줘요. 아까 전에 말했듯, 정 뭣하면 귀화시키기까지 하고. 강하게 항의하는 나라에게는 자국 내에서 별의별 핑계로 경제 제재나 불매 운동까지 하니 기업이나 타국 정부는 반항하고 싶어도 못할 수밖에요.”

“아니, 아무리 초강대국이여도 그런 노골적인 양아치 짓이 가능한...”

“유권자 때문에 티는 잘 안 내지만 우리나라에 친중 정치인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걔들이 앞장서준답니다.”

“그럼 언론... 아니, 시민단체라도...”

“하, 걔네들도 마찬가지에요. 새벽씨, 북쪽 출신이라서 그런지 뭘 모르네.”

코웃음과 함께 마빡 아가씨는 내 대답을 끊으며 날 향해 뭘 모른다는 듯이 검지를 흔들며 말을 이어나간다.

“그런 시민 단체들도 결국엔 다~ 돈 벌려고 하는 거랍니다. 걔네들 중국에서 받아쳐먹는 돈이 얼마인지 알아요? 조선족들에게 한국국적을 주고 똑같이 대우해줘라 시위하는 놈들이에요. 어처구니가 없어요. 시-팔 새끼들.”

나 말곤 듣는 사람이 없다곤 하지만 원색적인 욕설을 내뱉는 마빡 아가씨.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생각해보니 나름 납득이 가는 말이었다. 원래, 내가 있던 세계에서도 ‘듕궉 짜요!’하면서 친중-거의 간첩 수준의 정치인들이 널렸었지. 조선족들도 많았고. 지금 이 세상에선 더할 거다.

여긴, 미궁에서 튀어나온 3개의 재앙-룬 수호자 때문에 미국이 한 번 박살나서 중국이 ‘세계 제 1의 초강대국’이거든.

...나도 처음엔 이 사실을 믿기 힘들었지만 진짜다. 썩어도 준치라고 미국도 빠르게 국력회복을 해서 나름 중국과 비등한 위치까지 회복하긴 했지만 그래도 여러 면에서 딸려서 두 번째 초강대국이다. 그러니 중국을 빨아줄 사람은 내가 있던 세계보다 더 많을 거야. 거의 조선시대 수준으로 사대하겠지.

차이나 넘버원이라니··· 역시, 좆같은 소설이야.

담당 일찐 역할을 하던 미국이 약해졌으니 마빡 아가씨가 말한 저런 양아치 짓도 거리낌 없이 하는 거겠지. 그렇게 내가 다시 한 번 이 세계의 엿 같음을 느끼며 한탄하고 있는 사이, 마빡 아가씨의 합리적인 설득은 계속 이어졌다.

“설령, 증거가 있다고 해도 신고하면 힘들 거예요. 신고자 보호가 전혀 안 되거든요! 몇 시간 되지 않아 스파이는 누가 자신을 신고했는지 알 거예요. 왜 확신하냐고요? 우리 기업도 기관에 접촉한 내부 고발자가 누군지 하루 만에 파악하거든요!”

“...”

“근데, 중국은? 더하죠! 요구하면 정부 기관 곳곳에 박힌 중국 스파이들이 냅다 가져다 바칠 걸요? 중국 놈들, 받은 이득은 입 싹 닦고 잊어먹어도 손해 끼친 놈은 절대 안 잊는답니다? 보복 하나는 존나 확실하게 하죠. 신고하면 새벽씨의 인생이 ‘아주아주’ 고달파 질 거예요.”

아주 당당하게 내부 고발자를 파악한다고 말하는 아가씨, 내가 그 참담한 현실에 한숨만 내뱉자 아가씨는 그런 내 옆으로 다가와 친한 척 어깨동무를 한다. ...꼭 일진이 찐따에게 친한 척하면서 삥 뜯는 것 같은 느낌이네.

“그런 의미에서 저도 스파이 고발은 못해줘요. 우리 기업은 중국에도 물건을 팔고 있거든요. 별 다른 이득도 없는데, 우리 기업 밥줄 끊길 리스크를 저지를 수는 없죠. 그럴 바엔 차라리... 스파이가 빼돌리는 자료를 우리도 빼돌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

“뭐, 연구가 쓸모가 없다면 신경 끄겠지만 연구 내용을 보니 쓸모없진 않겠더군요. 저희 기업도 새로운 자회사를 만들고 슬슬 생체분야에 대한 투자를 하고 있거든요? 설령, 얻은 자료가 별로 쓸모없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이건, 충분히 시도할 만한 투자니까.”

대놓고 음흉하게 ‘큭큭!’ 웃는 마빡 아가씨의 모습을 보며 난 한탄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어찌하여 나라의 부를 갈취하는 놈들을 처단하지 않고 함께 빼돌리려 하다니? 한국 사람이라면 당연히 양심에 찔려야 하는 것 아닌...

“천만 원이 적은가요? 그럼 5천만 원 드리죠. 어때요?”

“콜.”

-라고 꾸짖기엔 너무나도 많은 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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