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65화 (65/350)

< 15화. 범죄는 아니겠죠? >

4.

재벌의 돈지랄에 굴복한 뒤, 난 순순히 스파이에 관해 말했다.

월요일 오전에 오는 초청 강사가 ‘국가마력기술연구소’의 연구원이고, 연구소의 자료들을 빼돌리고 있다는 것을. 그런 내 대답에 아가씨는 예상대로 ‘그걸 어떻게 알았냐?’라고 추궁하듯 물어봤지만 대충 비밀이라고 얼버무렸다. 마침, 타이밍 좋게 종이 쳐서 수업 가야한다고 쨋지.

“~♬”

다음날 점심시간, 입금될 오천만 원을 생각하며 난 옥상의 벤치에 앉아서 빵과 우유를 섭취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또 자야할 것 같다는 사실에 기분이 다운됐지만, 그래도 보수를 받으면 이 긴축 재정도 끝이라는 생각을 하며 억지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끼익.

그렇게 싱글벙글 웃고 있는데, 옥상문이 열리며 마빡 아가씨가 나타난다. 톡으로 여기서 만나기로 했거든. 다가와서 내 옆 자리에 털썩 앉은 우리 아가씨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일단, 당신이 말한 기본적인 정보를 확인해봤어요.”

“어떤가요?”

“월요일 오전 수업의 강사, 진짜로 연구원이더군요.”

그것만 말하고 아무런 말이 없는 마빡 아가씨, 몇 초간 이어지는 어색한 침묵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리고요?”

“그것 빼곤 딱히 알아낸 건 없어요.”

그 대답에 난 멍청하게 두 눈을 끔뻑였다. 아니, 그게 끝? 보통 드라마나 영화 같은데에선 재벌가 양아치가 여자를 끼고 꺼드럭대며 ‘해와.’하면 아랫것들이 하루 만에 자료 수십 장을 뽑아오던데? 그런 내 속마음을 관심법으로 읽은 건지 마빡 아가씨는 미간을 찡그린다.

“고작 하루에요. 조사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게 당연하잖아요?”

“아니, 그래도 어디서 USB를 교환했는지 가르쳐줬잖아요? 서울 시내니 거기에 CCTV도 깔렸을 텐데 돌려서 보면 알 텐데요? 얼마 안 지나서 삭제도 안 됐을 거잖아요? 불과 저저번 주라고요?”

<과거시>로 파악한 바, 스파이 아줌마의 정보 전달 방법은 마약 딜러처럼 연구 내용이 담긴 USB를 약속한 장소에 던지고 가는 것이었다. 3개월에 한 번 씩 하는데, 최근의 던지기가 고작 저저번 주 금요일이었다. 11일 밖에 안 지났어.

하지만, 마빡 아가씨는 그런 내 대꾸에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자기 이마를 짚는다.

“하아, 그 CCTV보는 게 쉬운 줄 알아요?”

“영화나 드라마에선 그러던데요?”

“어쩐지. 그런 걸 보니까 이런 말을 하지.”

그 뒤, 마빡 아가씨는 이마를 짚은 손을 내리고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건 거의 99%픽션이예요. 물론, 그룹 차원의 인맥등을 사용하면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이번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하니 불가능하죠. 따로 TF팀을 꾸려야 해요.”

“TF팀이요?”

“네. 들키더라도 꼬리를 잘라야 하니 몇 차례 건너서 포섭해야겠지요. 비밀 유지도 가능한 믿을 만한 인원을 뽑는데 시간도 걸릴 테고... 솔직히, 말하면 좀 오래 걸릴 거예요. 저희 그룹 비서실을 쓸 수 없는 안건이거든요.”

“...아니, 왜요?”

“그룹의 주인은 한 명인데, 후계자 후보들은 저희 아버지를 포함해서 4명이나 되니까.”

미간을 찡그리며 마빡 아가씨는 중얼거린다.

