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간. 결국 들킨 병신 >
1.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 마빡 아가씨는 함께 자축하자며 거실 냉장고에서 병맥주와 마른안주들을 가져왔다.
그 뒤, 다 같이 건배하고 함께 병나발을 불었지. 작정하고 준비한 듯, 마빡 아가씨는 병이 빌 때마다 냉장고에서 서리가 낀 맥주를 계속해서 가져왔는데 그렇게 술이 계속 들어가다 보니 분위기가 많이 화기애애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서예린과 남궁진아’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나? 2억 5천만 원 뜯기고 즐겁겠냐!?
뭔 소리하는지 모르겠지만 두 사람의 ‘꺄륵! 꺄르륵!’ 거리는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난 서러움에 계속 병나발 불다가 필름이 끊겼다. 파르스름한 새벽에 정신이 돌아왔는데, 한 손엔 초코 우유를 쥔 채 버스를 타고 있더라. 눈앞에 떠 있는 <메모장>에는 서예린이 듣는 인터넷 수업 목록이 떠 있었고.
...숙취에 시달리는 머리통을 굴려가며 생각해보니 지금 타고 있는 버스가 <메모장>에 적힌 사이버 대학의 방향이더라고?
필름이 끊겨서 기억은 안 나지만 정황상 일하러 움직이고 있던 것 같다. 거참,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 처먹어도 자지 않고 꿋꿋이 일하러 나오다니... 하긴, 자는 건 될 수 있으면 안하는 게 옳은 거니까. 일하는 게 훨씬 낫지.
그럼 별 수 있나? 일해야지.
쓰린 속을 초코 우유로 달래면서 사이버 대학교에 도착, 인포 데스크에서 묻거나 <과거시>로 강사들의 신상 정보를 알아낸 뒤에 직접 만나기 위해 서울-경기권을 돌아다녔다. 그나마 대학이 서울에, 강사들도 근처에 있어서 하루 만에 다 찾아내서 시험문제를 베낄 수 있었다.
그렇게 토요일을 깔끔하게 혹사시킨 뒤, 일요일 아침에 기숙사 돌아와서 약 먹고 잤다.
교수가 어디 있는지 알기 위해 <과거시>를 남발한 여파가 생각보다 컸다. 고작 천만 원 때문에 잠을 자야 할 정도로 혹사하다니... 돈 때문에 반사적으로 하겠다고 한 병신 같은 과거의 날 저주하면서 잤지.
그렇게 공포에 질린 채 잠에 빠지고 다시 일어나니 화요일 아침이었고...
“자, 다 왔다. 여기, 아주 괜찮은 곳이야.”
오후 8시, 평소 같으면 일터에서 싸장님과 같이 배달 음식을 먹고 있을 시각. 하지만, 오늘은 웬일로 싸장님이 외식하자고 해서 밖에 나왔다. 그렇게 싸장님이 안내한 곳은 며칠 전에 마빡 아가씨의 아싸단 합류 축하 회식을 했던 복어 요리집 앞이었다.
익숙한 일본풍 나무 간판을 보며 내가 쓴 웃음을 짓는 동안, 싸장님은 앞장서서 움직이며 말을 이어나가신다.
“사실, 여기 요리사 아저씨가 나랑 친분이 있거든? 호텔에서 주방장하고 계신 걸 내가 100% 성공할 테니 이쪽에 오라고 꼬셨어. 무이자로 대출도 해드렸지.”
“오, 그랬나요?”
“그래, 이종족들이 송파구 밖으론 나가기 힘들잖아? 나간다고 해도 좀 까다롭고. 그래서 돈이 많이 있어도 못 먹는 게 있어요. 사회적 지위가 있는 이종족들은 그게 좀 불만이 크지. 그런 것들 중 하나가 복어 요리야. 아마 안에 이종족들도 꽤 있을 테니 놀라지 마라.”
“넵넵.”
나도 안다. 저번에 갔을 때, 손님이 고급스런 정장을 입은 엘프와 오크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일본풍으로 꾸며진 실내에서 한 테이블에 앉은 오크와 엘프가 담소를 나누면서 젓가락으로 우아하게 초밥을 먹고 있는 광경은... 어느 정도 이 세계에 적응이 된 나도 좀 묘하더라.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싸장님은 느릿하게 바테이블 쪽을 향해 손을 흔든다.
“여, 아저씨. 장사 잘 되십니까~”
그리 크진 않지만 충분히 들릴만한 또렷한 음성으로 말하는 싸장님, 그 말에 테이블 안쪽에서 회 뜨고 있던 아저씨가 우릴 보더니 말없이 웃으며 꾸벅 고갤 숙인다. 진짜 아는 사이인갑네.
근데, 바 테이블 앞에 있는 손님들의 뒷모습이 좀 많이 낯익...
“...어라!?”
놀라는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두 사람 중 덩치 큰 쪽이 고갤 돌려 날 바라본다. 힙한 옷차림에 육감적인 몸매, 이질적인 까만 피부, 얼굴에 나있는 커다란 두 개의 상처와 야성이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 서예린이었다. 손에는 사케로 보이는 컵을 들고 있네.
