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스며드는 핏물 >
1.
싸장님에게 ‘알바 땡땡이, 닷씨는··· 닷씨는 안 하겠소!’+‘한 달 간 하루 12시간 노동예속 선언’을 하고 일주일 뒤, 미르의 중간고사 시즌이 도래했다.
중간고사, 진짜 학창 시절엔 ‘학교가 무너지거나 전쟁이 나서 안 했으면 좋겠다.’라는 철없는 생각이 들게 하던 악몽. 하지만, 이 몸으로 다시 겪으니 그냥 별 생각 없었다. 솔직히, 시험지를 다 빼돌린 상태니 긴장이랄 것도 없지. 시험지를 받자마자 기계적으로 미리 풀어놨던 답을 채워 넣었다.
양판소 헌터 학교에서 일어날 법한 헤프닝?
그딴 거, 있을 리가 없잖수...
오히려 시험 기간 동안은 평상시보다 더 평온했다. 시험 끝날 때마다 채점을 해보니까 예상대로 전부 만점, 근데 워낙 결석 일수가 좀 많아서 전교 1등은 안될 것 같다. 그냥 장학금만 받을 정도로 나왔으면 좋겠어. 뭐, 서예린도 기색을 보아하니 대충 잘 본 듯했다.
-딩동~♬ 댕동~♬
“자, 시간 다 됐으니 마킹펜을 내려놓으세요.”
그렇게 중간고사의 마지막 날 금요일, 마지막 공통과목 시험이 끝났다.
사실상 중간고사 끝, 시험 감독으로 들어왔던 선생이 OMR카드를 걷어서 사라지자 애들은 삼삼오오 모여 떠들면서 곧바로 PC방이나 노래방, 혹은 점심을 먹으러 사라졌다. 항상 은따였던 서예린도 마빡 아가씨의 권유에 은근슬쩍 마빡 아가씨의 패거리에 끼었네. 겉도는 분위기긴 해도 말이지.
···싯팔, 난 또 혼자 밥 먹게 생겼구나ㅠ
항상 혼자 먹긴 했다만 중간고사가 끝나 축제 분위기 같아서 그런지 오늘 따라 더 서럽다. 그렇게 아싸찐따의 비애를 맛보며 반 애들이 거의 다 나간 교실에서 느릿하게 빈 가방에 채점한 시험지를 쑤셔 넣고 있는데... 뒤쪽에서 나와 똑같이 어깨가 축 늘어진 채로 혼자서 가방을 싸고 있는 애가 보였다.
우리 대환이네.
지난번에 날 상대로 일찐놀이하다가 참교육 당한 녀석, 영상이 퍼지진 않았지만 내게 두들겨 맞고 오줌까지 지린 사실이 어느새 전교에 좍 퍼졌더라. 오후 선택 수업을 듣고 종례 없이 서로 뿔뿔이 흩어지기에 따돌림 당하는 모습을 많이 보진 못 했는데 이렇게 또 보게 되네.
그래도 혼자는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을 느끼며 쓰게 웃고 있을 때, 대환이가 내 뒤통수를 빤히 바라본다.
앙 다문 이빨, 부릅뜨며 부라리고 있는 두 눈. 아마, 자기가 이런 꼴이 된 게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자업자득인데 말이야. 그렇게 몰래 내 뒤통수를 보며 원한을 불태우는 모습에 난 피식 웃었다. 그리곤, 가방을 매곤 고갤 돌려 놈을 바라봤다.
내가 고갤 돌려 바라보기 무섭게 시선을 아래로 깔며 가방을 싸는 대환이
그 귀여운 모습에 난 느긋하게 걸어가다가 놈의 옆에 멈춰 섰다. 그리곤 살짝 허릴 숙여 내 시선을 피하고 있는 대환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20cm이상 차이나는 신장, 체격이 나보다 2배 이상 컸지만 오히려 쫀 건 대환이다. 그런 녀석을 향해 난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면서-.
감고 있던 두 눈을 떴다.
대환이의 눈동자에 비치는 유리알 같은 자줏빛 홍채, 그 ‘공포스런 색채’를 보니 자연스럽게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온다. 나도 참, 고작 이런 거에 꼴 받아서 저 저주받을 색채를 다시 볼 생각을 하다니... 나 못지않게 겁에 질린 듯, 떨리는 대환이의 동공을 보며 작게 속삭였다.
