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자를 위한 연중작은 없다-76화 (76/350)

< 17화. 차오르는 핏물 >

예상대로 내가 허공에 그린 표식의 정체를 아는 듯, 두 사람의 얼굴이 꽤 심각하게 굳어졌다. 당연히,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무한의 눈>을 사용하면서 봤었던 핏빛 대지, 그 시체옥좌를 이루는 시체들의 몸 한군데에 새겨져 있던 ‘인장’이거든.

“...이걸 어디서 봤지?”

“흐음, 제 꿈에서...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냥 꿈은 아니죠.”

대답과 함께 난 천천히 선글라스를 벗고 감고 있었던 두 눈을 떴다. 그와 함께 드러나는 변덕스럽게 보이는 자줏빛 홍채, 보여주진 않았지만 서강이 이걸 ‘르피너스의 상징색’이라고 말하던 것을 난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꿈속의 ‘계시’에서 봤죠. 르피너스가 제멋대로 보여주는 저주받은 환영 속에서요.”

“...”

“핏빛 하늘에 떠오른 검은 태양, 검은 태양에서 흘러내리는 핏물에 대지가 잠기고, 그 아래에서 야만인들이 기어 나올 겁니다. 그리고, 이곳엔 ‘살육’, ‘유혈’, ‘광기’가 넘쳐날 거예요. 이건 피할 수 없어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김가트, 그의 머리 위에 이미 나타났거든요.”

내 말을 심각한 얼굴로 듣는 두 사람, 반응을 보아하니 더 설득할 필요는 없는 것 같기에 난 다시 선글라스를 끼곤 느긋하게 커피를 마셨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커피마시니 디 카페인이라도 맛이 좋네. 나중에 인터넷으로 좀 사둬야지.

뜨거운 커피가 살짝 미지근해질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서강 아저씨가 마침내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건가?”

“제가 바깥사람들에게 말해봤자 안 믿을 겁니다. 이 세상은 넓고 병신들은 널려서 ‘감히’ 신의 이름을 팔면서 어그로를 끌려는 이들도 있거든요. 하지만, 신의 두려움을 아는 미궁 출신인 아저씨가 말하는 건 무게가 다르겠죠.”

“...”

“그러니 대비하자는 겁니다. [물론, 그래봤자 유혈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아하하하핳!]”

갑자기 제멋대로 움직이며 소리 높여 웃는 내 입. 내 목소리지만 명백하게 다르게 느껴지는 그 이질적인 음성에 부녀가 흠칫하는 가운데, 나는 재빨리 내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병원에서 일어났을 때완 달리 얼마 가지앉아 아가리를 닥친다.

그 뒤, 난 손을 떼고 어색하게 웃었다.

“아, 죄송합니다. 르피너스의 제단 조각을 만진 뒤부터 뭔가가 제 심장에 있는데, 가끔씩 이렇게 제멋대로 움직여요. 예린 양도 봤었죠? 화요일날 웃으며 발작했던 거.”

내 시선에 꺼림칙한 표정을 지으며 고갤 끄덕이는 서예린, 어찌됐든 두 사람 모두 내 말을 진지하게 믿는 눈치기에 난 내가 생각해뒀던 요구사항을 말해나갔다.

“어찌됐든,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바깥사람들에게 말해주세요. 아, 제가 알렸다는 사실은 좀 숨겨주셨으면 좋겠네요. 저야 상관없긴 한데, 제 안에 있는 이것이... 알리면 재미없을 거라고 해서.”

“그래, 알겠네.”

“그리고, 죽지 않도록 단단히 준비들을 하세요. 제가 봤던 환영에서 서강 아저씨는 미처 못 봤지만... 예린양은 죽거든요.”

자신이 죽는다는 말에 서예린이 얼굴을 미묘하게 구겨지는 가운데, 난 꿈속에서 봤었던 그녀의 모습을 묘사했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예린양은 양 손에는 각각 단검과 장검을 들고 있었어요. 그리고 주위에는 손에 쥔 무기를 투영한 모습의 반투명한 검들이 둥둥 떠 있었죠. 그 칼날들이 회전하며 폭풍처럼 야만인들을 썰어 젖혔지만 결국 물량에 압살당해요.”

“...내가 도망 안 침?”

“도망치려고도 했지만 안쪽에 있는 이들은 핏빛 안개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더라고요. 야만인들은 투명화도 간파했고요.”