“새벽씨?”
이어서 나머지 한 명도 돌아본다. 마빡 아가씨. 이쪽도 술을 마신 듯 얼굴이 붉다. 이젠 나 빼고 두 사람이 서로 놀고 있네. 나는 그지 같이 일하다가 온 건데, 내 돈을 약탈한 저 두 무법자는 향락을 즐기고 있구나! 억울하다...! 억울해! 나 너무 억울해서 손발이 부들부들 떨려...ㅠ
근데, 이쪽을 본 두 사람의 반응이 좀 기괴하다.
“저분은...?”
아주 조심스럽게 내 옆에 있는 싸장님을 향해 말하는 마빡 아가씨, 아무리 봐도 이미 알고 있는 눈치다. 상식적으로 초딩으로 보이는 애한테 저분이라고 말할 순 없거든. 하긴, 마빡 아가씨 상향으론 내 뒷조사도 했을 테니 누군지 알겠지.
“아, 이분은 강수영이라고 제가 알바 뛰고 있는 곳의 싸장님이예요. 싸장님, 여긴 남궁진아라고 같은 반 친구랍니다. 옆에도 같은 반인 서예린이고.”
“···친구? 너, 친구도 있었냐? 알바하면서 맨날 자기는 하드코어 아싸라고 한탄하고 징징거렸는데?”
“싸장님···”
그렇게 소개하자 날 놀리는 싸장님, 그럼 일단 친구라고 불러야지 뭐라고 부릅니까··· 내가 말끝을 흐리자 싸장님은 피식 웃었고 마빡 아가씨는-.
“아! 안녕하세요! 남궁진아라고 합니다!”
먼저 공손하게 꾸벅 머릴 숙인다. 음, 겉으로 보기엔 잘나가는 일찐 고딩이 초등학생에게 인사하는 것 같네. 쓰읍, 저 거만한 재벌 아가씨가 저렇게 살갑게 대하다니... 역시, 우리 싸장님! 정말 데~단해.
그렇게 과도하게 공손한 모습에 싸장님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고갤 갸웃거린다.
“너, 나 아냐?
“그.. 잘 알죠. 저희 회사에 물품을 공급해주시는데요.”
“회사? ...남궁? 너 혹시 DK그룹이랑 관련 있니?”
“네, DK 신소재 사장인 남궁원이 제 아버지세요.”
이어진 소개에 싸장님은 느릿하게 고갤 끄덕였다.
“그럼 날 알만도 하지. 그나저나 날 알 정도면 회사 실무에도 어느 정도 관심이 있다는 건데, 웬만한 재벌집 애들보다 훨씬 나은 걸? 그리고...”
싸장님는 시선을 옆으로 옮긴다. 거기엔 싸장님을 보며 경계하고 있는 서예린이 있다. 한쪽 손을 뒤로 뻗은 것을 보니 여차하면 허리춤에 멘 단검을 꺼낼 기세, 그 모습에 싸장님은 피식 웃으며 손을 휘휘 내젓는다.
“넌 미궁 출신이지? 딱 봐도 알겠다. 긴장 풀어, 여긴 밖이야. 밖에선 밖의 룰을 따라야지.”
“음, 서예린 입미다.”
“그래, 그래.”
조심스럽게 긴장을 푸는 서예린을 향해 고갤 끄덕이는 싸장님, 우리 싸장님의 몸놀림이 범상치 않다는 걸 알긴 알았는데 저 서예린이 긴장할 정도라니 생각보다 더 대단할 지도? 어찌됐든 그렇게 두 사람과 인사를 마치곤 싸장님은 고갤 돌려서 가게를 훑곤 미간을 찡그린다.
“아저씨, 남는 자리 없어요?”
“음, 방까지 꽉 찼구나. 좀 기다려야겠는 걸?”
“아오, 너무 잘 되도 문제네. 야, 쫌만 기다리자? 여긴, 그럴만한 가치가 있어.”
음식점 사장님의 말에 혀를 차며 기다리자고 하는 싸장님, 그걸 들은 마빡 아가씨가 재빨리 끼어든다.
“아, 저희 자리에 앉으세요. 슬슬 식사도 다 했고 곧 나가려고 했거든요.”
“오, 그래? 고맙다. 보답으로 밥값이라도 내줄까?”
“아뇨, 괜찮습니다. 제가 친구한테 밥 한끼 사겠다고 해서요. 이럴 때 돈을 안 쓰면 생색을 못 내죠.”
방긋 웃으며 고갤 젓는 마빡 아가씨. 옆에 앉아있던 서예린도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선다. 쓰읍, 진짜 내숭하곤··· 마빡 아가씨의 본 모습을 알고 있는 나로선 진짜 보기가 힘드네. 그렇게 내가 속으로 구시렁대고 있는데, 마빡 아가씨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날 향해 고갤 돌린다.
