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범죄는 아니겠죠? >
7.
직장인은 되도록이면 직장과 가까운 곳에 집을 구하려고 노력한다.
출퇴근이 유발하는 시간 손해와 피로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직장 근처 도심의 비싼 집값에 기함하며 어떻게 멀리 통근하며 버텨보려고 해도, 하루에 왕복 3~4시간을 버스나 지하철에서 보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빚을 내서라도 집을 구하는 것을 알아보게 되지.
이러한 이유로 ‘마력과 관련된 일’을 하는 이들은 90% 이상이 지상의 송파구에 거주한다.
송파구, 1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줘도 안 가지는’-언제 또 뒤집어져서 지하로 꺼질지 모르는 쓰레기 땅. 경제 재건을 위해 지하의 종족과 협업하면서 정부는 그런 송파구를 살리기 위해 대규모 마력 연구 시설을 유치했고 덤으로 깔끔한 신축 아파트와 편의시설까지 깔았다.
그리고, 그렇게 지어진 아파트를 지원 정책으로 연구자들에게 싸게 판매 혹은 임대했다.
그 결과, 마력 연구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면 누구라도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송파구에 집을 사거나 혹은 싼 월세를 내고 살아갈 수 있다. 이러한 파격적인 혜택은 송파구의 집값이 계속 올라가고 있는 지금까지도 똑같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혜택이 붙는 아파트들 중에서 가장 최고는 송파구 잠실 2동에 위치한 리버 벨리(River valley)다.
40층 건물 5개로 이루어진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 단지, 하나의 거대한 복합 쇼핑몰로 설계되어 있는 지하 2층~지상 4층은 송파구의 중심 번화가 중 하나다. 당연히 엄청난 가격을 형성하고 있고, 최중요 마력 연구와 관련된 인원들이 배정받는 곳이다.
그렇기에 상업 지역이 아닌 위쪽의 ‘거주 구역’ 경계는 평범한 아파트라곤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삼엄하다.
곳곳에 CCTV와 최첨단 열-마력 감지 센서가 깔렸고 그 경비들 중에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마력 사용자’가 무려 20명이나 채용되어 일하고 있었다. 전부 국가의 예산으로 말이다. 말 그대로 철통같은 경비를 자랑하는 곳 성채였지만...
“...하하, 설마 이런 곳에 사실 줄이야.”
코인 노래방에서의 회동이 끝난 지 30분가량, 마빡 아가씨와 나 그리고 서예린은 그런 리버 벨리의 거주민 주거 구역 안을 걷고 있었다. 경비원들 몰래? 아니, 당당하게! 허탈하단 내 웃음소리에 앞장서서 걷고 있는 마빡 아가씨는 피식 웃는다.
“그나마 여기가 송파구에서 가장 괜찮았거든요. 좀 복작복작하지만 출퇴근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단 나으니까. 뭐, 스파이도 이곳에 살고 있는 줄은 몰랐지만.”
-삐빅!
품 안에서 꺼낸 ID카드를 정문에 대는 아가씨, 그와 함께 성채와도 같은 아파트의 정문이 열린다.
스파이에게서 노트북을 몰래 탈취하고, 다시 몰래 가져다 놓는 일,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다. 좀 더 알아봐야할 것들이 있기에 오늘은 대략적인 브리핑만 하고 끝내려 했는데... 스파이에 대한 인적사항-리버 벨리에 거주한다는 걸 듣곤 우리 아가씨께서 살짝 놀라시더라고?
그리곤, 자기가 사는 곳이라고 하셨다.
생각지도 못한 호재였기에 이렇게 정찰 겸 집을 보여 달라고 했지. 이렇게 아가씨는 흔쾌히 허락하셨고. 흠, 어찌됐든 이렇게 내부에서 보니까...
“오늘 당장 스파이네 집을 털 수도 있겠는걸요?”
앞장서서 안내하는 아가씨를 따라가면서 난 고갤 주억였다. 철통같은 외곽 경비에 비하면 많이 허술해 보인다. 그런 내 말이 마음에 든다는 듯이 아가씨가 씨익 웃으신다.
“오호? 정말로?”
“네, 외부에서부터 뚫는 건 굉장히 힘들어 보였지만... 안쪽에서의 방비는 많이 허술해 보이네요. 서예린 양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뚫고도 남겠어요. 예린양? 저 아파트 외벽 탈 수 있죠?”
내 질문에 스윽 아파트 쪽을 훑은 서예린은 고갤 끄덕였다.