내 말에 서예린이 팔짱을 낀 채 심각하게 고민하는 가운데, 난 서강 아저씨를 향해 빙긋 웃었다.

“그러니까 그런 비극을 방지하는 의미에서... 제게 물건 몇 개 좀 빌려주실 수 있나요? 대비를 좀 하고 싶은데, 학생 신분인지라 영 시원찮네요. 헤헤.”

염치없는 요구인 것 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재산으로는 준비가 거의 안 되는걸? 딸내미 목숨이 달렸으니 전폭적으로 협력하시겠지. 그에 서강 아저씨는 골치 아프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린다.

“음, 무기나 여타 장비는 자네가 올라갈 때 검문검색에 걸릴 걸세. 나도 내가 가진 몇몇 물품은 밖에 못 가지고 나가. 시간이 있다면 그래도 어떻게 몰래 해보겠는데...”

“아, 그런 건 아니고 물약 재료예요. 비싼 데다가 개인이 살 수 없는 재료라서요. 이쪽 뒤에 식물원도 있길래.”

“뭐, 그 정도야. 해줄 수 있지.”

아저씨는 굳은 표정으로 고갤 끄덕였다.

7.

금세기 최고의 미래학자로 평가받는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인류 역사를 3개의 물결로 구분했다.

제 1의 물결인 ‘농업혁명’, 제 2의 물결인 ‘산업혁명’, 제 3의 물결인 ‘지식혁명’. 그리고 그 이후에 미지의 4번째 물결이 올 것이라고 했다. 그 4번째 물결의 정체에 대해선 말이 많았지만 미궁의 출현 이후 그 정체가 확정되었다.

제 4의 물결, ‘마력혁명’.

마력이란 에너지가 확인되고 그 가능성이 파악된 뒤, 각국 정부는 발 빠르게 그 새로운 4의 물결에 탑승하기 위해 경쟁하기 시작했다. 도중에 미궁의 입구에서 미국을 반파시킨 재앙들이 튀어나오고 그로 인한 위기감 고조로 인한 경제적 한파 또한 들이 닥쳤지만, 이런 경쟁에서 뒤처지면 어떻게 될지 역사가 말해주기에 계속 과감한 투자를 이어나갔다.

당연히, 마력 각성자를 훈련시키는 교육 기관 또한 국가 차원에서 신경을 쏟았다.

대한민국의 경우, 미르에 입학한 1학년 때부터 3년 동안 ‘학대’라고 불려도 될 만큼의 강도 높은 압박 교정을 이어나간다. 동시에 전담 정신과 의사가 달라붙어 세심한 관리를 한다. 그 덕분에 고학년 정도가 되면 따로 시키지 않아도 공부도 착실히 하는 모범생들이, 대한민국의 마력 산업을 이끌어갈 인재들이 탄생한다.

하지만, 이러한 ‘세심한 교정’을 받지 않는 이들은?

상대적으로 날뛰는 경향이 있었다. 현대 사회의 새로운 귀족으로 평가 받는, ‘부와 외모’라는 중요한 두 가지 가치를 모두 가지게 되는 마력 각성자였으니까. 실제로 이전에 대환이와 어울렸던 같은 또래 편입 남학생 3명은 그런 경향이 매우 짙었다.

“오빠! 오늘 좋았어!”

“하하, 그래! 다음 주 휴일에 또 보자!”

일요일 저녁, 미르 생도들이 거주하는 오피스텔 기숙사 건물 앞. 유명 연예 기획사의 A급 가수 지망생들이랑 찐한 만남을 가졌던 편입 남학생 3인방은 웃으며 만났던 애들을 배웅했다. 그 뒤, 그들은 시시덕거리며 기숙사 건물로 향했다.

“야, 맥주는 사뒀냐?”

“어, 냉장고에 꽉 채워 넣었지. 근데, 너무 힘들다. 주말에 여자 애들이랑 논 뒤에 쉬지도 못하고 게임이라니.”

한 아이의 질문에 다른 아이가 한숨을 푹 내뱉으며 푸념하고, 그에 또 다른 아이가 피식 웃는다.

“그럼 안 할 거?”

“아니, 그럼 아쉽지. 오늘 랭겜 다 뒤졌다. ‘마력 각성자’의 피지컬로 도살해주마.”

“뭐래. 골딱이 새끼가.”

“야, 내 피지컬 챌린저 수준이거든?”