“아, 새벽씨? 예린씨에게 들었어요. 일요일 아침에 자료를 보냈다면서요?”
“예, 바로 보냈죠.”
빼돌린 시험지 이야기하는 거다. 일요일 아침에 돌아온 뒤, 어차피 잘 거 한 번에 일 몰아서 하자는 마음에 공책에 찍어내고 그냥 그걸 폰으로 찍어서 보냈거든. 자기 싫어서 미적거리느라 그런 감도 있고. 어찌됐든 그런 내 대답에 마빡 아가씨는 고갤 끄덕인다.
“그 비용은 나중에 드릴게요. 월요일에 주려고 했는데, 미르에 안 와서 말이죠. 지금은 없네요.”
“...비용? 뭔 소리야?”
아가씨와 내 대화를 듣더니 요상한 표정으로 말에 끼어드는 싸장님, 그에 마빡 아가씨는 술에 취해 살짝 붉은 얼굴로 빙긋 웃으며 설명한다.
“저번 주에 잠깐 일손이 필요해서 새벽씨의 힘을 빌렸거든요. 일종의 단기 알바라고 해야 할까요?”
“...저번 주?”
그 말을 듣곤 미묘하게 미간이 구겨지는 싸장님. ...그러고 보니 저번 주 우리 싸장님 알바를 깔삼하게 싹 다 제꼈지? 그런 싸장님의 모습에 내가 다급하게 변명하려고 했는데, 우리 마빡 아가씨는 눈치 없게 웃으며 고갤 끄덕인다.
“네, 새벽이가 적극적으로 도와줘서 빨리 끝낼 수 있었어요. 하하.”
“...”
“...어? 예린아, 왜?”
서예린이 아가씨 뒤에서 몰래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뒤를 돌아본 아가씨가 식은땀 흘리는 서예린의 ‘폭발, 도망쳐.’라는 입 뻥긋거리는 걸 보곤 그제서야 이상함을 눈치 채신다. 술에 취에 알딸딸하게 웃던 표정도 다시 돌아오고...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예린아, 가자.”
그리곤, 황급히 싸장님에게 고갤 꾸벅 숙이곤 서예린과 함께 빤스런 한다.
...아니, X발?!
왜 저딴 말을 지금 꺼내는 거지?! 적극적으로 도와줬다고?! 금요일을 제외하면 별로 도와준 것도 없잖아! 그것도 오해하기 딱 좋게 비용이라는 말을 곁들여서! 뭐, 사실이긴 해도!
남겨진 나와 싸장님, 서빙 하는 알바생이 바 테이블을 정리하는 동안에-.
“...그러고 보니 저번 주에 우리 가게 알바 싹 다 빠졌지?”
싸장님의 심문이 시작됐다. 그 추궁에 내가 아무런 말을 못하는 가운데, 싸장님은 어느새 얼굴을 펴고 만면에 웃음을... 일그러진 표정보다 더 섬뜩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미르도 빠졌다고 하기에 난 니가 ‘마법사 시험 본 뒤에 뒤늦게 몸살이라도 났나?’ 했다니까? 하.하.하.”
“···”
“그래서 좀 보신시켜주려고 복어집에 데리고 왔는데··· 나 몰래 알바를 하고 있었네?”
“...”
“그래, 재벌 아가씨가 부탁한 단기 알바 페이가 달달하든? 응? 하긴, 나 같은 자영업자가 주는 돈으론 만족 못하겠지. 내가 잘못했네! 우리 유능한 알바생을 못 알아보고! 하긴~ 지금 어딜 가도 억대 연봉 받으실 실력자신데 말이야. 하.하.하.하.”
치와와, 미친 치와와가 윗몸을 드러내며 옆에서 있었다. 에일리언에 위협당하는 가련한 여주인공처럼 난 그 살기(殺氣)에 굳어 아무런 변명 또한 하지 못했다. 그렇게 아무런 반박도 못하고 속으로 시X, X발 거리고 있는데...
“이쪽으로 오세요.”
알바생이 탁자를 다 치우고 앉아도 된다고 안내한다.
“됐다. 밥이나 먹자.”
“···네.”
그에 부자연스런 웃음을 풀곤 자리에 털썩 앉는 싸장님. 나도 조심스럽게 그 옆에 앉았다. 그··· 쿨하게 넘어가시는 건가? 여윽시! 우리 싸장님은 마음이 하해와도 같···
“개도 먹을 땐 건드리지는 않잖아?”
“...뎃!?”
뒤에 이어진 말에 내 몸이 덜컥 굳은 가운데, 횟집 아저씨가 직접 따라준 찻잔을 기울이며 싸장님은 내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밥 다 먹고 작업장 가서 보자.”
“...”
“너, 마법사 시험에서 종합 전투 2급이라고 평가 받았다고 했지? 어디 그에 걸맞은 실력인지 보자고.”
“데..데...”
“각오하세요! 분충!”
“데갸아아악!”
그날, 강수영의 물약 상점은 해골 세 개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