“잡을 곳 많아보임. 창문 혹은 환풍구에 감지 장치가 설치되지 않다면 가능.”
“그건 걱정하지 마요. 아무런 장치도 설치되지 않았으니까.”
그런 내 대답에 마빡 아가씨 씨익 웃으신다.
“흐, 그럼 오늘 끝내죠.”
“...네?”
오늘 그냥 끝내버리자는 아가씨의 말, 뭔 뜻인지 몰라서 의아하다는 듯이 대꾸했는데 아가씨는 대답해주시질 않은 채로 실실 웃으며 발걸음을 옮기신다. 그렇게 우리는 A동 안으로 들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33층에 다다랐다.
“자, 여기가 제 집이랍니다!”
현관문을 열며 소개하는 아가씨, 한국 드라마에서 볼 법한 전형적인 도시 상류층 집이다. 근데, 집 안에서 아가씨의 안내에 따라 안쪽의 한 방으로 들어서자...
“여긴...?”
세련된 디자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 드러난다.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컴퓨터와 전선, 벽 곳곳에 달린 20대에 달하는 모니터, 철제 선반에 있는 각종 전자 장비들... 서예린도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가운데 아가씨는 씨익 웃으시며 대답한다.
“제 취미방이에요.”
“취미방이요? 이 전산실 같은 곳이?”
“예, 제 취미가 전자 장비 다루는 거거든요. 전기 마법을 배운 이유도 그것 때문이죠. 참고로 제가 가지고 다니는 태블릿 PC도 제가 직접 개조한 거랍니다?”
씨익 웃으며 엄지로 스스로를 가리키는 마빡 아가씨. 음, 우리 아가씨의 취미가 이런 공대 너드스러운 것이었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손바닥을 비비며 우리 아가씨는 무질서하게 나열되어있는 전자 장비들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응시한다.
“그리고, 당신이 요청한 물건들도 다 여기에 있죠! 무선 wifi가 되는 USB포트하고, 통신되는 이어폰 마이크까지!”
“오.”
“전자 장비도 있으니까 오늘 한 번에...”
-꼬르륵.
그런 마빡 아가씨의 말을 끊어버리는 큰 소리, 나와 마빡 아가씨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린 방향을 응시했다. 여전히 서예린은 담담한 표정으로 있다. 다만, 귀 끝이 살짝 붉어졌을 뿐. 그에 아가씨는 빙긋 웃었다.
“일단, 슬슬 저녁 시간인데 아래에서 밥부터 먹죠?”
8.
토요일 새벽 3시, 삼엄한 리버 벨리에 ‘밤손님’이 찾아들었다.
송파구의 아파트 중에서 최고의 방범 시설을 갖춘 성채. 곳곳에 설치된 CCTV와 열-마력 감지 센서, 그리고 경비견들과 순찰을 도는 경비원들이 물샐틈없이 경계하고 있었지만... 이 특별한 밤손님은 그들의 상식을 능가했다. 평범한 눈으론 볼 수 없었고 소리 또한 전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외부에서 침입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부터 시작했다
-스르륵...
A동 지상 33층의 창문에서 출발한 밤손님, 그녀는 아파트 창문을 사다리처럼 타고 내려갔다. 그렇게 지상에 착지한 뒤엔 곳곳에 깔린 CCTV와 열-마력 감지 센서가 없는 사각 지대로 움직였다. 거주자 전용 하늘 공원을 200m 가량 돌파하여 C동까지 접근한 밤손님은-.
“흡!”
C동의 벽을 타기 시작했다.
5m가량 도약해서 부엌 쪽 창문을 붙잡은 후, 소리 없이 다음 층 창문을 향해 도약한다. 그렇게 순식간에 13층까지 쭉 올라간 뒤, 그녀는 조심스럽게 부엌 쪽 창문을 열었다. 한 사람이 들어가기엔 좀 작은 편인 창이었지만-.
-스륵.
고양잇과 맹수처럼 유연하게 몸을 비틀며 소리 없이 안으로 들어간다.
