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73화 (73/350)

< 17화. 차오르는 핏물 >

1.

난 잘 때 꿈을 거의 안 꾼다.

눈을 감으면 얼마 안가 죽은 것처럼 잠이 드는 체질, 그래서 나이가 서른이 다 될 동안 꿈을 꾼 적은 손에 꼽는다... 그래, 그 꿈이 사실은 전부 다른 세계를 엿보는 것이었던 걸 르피너스와 마주치고 나서야 알았지.

참으로 끔찍한 경험이었다.

그런 것을 다시 꿀 까봐 잠을 자는 것이 두려워질 정도로. 뭐, 어찌되었든 간에 이곳에 떨어지고 나서 꿈을 꿔본 적은 아직까지 없다. 근데, 지금. 이곳에 떨어져서 처음으로 또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라는 객체가 보이지 않는 어떤 공간

그곳은 명확한 형태가 있는 곳이 아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좀 더 ‘추상적’인 개념의 장소? 이전에 꿨던 꿈들처럼 꿈속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주위를 살펴보는 건 불가능했고, 그 대신에 자신의 시야 앞에 있는 ‘모호하고 거대한 형상’을 볼 수 있었다.

내 시야를 중심으로 ‘커다란 나무의 가지가 뻗어나간 것 같은 형체’가 있다.

내 뒤편에 있는 갈래는 커다란 한 줄기, 하지만 앞쪽에 있는 갈래는 점점 앞으로 갈수록 여러 갈래로 나뉜다. 뒤쪽은 선명하지만, 내가 서 있는 곳부터 살짝 흐릿해지며. 앞쪽으로 갈수록 난잡하게 갈라진 줄기들은 뻗어나가면 뻗어나갈수록 그 형상이 굉장히 모호해진다.

그 어떤 단서도 없지만... 이게 뭔지 알 것 같다.

뒤쪽의 커다란 한 줄기는 흘러간 ‘과거’고, 지금 서있는 곳은 ‘현재’이며, 이 앞에 펼쳐진 무한하게 쪼개진 줄기들은... ‘미래’다. 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맞을 거다. 지금 이 순간에도 <미래시>와 <과거시>를 사용해봤을 때 느꼈던 감각들이 그대로 느껴지고 있으니까.

반사적으로 앞을 응시했다.

형용할 수 없는 무수한 조각들이 모여 있는 형상, 그건 물결치는 바다와도 같았다. 그 배열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뒤섞이고 있었고, 뒤죽박죽이었지만 함께 섞이면서 기묘한 패턴이 생기기도 했다. 운명을 본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뭔가 중독성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머리가 너무 아프네.

특별한 경험이긴 하다만 <미래시>를 시도하다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을 때처럼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무한의 눈>을 사용했을 때보다 더한 부하, 미래의 거대한 흐름을 볼수록 그리고 어떤 ‘한 지점’을 자세히 관측하려고 할수록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런데도 눈을 뗄 수 없다.

어리석은 짓이라는 건 안다. 어차피 봐도 모르니까. 하지만, 미래란 건 너무나도 매력적인... 그래, 누구나 갈구하는 보석과도 같다. 그것이 내가 활용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가져도 쓸모가 없는 것이라고 해도,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보석.

그렇게 반쯤 정신을 놓은 채, 멍하니 거대한 운명의 흐름을 보고 있을 때-.

하@#하%-! 하*@) 하!$하!!!

저 앞쪽에서 광기어린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천억의 인간들이 일제히 합창하는 듯한,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죽여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끓게 하는 잔혹한 웃음소리. 르피너스의 것과도 ‘비슷하지만 다른’, 그러나 내 트라우마를 자극하기엔 충분한 그것에 내가 패닉에 빠졌을 때-.

앞에 있는 수많은 모자이크 조각들-‘미래의 가능성들’이 일제히 검붉게 물든다.

조각 하나하나는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그 색채와 거기서 느껴지는 피비린내와 절규, 비명 소리는 비슷비슷했다. 대충 비슷하게 통일되어서 일까? 이전까지는 미래는 봐도 몰랐지만, 지금은 저것들이 의미하는 것이 대충 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

핏빛으로 물든 수많은 미래가 내 정면으로 쏟아진다.