“이번 일을 꾸미다가 걸리면? 삼촌이나 고모들이 아주 좋아할 거예요. 아니, 이런 일을 꾸미는 걸 알면 오히려 태클을 걸려고 하겠죠. 비서실에 정식으로 보고하고 일을 진행할 수도 있지만 그랬던 여기저기 숟가락 얻으려는 사람들이 나올 거예요.”

“...”

“이번 성과는 온전히 제가 독식하고 싶어요. 그러니 시간이 좀 걸릴 수밖에요.”

아가씨의 대답에 난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거참 피곤하게 사네. 그래도 이해 못할 건 아니-.

“그래서 5천만 원은 일단 나중에 드릴게요.”

“...!?”

“걱정마요. 확실히, 스파이란 게 밝혀지면 줄 테니까. 당신을 못 믿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스파이인 것이 밝혀지지도 않았는데 5천만 원을 훌쩍 줄 순 없잖아요? 이런 돈 문제는 확실하게 가야죠.”

아니, 이게 말이 되나?!

일찍 자야할 것 같다는 사실에 기분이 씹창난 걸, 5천만 원 받을 수 있다는 걸로 억지로 띄우고 있었는데 그걸 못 준다고? 오천만원 받고 이제 빈궁한 아침 점심 식사를 바꿀 수 있나 기대했더니 나중에 준다고? 안 그래도 요번 달은 곱창 먹다 뻗었을 때 호텔 이틀치 숙박비 때문에 더 절망적인데!?

안 된다.

이 쬐끄만 몸이 쬐끔이라도 크려면 양질의 식사를 해야 한다. 그래도 저녁은 싸장님에게 빌붙어서 한끼를 해결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더 맛있고 단백질이 많은 식사를 원한다...! 이런 편의점 빵 쪼가리가 아니라!

이 엿 같은 편의점!

당첨 복권이라도 좀 제대로 구해서 들여오던가! 복권 리필될 때마다 <관찰자의 눈>으로 훑어봐도 천 원 이천 원 당첨 밖에 없는 쓰레기...

“괜찮아요? 좀 이상해 보이는데?”

“아, 아니에요. 아니, 아니에요.”

마빡 아가씨의 말에 난 정신을 차렸다.

아니, 정신이 좀 어질어질해서 그런지 생각이 엉뚱한 대로 흘러가네. 정신차려, 정신차려, 정신차려, 정신차려. 머리통을 탁탁 두드리며 다시 생각했다. 일단, 마빡 아가씨의 말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 그래, 억울하지만 타당해. 그럼 어떻게 해야 이 난관을 해결할 수 있을까?

아니, 잠깐만? 생각해보니까...

“만약에 말이죠. 제가 좀 더 기여를 하면 돈을 더 받을 수 있나요?”

“음, 안 될 건 없죠?”

내 질문에 고갤 갸웃하더니 이내 고갤 까닥이는 아가씨. 좋아, 그렇다면...

“그럼 제게 맡겨주시는 건 어때요?”

“...네?”

“그렇게 TF팀 구한다고 시간 질질 끌지 말고 저에게 맡겨달라고요.”

난, 그 강사 아줌마의 근 2년의 과거를 낱낱이 살폈다. 그래서 노트북 비밀번호는 물론이고, 언제 포섭됐는지, 빼돌리는 주기 같은 걸 다 안다. 그래, 사실상 ‘완벽한 뒷조사’를 끝낸 것이나 다름없지. 생각해보니 차라리 내가 직접 그 아줌마의 자료를 빼돌려도 될 것 같았다.

“...농담이죠?”

그런 내 대답에 마빡 아가씨의 미간이 깊어지지만 난 진지하다. 진짜 성공할 자신 있어.

“아뇨, 진담인데요.”

“도대체 뭘 믿고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음, 그냥?”

내 비밀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긴 곤란하기에 나름 상쾌한 미소와 함께 말했는데, 마빡 아가씨는 다르게 받아들였는지 머리띠로 드러낸 마빡에 핏줄이 하나 솟아난다. 허미, 웃고 있는 얼굴로 이마 핏줄 하나만 솟아나니 더 무섭네.