잠시, 숨을 죽이며 별 다른 인기척이 없다는 걸 확인한 그녀는 그제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표는 안방, 처음 방문한 곳이지만 이미 평면도와 내부 사진을 봤기에 거침이 없었다. 그렇게 안방 앞까지 이동한 밤손님은 집주인의 숨소리를 듣곤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꺼낸 것은 호두알 크기의 투명한 구슬
조심스럽게 마력을 불어넣자 구슬은 소리 없이 기화하기 시작한다. 빠르게 작아지는 그걸 그녀는 목표가 있는 방에 굴려 넣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안방 문을 닫은 뒤, 5분가량 밖에서 시간을 때웠다가 다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서 자고 있는 중년 여성
숨소리가 고르단 걸 확인한 후, 밤손님은 책상 옆의 서랍장을 열고 노트북을 꺼냈다. 꽤나 큰 소리가 났지만 바로 옆의 집주인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 노트북을 메고 온 가방에 넣은 후, 이어서 밤손님은 호주머니에서 젓가락 하나를 꺼내 옆의 책장에 쪼그려 앉았다.
“...”
책장과 바닥 사이의 작은 틈, 손가락이 들어가지 않는 작은 공간에 젓가락을 넣고 조심스럽게 쓸었다. 그러자 USB하나 튀어나온다. 부주의로 바닥에 떨어트려 잃어버린 것 같은 그 USB도 밤손님은 조심스럽게 메고 왔던 가방에 넣었다.
그 뒤, 밤손님은 다시 가방을 메고 들어왔던 부엌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9.
깔끔하게 저녁 식사와 후식까지 조진 뒤, 우린 돌아와서 각자 준비를 시작했다.
마빡 아가씨는 컴퓨터와 전자 장비들을 점검하고 조립했고, 나는 <관찰자의 눈>으로 리버 벨리의 윗층에 경보장비가 없나 확인하고 작전을 세웠다. 그 뒤, 기숙사 오피스텔에 돌아가서 내가 쓰는 수면제를 왕창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 수면제들을 <연금술>로 후(後)가공했다.
마력을 넣으면 기체로 기화하도록. 혹시 서예린이 장비를 빼돌리는 도중에 깨어날지도 모르니까 확실히 잠재우기 위해서 생각해낸 거지. 전문적인 연금술 설비가 없이 해서 성능은 좀 떨어지게 됐지만 그래도 대충 되더라.
서예린?
걔는 방에서 혼자 미튜브 보면서 멀뚱멀뚱 시간을 때웠어. 어찌됐든 그렇게 열심히 세부 준비를 마치고, 경비가 가장 느슨해 보이는 시각에 작전에 돌입했다. 그렇게 작전이 시작된 지 20분 가량 됐을 때-,
“다녀옴.”
열어놨던 창문을 통해 서예린이 들어왔다. 그 모습에 긴장하고 있던 마빡 아가씨가 반색한다.
“와, 엄청 빠르시네요?”
“쉬움. 여기.”
쿨하게 대답하며 메고 있던 가방을 넘기는 서예린, 혹시 모르니까 지문이 묻지 않도록 라텍스 장갑을 낀 뒤에 아가씨는 그 안에서 노트북과 USB를 꺼냈다.
“자, 먼저 USB부터 확인해보시죠.”
USB를 자기 앞에 세팅해둔 컴퓨터를 꽂는 아가씨. 모니터에 프로그램이 켜진 걸 보면서 뭔가를 확인하는 눈치인데 얼마 안가 고갤 끄덕였다.
“기존의 인가 방어벽도 뚫고 자료를 이동해도 기록이 안 남는 걸 보면 이 USB는 황금 열쇠가 맞군요. 그 안에 든 문서 파일의 제목은... ‘외부 간섭에 따른 마력 각성자의 신체 근전도 변화’. 일단, 자료는 제 컴퓨터로 복사해놓고 나중에 확인하도록 하죠. 그리고...”
USB가 연결된 컴퓨터 본체 내부를 관찰하는 마빡 아가씨, 진짜 USB에서 스파크가 뿜어져 나오며 하드웨어와 접촉하는 모습에 그녀는 혀를 내둘렀다.
“진짜 마법을 이용해서 장비에 간섭하고 있네. 나도 할 수 있는 거긴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회용 마법 물품을 만들었지? 특별한 재료가 들어갔다면 국립과학연구소에서 다 밝혀냈을 텐데??”
“아무튼 그걸로 스파이란 게 증명된 거죠?”
“...예, 증명한 걸로 치죠.”
이어서 마빡 아가씨는 노트북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드라이버와 조각칼을 들고 앞판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거침없는 손길, 딱 봐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네. 아주 간단하게 분해를 마친 아가씨는 USB포트 부분을 노트북에서 떼어놓고 준비해둔 USB 포트를 넣었다.
“좋아, USB교체는 끝났고.”