“그래, 골딱아. 우린 듀오로 할 테니 넌 골딱이 탈출이나 해봐라.”

오피스텔 건물 안으로 들어갔음에도 각자의 방이 아닌 한 아이의 방으로 향하는 3인조. 기숙사 오피스텔의 얼마 없는 규칙 중 하나인 일요일 통금 시간 때문에 일요일 밤까지 돌아와야 했지만, 일단 들어가면 그 안에서 뭘 하는 지는 온전히 생도의 자유다.

그렇기에 월요일 아침까지 밤새서 놀다가 등교해서 수업시간에 부족한 잠을 자는 것이 그들의 미르 생활이었다.

미래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행동. 하지만, 아무리 무능하다고 해도 마력 각성자면 돈 들어올 구석이 많기에 그들에게 미래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시시덕거리며 평소에 모이던 방 안으로 들어갔고-.

“...야, 너 방 공사하냐?”

“아니, 그럴 리가. 그러면 컴퓨터를 옮겼겠지. 시발? 뭐야?!”

나갔을 때완 달라진 기숙사 안쪽의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공사라도 하는 것 마냥 특대형 비닐이 창문과 벽지를 둘러싸고 있는 개인 오피스텔 내부. 그렇게 세 사람이 달라진 기숙사 방의 모습에 의아해 하면서도 안쪽까지 들어간 순간-.

-찰칵.

현관문 고리가 걸리는 소리가 들린다.

세 사람이 고갤 돌리자 한손에 편의점 봉투를 든 남자애가 서 있었다. 한 때, 그들의 패거리 중 하나였지만 지금은 소외된 김대환. 그들이 완전히 안쪽으로 들어간 순간, 현관 옆의 화장실에서 숨어있던 그는 나와서 그렇게 퇴로를 막았다.

생각지도 못한 대환이의 등장에 아이들은 잠시 벙 쪄있다가 이내 한 아이가 미간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야, 너 왜 여기 있냐? 그리고, 방안에 비닐들. 이거 니가 한 거냐?”

“어, 나중에 처리하기 귀찮아져서 말이지.”

고갤 끄덕이며 시인하는 대환이, 그에 3인의 얼굴에 어이가 없다는 듯 감정이 스쳐지나간다. 이어서-

“하,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 대환아, 이게 뭔 짓이냐? 남의 방에 마음대로 들어오고.”

“...”

“아니, 존중이란 게 더 이상 없나봐?”

가장 앞에 있던 한 아이가 코웃음을 흘리며 대환이에게 다가간다. 5개월 전, 대환이와 함께 한새벽에게 두들겨 맞았던 아이. 하지만, 대환이처럼 오줌을 싸며 꼴불견으로 당하지는 않았기에 간신히 왕따를 피한 애였다.

그렇게 다가가는 아이의 모습은 평범한 중고등학생들이라면 자연스레 주눅들 정도로 꽤 살벌했다.

그렇게 김대환의 바로 앞에 선 남자애는 입가에 위협적인 웃음을 띠며 어린애를 귀여워하듯이 대환이의 뺨을 툭툭 건드린다.

“하하. 대환아, 너 재미있다?”

“...”

“이런 개짓거리도 하고. 우리가 너랑 안 놀아줘서 그런 거냐?”

“...”

“근데, 너랑 우리가 놀기엔 수준이 안 맞잖아. 수준이. 오줌 냄새 나니까, 꺼...”

경멸어린 시선을 보내며 대환이의 뺨을 후려갈기려고 했지만, 아이는 오히려 대환이에게 팔을 잡혔다. 손목에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힘에 아이의 얼굴이 순간 의아함이 떠오르는 가운데, 대환이는-.

-쿵!

그대로 힘을 줘서 아이를 밀쳐냈다. 아이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볼썽사납게 뒤로 쓰러지고 난 뒤, 대환이는 그대로 두 눈을 감고 ‘자신의 달라진 힘’에 취했다.

신에게 귀의한 지, 고작 10일

그 10일 동안, 자신은 너무나도 많이 달라졌다. 그래, ‘완전히 새롭게’ 다시 태어났다. 자신은 강하다. 지금 보니 이런 유치한 놈들과 어울리지 못해서 침울해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하긴, 진정한 신을 영접했으니 당연한 변화이리라!

“후후후.”