그 폭풍전야 같은 살벌함에 난 진정하라는 의미로 양손을 뻗으며 입을 놀렸다.

“아가씨가 쪼금 기술적인 부분과 자금을 지원해주면 자신 있어요. 그 근거는... 쪼끔 설명하기 난감하지만요.”

“...”

“한 번 투자해보는 게 어때요? 절 믿는다면서요?”

“...”

“아니, 생각해보면 볼수록 이게 더 좋은데요? TF팀 꾸린다고 시간 낭비할 필요도 없고요, 들킨다고 해도 제가 온전히 꾸민 걸로 하기에도 쉽죠. 변명도 하기 좋고요!”

이어지는 내 변명을 듣고 마빡 아가씨는 생각에 빠진 듯, 말없이 턱을 매만졌다. 그 모습이 신입의 참신한 계획(개소리)을 듣고 ‘이걸 어떻게 조질까?’ 고민하는 부장님 같아 보여서 반사적으로 주눅이 든다. 허, 이 세카이에 와서도 난 쩌리 신세는 벗어나질 못 하는구나...

그렇게 불편한 몇 십초 간의 시간이 지난 후, 마빡 아가씨는 벤치에서 일어나 날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 참 신기해요.”

“하하, 그런가요?”

“처음에 봤을 땐, 그냥 헤실헤실 거리는 바보정도로 보였죠.”

...허락 안 하는 건가? 하긴, 나 같아도 설명하지 않은 채 날 믿고 투자하라고 하면 못 믿을 것 같다. 어쩔 수 없지. 당분간 그지 같이 아침 점심을 빵우유로 때우는 수밖에. 그렇게 속으로 체념할 때-.

“하지만, 알면 알수록 섬뜩했어요.”

“...네?”

“그 헤실헤실 웃는 미소도 이젠 먹잇감을 보며 실실 웃는 걸로 보이고요.”

무슨 착각을 하시는 건지...? 아가씨도 나처럼 잠을 못자서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인가? 그렇게 생뚱맞은 표현에 내가 벙쪄있는 동안 마빡 아가씨는 크게 숨을 내뱉곤 고갤 끄덕였다.

“제가 모르는 또 무언가가 있겠죠. 그러니 한 번 믿어보겠어요. 그리고, 이번엔 그쪽이 뭘 할지 옆에서 지켜보죠.”

“하하! 좋은 선택을 한 거예요.”

마빡 아가씨의 말에 난 활짝 웃었다. 캬! 통과, 통과다! 생글생글 웃으며 난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 일단 작전을 위한 자금 좀 융통해주시죠. 선금으로 5천.. 아니, 10만 원만 주세요”

“...”

“작전을 세우기 전에 일단 밥을 든든하게 먹어야 하잖아요. 그리고 약간의 준비 자금도 필요하고...”

“...하.”

내 요구에 한숨을 내뱉더니 지갑을 꺼내 5만 원짜리 지폐를 대충 꺼내 주는 마빡 아가씨, 어이쿠 10만원만 달라고 했는데 10장을 주시네. 이제 밥 좀 제대로 먹고 살 수 있겠다! 아, 생각만 해도 군침이 싹! 도네! 오늘 기분도 꿀꿀한데 자기 전에 먹어둬야지. 뭐 먹을까?

그렇게 희희낙락하며 아가씨가 하사한 돈을 받아 내 호주머니에 넣고 있는데, 아가씨는 도끼눈으로 날 내려다보며 웃는다.

“하지만, 만약에 들키면! 그쪽이 전부 독박 쓰도록 해요! 깜빵 가더라도 추가로 돈은 넉넉히 챙겨줄 테니까. 설마, 그 정도 각오는 하고 제안한 거겠죠?”

“하. 하. 그렇게 말하니 좀 후회되는데요...”

“쫄?”

하, 애초에 불가능할 것 같았으면 제안을 하지도 않았지. 고갤 저으며 난 조금 남은 우유를 입에 털어 넣었다.