이어서 배터리로 보이는 것도 뜯어낸 뒤에-.
-빠지직!
전격 마법을 일으키신다. 손안의 배터리에서 잠깐 동안 스파크가 튀고 아가씨는 이내 살짝 혀를 차며 배터리를 내려놓는다.
“역시, 좀 많이 닳았네. 교체하는 게 좋겠어.”
“네? 굳이 그걸...”
“제가 끼운 USB 해킹 포트는 그 소모 전력을 노트북 전력에서 끌어온답니다. 자체 wifi 기능이 있어서 전력 소모량이 조금 늘어나죠. 들킬 수도 있으니 새 걸로 바꿔놓는 게 좋아요. 다행히 노트북 기종에 대해 말해줘서 적당한 걸 가져왔죠.”
옆에 둔 배낭에서 배터리까지 꺼내 능숙하게 교체하는 아가씨, 그렇게 다 조립하곤 아가씨는 노트북을 켰다. 비밀번호가 걸려 있어서 직접 조작까진 못했지만 아가씨는 집안에 설치한 wifi 수신기에 불이 들어온 걸 보곤 고갤 끄덕였다.
“좋아, 정상적으로 신호가 잡히네. 설치 끝! 예린씨, 이걸 다시 원래대로 옮겨주시겠어요?”
“음.”
USB와 노트북을 건네는 마빡 아가씨, 충실한 부하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받은 서예린은 다시 가방을 넣고 창문 밖으로 사라진다. 거참 오바도. 그렇게 서예린이 사라진 뒤, 마빡 아가씨는 빼돌린 자료를 훑어보는데 여념이 없었다.
옆에서 나도 힐끗 보니...
“저 사진, 인체 실험 아닌가요?”
인체 실험에 가까운 해부 사진까지 보인다. 사진을 보니 저주 걸린 마법장비에 대한 인체 테스트 같은데 살벌하네. 으음, 스파이가 자료를 빼돌릴 때 내용은 보지 않고 빼돌려서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는 몰랐는데... 보기가 좀 그렇구만.
그런 내 질문에 마빡 아가씨는 잠시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다가 이내 천천히 고갤 저었다.
“오크니까 ‘인체’는 아니죠. 우리나라에선 오크는 사람으로 취급 안하니까. 그러니 밝혀져도 냉정하게 따지면 인권 문제는 아니에요.”
“흠. 그래도 좀 안타깝...”
“근데, 혼혈에 대한 실험도 몇 개 있는 것 같은데 밝혀지면 좀 논란이 되긴 하겠네요.”
혼혈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찡그려진 미간의 골이 더 깊어졌다. 마빡 아가씨도 나와 비슷하게 얼굴을 구기고.
“아마, 뉴 송파구 오크 쪽에서 공급해준 거겠죠.”
“...뉴 송파구에서요? 아니, 자료 중에 오크도 있지 않았어요?”
“예, 오크도 있었죠.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에요. 토굴 부분의 뉴 송파구 지역은 좀 낫지만 이전 송파구-‘진짜 밑바닥’은 사실상 무법지대니까. 적당한 오크나 사람을 구해서 ‘끽!’.”
목을 치는 시늉을 하는 아가씨, 그리곤 그녀는 어깰 으쓱였다.
“괜히, 미궁 출신 인간들이 이종족을 경계하고 이를 가는 게 아니에요. 뭐, 이렇게 비슷한 짓을 하는 걸 보면 인간도 욕할 처지는 아니지만.”
이곳에 떨어지기 전, 난 꿈을 꾸면서 인간을 사냥하고 그 시체를 먹던 이종족(놀과 오크, 오우거)들을 봤다. 그렇기에 이종족에 대한 적개심을 숨김없이 드러냈지. 하지만, 지금은 많이 희석된 편이다. 특히, 혼혈 애들에 대해 알고 친분을 좀 쌓고 나서부터 더더욱.
아무리 이세카이라지만 한국에서 저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니...
그렇게 분위기에 휩쓸려서 심각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같이 보고 있는데, 서예린이 나갔던 창문이 열리고 닫힌다.
“다녀옴.”
이전보다 훨씬 빨리 다시 나타난 서예린, 그에 마빡 아가씨는 보고 있던 자료를 내리곤 고갤 끄덕였다.
“이걸로 일은 다 끝났군요. 다들 고생하셨어요. 아, 이제 보수를 드려야죠?”