“뒤에서 눈 부라리지 마요. 짜증나니까.”
“···”
“하하핳!”
창백하게 굳은 채 말을 못하는 대환이를 뒤로 한 채, 난 다시 선글라스를 쓰고 느긋하게 혼자 밥 먹으러 발걸음을 옮겼다.
2.
미궁이 부상하면서 세계정세는 급격하게 바뀌었고, 그에 미처 대처하지 못한 도시들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전라남도 행정과 정치의 중심이었던 ‘목포’도 그런 수많은 도시들 중 하나였다. 미궁이 나타나기 전엔 대한민국의 유서 깊은 어항(漁港)이자 무역 항구, 새롭게 떠오르던 소비 도시였지만, 미궁 출현으로 인한 여파는 목포를 지탱하던 그 3개의 기둥들을 다 박살냈다.
어업?
미궁이라는 비상식적인 재난에 전 세계적으로 식량 사재기에 성행했고, 중국은 아예 대놓고 한국 영해까지 들어와 물고기를 싹쓸이 해가기 시작했다. 한국 정부는 어떻게 항의도 못하는 상황, 때문에 황해 인근의 어업은 완전히 괴멸했고 목포의 어업 또한 사라졌다.
무역?
대규모 무역항으로 쓰기엔 입지가 나쁘고 교통 인프라도 부산항과 인천항에 비해 부실해서 그리 각광받는 항구는 아니었지만, 중국과의 무역이 있기에 화물 운송량이 꽤 있었다. 하지만, 미궁 부상 이후 중국이 모든 산업 분야에서 자급자족을 추구하면서 무역은 다 끊겼다.
소비 도시?
삽진 산업단지의 중소형조선소들과 그 하청업체들, 영암군에 있는 대기업의 공업단지와 대불국가산업단지로 이뤄진 돈줄이 목포로 흘러들어가는 구조 덕분에 목포가 소비 도시가 될 수 있었는데, 미궁 부상 이후 공장에 들어오는 수주는 거의 다 끊겼다. 당연히, 소비도 사라졌다.
이런 급격한 변화를 목포는 견뎌내지 못했다.
산업의 몰락으로 인한 실업률의 상승, 중산층 소멸로 인한 극단적 양극화, 빠르게 줄어드는 인구, 나빠지는 치안과 치솟는 범죄율... 연쇄되는 악순환의 고리에 목포는 ‘미국의 디트로이트가 있다면 남한엔 목포가 있다.’고 말할 정도로 비참하게 몰락해갔다.
그렇게 16년이 흘렀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계는 미궁이라는 새로운 질서에 적응하고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안정을 되찾았다. 국제 무역도 어느 정도 회복되었고 중국어선 또한 덜 강짜를 부리게 되면서 황해의 어업도 조금씩 나아졌다. 그러나 목포가 가졌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것은 요원해보였다.
-철~퍽! 쏴아아!
그러한 목포 외곽의 한 낡은 방파제, 불빛이라곤 근처의 몇 없는 민박 겸 음식점의 것 밖에 보이지 않는 쓸쓸한 밤바다에선 오늘도 낚시꾼 몇 명만이 찌를 드리운 채 낚시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그 쇠락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에-.
한 ‘불길한 형체’가 방파제에 쌓인 테트라포드를 타고 느릿하게 기어 올라왔다.
한손에 커다란 둔기를 들고 있는 인간 남성의 형상, 하지만 어둠속에서 소리 없이 천천히 기어가는 그 모습은 사람이라기 보단 꼭 커다랗고 새카만 연체동물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방파제를 기어오른 그 형체는 잠시 동안 조용히 주위를 살피다가-.
빛이 없는 구석 쪽에서 방파제 낚시를 즐기고 있는 중년 남성을 향해 이동했다.
낚시찌가 있는 전방이 아닌, 뒤편까지 조용히 움직인 다음에 낚시꾼들의 등 뒤를 이동하는 검은 형체. 낚시꾼들은 자기 뒤에서 움직이는 그 존재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렇게 목표로 삼은 낚시꾼의 뒤에 도착하자 그것은 손에 쥔 나무칼을 살짝 내려놓고-.