핏물이 얼굴에 쏟아지는 것처럼 지독한 피비린내와 기분 나쁜 질척함... 그렇게 내가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고 있을 때, 나는 어느새 새로운 곳에 서 있었다. 단순한 검은 공간이 아닌 어떤 도시 한복판, 하지만 섬뜩하게 뒤틀려있었다.

광인의 병적인 상상력이 현실이 된 듯한 세계

하늘은 푸른색이 아닌 심장에서 쥐어짜낸 피처럼 번들거리는 선홍빛이었고, 그 불길한 색의 하늘 한 켠에선 맥동하는 검은 태양이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피의 탁류를 지상을 향해 쏟아내고 있었다. 주위의 건물의 형태를 보아하니 좀 많이 익숙한...

여긴, 미르다.

학교의 건물들은 하나같이 요상하게 뒤틀려 있어서 눈치를 채는 게 늦었지만 확실하다. 버그가 발생한 오픈 월드 게임의 맵처럼 기존의 건물들과 남미 쪽의 고대 문명에서 볼 법한 거대한 석조 피라미드들과 두개골을 줄줄이 꿰어 만든 해골 선반등이 난잡하게 얽혀있었다.

그렇게 섬뜩하게 일그러진 세상 아래에 살육이 펼쳐지고 있었다.

검은 태양이 쏟아낸 검붉은 피가 대지를 적시자 그 아래에서 사람 가죽을, 표범 가죽을, 독수리로 꾸민 옷을 입은 갈색 피부 야만인들이 기어 올라왔다. 뻥 뚫린 새카만 동공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격분한 광전사들은 손에 든 날붙이들로 주위의 것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했다.

미르의 교사들이 대처하지만 역부족

주위의 공기 또한 정상이 아닌 듯, 정신줄을 놓아버리고 주위의 아이들을 공격하는 애들도 몇몇 나왔다. 그렇게 아무도 믿을 수 없는 피의 축제가 벌어지는 가운데, 나는 방관자로서 그 모든 걸 보고 있었다.

서예린이 죽었다.

한손엔 장검을, 다른 한손엔 마법 단도를 들고 미친 듯이 밀려드는 야만인들을 썰어재꼈지만 그 숫자가 너무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야만인들은 죽여도 피로 물든 대지에서 또 튀어나왔다. 도주도 불가능한 지, 서예린은 외곽쪽을 뱅뱅 돌다가 결국엔 특출하게 강한 수십 마리의 야만인들에게 찢겨졌다.

마빡 아가씨-남궁 진아도 죽는다.

전격의 그물을 뿜어내며 야만인들을 튀겨버리는 아가씨, 인간은 구이로 만들어버릴 수준의 화력을 투사했지만 야만인들은 마법에 어마어마한 내성을 지녔는지 터프하게 버텨냈다. 그래도 영리하게 입구가 한정된 옥상에서 적을 틀어막으며 고군분투했지만...

지키던 자기 패거리 여자애 하나가 주위 공기에 돌아버려 뒤에서 식칼로 찌르자 어이없게 마법이 끊기고 그에 들이닥친 야만인들에게 찢겨졌다. 뒤에 있는 패거리도 덤이다.

이종족 애들도 사지가 뜯겨졌다.

외부에서 들어온 이들-군인들과 이종족들도 죽어서 목이 잘려나갔다. 그렇게 모든 살육이 끝났을 때, 내가 아는 이들과 모르는 이들 모두 머리통이 해골 선반에 걸린다. 이어서 광전사들은 일제히 죽어가는 인간의 비명소리가 나는 휘슬을 불며 광기에 찬 함성을 내지른다. 그리곤, 자기들끼리 죽이기 시작한다.