생각났다는 듯이 컴퓨터가 있는 탁자 아래쪽에 뒀던 클래식한 007 가방을 쥐는 마빡 아가씨. 영화에선 저런 곳에다가 금괴나 돈을 담던데 말이지. 마빡 아가씨는 의미심장한 웃음과 함께 가방을 탁자 위에 놓더니 그 잠금 장치를 풀고 열었다.
“오!”
“···!?”
드러나는 것은··· 가방을 가득 채운 5만원권 지폐다발! 어억···! 수도권 아파트가 저 가방 안에 있는 건가?! 아니, 요즘은 저걸론 부족한가? 아무튼 많은 돈이긴 하지. 영화에서나 보던 광경에 난 감격했고, 서예린도 눈이 핑핑 돌아가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서민들의 반응이 마음에 든 것인지, 마빡 아가씨는 사악하게 웃으며 가방을 내 쪽으로 민다.
“정확히 5억이에요. 이걸로 계산은 끝난 거죠?”
“그렇죠. 하하!”
웃으면서 난 그 보수를 받아들였다. 크으, 한 탕에 5억이라니··· 나, 출세했구나! 이걸로 은행빚에서 완전히 탈출인가? 그렇게 희희낙락하고 있는데 옆에서 서예린의 시선이 느껴진다. 아, 5천만원은 서예린의 보수로 줘야지. 그래도 4억 5천 남으니 전혀 아깝지 않아!
총 10개의 지폐다발을 꺼내서 옆에 내려놓은 뒤, 난 활짝 웃으며 서예린에게 내밀었다.
“자, 이번 보수랍니다. 고생하셨어요. 예린씨. 일이 있으면 다음번에도 함께하죠.”
“···”
“···저, 예린씨?”
돈을 내밀어도 받지 않고 말없이 서류가방에 든 나머지 돈 다발을 바라보는 서예린, 그 안에 서린 탐욕을 뒤늦게 눈치 챈 난 재빨리 가방을 닫았다. 그리곤 뺏기지 않도록 내 가슴팍에 끌어 앉으려고 했는데-.
“왜... 왜 이러시는 거예요...”
어느새 뻗쳐온 서예린의 마수(魔手)가 가방을 짓누른다. 내 항의에 서예린은 날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반 달라.”
“바...반을요? 아니, 처음 계약에는 5천만원...”
“반 달라!”
언성을 높이며 두 눈을 빛내는 서예린, 하지만 나도 양보할 순 없다.
“바..반이면 2억 5천이잖아요. 어떻게 약속 금액의 5배나 더 받으려고 해요? 그래도 노력해주신 게 있으니까... 1억 드릴게요. 2배예요. 2배!”
“반.”
“아니, 제가 알아낸 거 아니었으면 침투하기 힘들었잖아요? 그런 뒷조사가 돈과 노력이 매우 많이 든답니다. 그리고, 이번에 쓴 특제 수면제도 제가 만든 거라고요! 그거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요? 마력 가공이 가능한 연금술사들이나 만드는 거예요!”
“반 달라.”
“조··· 좋아요! 3배! 1억 5천!”
“···”
“아가씨! 진아씨! 어떻게 좀 말해줘 봐요! 아니, 하청이 수익의 반을 달라고 하다니!”
아니, 정당한 계약에 따른 거래이건만 내가 돈을 더 받는다고 해서 이렇게 땡깡을 놓다니...! 아직 서예린은 자본주의에 대해 잘 모르는 게 틀림없다. 그렇게 불만을 토하는 서예린을 진정시켜보라는 의미에서 옆의 마빡 아가씨에게 도움을 청했건만-.
“참나, 이게 무슨 기업인가요? 그냥 팀으로 했으니 n빵하는 거지.”
“···”
“그리고, 솔직히 그쪽보단 예린 양이 더 열심히 한 것 같은데요? 게다가 5억 받으면서 예린 양에겐 고작 5천만원 주고 나머진 혼자 꿀꺽 하려고 했어요? 그건 좀 심하다.”
전혀 다른 결론을 내렸다.
아니, 뒷조사가 얼마나 힘든 건데...! 그 상도덕을 무시한 배신에 나는 치를 떨었고 서예린은 마빡 아가씨의 지원에 의기양양해진다. 이런 것까지 언급하긴 싫었는데··· 있는 힘껏 007가방의 손잡이를 당기면서 난 비장의 수를 꺼냈다.