“...!?”
튀어 오르듯이 솟구쳐서 낚시꾼을 덮쳤다. 목을 감싸는 축축한 팔뚝, 낚시꾼이 반사적으로 발버둥 쳤지만 그의 목을 쥐어짜는 억센 손아귀는 숨구멍은 물론이고 경동맥까지 짓눌렀다. 결국, 평범한 인간인 낚시꾼은 상황파악도 못한 채 수 초 만에 실신했다.
그 뒤, 괴물은 낚시꾼의 목을 풀며 민활하게 주위를 살폈다.
아직 다른 낚시꾼들은 알아채지 못한 듯한 눈치, 외진 곳에 있기도 하거나와 짧은 발버둥이 만들어낸 소리는 방파제에 부딪치는 요란한 파도 소리에 쓸려 다른 이들에게 닿지 못했다. 그렇게 확신을 얻은 괴물은 기절한 낚시꾼의 멱살을 쥔 채 파도가 밀려오는 바닷가로 향했다.
-철~퍽! 쏴아아!
성인의 키를 훨씬 뛰어넘는 기본 3~5m의 폭의 구조물 테트라포드, 당연히 틈도 많았고 몇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를 가진 곳도 있었다. 유지보수가 되지 않아서 낡았으면 더더욱. 새카만 밤바다를 꿰뚫어보고 적당한 구멍을 찾자 그는 곧바로 잠수했다.
“...!”
몸을 적시는 차가운 바닷물에 낚시꾼이 화들짝 깨어나 버둥거리며 비명을 질렀지만 그저 수면(水面) 아래의 발악에 불과했다. 바닷물 아래에서부터 퍼져나가는 핏물을 새카만 밤의 장막이 가려주는 가운데-.
-철퍽!
몇 분 뒤에 한 남자가 천천히 바다에서 올라왔다.
낚시 바지와 아웃도어 티셔츠 차림의 왜소한 체격의 50대 남성, 바닷물에 펑 젖은 그의 오른쪽 옆구리에는 돌돌 말린 가죽 덩어리를 끼고 있었다. 겉모습만은 완벽하게 바다에 끌려갔던 낚시꾼이었다.
“...”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자리로 돌아온 낚시꾼은 물고기 보관용 아이스박스를 뒤집어 비우곤 옆구리에 끼고 있던 가죽을 집어넣었다. 떨어트린 낚싯대와 커다란 나무 몽둥이를 1m남짓한 낚싯대 전용 가방에 넣고 펼쳐져 있던 캠핑 의자도 접었다.
그렇게 모든 떠날 채비를 마친 뒤, 그는 바닷물에 젖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느릿하게 움직였다.
불빛이 있는 방향으로 향하자 희미하게 시끄러운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술에 취해 흥청망청 거리는 이들과 접대부로 보이는 여자들의 목소리들도. 그 달콤한 재잘거림을 들으며 낚시꾼은, 아니 낚시꾼의 거죽을 뒤집어쓴 ‘괴물’은 차분히 심호흡을 했다.
죽이고 싶다.
신의 축복을 받으면서부터 생긴 충동, 생존이 그 자체로 모든 생명체의 목적이자 목표인 것처럼 ‘지성체의 살육과 유혈’은 이제 그에게 필수적인 행위가 되었다. 지금 저쪽에서 들려오는 생명체의 재잘거림은 그에게 있어서 향기로운 음식의 냄새와도 같았다.
하지만, 괴물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충동을 조절했다.
그는 지성이 있으며 ‘더 큰 걸 위해서’ 잠시 참을 줄도 알았다. 인내를 되새기며 괴물은 주위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들을 경청했다. 그리고, 그렇게 들리는 목소리의 음정과 발음을 해체하며 가볍게 혓바닥을 움직였다.
“에아어으우. 게가거그구고. 오빠 거긴, 안 돼?”