5.

깔끔하게 화-수요일을 잠으로 날려버린 뒤, 난 목요일부터 본격적으로 준비에 들어갔다.

일단, 내가 아는 사실들을 전부 공책에 적었고 그걸 천천히 뜯어보면서 생각했다. 그걸 토대로 대략적인 작전을 세운 뒤, 마빡 아가씨에게 작전에 필요한 준비물들을 적어서 건넸다. 하지만, 모든 걸 마빡 아가씨에게 요청하는 것만으로 해결할 순 없었다.

이 작전엔 사람이 필요했다.

평범한 인력이 아닌 말 그대로 첩보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잠입액션’에 가까운 일을 할 수 있는 인재가. 그리고 마침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그런 인재가 있었다.

“...왜 불렀나?”

점심시간, 미르 중앙 지역에 위치한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

구석 자리 테이블에서 마주 앉은 서예린은 내가 사준 벤티 사이즈 ‘초코 웨하스 쉐이크’를 쥔 채 뚱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묻는다. 보기 싫지만 일단 사준다니 왔다는 표정이 훤히 드러나네. 뭐, 우리가 잡담할 사이는 아니긴 하지.

내 몫으로 산 흑당 버블티(처음 먹어본다)를 한 모금 쪼옥 빤 뒤, 난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같이 일 해볼 생각 없어요?”

“...일?”

“예, 꽤나 벌이가 좋은 일이에요. 딱 한탕만 하면 되죠. 예린씨의 능력이면 꽤나 쉬운 일이기도 하고.”

내 말에 음료잔을 기울이며 미간을 찡그리는 서예린, 왠지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거부할 것 같은 기색에 난 재빨리 내가 준비한 포섭 카드를 꺼냈다.

“5천만 원, 그리고 예린씨의 선택 과목들의 중간고사 시험지를 빼돌려서 드리도록 하죠.”

“...!?”

“어때요? 일단, 들어볼 만하지 않나요?”

5천만 원, 한 번 쓰는데 무지 비싼 몸값이긴 하다만 마빡 아가씨가 들어가는 비용과 별개로 작전 성공 시 5억을 준다고 했으니 걱정 없다.

서예린의 선택과목 중간고사 시험지?

성공 보수가 5억이다! 5억! 그 돈이면 교수가 어디 사는지 알아내서 새벽에라도 찾아가야지!

“어떤 일?”

그런 내 제안에 눈가를 꿈틀거린 서예린은 마시던 음료를 내려놓고 말해보라는 듯이 말한다. 카페 내에는 생도 이외에도 사업차 방문한 수많은 이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지만, 그래도 보안 유지가 중요하니 난 목소리를 최대한 낮춘 채 속삭였다.

“우리가 듣고 있는 월요일 오전 수업 알죠?”

“암. 지겨움.”

“그 강사, ‘국가마력기술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 현역 연구원이에요. 근데, 이번에 예린씨에게 줄 시험지를 빼돌리다가 안 사실인데··· 사실, 중국 쪽의 산업 스파이더군요.”

스파이라는 걸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두 눈을 휘둥그레 뜨는 걸 보니 다행히 뭔지 아는 것 같다. 스파이가 뭔지 설명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행이네. 난 곧바로 이번 일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연구소에서 빼돌려지고 있는 자료, 신고해도 소용없는 현실, 차라리 이쪽도 자료를 빼돌려서 사용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사실, 그걸 마빡 아가씨가 사기로 했다는 것···

“...재벌가!?”

“몰랐어요? 그 마빡... 아니, 남궁진아씨는 재벌가의 일원이에요. 산업 스파이에 대해 잘 알 것 같기에 상담하려고 말했는데, 스파이의 자료를 역으로 빼돌리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런 일을 예린씨에게 제안하게 된 거죠.”

“재벌...”

남궁진아가 재벌가의 일원이라는 부분에서 서예린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이어진 내 말에 표정이 살짝 풀어지며 눈빛이 몽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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