피. 피. 피. 피. 피···

빠른 슬라이드 쇼처럼 쏟아지는 미래, 그 모든 모자이크 조각이, 그 모든 미래가, 비슷하다. 피비린내 나는 세상의 중심에 있는 석제 피라미드, 그 피라미드 위에 있는 태양을 형상화한 커다란 바위덩이, 그 앞 제단에 시체의 심장을 꺼내 놓는 한 남자, 기뻐하는 검은 태양, 쓰레기처럼 계단에 굴러 떨어지는 심장이 뜯겨진 백발의 시체는...

···

-삐비비빅! 삐비비빅!

“...!?”

옆의 시계 알람에 눈을 떴다.

오전 6시, 느릿하게 이불을 걷어차서 일어났다. 언제나 똑같은 아침이다. 그래, 상쾌하기 그지없는 수면 후의 아침. 정신도 맑고 몸도 상쾌하기...

“엥?”

일어나서 몰랐는데, 잠옷이 땀에 펑 젖었다. 사우나라도 한 것처럼 얼굴에 맺힌 땀이 주르륵 바닥에 떨어지네. 혹시나 해서 침대를 봤다가 이마를 짚었다. 잠옷처럼 펑 젖은 침대보, 이거 얄짤없이 빨아야 할 것 같다.

“끙, 뭐죠.”

땀을 흠뻑 흘려서인지 타는 듯한 갈증, 곧바로 냉장고에서 냉수를 꺼내 마시며 난 이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에 대해 고민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개꿈을 꾸었으려니 하고 넘어갈지도 모르겠다만... 난 다르다. 잠자는 동안 이렇게 땀에 젖은 경우는 내 인생을 통틀어 딱 한 번- ‘꿈에서 르피너스를 만나서 이곳에 떨어졌을 때’ 밖에 없거든. 근데...

“내가 무슨 꿈을 꿨을까요?”

머릴 긁적이며 꿈을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꿈의 내용이 기억나질 않는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한 가설’에 <게임 시스템>의 메모장의 <르피너스의 장난감>을 켜서 특정 부분을 읽었다.

“...의식하지 못하는 꿈.”

이 세상은 ‘르피너스의 장난감’이라는 좆망 소설 속, 이미 15년 전... 아니, 이젠 16년 전의 내용이긴 하다만 주인공이 나와 비슷한 처지기에 그 내용을 많이 참조한다. 근데, 그 소설의 주인공이 겪인 일 중에서 지금 나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바로, 자다가 꿈에서 르피너스와 조우했을 때.

르피너스는 총 두 번 주인공의 꿈을 방문했는데, 첫 번째는 그냥 인사차 찾아왔고 두 번째는... 일종의 조롱과 경고를 했다. 그 뒤, 주인공이 일어났을 땐 속옷이 식은땀에 펑 젖었다는 언급이 있다. 추가로 처음엔 꿈에서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고.

근데, 여기선 주인공에겐 커다란 생물 참치까지 던져줬네?

...난 참치 같은 건 없는데 말이야.

“···에효.”

미간을 구긴 채, 거의 한 시간가량을 침대에 앉아서 ‘내가 꾼 꿈의 정체가 뭘까?’ 궁리하다가 결국 한숨을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꿈을 기억해보려고 계속 고민했지만... 기억이라곤 단 한 톨도 나지 않고 점점 기분만 좆같아진다.

단순한 느낌이 아니다.

얼굴에서 뚝뚝 떨어지는 식은땀, 르피너스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공포에 진저리를 치는 게 느껴진다. 그 만큼 두려운 것일까? 아니, 어쩌면 그걸 기억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을 지도.

“···혹시 모르니 준비를 해둬야겠어요.”

뭔가 일어날지도 모르니 몸을 지킬만한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난 샤워실 안으로 들어갔다.

2.

사이비든 아니든, 종교에 한 번 깊게 빠진다면 그 이전으론 돌아갈 수 없다.

세례를 받고 ‘칸’에게 귀의한 대환이 또한 그러했다. 신을 목도하면서 느낀 종교적인 법열(法悅), 그 강렬한 경험은 의지할 곳 없이 떠돌던 미숙한 소년의 영혼에 깊은 울림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 순간, 소년이 방황을 끝내고 어른이 되는 것처럼 대환이는 한 순간에 변했다.