“아니, 제가 나머지 시험지도 구해주기로 했잖아요! 그거 구하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요?! 그런 것까지 받으면서 받은 돈의 반을 달라고요? 자꾸 그러면 저도 했던 약속 바꿀 거랍니다!”
비장의 수단, 중간고사 시험지의 언급에 그제서야 찔끔하는 서예린. 그와 함께 가방을 짓누르는 그녀의 마수가 느슨해졌고 나는 성공적으로 가방을 빼앗아 가슴팍에 곱게 껴안을 수 있었다. 마이... 프레셔스! 그래! 그래야지!
하지만, 그 모습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마빡 아가씨는 미간을 찡그린다.
“시험지? 그게 뭔가요?”
날카롭게 추궁해오는 그 목소리에 난 잠시 고민했다. 기색을 보니 적당히 둘러대긴 그른 것 같은데... 에잇, 어차피 이번에 한 일에 비하면 중간고사 시험지를 빼돌리는 건 별 큰일도 아니기에 순순히 진실을 토해야겠다.
“예린씨가 듣는 인터넷 수업의 시험지에요.”
“인터넷 수업?”
“미르의 선택 수업 대신 듣는 대학교 교양 과목인데, 예린양이 공부를 안 해둬서 막막하기에 제가 구해주기로 했죠. 후후!”
“...하, 고작 그런 걸로 1억을 퉁치려고 한 거예요?”
내 대답에 코웃음을 흘리는 마빡 아가씨, 코웃음 치는 그 반응에 난 반사적으로 불길함을 느꼈고 아가씨는 정답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처럼 서예린을 향해 빙긋 웃는다.
“예린씨, 그거 내가 구해다 줄게요.”
“···!?”
“그깟 대학교 시험지, 작정하고 구하려고 하면 별거 아니죠. 어떤 과목인 건지 말해주세요. 전 저런 쪼잔한 놈과는 달리 전 아주 관대하답니다. 그러니까 시험지 따위에 발목 잡히지 말고 당당히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세요.”
날 가리키며 말하는 싱긋 웃는 마빡 아가씨, 그에 답하듯 서예린도 환하게 웃는다.
정직원 노조를 무시한 채, 비정규직 하청과 직접 거래하려는 그 사악한 대기업의 행태에 난 부들거렸다. 아니, 이 사악한 부르주아가 서민 노동자의 피를 빠는구나! 그냥 무시해야··· 아니, 그럼 진짜 왕따 되는 건가? 안 그래도 아싸인데···!
“반.”
“...”
“반! 달라!”
용역 깡패처럼 탁자를 쾅쾅 치며 소리치는 서예린. 계약을 무시하는 부당한 행태였지만, 그 살벌한 기색에 난 결국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바... 반 드릴게요. 반.”
“그럼 주는 김에 원래 약속했던 시험지까지 해줘요.”
가만히 보고 있던 마빡 아가씨의 후속타, 아니 돈을 반이나 뜯어가면서 시험지까지 가져다가 바치라고? 그런 내 억울한 시선을 느낀 건지. 아가씨는 혀를 한 번 차곤 고갤 절래절래 저으며 말을 이어나간다.
“새벽씨. 당신, 능력에 비해 되게 쪼잔한 거 알아요?”
“...”
“고작 돈 얼마 가지고 그렇게 치사하게 굴어요? 작은 거에 연연하면 크게 될 수 없답니다. 어차피 돈 나가는 거, 통이 크다는 걸 보이는 게 낫죠. 예린양처럼 대단한 사람이랑 친분 쌓는 게 쉬운 줄 알아요? 그냥 해줘요.”
“...”
“쯧, 그래요. 제가 추가로 천만 원 드릴게. 그걸로 예린씨 시험지들 구해줘요.”
“...”
“싫어? 그럼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서 구할...”
“하, 할게요. 시.. 시험지까지···”
이것이 원천기술을 빼앗아가고 먹고 떨어지라는 듯이 부스러기를 주는 재벌식 갑질인가... 그 부스러기라도 먹어야 살림이 나아지기에 난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받아들였고, 반대로 서예린은 활짝 웃는다.
“좋음, 감사! 좋음, 반!!”
빚더미에서 탈출하나 싶었는데 이렇게 되다니... 서먹함이 사라지고 어느새 서로를 보며 꺄르륵 웃는 서예린과 남궁진아. 이··· 이 개년들···
“주셈.”
“앗..아아아.”
이어진 서예린의 마수는 내 품에서 가방을 빼앗고 내 정당한 권리-황금빛 지폐를 강탈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