신을 영접하기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학의 교수로 재직했기에 메이저한 중국어와 일본어는 능통했지만 지금 도착한 ‘이런 작은 나라’의 언어까지는 배우지는 않았다. 영어를 써도 통하겠지만 이런 외모라면 이상하게 생각할 터, 최대한 빨리 이 언어를 터득해야 한다. 그래야만...
신께서 내려주신 ‘새로운 목표’를 취할 수 있다.
그것이 있는 방향을 다시 한 번 응시한 뒤, 괴물은 기괴한 중얼거림을 반복하면서 쇠락한 도시의 한복판으로 스며들었다.
3.
전장에서 병사들은 매우 극단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과할 정도로 발달한 현대 무기 앞에서 인간의 육신은 너무나도 연약하다. 무기에 직격 당하는 순간, 몸뚱이가 터져나가며 죽는 것이 대다수. 설령, 운 좋게 육신에 상처를 입지 않았다고는 해도 함께 웃고 떠들던 동료가 한순간에 터지며 핏물을 흩뿌리는 광경은 병사의 ‘영혼과 정신’에 회복되기 힘든 깊은 상처를 남긴다.
겉으론 드러나지 않는 이 영혼의 상처-PTSD의 증상은 각자 다르다.
무기력증, 기억상실, 정신 착란, 지나친 공격성... 이러한 증상들은 ‘마력’이라는 초월적인 힘을 받아들인 마력 사용자도 얄짤 없이 나타난다. 전쟁을 경험한 병사들이 가끔씩 PTSD 발작으로 일으키는 사고도 사회에 엄청난 피해를 초래하는데, 전문적인 전투 훈련을 받은 마력 사용자가 발작하면 그 피해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기에 대한민국 정부는 한 달 전, 러시아를 통해 한국 쪽으로 향하던 특급 범죄자-닥터 크림슨을 막기 위해 투입됐던 이능력 특전단원들을 아직까지도 세심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다들 상태는 어떻습니까?”
미르와 연결된 지하의 뉴 송파구의 연구 지역, 광활한 돔 형태의 내부 거주 시설을 안내하고 있던 정한솔 선생은 외부에서 방문한 인물의 질문에 어깰 으쓱였다.
“대부분 양호해요.”
“양호하다고요? 흠, 작전 동안에 20명이나 죽었다고 알고 있는데 의외로군요.”
의외라는 듯이 대꾸하는 그의 말에 정한솔 선생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살인이나 전쟁을 겪더라도 ‘몸을 지켜야 한다.’,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등의 정당하다고 느끼는 이유가 있으면 PTSD는 그리 크지 않아요. 이번 작전에 투입됐던 이들은 대부분 그런 정당성을 느끼고 있고요.”
“오호.”
“그래서 귀환한 이들의 90%는 증상이 미약해요. 찬휘를 포함한 대부분은 곧 퇴원할 수 있을 거예요.”
“그거 참 다행이군요.”
천천히 고갤 끄덕이는 남자, 하지만 정한솔 선생은 작게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문제는 나머지 10%에 해당하는 20명이죠. 솔직히, 그들은 상태는... 많이 안 좋아요. 감정을 주입하는 마법적 치료와 각종 약물 치료로도 증상이 잘 호전되지 않고 있고. 닥터 크림슨이 흩뿌리는 특수한 마력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공격성이 굉장히 강해진 상태인데···”
살짝 뒷말을 흐리는 정한솔 선생, 말하기 꺼리는 것 같은 기색에 같이 걷던 남자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녀는 한숨을 내뱉었다.
“일단, 한 달 간 기존 치료를 더 할 예정이에요. 하지만, 계속해서 낫지 않는다면 더 ‘강한 치료’를 해야겠죠.”
“강한 치료라니, 좀 뉘앙스가 이상한데요?”
“일종의 환각, 세뇌 요법이거든요. 그 당시의 기억을 제거하거나 아니면 다른 기억으로 대체하거나 하는 거죠.”
“···허, 이젠 그런 것도 가능합니까?”
기억을 건드린다는 정한솔 선생의 말에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남자, 그에 정한솔 선생도 쓰게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이노우에 미네타, 아시죠? 2년 전에 뉴스에 나왔던.”
“···세뇌사를 말하는 겁니까?”
“네.”
정한솔 선생의 긍정에 남자는 미간을 찡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