그의 신이 의도한 대로

살인과 유혈, 그리고 분노. 게다가 그런 그를 인도해줄 사악한 스승 또한 옆에 있었다. 금요일에서부터 일요일까지, 대환이는 스승이 가르치는 의식에 대해 배웠고, 그 권능들을 익혔으며, 우발적인 것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살인’ 또한 했다.

···그리고, 살인이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도 알았다.

“...”

그렇게 인생의 그 어느 때보다 보람찬 시간을 보낸 후, 미르로 다시 복귀한 첫 날. 뒷자리에 앉은 대환이는 스마트폰 게임을 하던 평소완 달리 약에 취한 것 마냥 무기력하고 몽롱한 표정으로 멍하니 칠판을 응시했다.

실제로도 대환이는 지금 약물에 취해 있었다.

‘칸의 축복’을 받게 되면 그 신도들은 신의 의지에 따라 점점 살육에 미친 괴물이 된다. 숨 쉬는 것, 생각하는 것, 음식을 맛보는 것, 슬픔, 사랑, 즐거움··· 그 모든 자극이 고통스럽게 느껴지게 된며, 오직 ‘분노와 살육’만이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열쇠다.

아니, 분노와 살육 그 자체가 즐거움이요, 사랑이며, 행복이 된다.

나중가선 분노 이외의 감정을 못 느끼게 변한다. 대환이 또한 풋내기지만 칸의 신도, 아직 심하게 변하진 않지만 그대로 갔다간 분노에 취해 충동적으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랐기에 스승은 설명과 함께 정체불명의 약을 건네며 먹기를 종용했다.

어떤 약인지는 모르겠다만 대환이는 스승을 믿고 약을 먹었고, 그 약효 덕분에 효과적으로 자신의 분노를 숨길 수 있었지만...

“단위...마력의!#$인간의@#[email protected]!집중!”

너무 고통스러웠다.

머릿속이 안개가 낀 것 마냥 뿌옇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파악하려 했으나 파악 되지 않는다. 망가진 비디오 영상 마냥 뒤죽박죽인 시야와 그에 맞지 않은 소리들, 집중하려 할수록 점점 더 고통을 그대로 느꼈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완전히 무력화된 채 시간을 보내다가-.

“자,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시간에 쪽지시험 볼 테니 준비해오도록 하세요.”

4시간에 달하는 월요일 단일 오전 수업이 끝났다. 중년의 여자 강사가 나간 뒤, 친한 애들끼리 모여 식당 구역으로 향하는 가운데 아직까지도 멍하니 앉아있는 대환이의 흐릿한 시야에 무언가가 잡힌다.

잡티하나 없는 깨끗한 백색.

허공에 떠오른 그 색채가 무엇인지 대환이는 알았다. 아니, 어떻게 저걸 잊을 수 있을까? 자신이 경험했던 모든 부당함의 원천인데? 절로 이가 바득바득 갈리면서 심장이 쿵쾅거린다. 그와 함께 머릿속을 잠식하던 안개가 분노라는 힘 앞에서 빠르게 걷히기 시작한다.

죽일까?

죽일까? 죽일까? 죽일까? 죽일까? 죽일까? 죽일까? 죽일까? 죽일까? 죽일까? 죽일까? 죽일까? 죽일까? 죽일까? 죽일까? 죽일까? 죽일까? 죽일까? 죽일까? 죽일까? 죽일까? 죽일까? 죽일까? 죽일까?

‘아니, 아직 아니야.’

또렷하게 본 순간, 충동을 참을 수 없을 것 같기에 대환이는 책상에 엎드렸다. 그리곤, 이를 악물고 스승의 가르침을 되뇌며 버텼다.

‘더 많은 살육을 위해서 참을 줄도 알아야 한다.’

그래, 지금은 때가 아니다. 하지만, 반드시 이뤄질 것이다. 그의 스승이, 그리고 그의 신께서 살육을 약속하셨으니까.

“흐, 흐흐흐...”

첫 살인의 쾌감을 다시 떠올리며 광신도는 피 흘리는 잇몸을 드러낸 채 몰래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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