만족감 섞인 나지막한 웃음을 흘리며 대환은 천천히 감았던 두 눈을 뜨고 다른 손에 쥐었던 편의점 봉투에 손을 넣어서 안에 있던 물건들 중 하나를 꺼냈다. 그 뒤, 그 편의점 봉투를 쓰러져있던 아이를 향해 던졌다.

-땡그랑!

쇳소리와 함께 봉투가 찢어지며 드러나는 싸구려 식칼들, 딱 소년들의 숫자와 같은 3개였다. 몰래 죽일 수도 혹은 자신만 무기를 쥔 채 일방적으로 죽일 수도 있었지만, 그건 ‘유혈과 투쟁’의 방식이 아니었다. 좀 더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이게 적합했다.

미리 꺼낸 쥔 자신의 몫의 식칼을 들어 올리며 ‘진정한 신’에게 기도를 올린 후, 대환이는 바닥에 떨어진 식칼을 향해 턱짓하며 아직까지도 정신을 못 차린 아이들에게 입을 열었다.

“주워.”

“...뭐?”

“칼 잡고 한 번 싸워보자고. 참고로 난 니들을 죽일 생각이니까 전력을 다해서 발악해봐. 거짓말 아니야. 방안에 싸놓은 비닐 보이지? 피가 튀길까봐 그런 거야. 아, 문틈도 실리콘으로 꼼꼼히 막아서 방음도 신경 썼으니 비명 질러도 소용없어.”

말의 내용과는 180도 다른 차분한 음성, 너무나도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아직까지 멍해있는 소년들을 향해 대환이는 본격적으로 살기를 드러내며 웃었다.

“왜 그래? 난 겁에 벌벌 질려서 오줌이나 싸갈긴 병신이라고 그랬잖아? 병신 새끼 정도는 손쉽게 이길 수 있지 않아? 날 죽여도 돼. 너희들은 정당방위니까.”

대환이의 말에 아이들은 비아냥대던 이전과는 달리 침묵했다.

말로는 남을 비방하기 쉽다. 하지만, 그 말의 결과로 ‘맞을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면 말이 조심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다. 특히나 상대가 잔뜩 핏발선 눈을 번들거리는 놈이라면, 그 손에 칼이 들렸다면 더더욱.

그렇게 애들 사이에 당혹감이 퍼지는 가운데, 일어서 있던 두 아이 중 하나가 대환이를 향해 다가갔다.

“대환아, 좀 진정해라. 우리가 이러고 싶어서 그랬...”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환이의 손에 쥔 식칼이 번뜩인다. 그리고, 대환이의 얼굴이 피로 흠뻑 젖는다.

“...?”

현기증을 느끼며 그대로 뒤로 넘어가 쓰러지는 아이, 그런 아이의 목에선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신의 피를 막아보려던 아이는 이내 바람 빠지는 듯한 신음과 함께 실혈(失血)로 정신을 잃는다.

“우... 우와아아악!”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바닥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굳어있던 아이가 비명을 지르며 물러서는 가운데, 대환이는 피 묻은 식칼을 한 번 핥곤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크, 크크크큭! 뭐하냐? 병신이.”

순식간에 피를 흘리며 경련하는 잃은 친구의 모습에 두 사람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반면, 대환이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그 웃는 모습에 바닥에 넘어졌던 아이는 소리친다.

“너... 너 미쳤어?!”

“미쳤냐고?”

“그...그래! 살인? 이거 인생 종치는 거야! 너... 아니, 너 뿐만 아냐! 니 가족들이 무사할 것 같냐! 그냥 조리돌림 당한다고!”

“아, 가족?”

아이의 필사적인 비난에 피식 실소를 흘린 후, 대환이는 불과 3일 전에 벌였던 일을 떠올리며 피 묻은 얼굴로 활짝 웃었다.

“걱정마, 이미 내 손으로 다 죽였어.”

“뭐...?”

“죽였다고. 신을 위해서. 진정한 신의 공물로 바쳐졌으니 그분들도 기뻐하실 거야. 암. 그만한 효도가 어디 있을까?”

즐겁다는 듯이 양 팔을 벌리며 웃는 대환이, 그에 아이들은 완전히 공포에 질렸다. 목포에서 잔인한 린치등을 하며 나름 공포로 군림하던 애들이었지만, 그건 집단의 힘과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랬을 뿐 개개인은 평범한 애들과 다를 바 없다.

“식칼을 안 쓸 거야? 그럼 어쩔 수 없지. 간다.”

공포에 질린 두 희생양을 향해 살인자는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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